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네일 이미지: @10000_GG (구 님)

*본 글은 감풀 선생님과 함께 쓰는 큰세배세 합작 연재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저와 감풀 선생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캠퍼스 수인 물

*인간 이세진 X 햄스터 수인 배세진 

*혐관으로 시작하고 썸을 타게 되면서 삽질을 할 예정입니다.

*2023년 1월 아이소 신간 발간 예정

*하트와 댓글 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트위터: @luvto_nari @gampool12


기다림의 미학              
        
                                           w. 나리 & 감풀




배세진은 자기 손에 있는 비타민 음료를 만지작거리며, 저 멀리 인파 속에 묻혀 있는 이세진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술 마시고 민폐를 끼친 게 미안해서, 뭐라도 답례해주고 싶은 마음에 산 음료인데, 사기만 하고 몇 시간째 손에만 쥐고 있었던 탓에, 차가웠던 음료는 어느새 뜨뜻미지근해져 있었다. 이래서야 음료를 전해줘도 소용이 없잖아. 한숨을 푹 내쉰 배세진은 차라리 이세진이 혼자 있을 때를 노려보자고 다짐하며 손에 쥔 음료 병뚜껑을 따, 한입에 털어 마셨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이세진은 학과에서 인기가 많았다. 누구한테나 서글서글하게 대하는 성격 탓이겠지. 학생회에서 나랑 처음 봤을 때도 혼자 동떨어져 있던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줬었으니까. 나한테 직접적으로 말을 건 사람은 이세진이 처음이어서 많이 놀랐었는데. 가만 보면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내가 쟤를 인간이란 이유로 꼬아 보는 것뿐이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편견 어린 시선을 이세진한테 보내고 있었단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경계는 원래 해도 해도 모자란 거니까. 그래도 자신이 햄스터 수인이란 사실을 알아챘으면서, 아무런 티도 내지 않는 이세진에겐 조금 많이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고 싶은데, 대체 왜 혼자 있는 시간이 없는 건데…!! 학교에 온 순간부터 계속 이세진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건만, 도대체가 혼자 있는 시간이 전혀 없었다. 남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익숙지 않은 배세진은 언제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세진에게 다가가는 게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난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은혜를 입은 게 있다면 꼭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를 지닌 배세진은, 어떻게든 이세진에게 밥을 먹이겠다고 다짐하며 그의 뒤통수를 열심히 째려보았다.


아, 뒤통수에 구멍이 뚫릴 것 같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이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잔뜩 찌푸린 미간을 문질렀다. 아침부터 진득하게 따라붙는 배세진의 시선이 계속 느껴져서 짜증이 났다. 지난번엔 그렇게 사람 마음을 찝찝하게 만들어 놓고 가 버리더니, 오늘부터는 아예 비호감 쪽으로 노선을 틀어 버릴 모양이었다.


배세진이 저렇게 구는 것도 나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말로는 민주주의 사회니, 평등이니 해도 아직 수인에 대한 차별, 그것도 소형종 수인에 대한 차별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제가 남에게 비밀을 발설이라도 할까 싶어 저렇게 전전긍긍하며 따라다니는 거겠지. 다른 사람과 가까이 있을 때 시선이 더 심해진다는 점은 이세진의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래서 이세진은 기분이 나빴다. 그는 악감정도 없는 사람의 비밀을 공공연하게 퍼뜨려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날 얼마나 쓰레기 새끼로 생각하는 거야? 시선이 느껴지는 내내 이세진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세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별거 아냐.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동기의 걱정에 이세진은 다시 표정을 풀어냈다. 그러기도 잠시, 손톱 밑 가시처럼 까끌까끌한 시선에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안 되겠다. 얘들아, 미안한데 나 먼저 가 볼게. 과제 열심히들 하고~”


평소 같으면 그의 곁에 따라붙었을 이들도, 아침부터 어딘가 불편해 보이던 이세진의 안색을 눈치챘기에 쉽게 그를 보내 주었다. 그는 빠르게 학교를 벗어났다. 예상대로 배세진은 그의 뒤를 급히 따라나섰다. 그는 일부러 사람 없는 골목 주택가로 향했다. 꽤 벌어진 거리를 좁히려 걸음을 늦추었다가, 그가 충분히 가까이 왔다고 생각될 즈음 확 몸을 돌려 따라오는 배세진을 급습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흐악…!”

