Camino 

- Me he empapado en el camino 

w.데자와 





호텔 묵는 김에 늦잠을 자기로 했다. 평소엔 새벽 같이 일어나서 최소 20~30km 걷지만 오늘은 체크아웃 시간까지 느긋하게 뻗대려고 목표도 그만큼 적게 잡았다. 침대 매트가 좋아서인지 일어났을 때 몸이 한결 가뿐했다. 누운 채 기지개를 켜자 맨다리 아래 뽀송한 시트의 감촉이 느껴진다. 돈이 좋긴 좋다. 고개만 돌려 옆 침대를 봤다. 아 깜짝이야. 지훈이가 내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서 헉했는데 다시 보니까 자고 있는 거였다. 눈이 커서 눈꺼풀이 다 안 닫히는 건가. 신기해서 자는 얼굴을 한참 봤다. 고양이들도 저럴 때 있는데. 눈 가늘게 뜨고 나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가까이 가보면 고롱고롱 코 골고 있지. 지훈이 정수리도 고양이처럼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그러면 바로 깰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어제 중국 마트에서 사온 신라면 꺼내서 뽀글이 만들었다. 호텔이라도 남 썼던 전기 포트 찝찝해서 수돗물 초벌로 끓였다가 세면대에 버리고 생수 넣어 다시 끓였다. 물 끓는 소리에 지훈이도 깼는지 이불 뒤집어 쓰고 꼬물거린다. 베개에 얼굴 묻고 버둥거린다 싶더니 다음 순간 발딱 일어나 앉는데, 뒤집어진 뒷머리에서 안테나 하나가 찡긋 솟았다.


"뭐해요?"

"뽀글이."

"우앙. 나는 두 개."

"안 그래도 네 봉지 뜯었다."

"형 최고."

"내밖에 없제."

"네네. 형밖에 없어요."


빈말이어도 기분 좋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봉지에 물 따르고 있으려니 지훈이가 어느새 다가와서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어, 조심해라. 뜨겁다."

"형도 조심해요. 이거 중심 못 잡으면 쓰러짐."

"여따가 기대 놓으면 되겠다."


물 먹어서 뚱뚱해진 봉지들을 반만 벌린 나무 젓가락으로 고정해서 미니바 칸막이에 줄세워 놨다. 꼬르륵. 두 배에서 동시에 배꼽시계가 울렸다. 그제야 배고픔과 함께 숙취를 자각했다.


"먹을 땐 몰랐는데 샹그리아 이거 뒤끝 있네요."

"과실주가 다 그렇지."


관자놀이를 짚고 끙끙거리는 지훈이의 뒤통수를 문질러 주었다. 머릿결을 살살 쓸다가 손을 내려 뒷목을 가볍게 주물러주니 튀겨지듯 물러난다. 털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캬르릉.


"아 뭐예요. 갑자기. 깜짝 놀랐잖아요."

"아니 니 머리 아픈 것 같아서 주물러 준 건데..."


물론 갑자기 만진 내 잘못도 있지만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일인가. 지훈이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결국 나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다운됐다. 그게 얼굴에 표가 났는지 지훈이가 내 눈치를 보다가, 결국 사과했다.


"...미안해요. 형. 좋은 뜻으로 해주신 건데..."

"미안할 게 뭐 있노. 어, 뽀글이 다 된 것 같다. 먹자."

"누가 갑자기 만지면 놀라는 편이라서..."

"됐다, 고마. 뿔기 전에 먹자."


그러고 그냥 내 몫의 봉지 하나 가져와서 먹기 시작하자 눈치 보던 지훈이도 봉투를 열었다. 크. 냄새부터 존맛탱. 대화가 끊긴 방 안에 후룩후룩 라면 먹는 소리만 가득했다. 코 박고 먹다가 지훈이 쪽을 한 번씩 봤다. 뽀글이가 만들기는 편해도 먹기는 불편한지라. 까딱하면 쏟아서 화상 입기 쉽거든. 걱정한 게 무색하게 상당히 안정적인 자세로 두 개째 먹고 있는 박지훈. 아, 생각해 보니 쟤도 군대 갔다온 다 큰 남자애다. 내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냐며. 다 먹은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눈가를 긁었다. 혼자 걱정하고 혼자 머쓱해지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났다 강다니엘.


