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가 내렸다.

붉게 물든 하늘이 보이는 고원. 시체가 산처럼 쌓고 핏물이 바다를 이루는 살겁의 현장에 검을 든 두 사람만이 우뚝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시신들을 밟고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이들의 명분은 뻔하다면 뻔한 것이었다.

마교가 준동하여 스스로를 신교라 일컬으며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하였고, 파죽지세의 침탈을 막기 위해 정파와 사파가 손을 잡고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십여 년의 세월을 쫓고 쫓기는 외줄타기를 하며 수많은 목숨이 강호를 휩쓰는 화마의 불쏘시개로 쓰였다.

전쟁의 막바지. 더는 소모전조차 불가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마교가 전면에 나섰고 이에 대응하듯 무림맹 연합 역시 그에 대응하였다. 무력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 뒤를 남기지 않는 총력전이라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죽고 죽이는 싸움 끝에 남은 이는 둘.

하나는 마교의, 다른 하나는 무림맹 연합의 고수였다. 명호와 이름은 상관없었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쌓였다. 그들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새삼스럽게 서로를 향해 제가 누구인지 소리칠 이유가 없었다.

본디 붉은색이었으나 피를 머금어 검게 보이는 옷자락을 늘어뜨린 사내가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손에 쥔 검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제 앞에 흐트러짐 없이 선 이를 향해 말했다.

“잠시 쉬자.”

사내는 동의를 얻지 않고 몸을 살짝 돌려 그 자리에 정좌하고 앉았다.

피차 남은 진기는 한 줌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일합으로 판가름이 날 결전이었다.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 서로의 목에 칼을 꽂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한숨을 고르자는 그 제안이 상대에게도 썩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핏빛 낙조 아래 살아있는 사람은 그들 둘뿐이었다. 하늘 외에는 보는 눈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합을 앞두고 한담을 나눈다 하여 하늘이 노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피가 튀어 마치 붉은 매화를 수놓은 것 같은 흰 옷자락을 늘어뜨린 이가 그 청에 답하듯 검을 거두어들이며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마주 앉은 것은 아니었다. 높다랗게 하늘에 드리운 낙조를 바라보는 듯 나란히 앉은 형상에 가까웠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 끝자락, 산기운을 탄 차가운 바람이 사취를 쓸어내리며 조용히 앉은 이들 사이를 스쳤다.

얼마 만이던가.

지난 세월 쫓고 쫓기는 가운데 서로에게 검을 겨눈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승패가 나지 않아 물러서는 길에 시선을 마주하고 돌아서는 일은 세는 것조차 의미가 없었다.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십칠 년.”

아주 구체적인 숫자였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는 듯 하, 사내는 하 하고 짧은 탄식을 내어놓았다.

“그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나.”

“왜 기억하지 않지.”

“의미 없으니까.”

“그게 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의미 없지는 않은가 본데.”

빈정거리는 듯 내어놓는 말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낙조를 맞이하여 희고 매끄러운 볼 위로 발갛게 물든 빛을 드리운 이가 제 옆을 돌아보았다. 그린 듯 바르게 앉은 사내의, 역시나 붉게 물든 이목구비를 한참 살핀 후 느릿하게 말을 더했다.

“오늘로 딱 이십칠 년이다.”

그랬던가. 사내는 그렇게 되뇌었다.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따져 무엇을 할까. 삶은 그저 그리 되었다 싶을 만큼 그의 뜻과 관계없이 흘러갔다. 아마 스스로 해낸 무언가라 한다면, 하나뿐일 것이다.

“늘 묻고 싶었다.”

오래도록. 전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떨어지는 칼날 너머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날. 왜 내 손을 뿌리친 것인지.”

잡은 손을 놓은 것.

사내는 제 의지로 이루어낸 일을 되묻는 이를 돌아보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답을 얻어 무엇을 하려고.”

“알아야겠다.”

마주한 시선 너머로 흐릿한 웃음이 흐트러졌다.

