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홍석, 내 벨트 못봤어?"

"아, 벨트요. 잠깐만요..."


홍석이 곧 안방 서랍을 뒤져 벨트를 찾아내었다. 회택에게 직접 벨트를 매 주고 싶어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댔지만, 회택은 무심한 손길로 홍석의 손을 밀어내고 벨트를 채갔다. 홍석은 애써 웃으며 민망하게 내밀어진 손을 거두었다. 그들은 이제 결혼한 지 1년쯤 되어가는 신혼부부였으나, 다른 집 신혼부부들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오늘 중요한 일 있으세요? 정장을 다 입으시고."

"아, 미팅이 있어서. 근데 너..."

"네?"


회택이 급작스럽게 홍석의 목덜미 쪽에 얼굴을 묻었다. 은은한 박하향과 함께 훅 가까이 다가온 회택에 홍석은 석고상마냥 굳어 경직된 채 침만 꼴깍 삼켜내었다. 홍석의 목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가 싶던 회택은 이내 금방 홍석에게서 떨어졌다.


"꽃 냄새 심하게 난다. 히트 올 때 된거 아니야?"

"아..., 시기상으로 아마 그럴거에요."

"약 잘 챙겨먹어. 나 간다."

"네, 다녀오세요."


회택은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지만 무심했다. 그 놈의 약 잘 챙겨먹으라는 소리. 홍석은 얼마 전에 회택의 어머니와 통화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아가. 뭐 좋은 소식은 없고? 네, 어머니. 아직이요... 너네는 결혼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이니? 노력은 하고 있어?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홍석은 억지로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뭐, 노력은 하고 있냐고? 노력은 개뿔. 댁네 아드님께서 히트싸이클 약을 워낙 잘 챙겨주셔서 말이죠. 본인도 꼬박꼬박 러트 약을 잘 챙겨먹구요. 무슨 일이 생길 일이 없네요.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아내느라 혼이 났다.


회택이 떠나고 난 후, 홍석은 넓고 적막한 집안을 한 번 쭉 둘러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또 혼자가 될 시간이었다. 부엌으로 가서 핸드드립 커피를 맛있게 내리고, 서재에서 책 한 권을 뽑은 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책은 홍석의 좋은 벗이었다. 한 장씩 넘기며 읽어내려가다 보면 어느 새 시간이 훅 지나가 있는 것이 좋았다.


책을 한 권 다 읽은 후, 홍석은 인스턴트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 회택이 당부한 대로 약을 챙겨먹었다. 그는 요새 들어 끼니를 대충 때우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원래 먹는 것을 좋아했으나, 혼자 먹으려니 쓸쓸한 기분이 들어 식사시간을 기피하게 된 것이었다. 홍석은 최근 집안일도 가사도우미를 쓰지 않고 직접 하기 시작했다. 바쁘게 살면 외로움을 덜 느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혼자 하다보면 곧 어둠이 찾아온다. 회택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늦어. 먼저 자.' 무심함이 뚝뚝 묻어나는 짧은 메시지였으나, 홍석은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서 늦을 때면 이렇게 꼭 메시지를 남겨주는 회택이 고마웠다. 오늘 있던 미팅은 잘 마쳤을까. 밥은 챙겨 먹었을까.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괜히 물어보면 회택을 방해하게 될 까봐 홍석은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아내었다.


회택은 직업 특성상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가수 겸 작곡가였는데, 앨범을 내면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바빴고 평소에는 곡 작업을 하느라 작업실에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홍석도 그런 그를 이해하기에 안그래도 힘들고 피곤할 회택에게 괜히 투정부리고 싶지 않았다.


홍석은 오늘처럼 혼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날에는 꼭 회택의 노래를 틀어놓았다. 오래 된 습관이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을 감을때면, 혼자 있는데도 꼭 회택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홍석은 꿈에서 오래 전 회택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작년 봄이었다. 홍석은 상견례가 잡혀있던 당일에 별안간 자신의 결혼상대를 부모로부터 통보받았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예상해왔던 일이었고, 그저 그 말을 듣고는 때가 됐구나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상대는 어느 대형 레코드 사 회장의 맏아들이라던가. 홍석의 아버지는 평소 음악가들을 통칭 '딴따라'라고 부르며 얕잡아보던 사람이었으므로, 홍석은 그 부분이 의외여서 조금 놀라긴했다. 제 아들을 딴따라한테 장가 보낼 결심을 한 것을 보니 꽤나 이 결혼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홍석은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인 편이 낫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보,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요? 어차피 저 녀석 처치 곤란이었는데 데려간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잘된거지." 