*


방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선크림을 발랐다. 다 바르고 지훈이한테 던져주자 귀찮다고 투덜대면서 튜브를 짠다. 아빠 스킨 바르는 것처럼 대충대충 투덕투덕. 저것도 내가 선크림 바르라고 억지로 쥐어주고 발라주고 난리쳐서 겨우 하는 거다. 같이 다닌 초반에 아무것도 안 바르고 그냥 나서길래 기겁해서 선크림 안 바르냐고 물어봤더니 한국에서 가져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너 이러면 타는 건 둘째 치고 건강에도 안 좋다고, 붙잡고 한참을 잔소리한 끝에 내 걸 나눠쓰기 시작했다.


"다 바른 거냐 그게."

"넹."

"아이고... 일로 와봐라."

"왜요."


그냥 내가 다가갔다. 턱 아래를 잡고 볼따구를 문질렀다. 연지곤지 찍은 것도 아니고, 허연 크림이 볼따구 한쪽에 다 뭉쳐 있는데 이게 뭐가 바른 거야. 박지훈 이놈, 귀찮다고 바른 시늉만 한 게 분명하다.


"아 형 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니가 뭘 알아서 해. 세상 여자 다 울리고 다니게 생겨갖고 얼굴에 크림 하나 못 바르고."

"생긴 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 손에 잡혀서 찌부된 입술로 뚱시렁 뚱시렁 말이 많길래 “확 깨물어삘라.” 한마디 했더니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지. 콧잔등이며 턱 아래며 허옇게 뭉친 크림을 주변으로 살살 펴바르자 지훈이가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속눈썹 진짜 길다. 예전에 일본에서 본 사슴 같다. 아니, 속눈썹 뿐만이 아니다.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어둑한 호텔 조명 아래서도 명암이 진다. 잘생긴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만큼 가까이서 보니 느낌이 또 다르네. 감탄을 숨기지 않은 채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마지막으로 눈길이 멈춘 곳은 내 손에 잡힌 턱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 도톰한 입술 가운데 옅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신기하게 이런 데 점이 다 있네. 손 끝으로 그 입술 점을 더듬은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순간의 충동. 지훈이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두 쌍의 눈이 한 치 앞에서 마주쳤다. 커다란 눈동자 가득 내 얼굴이 비치고 있다. 거울이야 뭐야. 뭔데 이렇게 예쁘지. 침이 절로 삼켜졌다. 아, 나 이 분위기 알 것도 같은데...


“그만 발라요. 이러다 늦겠어요.”

“어? 뭐, 뭐가?”

“체크아웃이요.”


시계를 보니 지훈이 말대로 아슬아슬하다. 방에 풀어놨던 물건들을 가방 안에 허겁지겁 챙기고 있는데 불이 꺼져 뭔가 하고 봤더니 박지훈 이미 문가에 서서 카드키 뽑고 있었다. 야 잠깐만. 벌써 뽑으면 어떡해 전기 나가잖아, 이랬더니 꾸물거리지 좀 말라는 야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은근 서운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


큰일났다. 한번 의식하고 나니까 눈앞에 자꾸 어른거린다. 뭘 의식했고 뭐가 어른거리냐고? 아... 말하기 민망한데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독백인 걸. 흠흠. 그러니까... 그저께 선크림 발라준 뒤로... 자꾸 지훈이 입술만 보인다. 애가 옆에서 막 쫑알쫑알 열심히 말하는데 어느 순간 내용은 잘 안 들리고 입술만 클로즈업 쫘악 들어가질 않나. 마주보고 앉아서 밥 먹을 때, 예전엔 복스럽게 잘 먹는다 정도의 생각만 들었는데 이젠 침으로 번들한 입술만 시야 가득 차질 않나.