“이유를 묻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분명 말했지 않던가, 나 궁금한 거 못 참는 성격이라고.”

그들이 시산혈해를 깔고 칼을 겨누는 명분은 세상이 정해주었지만, 마지막 한담을 나누기 위해 칼을 거두는 사연은 그와 관계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침묵에 묻어놓은 비밀에서 비롯되었다.

스물일곱 해 전.

사내가 마교의 이름 없는 어린 살수였을 때, 대계를 위하여 미리 정파의 고수들을 함정에 빠뜨려 암살하는 미끼 역을 배정받았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 쓸모로 길러진 살수는 제게 부여된 임무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명령받은 대로 움직여 그들을 함정에 하나하나 빠뜨려 제거했다. 변수만 없다면 마지막 한 명까지 제거한 후, 목숨이 다하여 죽었어야 했을 터.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내의 삶은 그 의지와 아무 관계 없이 멋대로 흘러갔다. 사내가 어린 살수였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의 죽음을 겪고 이것이 마교의 농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정파의 후기지수 하나가 저 하나를 희생하여 다른 이들을 살리겠다며 살수를 낚아채었다. 그리고 몇 번의 공방 끝에 마교가 안배한 함정 하나로 둘이 함께 굴러떨어졌다.

여기까지였다면 마교의 살수와 정파의 후기지수가 마교의 농간에 치여 죽음을 맞이한 일로 끝났을 것이다.

문제는 그 함정이 비동秘洞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고, 그들이 비동에 쓸려 들어가는 것으로 기환진이 발동되는 조건이 완성되어 그들은 그 안에 갇히게 되었다.

우연이었다. 혹자들은 기연으로 표현할 일이기도 했다.

적으로 만나 죽이고자 싸웠던 이들이 도망치고 피할 데가 없는 곳에 갇혔다. 하지만 서로를 경계할 틈도 없었다.

기환진으로 둘러싸인 비동은 빛 한 점 존재하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디디는 것만으로도 사위가 뒤바뀌고 발밑이 꺼졌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제 발로 땅을 붙잡고 있어도 온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나뒹구는 것만 같았다.

명정과 평정을 기반으로 가다듬은 수련으로도 쉬이 이겨내지 못한 혼란이었다. 평정심. 이는 실제가 아니다. 기환진이 강제하는 혼란. 평정심으로 이겨낼 수 있다. 정좌조차 하지 못하고 웅크린 몸으로 그 말을 수도 없이 되뇌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작은 숨소리를 깨달았다.

내가 내쉬는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것.

시선을 건넨 곳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너머 가늘고 낮게 흐르는 숨결이 손끝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먹먹하게 귀가 멀 것 같은 정적과 사위가 구분 가지 않는 혼돈 속에서도 그 소리 하나만큼 선명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서로 죽이고자 칼을 겨누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사내는 마주 닿은 시선을 천천히 떼어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낙조 너머 반짝이는 빛 하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밤이 다가온다는 증표였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깨달은 사내는 피냄새 뒤섞인 바람으로 가벼운 숨을 풀어놓았다.

여기까지 왔다.

더 숨기고 감추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유야 별것 있겠나. 그게 너도 나도 살아남을 방법이었으니까.”

“기환진의 생문으로 나만 내보냈으면서 무슨 개소리지?”

이십칠 년 전에야 후기지수였지만, 지금은 무림맹주도 한 수 접어주는 명사의 입버릇이 왜 저 모양인지.

여전해.

사내는 감탄도 한탄도 아닌 말 한 마디를 삼켰다.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도 가늠하기 어렵고 시간이 흐르는지 마는지도 알 수 없는 기환진 안에서 서로를 적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몸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싸우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숨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리는 거리에서 대치하다, 결국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도록 훈련된 살수를 이기지 못한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마교 개새끼. 이름이 뭐야?

시비를 거는 듯 들리는 물음이 그들이 나눈 수많은 말의 첫머리였다.

“한 번에 한 명만 통과할 수 있는 생문이니 못 버틸 사람이 먼저 나가는 게 맞지 않겠나.”