귀까지 튀어나온 채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더욱 기분이 저조해졌다. 또 나만 나쁜 놈이지.

“선배, 왜 자꾸 저 따라다녀요?”

“아, 아니, 그게….”


내가 뒤따라 걷는 걸 눈치챘구나. 지난번엔 정말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밥 한 끼 사주려던 배세진의 야심에 찬 계획은 갑작스러운 이세진의 물음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분명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꺼낼지 다 계획해두고 있었는데, 막상 왜 따라오냐며 추궁당하고 나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답례할 기회가 안 올지도 몰라! 오늘 하루 지켜본 결과, 이세진 주위엔 사람이 붙어있지 않은 경우가 극히 드물었으므로 밥을 사주려면 지금이 딱 적기였다.


“저번에, 술 취한 나 챙겨준 게 너무 고마워서… 이래저래 민폐 끼치기도 했고, 너만 괜찮으면 밥 한 끼 사주고 싶어서 그랬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배세진이 침착하게 자신의 목적을 전했다. 한데, 늘 웃는 얼굴이던 이세진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다. …마치 귀찮은 일에 엮여버렸다는 것처럼. 물론 그 표정은 금세 웃는 얼굴로 변하긴 했지만, 배세진은 알 수 있었다. …아. 얘 나랑 같이 밥 먹기 싫구나. 그 역시 자신이 싫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같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긴 싫었지만, 그것과 신세 진 걸 갚아야 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밥 안 사주셔도 괜찮은데. 별일도 아니었는데요, 뭐.”

“너는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밥이 싫다면 다른 것도 상관없으니까.”


머리 위에서 연신 쫑긋대던 배세진의 귀가 밑으로 살짝 접혀 내려갔다. 제발 알겠다고 해줘라, 이세진. 나도 빨리 밥 한 끼 사주고 이 불편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단언컨대 지금, 이 순간은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아싸 생활을 일삼던 배세진의 대학 생활 중 가장 난감한 순간이었다.


물론 이세진은 둘이 앉아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제게 까닭 모를 적개심을 보였고, 이제는 온몸으로- 혹은 온 귀로, 나는 너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는 사람과 앉아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먹은 밥이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그리고 솔직히… 이세진 입장에서는 그냥 따라다니다가 걸리니까 변명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우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이 말을 예쁘게 포장할 수 있을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배세진의 비명을 들은 건지 저 멀리서 몇 명이 이쪽을 흘끔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배세진은 비밀을 들키는 게 싫다는 사람치곤 지나치게 허술했다. 이대로 가다간 적나라하게 튀어나온 두 귀를 다른 사람에게 다 내보이겠다 싶은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이세진이 그의 옷에 달린 후드를 잡아 쥐었다.


“잠깐만요, 형, 잠시만….”


손에 쥔 후드를 배세진의 머리 위에 덮어씌운 이세진이 얼른 손을 뗐다. 배세진은 그제야 제 귀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뒤에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어서요, 형. 갑자기 손대서 죄송해요.”


배세진은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이세진을 올려다봤다. 그 표정에 또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진 이세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식사는, 제가 좀 바빠서 힘들 것 같고… 정 갚고 싶으시면 저희 전필 족보나 좀 주시면 감사할 것 같은데요.”


족보를 전해 주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식사 대접을 하는 것보단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까. 다만, 제게 후드를 씌워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이세진의 행동은 정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세심한 구석이 있기는 하네. …왜 주위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구나.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을 챙겨준 이세진에게 고마운 마음이 살짝 더해진 배세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내 족보라도 괜찮다면, 줄게.”


그것만 전해주면 이제 얘랑 더 엮일 일은 없겠지. 그런데 왜 자꾸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까. 이세진이 씌워준 후드의 끈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린 배세진은 아주 잠깐, 가까이 닿았던 이세진의 손을 떠올리며 볼을 붉혔다. …날이 꽤 덥네. 이제 후드도 못 걸쳐 입겠어.


한편 이세진은 배세진이 생각보다 흔쾌히 족보를 주겠다고 말해서 기분이 나아졌다. 그럼 이제 핑계도 없으니 안 따라다니려나. 잘됐다고 생각하며 이세진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번호 찍어드릴게요, 앞으로는 뭐 말씀하실 거 있으면 그냥 카톡 하세요.”