미쳤다 미쳤어 강다니엘. 같은 거 달린 남자 동생 상대로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손을 들어 양쪽 뺨을 차례로 때렸더니 옆에서 걷고 있던 지훈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형 어디 아파요? 오늘은 일찍 쉴까요?”

“아니아니. 내 괜찮다. 신경쓰지 마라.”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 괜찮타꼬.”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잘못한 것도 없는 애한테 신경질을 버럭 내버렸다. 지훈이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더 심해지기만 했다. 이제는 입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체 부위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아 이렇게 말하니까 나 너무 변태 같은데, 맹세코 변태는 아니다. 그냥, 9부 바지 입고 침대 앉아 있는 지훈이 발목이 의외로 가늘어서 눈길이 좀 갔다. 내 손이 워낙 큰 편이라 말아쥐면 한손에 딱 들어올 것 같달까. 그러고 보니 쟤는 허리도 가늘던데. 어깨 넓은 애가 목이랑 허리는 또 낭창해서 몸선이 참 묘하다. 묘한 건 상체 뿐만이 아니다. 골반은 좁은데 엉덩이는 통통... 하아... 인정해야겠다.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변태가 됐나 보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지훈이한테 거짓말을 했다. 발이 좀 아파서 그러니 오늘은 좀 천천히 걷겠다고. 지훈이가 그럼 나한테 보조 맞춰 걷겠다고 하길래 됐다고, 너는 너 페이스 대로 걸으라고 했다. 지훈이는 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꽉 다물더니 고개만 주억거렸다.


여정 초반에는 혼자서도 잘 걸었던 것 같은데, 그새 지훈이랑 같이 걷는 것에 익숙해졌는지 오늘의 25km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과 푸른 하늘, 이름 모를 새들도 초반에야 신기하고 아름다웠지 솔직히 이젠 대자연 어머니도 지겨웠고. 이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를 찾아 홀로 떠난 순례길이지만 결국은 타인과 부대끼는 과정에서 길의 의미를 찾았다는 걸.


와이파이 되는 숙소 잡고 지훈이한테 연락해야지. 내일부터 다시 같이 다니자고.


*


연락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들어간 숙소에 지훈이도 먼저 와있었다. 씻으려고 샤워실 가던 중이었는데 복도 끝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여서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 했다. 종일 천천히 걸었던 터라 마을 하나 정도는 차이날 줄 알았는데. 지훈이도 어디 안 좋은가? 이름을 부르려던 차에 갑자기 나타난 서양 남자 한 명이 지훈이 옆에 서며 뭐라고 말을 걸었다. 벌써 통성명을 한 사이인지 지훈이도 남자를 올려보며 자연스럽게 대꾸를 했다. 타이밍을 놓친 내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둘은 담소를 나누며 층계 아래로 사라졌다. 아니, 박지훈 너 영어 잘 못 해서 나 만나기 전까지 친구도 못 사귀었다며. 설마 저 남자가 한국어 능통자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는 거냐고.


잽싸게 씻었다. 군대에서 3분 안에 씻고 나오라는 명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신속하게.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가장 깔끔한 걸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내려가니 박지훈이 불 앞에 서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지훈과 아까의 그 서양 남자가 나란히 서서 뭔갈 열심히 만들고 있다. 얼마나 붙어 있는지 몸 사이로 웍이 보였다 말았다 한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은근슬쩍 지훈이 어깨도 만졌다가, 웍 같이 돌려주는 척 손목도 잡았다가...


"지훈아. 뭐 만드노."

"아, 형! 언제 도착했어요?"

"내, 방금. 근데 니도 멀리 못 갔네. 발가락 또 아프나. 약 발라 줄까."