싸우자는 것처럼 시작되었던 통성명은 이후 수많은 대화로 이어졌다. 어떻게 이곳을 나가야 할 것인지 논의도 나누었고, 무공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도 있었고,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 대한 쓸데없는 화풀이도 있었다. 어쨌거나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을 다 알 만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이 마르지도 않은 이상한 공간. 눈을 감으나 뜨나 새까맣게 깔린 어둠이 부리는 농간은 끔찍했다. 사람을 피 마르게 하는 감각이었다.

가만히 있어. 가까이 갈 거다. 피하면 죽인다.

여전히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였다. 새삼스럽게 주먹다짐이라도 다시 시작하려나 싶었지만 의외로 지척에 다가온 이는 더듬더듬 사방을 더듬다 결국 툭, 사내의 무릎을 건드렸다. 제가 건드려놓고 흠칫 놀라 물러서던 손길이 아직도 생각이 났다. 동시에 손 내놓으라고 버럭하는 목소리를 따라 반사적으로 내놓은 손바닥에 닿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던 감촉도.

언제까지 이 어둠이 계속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제 것이 아닌 숨소리를 내어놓는 존재에게서 얻은 안도로 상쇄되었다.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숨소리만이 제가 살아있다는 증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들은 한겨울의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서로에게 등을 기대는 어린 짐승들처럼 엉켜 잠을 청하게 되었다.

밑바닥조차 존재하지 않는 지옥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놓지 않을 듯 붙잡는 게 당연했다.

“왜 내가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경우를 봤으니까.”

“봤다고?”

“그래. 본교에서 살수를 길러내는 방법이 그와 유사하다. 나는 이미 겪은 일이었고.”

서로 다른 독충을 한 항아리 안에 가두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을 골라내는 과정과 유사했다. 그중 어떤 독충은 다른 독충을 물어 죽이는 게 아니라 갉아먹는 것도 있었다.

사내는 하늘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려 한 번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을 마주했다. 바르고 곧은, 무엇을 보더라도 피하지 않는 시선.

그 어둠 속에서도 너는 나를 이리 보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온몸을 감싸는 온기에 익숙해질 즈음. 더는 떨리지 않는 손끝이 이마 위를 쓸어내리다 눈두덩을 두드렸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뺨 위를 꾹꾹 누르는 일도 잦아졌다. 누군가가 얼굴을 만지는 일이 없었기에 위해를 가하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떼어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래도 사내는 기어이 그 손길을 참아내었다. 그에게도 매달릴 것은 제 품에 안겨 있는 따뜻한 육신이 전부였다. 밀어내는 순간 온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입술 위에 닿은 입술마저도 얌전히 받아들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스며든 혀끝이 제 혀를 감아 핥는 행위도, 가지런한 이가 혀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내는 것도.

“암동에 함께 갇혔던 이들 중 하나가 어둠을 못 견디고 미쳐 스스로 제 다리를 끊어내어 삼키던 모습도 봤다. …너도 그렇게 될 것 같았지.”

고통과 공포를 거세하기 위해 모든 통각을 금제 당한 어린 살수에게 무언가를 입에 넣고 씹는 행위는 무언가를 먹는 것 외에는 없었다. 스스로 다리를 끊어 입에 물고 고기라고 외치며 먹어치우는 광기가 그 관념에 쐐기를 박았다.

그에게는 겹쳐진 입술 사이로 오가는 혀끝을 삼키는 것 역시 그와 별다를 바 없었다.

뒤늦게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은 듯, 하 하고 짧은 헛웃음이 흩어졌다.

“너. 접문이라는 말 들어본 적도 없는 거냐?”

노려보는 눈길이 벼락을 가른다는 검로보다도 매서웠다. 섬뜩한 칼날이 진짜로 목덜미를 찌르는 느낌인지라 사내는 머쓱하게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때는 몰랐다.”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되나?”