따라다니지 말고요, 하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비밀은 어차피 지킬 거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그의 비밀을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그, 족보는 내가 내일 전해줄게. 여러모로 고마워.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다시 돌려받은 핸드폰에 이세진을 이름 석 자로 저장한 배세진이 자기 머리 위에 씌워진 후드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별거 아닌데요, 뭐. 그럼 들어가세요, 저도 가 볼게요.”


이세진은 오늘 그에게 한 일 중에 딱히 감사를 받을 일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모자를 씌워 준 일도 사실 따지고 보면 허락 없이 남의 몸에 손을 댄 거였으니,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로 감사를 받으니 어쩐지 머쓱해져서, 떨떠름하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이제 저 형이랑 얽히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 * *

 

비품실에는 먼지가 쌓여 퀴퀴한 냄새가 났다. 뭘 찾거나 행사가 있을 때가 아니면 굳이 찾지 않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세진은 고장이 난 비품실 문이 닫히지 않도록 문 앞에 상자를 하나 괴어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강총회의 안건지와 위임장을 인쇄해야 하는데 과방에 있는 무한잉크 프린터에 잉크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무한잉크야, 하고 투덜거리면서 리필 잉크를 찾아 종이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세진?”


얼떨떨한 낯을 한 동명이인이 비품실 앞에 서 있었다. 어, 저 형이 왜 여기에?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형?”

“그, 톡방에서 세진이가 비품실에 다녀오라고 하길래….”

“…형, 과장 선배가 말씀하신 세진이는 저 같은데요.”


그 맥락에서 세진이를 찾으면 당연히 후배 쪽이지, 설마하니 고학번 선배를 부려 먹을까. 그러나 배세진은 확신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 했다. 뭐, 손이 많으면 나야 좋지. 이세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찾을까요? 찾아볼 데가 너무 많네요. 어디 박스에 들어 있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자.”


배세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가 비품실 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박스를 밀어내고 문을 닫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끼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이세진이 눈을 크게 뜨고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아 잠깐, 그 문…!”


달칵. 이세진이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문은 야무지게도 닫혔다. 당황한 배세진이 문고리를 돌려 보았지만, 철컥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손잡이는 헛돌기만 했다. 이세진이 황망하게 말을 맺었다.


“…고장 나서, 한 번 닫히면 안쪽에서 안 열리는데….”

숨 막히는 정적이 그들을 덮쳤다.

“……아.”


낭패도 이런 낭패가 다 있나. 어딜 가든 열린 문은 닫고 보는 습관이 이런 숨 막히는 상황을 만들어 낼 줄 누가 알았을까. 배세진은 비품실에 잉크 찾으러 왔다가 이세진과 단둘이 갇혀버린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나는 왜 항상 쟤한테 미안한 일만 생기지?! 이세진과 번호를 주고받긴 했지만, 족보를 전달해 준 이후, 한 번도 사적으로 연락한 적 없는 그는 어색함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잘하지 못하는데, 하필이면 이세진과 단둘이 비품실에 갇혀버렸으니, 이걸 어쩌면 좋냐고, 진짜.


“그…미안해! 문이 고장 나 있는 줄은 몰랐어.”

“어쩔 수 없죠. 형도 모르고 한 일이니까요.”

“핸드폰으로 과방 사람들한테 문 좀 열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저 핸드폰 충전한다고 과방에 두고 와서 없는데, 형은요?”

“…아. 나도 핸드폰 배터리가 하필 다 나가버려서.”


…이 형은 보조배터리도 안 들고 다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든 이세진이었으나, 늘 친구 없이 혼자 다니는 사람이니 핸드폰도 그냥 연락용으로 갖고 다니나 보다, 하고 빠르게 납득하며 머리를 굴려 냈다. 과방에 있는 사람들한테 연락할 핸드폰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이곳에 찾아오기까진 여길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저희 찾으러 올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잉크라도 미리 찾아둘까요?”


결국 어색한 정적을 이기지 못한 이세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보단, 뭐라도 찾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든 배세진은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잉크를 찾기 위해 여기 온 거니까, 그것부터 찾아 놓는 게 맞았다. 하지만 비품실 곳곳을 둘러보아도 찾고 있는 잉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저 선반 위에 있는 박스 안에 들어 있나? 아직 찾아보지 않은 높은 선반 위에 시선을 둔 배세진이 상자를 꺼내기 위해 양손을 위로 쭉 뻗어냈다. 보기보다 선반이 높은 탓에, 배세진은 끙끙대며 용을 써야 했다.