"아뇨. 아픈 건 아니고... 오늘 좀 피곤해서 일찍 짐 풀었어요."

"글나. 근데 이분은..."


원래 이런 불특정 다수가 묵는 공용 공간에서는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하면 안 된다. 방금 내가 둘 사이에 껴들어서 틈을 벌려 놓은 건 혹시나 지훈이가 괜한 오해를 사서 남들한테 욕 먹을까봐, 문제의 소지를 미리 차단 해준 거다.


"아, 이쪽은 루카. 아까 길에서 만났어요. 루카, 디스 이즈 다니엘."

"Oh, J. Is he your boy friend?"


나를 보고 서양인 특유의 오바육바를 하며 악수를 청하는 루칸지 쏘칸지 곱슬머리 나부랭이에게 지훈이가 급하게 노오오옵, 하고 부정을 했다. 아닌 건 맞지만 그렇게 정색하며 손까지 내저을 필요가 있니 지훈아... 그나저나 외국은 확실히 개방적이구나. 우리나라였다면 그냥 친구로 생각했을 것을 보자마자 보이프렌드냬.


"아 맞다. 형. 루카가 파스타 2인분 만들었는데 제 꺼에서 나눠줄게요. 같이 먹어요."

"아니다. 내는 그냥 알아서 혼자 먹을게. 그거 너네 먹을라고 만든 거다이가."

"어, 저 진짜 괜찮은데. 모자라면 이따 또 다른 거 먹으면 되고..."


결국 셋이 둥글게 앉아 파스타 노나 먹는데, 아니 쏘카 쟤는 이걸 2인분이라고 만든 건지. 1인분으로 보일 만큼 적은 양의 파스타를 셋이 먹자니 이건 뭐 포크로 몇 번 감으면 없어질 기세다. 아무튼 몇 마디 대화 끝에 쏘카가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한국 나이로 스물 다섯, 국제 나이로 스물 넷이라는 것도 들었으며, 마지막으로... 게이라는 정보도 획득했다. 그러면서 지훈이가 멀리서도 빛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는 둥 동쪽에서 온 진주라는 둥 개소리를 늘어놓는데, 안타깝게도 지훈이는 그 이탈리안 주접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누가 뭐라 하든 그저 웃으면서 파스타만 호로록 먹고 있는 이 상황이 안타까워서 번짓수 잘못 찾은 이탈리아 헌팅남한테 친절하게 알려줬다. 지훈이 영어 잘 못해서 지금 님이 하는 말 아무 소용 없다고. 그랬더니 쏘카 이 새끼가 한다는 말이,


"저도 알아요."


황당해서 포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왜 그런 말을..."

"그쪽 들으라구요."


아 개빡친다.


*


계속 눈치를 줬는데, 답답한 박지훈은 전혀 알아채질 못하고 웃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다 까놓고 솔직하게 말했다.


"야, 지훈아. 저 사람 지금 니한테 작업 넣는 거다. 조심해라."


어차피 한국어라 쏘카 새끼는 못 알아듣는데 지훈이가 도끼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사람 앞에 두고 무슨 소리에요. 무례하게."

"무례라니. 나는 들은 대로 말해준 거다."

"형. 그게 무례한 거예요. 게이라고 모든 남자를 다 좋아하겠어요?"


아니, 지훈아. 게이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쟤가 지금 니 꼬시려고...


"Coffee?"

"그레이트! 루카, 유 아 쏘 카인드."


식후 커피 최고라며 손뼉 치는 박지훈 앞에 루카 쏘카 하이카가 모카포트를 들고 서있었다. 아니, 이탈리안들은 저 모카포트 대체 어디서 꺼내들고 오는 거냐고.