"....애가 듣겠어요. 그래도 오메가인 것만 빼면... 정말 모자란 것 없이 완벽한 아이잖아요." 


본인들 딴에는 조용히 말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대화 내용은 홍석에게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더 이상 저런 말들에 상처 받을 나이는 지났다. 오메가니 뭐니, 처치 곤란이니 뭐니 말해도 결국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홍석의 결혼은 꼭 성사되어야 했고, 홍석이 없으면 곤란한 쪽이 그들의 쪽이었다. 슬쩍 부모가 아들의 쪽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자, 홍석은 괜히 노래가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시선은 금세 거두어졌다. 


"그냥 소문이... 좀 그래요. 저 아이 남편 될 사람이요." 

"... 어떤 소문이 났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 결혼은 진행될 거에요. 더 이상 이 일로 말 꺼내지 마세요." 

"네, 알겠어요..." 


차라리 듣지 말 걸 하고 후회하면서도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했다. 대화의 주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지만 홍석은 역겨운 기분이 들어 더 이상 둘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대충 음원사이트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노래 하나를 튼 후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가 들렸다. 차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눈치 없이 맑기만 하다. 나는 이렇게나 우울한데. 오늘 비라도 마구 내렸으면 좋았을걸. 홍석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눈을 감았다. 


고급 레스토랑의 룸을 빌려 진행된 이 만남은 예상대로 위선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 위선적인 사람들에는 홍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맞장구를 쳤다. 행여 실수라도 할까봐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좋게 말하면 상견례 자리. 하지만 다들 본인의 이익을 하나라도 더 챙기느라 여력이 없었다. 결혼의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었기에 다행히도 홍석이 말을 해야하는 상황은 별로 없었다. 


홍석은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부모를 보다가 시선을 돌리다가 맞은 편에 앉은 회택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내 억지로 웃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잘보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 자리에서 혼자 둥 떨어져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부모가 슬쩍 눈치를 주는 듯 했으나 회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며 음식을 깨작거리는 모습에 홍석은 자꾸만 회택에게 눈이 갔다. 


"회택 군은 음식이 입에 안맞나요?" 

"... 아뇨, 그냥 입맛이 없어서요." 


회택이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석의 아버지가 낸 소리였다. 분위기가 조금 얼어붙은 것이 느껴졌다. 다들 헛기침을 내며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홍석도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였고, 회택은 그저 앞에 놓여진 물컵을 들어 본인의 목을 축일 뿐이었다. 


"회택아, 음식을 남기면 못 써." 

".... 저만 남긴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모두의 시선이 식탁 위의 접시들로 향했다. 음식들은 대부분 남겨져 있었다.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다들 좀체 먹지 않은 탓이었다. 접시를 거의 비운 사람은 홍석 뿐이었다. 홍석은 제 쪽으로 관심이 몰리자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평소대로 먹었나 싶었나 싶어서 후회하던 찰나, 회택이 홍석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홍석 씨는 잘 드시네요." 

"아, 네... 제가 초밥을 좋아해서요." 

"제 것도 더 드실래요?" 


회택이 제 앞에 놓여진 접시를 홍석 쪽으로 밀었다. 아, 연어초밥이다. 홍석은 솔직히 더 먹고싶었으나 눈치가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더 먹고 싶다고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홍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뜸을 들이자, 회택이 젓가락을 들어 초밥을 직접 홍석의 접시로 옮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어머, 회택 군이 벌써부터 홍석이를 챙기네요. 홍석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분위기는 언제 냉각됐었냐는 듯 다시 풀렸고 이야기의 주제는 곧 다시 사업 쪽으로 넘어갔다. 홍석은 연어초밥 하나를 입에 넣고 회택을 쳐다보았다. 피곤한 얼굴로 홍석을 보고 있던 회택과 눈이 마주쳤다. 홍석은 흠칫, 하고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 척 했다.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빤히 쳐다보아도 회택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홍석이 먹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먹다가 체하겠네. 남 먹는 걸 왜 저렇게 빤히 봐? 홍석은 낯뜨거운 시선을 피해 접시에 코를 박은 채로 식사를 계속했다. 부끄러움에 귀 끝이 달아올랐으나 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홍석은 집에 가자마자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들을 몽땅 찾아보았다. 말할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홍석은 회택의 노래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에 들었다. 그가 잠든 후에도 핸드폰 스피커에서는 계속해서 회택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랫소리는 조금씩 희미해져갔고 이윽고 완전히 소리가 멎었을 때, 홍석은 꿈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이 되었다는 걸 자각했다.