“나는 그러한 용도로 만들어진 살수가 아니어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많은 것을 알면 안 되는 소모품이었으니까.”

짧은 침묵 끝에 분이 어린 외침이 이어졌다.

“어쩐지, 싫은지 좋은지 말 한 마디가 없더라니. 나만 발정 난 고양이가 된 건가 분해서 마교 소교주 고자 새끼라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녔는데 그게 사실이었어!”

뭔가 억울함과 시원함이 반반 뒤섞인 목소리였다. 무림맹 연합과 부딪칠 때마다 저를 깎아내리는 말로 고자가 빠지지 않는다 했는데, 그 원흉이 여기에 있었다. 사내는 그건 아니라고 항변을 하려다 말았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칼이 날아올 예감이 들었다.

허공에 대고 화를 내던 이가 이내 어깨를 매서운 시선을 사내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같이 나가자고 잡은 손을 뿌리친 이유가, 정말로 그것뿐인가?”

“말했듯이 생문은 한 번에 하나만 통과시키는 터라. 그대로 갇혀 있었다면 우리 둘 다 미쳐 죽었을 거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에 순순히 수긍해줄 수가 없었다. 기환진에 갇힌 채로 미쳐 서로를 죽이는 것이나, 이 자리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미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너와 함께 있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지 않았나?”

되묻는 목소리에 묻어 있는 것은 의문보다도 원망이었다. 사내는 그 말들을 듣지 않는 듯 흘렸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독충이 되어 자라난 어린 살수는 저를 안아주는 온기로 하여금 세상에 하나뿐인 무언가가 제 목숨 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전부 내어줄 수 있었다. 혀끝부터 물어뜯겨 피 흘리며 죽어간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쓰임새를 잃고 버려진 목숨이었으니 거리낌도 없었다.

문제는 제가 그렇게 죽고 난 후였다.

홀로 남아 미칠 것 같은 고독과 마주하게 될 사람 걱정으로 다른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사위를 감싼 어둠보다도 더 짙게 눈을 가리는 맹목이었다. 그리고 울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와 놓지 못하겠다는 듯 붙드는 손끝을 기어이 뿌리치며 기환진의 어둠 속에 홀로 남게 된 그는 제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 예감했다.

수년의 시간이 흐르고.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시간을 따라 조금씩 갉혀 부스러지던 순간, 우연인 듯 아닌 듯 빛살 아래 반짝이는 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감은 확신이 되었다.

“내가 그 비동에 홀로 남은 너를 얼마나 걱정했을지. 너를 찾기 위해 얼마나 헤매었을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거로군.”

그러니 어떠한 원망을 듣는다 하더라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침묵하는 사내를 바라보던 이는 그제야 시선을 떼어내었다. 이미 지나 가버린 긴 세월을 가늠하는 듯 한숨이 찬 바람에 뒤섞여 사라졌다.

길게 늘어지는 태양의 마지막 정념을 받은 이마가 발갛고 따사롭게 물들어 있었다. 사내는 손을 내밀어 그 단아한 이마를 쓸어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오히려 거침없었던 때처럼.

“차라리 소교주가 되고 싶어서 홀로 남았다 할 것이지.”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살고 싶었고, 살아서 생문을 통과하고 싶었고, 생문 너머 제가 뿌리쳤던 손을 다시금 붙잡고 싶었다. 그런 일념 하나로 기환진의 축을 무너뜨리고 비동을 돌파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교의 원로들이 그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천마의 진전을 이어받은 후인이시니 받들겠다는 외침이 이어졌다.

도망치겠다 시도하고 실패한 게 몇 번이었던가. 필사적으로 저항해 보았지만 마교의 노괴들은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천마의 후인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릇이 비천하고 부족하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천마의 상징은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족할 일이니.

사내는 제게 걸려 있는 금제를 무심히 세어보았다.

스물하나. 엉키고 들러붙어 죽거나 깨달음을 얻어 탈태하는 게 아니고서야 절대 풀어내지 못할 족쇄였다.