*


지훈이랑 방이 달랐다. 하필 그 이탈리안 게이와 같은 침대라고 해서 더 걱정됐다. 밤에 잘 때 조심하라고 했더니 지훈이가 화를 내며 가버렸다. 정말 억울하다. 쏘카 새끼 나한테 했던 말 생각하면 지훈이한테 흑심 품고 있는 게 분명한데 이건 성별이 달랐어도 충분히 주의를 줄 만한 상황 아닌가.


아무튼 무거운 마음으로 내가 배정받은 방에 들어오니 며칠 전 봤던 스웨덴 여자분들이 인사를 해주었다. 그 귀여운 소년은 어디 갔냐길래 다른 방에 있다고 했더니 자기들끼리 스웨덴 말로 쑥덕거린다. 오해를 하든가 말든가. 정정해 줄 힘도 없어서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시죠?"


맞은편 침대 1층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해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습관적으로 맞인사를 하고 얼굴을 보니 처음 보는 한국인 여자였다. 나이는 대충 내 또래? 끈나시에 엄청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시선을 급하게 뗐다. 핸드폰 액정에 코 박고 와이파이 잡고 있는데, 여자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일행은 없으세요?"

"...지금 다른 방에 있어요."

"보통은 일행이랑 같은 방 묵지 않나요?"

"오늘은 제가 발이 아파서 좀 늦게 도착했어요."

"아 정말요? 그럼 혹시 파스 같은 거 있으세요?"

"액상 파스 있는데... 빌려 드릴까요?"

"네! 저 오늘 근육통이 너무 심해서..."


여자가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왔다. 예의상 사람을 안 보고 말할 수도 없고. 근데 옷이 너무 짧아서 쳐다보기 민망하고. 급하게 가방을 뒤져 파스를 꺼냈다. 저렇게 생긴 걸 돌핀 팬츠라고 하던가? 송아현이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튼 굉장히 짧은 반바지를 입고 침대 옆에 서있으니, 아무리 눈을 돌려도 시야에 허연 허벅지가 들어와서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물건을 건넬 때 정도는 쳐다봐야 하니까 자세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형. 내일은..."

"아, 지훈아."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지훈이에게 손짓을 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의미였는데, 지훈이의 그 커다란 눈이 나와 내 앞에 서있는 여자를 빠르게 훑더니 더 들어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아까 말씀하신 그 일행분이세요?"

"네. ...지훈아, 문 열어놓고 뭐하노. 들어온나."

"이름이 지훈이에요? 일행 분도 넘 귀엽게 생기셨네."

"아... 안녕하세요."


여전히 삐쭉대며 문가에 서있는 박지훈을 보며 대충 눈치 깠다. 쟤 지금 낯가리고 있구나. 아니 근데 아까 그 루카 쏘카 하이카 새끼한텐 낯 1도 안 가리더니?


"형 다리 아직도 많이 아파요?"

"어? 아, 이거..."


지훈이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내가 들고 있는 액상 파스였다. 아냐 이건 이 여자분 빌려드리려고 꺼낸 거고 내일은 같이 걸을 수 있...


"아. 다리 아프시다고 하더니. 일행 분이랑 속도가 다른가봐요."

"아니 그게,"

"형 계속 아픈 거면 내일도 천천히 와요. 저 먼저 가고 있을게요."


야 박지훈 내 대답 듣고 가야지. 답할 틈도 없이 쌩하니 닫힌 문. 반사적으로 뻗은 손이 허망했다.


"이거, 이렇게 바르면 되는 건가요?"

"네. 그냥 막 펴바르시면 됩니다."

"양은 이 정도면 되나요?"

"다 쓰셔도 됩니다."

"아잉, 빌려쓰는 건데 어떻게 다 써버려요. 지금도 많이 쓴 것 같아서 죄송한데..."

"괜찮습니다. 바르시고 내일 아침에 주세요. 전 먼저 잡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침낭 속으로 파고들며 굿나잇 인사를 날리자 여자는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다 써도 된다고 했지만 가급적 돌려줬으면 좋겠다. 예전에 독일 출장 가서 산 건데 약효가 좋아서 여기까지 들고 온 거거든. 지훈이도 그거 시원해서 좋다고 몇 번이나 빌려썼다.