"...꿈이었네."


홍석이 막 잠에서 깨어나 푹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조금 그리운 듯한 느낌에 쉽사리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꿈에서의 여운에 잦아들었다.


간밤에 회택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밤새 틀어놓았던 노래가 더 이상 재생되지 않고 끊겨있었다. 언제 왔다 간 거지. 홍석이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대강 손으로 부비적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전 날 회택이 입었던 수트가 빨래통에 들어있었다. 아마 씻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들린 것 같았다.


어젯밤 푹 잠에 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잠시나마 깨서 얼굴을 봤다면 좋았을텐데. 홍석은 아쉬운 마음에 괜히 거실에 걸려있는 결혼 사진만 만지작거렸다. 홍석은 웃고있지만 회택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참으로 이질적인 느낌의 결혼 사진. 그럼에도 홍석은 그 사진을 좋아했다.


아침은 시리얼로 간단히 해결하고, 익숙하게 서재로 가서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워커홀릭이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회택 때문에 외롭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평화롭다. 오후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집으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초인종 소리였다. 집에 손님이 오는 경우가 정말 극히 드물었기에 홍석은 떨리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누구세요?" 

ー 저, 회택이 친구인데요. 뭐 좀 가지러 왔어요. 


친구? 처음 보는 여성은 본인을 그렇게 소개했다. 홍석은 일단 문을 열었다. 그녀는 꽤나 미인이었다. TV의 어느 방송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홍석이 몸을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도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홍석에게 인사를 해왔다.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이 코를 찔렀다. 오메가인가? 아, 아니다. 이 여자는 베타다. 그녀에게서는 인위적인 향이 났다. 향수를 뿌린 모양이었다. 


"혹시 검은색 USB 좀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어제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 있을거라던데." 

"네, 잠시만요..." 


홍석은 빨래통에 든 수트 바지에서 쉽게 USB를 찾아내었다. 주머니에 넣은 것을 깜빡하고 꺼내지 않은 듯 했다. 그녀는 홍석이 내미는 USB를 받아들고, 그것을 가방 깊숙히에 잘 넣어두었다. 


"제가 작업실에 가져다 드려도 됐는데." 

"어머, 홍석씨가 직접이요?" 

"네. 집에서 많이 멀지 않아서..." 

"그게 아니라, 홍석씨는 오메가잖아요." 


그녀가 대놓고 비웃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홍석은 당혹스러움에 네? 하고 한 번 되물었다. 억지로 집에 오메가를 들인 것도 짜증날텐데, 그 오메가가 자기 작업실을 드나드는 꼴을 보고 싶겠어요? 그렇게 모르겠다는 얼굴 하지 마세요. 결혼 전에도 회택이가 오메가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을 거 아녜요. 소문으로도 쫙 퍼졌는데. 집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잖아요. 


"회택이는... 베타 여성이랑 결혼하길 원했어요. 홍석씨 같은 오메가가 아니라."


그녀는 쐐기라도 박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홍석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하다, 간신히 벽을 짚어 버티고 섰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에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남의 입을 통해서 회택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은 처음이다. 홍석은 동요했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제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고 그저 소문일 뿐이다. 저 사람이 회택의 얼만큼 가까운 지인인지도 홍석은 잘 알지 못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안함에 손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저를 밀어내던 회택을 떠올렸다. 만일 그 모든 행동들이 내가 오메가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면? 홍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단지 오메가로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받아왔던 수많은 차별과 혐오들. 적어도 회택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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