“그리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본교의 소교주가 되기 위해 네 손을 뿌리쳤다고 정정하겠다.”

“닥쳐.”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짧게 흩어졌다. 그래서 사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낙조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별이 하나둘 반짝이며 빛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생각하는 것까지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더 쉬면 몸이 식는다. 이제,”

“우리, 도망칠까.”

그만 끝을 내자는 말을 하려던 사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전쟁은 끝났다. 여기서 너와 내가 살아도 죽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저들이 필요로 하는 명분에는 죽은 자의 이름이 더 들어맞기 마련이라.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으로도 족할 터.”

희대의 마인, 천추의 영걸. 어떤 말로 포장을 할 것인지는 알 바 아니었다. 어쨌거나 후일을 위하여 듣기 좋고 보기 좋게 갈고 다듬어 세상에 내어놓을 것만은 뻔했다.

“대막 너머 서쪽이든, 바다 건너 동쪽이든. 세상은 넓다. 너와 나 둘만 조용히 살 곳이 어디 하나쯤은 있을 거야. …나와 같이 가자.”

꿈결 같은 목소리가 오래도록 그렸던 바람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새까만 어둠에 둘러싸여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녹아나듯 온몸에 달라붙던 온기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굳은 머리로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룰 수 없는 소원을 자아내었다.

그때 너와 함께 나갈 수 있었더라면.

나는 어떠한 낮과 밤에도 너를 안을 수 있었겠지. 아무도 너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니 발길 닿는 곳 어디라도 함께 갈 수 있었을 텐데. 산도, 들도, 바다도.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 듯.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 보며- 네가 나를 보며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네게 웃어줄 수 있었을 텐데.

아마 이곳이 새까만 어둠만 존재하는 비동이었더라면 두 번 생각지 않고 그러마 답했을 것이다.

“거절한다.”

이유는 가져다 붙이기 마련이었다. 양측 모두 벼랑 끝에 몰려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하는 이 전쟁의 명분도. 정파의 명사로서 산처럼 높다랗게 쌓인 명예와 지켜야 할 대의도. 마교의 소교주라는 자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업과 악명도, 제가 이 길고 긴 전쟁의 원인이 된 천마의 후인이라는 사실도. 혹은 금제가 걸린 채로 선천지기까지 끌어다 쓰느라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도. 할 수 있는 말은 수많았다.

하지만 결국 사내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제 뜻과 관계없이 흘러가는 삶 속에서 유일하게 제 의지로 행하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신 없는 죽음을 용납할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더 사납게 추적할 테지. 사냥감처럼 세상 모든 것에 쫓기며 도망치는 것과 비동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이 무어 다른가. 그리 살 수는 없는 일.”

빛 속에서 어디로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너.

몇 번을 돌이켜도 후회하지 않는 마음을 네게 주었으니.

아무것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검을 들어라.”

생사결을 논하는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단호했다.

가라.

잡은 손을 뿌리치던 그때와 같이.

짧은 탄식이 흐트러졌다. 구차하게 매달려서라도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은 나뿐이었나. 그럴지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에 매달려 붙잡을 것이 하나뿐인 불안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서로를 끌어안는 것 외에는 안도할 게 하나 없는 관계가 정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리 없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랜 세월, 기환진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다. 방황하듯 떠도는 제자를 보다 못해 심마에 들었다며 폐관에 들라는 스승의 명을 거역했다가 파문당할 뻔했고, 결국 사형들이 설득하고 애원하여 폐관수련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 제외한다면- 그 삶은 못 잊을 기억을 찾아 떠도는 부평초 같았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사건을 겪었다. 그만큼 선연과 악연을 맺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얽혀 살아가면서도 모든 생각의 끝은 오로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아픔도, 슬픔도, 그리움도- 그 한마디로 저를 밀어내며 아득히 멀어지는 이에게만 닿았다. 그래서 두 눈을 뜨고 색채 가득한 세상을 보아도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만도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매정하게 죽을 자리를 마련하는 이를 보면서도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 나 홀로 품은 마음이면 어떠할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너는 내 것이지.