여기 잉크가 있기는 한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할 무렵, 문득 들리는 낑낑 소리에 이세진은 배세진을 돌아보았다. 배세진은 선반 제일 위에 있는 상자를 꺼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어, 저거 위험한데…! 상자 바로 밑에 있는 배세진의 시야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선반 위의 상자가 두 개 포개져 있는 탓에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위쪽 상자가 흔들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세진은 황급히 달려가며 손을 뻗었다.


“윽. 괜찮아요, 형?”


배세진의 머리 위로 쏟아질 뻔한 상자는 제법 무거웠다. 가까스로 떨어지기 직전에 상자를 받쳐낸 이세진은 그 무게감에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큰일 날 뻔했잖아, 이거. 배세진은 무너지는 소리와 등 뒤의 목소리에 귀까지 꺼내며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으악! 또 귀 튀어나왔어! 평소의 저였다면 튀어나온 귀부터 가리려 들었겠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아, 응. 도와줘서 고마워. 너는 괜찮아?”


괜히 선반 위에 있는 상자를 꺼내 보겠다고 나섰다가 이세진한테 피해를 준 것 같아 미안해진 배세진이 안절부절못하며 상자를 든 이세진의 손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밑으로 떨어진 상자를 급하게 손으로 받치느라 살짝 긁힌 것 같은데. 나한테 지금 밴드가 있던가….


이세진 손에 난 상처에 온 신경이 쏠린 배세진은, 머리 위로 쫑긋 솟은 자기 귀를 다시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이세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저 귀에는 뭐, 감각이 없나? 급기야 이세진은 그런 의심을 하는 단계에 다다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밀이 밝혀지는 게 싫다면서, 튀어나올 때마다 가리는 일이 이렇게까지 뒷전일 수 있는 건가. 이세진은 어떻게 하면 기분 안 나쁘게 햄스터 귀가 튀어나왔다는 걸 알려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상자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배세진이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손 줘봐.”

“손이요?”


이세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모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긁힌 자국이 있었다. 배세진은 그 상처에 직접 밴드를 붙여 주었다. 밴드를 붙이는 데 집중한 작은 머리통을, 그리고 그 위에서 움직이는 조막만 한 귀를 이세진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작은 상처보다야 당신의 비밀을 감추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좋은 사람이네, 좀 호구 같긴 하지만. 이세진의 안에서 배세진의 평가가 애매하게 상향 조정되었다.


“고마워요, 형. 근데 그… 귀는, 괜찮은 거예요?”


이세진의 말에 자기 귀를 뒤늦게 인지한 배세진이 난감한 얼굴을 하며 두 손으로 귀를 가려냈다. 아무리 비밀을 들켰다고는 하지만, 어째 얘 앞에선 항상 내 귀를 내보이고 마네. …어쩐지, 부끄러워.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자기 귀를 내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배세진이 붉게 달아오른 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내, 내가 원래 밖에서는 절대 안 이러는데…! 이상하게 조절이 잘 안돼서….”


‘네 앞에서’라는 말은 일부러 쏙 빼고 말했다. 괜히 신경 쓰게 하기는 싫었으니까. 그리고, 이세진 앞에서만 유난히 컨트롤이 잘 안되는 자신의 이상행동도 별로 인정하기 싫었다. …오늘따라 또 귀는 왜 이렇게 안 숨겨지는지. 아까부터 계속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귀를 숨기는 데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상자 떨어질 때 너무 놀라기라도 한 걸까. 좀처럼 심장 박동이 가라앉질 않네. 이게 진정돼야 귀를 숨기든 말든 할 텐데…!


이세진은 혼자 끙끙대는 배세진을 보고 그의 상태를 대충 눈치챘다. …뭔가 잘못돼서 나오는 것도 넣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네. 어쩐지 오늘따라 모자를 쓰고 나오고 싶더라니, 이러려고 그랬나. 이쯤 되면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이세진은 제 모자를 벗어 건넸다.


“일단 이거 쓰세요, 형. 혹시 당장 누가 문 열고 들어올 수도 있잖아요.”

“…고마워, 어쩐지 너한텐 고마울 일만 자꾸 생기네.”

“그럼 이건 그냥 밴드의 답례인 셈 치죠, 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물론 그 밴드도 따지자면 배세진을 도우다가 필요하게 된 거였지만, 이세진은 깔끔하게 그 사실을 무시했다. 그는 이제 평가가 상향 조정된 배세진에게 그 정도의 호의는 베풀 수 있었다. 그러나 배세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꺼냈다.