*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지훈이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심지어 그 이탈리아 남자도 떠나고 없었다. 말이 쉬워 순례길이지,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사고도 실종도 많이 일어나는 길이다. 불안해진 나는 아침도 안 먹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맞은편 침대의 여자가 돌려준 파스는 무게감이 어제와 사뭇 달랐다. 조금 빡쳤지만 다 써도 된다고 한 건 나였기 때문에 할말이 없었다.


"저..."

"네?"

"오늘도 천천히 걸으실 거면... 저랑 같이 출발하실래요?"

"그쪽이랑요?"

"네. 저도 걸음이 느린 편이어서, 속도 맞을 것 같아서요."


급한 마음에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죄송한데 저 오늘은 좀 빨리 걸을 거라서요."

"아, 그럼... 다음 번 도시에서 제가 밥이라도..."

"그쪽이 밥을 왜요?"

"어제 파스도 넘 많이 썼고..."

"괜찮아요. 그 정도 쯤이야. 신경쓰지 마세요."


내 옷깃을 잡은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숙소를 나섰다. 어차피 한 방향으로 난 길이라 다행이다. 부지런히 걷기만 하면 따라잡을 수 있으니.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론 절대 떨어지지 말아야지. 끝까지 같은 페이스로 걸어가야지.


*


결국 마지막 마을 가는 길에 둘을 따라잡았다. 루카가 다리 아픈 거 아니었냐고 묻길래 다 나았다고,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까 루카 얘야말로 걷는 모양새가 이상해서 괜찮냐고 역으로 물었더니 사실 하루종일 지훈이 걸음에 맞춰 걷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자기는 이렇게 빠르게 걷지 못 한다고, 아무래도 오늘 앓아 누울 것 같다길래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다리 찢어진다는 한국 속담을 영어로 직역해서 말해줬다. 이해를 못 했는지 그게 무슨 뜻이냐고 계속 물었지만 화제를 돌리며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지친 루카가 먼저 곯아 떨어지고, 지훈과 나는 식사 후 정원을 걸었다. 이제야 뭔가 제자리를 찾아간 느낌. 안정감에 취해 지훈이의 손을 잡았다. 몇 번 빠져나가려는 걸 힘 써서 잡았더니 체념한 듯 늘어져버린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힘을 빼고 그래.


"형은,"

"어."

"내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싫어요?"

"어?"

"어제 오늘 루카한테 계속 짜증냈잖아요."

"야 그건..."

"말해봐요. 형은 제가... 형이랑만 걸었으면 좋겠어요?"


이젠 제법 쌀쌀해져서 밤이면 바람막이를 입어도 찬기운이 돈다. 지훈이가 맞잡은 손을 축으로 반바퀴 돌아 나를 마주보고 섰다. 남은 한 손도 자연스레 끌어다 잡았다. 아, 또다. 또 입술이 먼저 보인다.


"니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싫은 건 아닌데..."

"......"

"산티아고는 쭉 나랑 걸었으면 좋겠다."

"......"

"걸어보니까 니랑 제일 잘 맞고... 니랑 있을 때 제일 재밌고.... 그래서."


나를 올려다보는 지훈의 눈이 밤하늘의 별보다 더 반짝거렸다. 너무 유치한 표현이긴 한데, 사실 이보다 완벽한 표현도 없었다. 은하수를 가득 담은 두 눈이 이윽고 휘어지게 웃었다. 가만히 있어도 잘생긴 애지만 이렇게 웃으면 가슴이 철렁하게 예쁘다.


"그래요. 저도 형이 제일 좋아요."

"진짜가."

"네. 그러니까 같이 걸어요. 길이 끝날 때까지."


그때의 나는 전혀 몰랐다. 지훈이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트위터 @tejava_mil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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