아니 된다 해도 그리 만들 것이다.

무겁게 내려앉는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선 이는 제 앞에 선 사내를 마주했다. 붉은 낙조가 조용히 쫓아오는 밤을 맞이하여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차게 식은 바람이 굳게 선 이들 사이를 스쳤다.

이로써 마지막.

더 할 말이 남아 있던가.

사내는 끊임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를 향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세에 다시 만나게 되거든.”

부질없는 약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네가 사내로 태어나면 등을 맡길 수 있는 친우가, 여인으로 태어나면 너만 보고 아껴주는 낭군이 되어주겠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약조더냐며 대꾸하려던 이는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아무것도 되어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남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미련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이대로 끝내야만 하기에 함께 가자는 그 말에 답하지 못한다. 그러니 마교의 살수도 아니고 정파의 후기지수도 아닌, 강호인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다시 만나면 그때 함께 하자.

서로를 끌어안고 몽상처럼 나누었던 어느 이야기의 한 자락이었다.

“둘 다 여인네로 태어나는 선택지도 있어야지?”

“그런가.”

흐리게 웃는 얼굴을 보며 선심 쓰는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면 둘도 없는 자매가 되어주마. 만약, 네가 또 사내로 태어나면 나만 사랑하라고 닦달하는 극성스러운 처가 될 생각이니 각오해.”

한담은 실없는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눈물을 대신하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스치어 사라졌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검을 들었다. 무겁게 내려앉는 발끝으로 보법을 밟고 영원히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리를 좁혔다.

세 걸음. 낙조에 비친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선명한 선을 드리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몇 번이나 더듬고 더듬어 손끝으로 만들어낸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수도 없이 쓸어내렸던 마른 뺨. 코끝에 마주 닿았던 코끝. 겹쳐진 입술로 느꼈던 입술.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던 그 눈.

하지만 기억하는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모르는 상처가 오른쪽 이마에 길게 새겨져 있었다. 눈 아래로 화인처럼 찍힌 작은 화상 자국이 얹혀 있었다. 세월을 따라 만들어졌을 주름 한 가닥이 눈가에 스며들어 있었다.

거의 십수 년이 지나 다시 만났고, 알아보지 못해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몇 번은 죽을 뻔했고, 또 몇 번은 죽일 뻔했다. 다시금 벼랑 끝에 내몰리고 나서야 서로를 알아보았다. 살아있어서 안도했다.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인해 비통했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억지로 전장에 나섰던 적도, 사지 같은 진영으로 기꺼이 걸어간 적도 있었다.

만나지 못했던 세월보다 더,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남은 힘을 다하여 내디딘 발끝이 땅을 짚었다. 긁어내듯 끌어올린 진기가 검날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한 번도 놓지 못한 마음 한 자락이 칼날에 매달렸다. 무겁고 끈질기게.

합을 셀 필요 없었다.

저물어가는 낙조 아래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가 뒤엉켰다. 춤을 추는 듯 팔락이는 옷자락 너머 검날이 부딪쳤다. 높다란 굉음과 함께 두 검 중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붉은 낙조 너머 반짝이는 궤적을 남기며 피육을 가르고 꿰뚫었다.

소리 높여 울부짖는 바람결이 세상 위로 붉은 핏방울을 흩뿌렸다. 맥없이 무너지는 그림자 둘이 하나처럼 엉켜 들었다. 바닥이 없는 어둠 속에서 그랬듯, 한겨울 진눈깨비 쏟아지는 세상에 내던져진 어린 짐승들처럼, 서로를 한몸처럼 끌어안은 이들 머리 위로 낙조를 밀어낸 새까만 밤이 내려앉았다.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어스름이 내려앉는 여명이 고원으로 찾아들었을 때,

핏물 사이로 덩그러니 내던져진 검 두 자루만이 제 주인이 이곳에 있었음을 세상에 알리었고, 그들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는 영원히 침묵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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