“밴드를 답례로 하기엔 너무 소박하지! 괜찮으면 내가 밥 사줘도 될까? 시간은 너 편할 때 내가 맞출게.”


누군가에게 자의로 밥을 사겠다고 한 것도, 그렇게나 싫어하던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의도치 않게 들키게 된 이세진이란 사실이 제일 놀랍긴 하지만. 몇 번 지켜본 결과, 이세진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제 비밀을 알고도 모른 척 입을 다물어 주는 데다, 매번 귀가 튀어나올 때마다 저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떨려왔다.


…얘는 원래도 이렇게 주위 사람을 잘 챙기나? 하긴. 그러니까 항상 인파 속에 파묻혀 있는 거겠지. 나랑은 정말 거리가 멀구나. …뭐, 애당초 인간과 수인이라는 사실부터가 나랑 저 녀석의 제일 큰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인간에 대한 내 편견은 한풀 꺾인 것 같네. 어디까지나 이세진 한정이긴 하지만.


배세진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세진 역시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뭐, 밥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은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것도 이상할 터였다. 게다가 저렇게 주먹까지 불끈 쥐며 말한다면 더욱 거절하기가 난처하지 않은가. 이세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럼? 설마 학식 사주실 생각은 아니죠?”

“당연하지!”


배세진은 이세진의 승낙에 기가 산 듯, 두 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웃었다. 아. 그 모션에서 얼마 전 드렁큰 햄스터의 행동을 겹쳐 본 이세진이 티 나지 않게 내려놓은 박스로 눈을 돌렸다. 조금만 더 떠올리면 실례다, 이건.


“어, 형. 잉크가 이 박스에 들어 있었네요. 그만 찾아도 되겠어요.”

“그러네. 그럼 좀 앉아서 기다릴까?”


비품실에는 버리기 아까워 가져다 놓은 낡은 소파나 라꾸라꾸 따위가 처박혀 있었다. 대충 먼지를 털어내고 나란히 앉아 기다리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휴대폰도 없으니 할 것도 없고… 대화라도 나눠 볼까, 흘끗 쳐다본 배세진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태평도 하셔라.


경계가 완전히 풀린 배세진을, 할 것이 없는 이세진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가 작아서 늘 사람을 올려다보는 탓일까, 좀 째려보는 듯 날카롭던 인상도 잘 때는 한껏 순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세진은 좀 용기가 났다. 그러니까, 오늘 저 모자를 돌려받을 수 있을지 확인할 용기 말이다. 온종일 모자를 쓰고 있느라 머리가 좀 눌렸을 텐데, 모자를 안 쓰고 집까지 가기엔 아무래도 그게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설마 아직도 햄스터 귀가 남아 있나? 이세진은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 가며 모자 아래를 엿보기 위해 애썼다. 모자를 썼으니 당연히 잘 보이지가 않아서, 모자챙을 피해 슬쩍 그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민 순간이었다.


“세진아, 너 여기 있어?”


쾅쾅, 요란하게 그들을 찾는 소리가 울린다. 기다리던 소리였지만 이세진은 도저히 그것을 반길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배세진이 고개를 휙 돌리면서, 스치듯,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 접촉 사고가 발생한 탓이다. 화등잔만 하게 커진 배세진의 눈을 보며, 이세진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 씨발. 그냥 밥 안 먹겠다고 할걸.


배세진은 그냥 얼이 빠졌다. 그는 그저 휘몰아치는 과제 늪에 빠져 밤새 리포트를 쓴 탓에 깜빡 졸았을 뿐이고,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 깼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자기 입술 위에 이세진의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음을 인지한 배세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이건… 실수…인 거지? 정적이 돌았다. 밖에서는 연신 자신들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둘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스치듯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이지만, 그 생경한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귀, 귀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아. 어떡해. 이세진이 건네준 모자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이세진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부름에 대답했다.


“네! 저 여기 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선배.”


이세진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잠겨있던 비품실 문을 열었고, 드디어 갇혀 있던 곳에서 탈출하게 된 둘이지만, 의도치 않은 입맞춤 덕에 어쩐지 묘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큰일 났다. 이세진한테 괜히 밥 산다고 했나.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잡은 식사 약속을 똑같이 후회하게 된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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