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써놓는 발렌타인 데이 연성.

*에미야 가의 오늘의 밥상 시공

*단기알바하는 랜서와 린을 위해 초콜릿을 만드려던 아처가 보고 싶어서.

*창궁 사이에는 무수한 역사가 있었다고 합시다.

*놀랍게도 전체연령가를 준수합니다.



*

가슴 언저리 높이에 커다란 철사로 만든 장식품을 고정하고, 아침 일찍부터 일일이 숨을 불어넣어 부풀린 하트 모양 풍선을 매단다. 둥글게 모양을 잡은 장식품 중간에 해당하는 풍선 앞에는 굵은 유성펜으로 한 글자씩 가타카나를 쓴 네모난 종이를 붙이면 얼추 준비가 끝난다. 오랫동안 숙이고 있어서 약간 뻐근한 기분이 드는 허리에 손을 붙이고 기지개를 켰다.

랜서는 하루 동안 신세 지게 된 일터를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생소한 일본의 이벤트를 기념하기 때문에 급하게 아르바이트생을 구한 가게였다. 다소 투박한 간판에는 ‘세계 과자 전문점’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랜서가 써넣은 종이에도 ‘2월 대 히트 이벤트’라는 글자가 보인다. 간판에 비해서 허술한 글자였지만, 어차피 사장이 행사 풍선 주문을 까먹은 바람에 당일에 급하게 준비하는 것이기에 그 이상의 퀄리티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가 손수 제작한 허술한 장식이 삐뚤어지지 않게 잘 고정하며, 랜서는 본격적으로 홍보를 하기 위해 사장이 나눠준 고깔 모양의 확성기를 입 앞으로 들어 올렸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용 초콜릿, 진심 초콜릿에 우정 초콜릿 1+1 행사합니다! 초콜릿 관련 전 품목 최대 50% 세일!”

그가 목소리 높이기 전부터, 장식품을 설치하던 그의 외모에 홀려 가게 앞에서 서성이던 손님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행사에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랜서는 그들을 유려하게 가게 안으로 흘려보내거나, 그의 옆에 진열해 놓은 상품을 추천하는 등, 사람이 많아도 능숙하게 응대한다.

그 모습을 멀리서, 쓸데없이 좋은 눈으로 확인한 아처는 가게로 걷던 발을 멈췄다. 가려던 가게에 재수 없게 랜서가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은 그들이 이 거리에서 지내는 동안 수십 번 목격해왔지만, 하필 밸런타인데이에 그런 행사에 민감한 가게에서 일하고 있을 것은 뭐람.

평소 린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서 초콜릿을 선물해주려던 아처는 머릿속으로 미리 디자인한 아기자기한 캐릭터 초콜릿이 빠르게 허물어지는 미래를 예감했다. 랜서가 일하는 가게가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든 초콜릿 제품을 썼기에 그곳에서 사려고 했건만. 창병 앞에서 괜한 오해를 사면서까지 초콜릿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100엔 숍에서 싸게 구매한 초콜릿 틀이나 주걱이 든 장바구니를 고쳐 들고, 등을 돌렸다. 저 가게가 아니라도 오늘은 어디를 가든 초콜릿의 재고가 남을 것이다. 그가 만들 초콜릿의 품질이 떨어지는 건 아쉽지만, 그는 어떤 재료로 만들든 완벽하게 맛있는 초콜릿을 완성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이미 해가 중천에 뜬 후에 초콜릿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모든 게 완벽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히 평소에 부리지 않는 게으름이었지만, 괜히 새벽부터 초콜릿을 준비해서 그 녀석과 모양이나 맛이 겹치는 일은 사양이다.

아처가 예상하지 못한 점은, 서번트인 남자가 저 멀리 후유키 시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의 아처를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랜서는 이미 저 멀리, 검고 하얀 실루엣에서 아처를 알아봤고, 그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걸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저렇게 고민해도 남자는 처음 세웠던 계획을 웬만해서는 바꾸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에미야 시로를 대할 때도 질색하는 한편, 끝까지 하던 일을 고수하는 놈인데, 고작 저 하나로 들리려던 가게를 바꿀 리가. 그는 랜서가 생선 가게 알바를 할 때도 인상을 찌푸리고 그 귀여운 입을 오물거리면서, 꾸역꾸역 생선을 사 갔다. 그래서 랜서는 유들대며, 예상대로 점점 가까워져 오는 궁병의 신변을 모른 척 기다렸다.

“…초콜릿을 내놔라, 랜서.”

“말이 짧은데요, 손님?”

“손님에게 말대꾸라니 알바생이 건방지군.”

“네 놈이 보통 손님이냐. 그래서 높임말도 써줬잖냐.”

“그거 감사하군. 그러니 어서 빨리 초콜릿이나 내놔라.”

저놈은 분명 홍보를 위해 단기 알바로 고용된 랜서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가게 안에 들어가 직접 초콜릿을 선별하는 게 빠르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구태여 랜서에게 제품을 요구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분 나쁜 심술이랄까. 랜서는 그런 아처의 속내를 속속히 알고 있었지만, 평화로운 거리에서 무력행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기에 기분 나쁜 티만을 팍팍 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거나 대충 골라 나오면 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궁병은 트집을 잡아 몇십 분이고 장알거리겠지. 랜서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꼴 때면 드물게 생기 넘치는 아처의 모습이 싫지는 않다만, 그 상대가 자신일 경우에는 창을 휘두르려고 꼼지락거리는 손을 자제하는 게 힘들어진다. 이 거리에서 필요 없는 투기 치솟는다. 다행히 랜서는 창을 들 때와 내려놓을 때를 정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그는 아처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친절한 알바생의 서비스 정신으로 만든 미소를 지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사장이 직접 가장 품질이 좋다는 초콜릿을 가져온다. 저 아처니까 선물용이 아닌 조리용 초콜릿을 찾은 거겠지.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 아처의 성향 정도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만들어주려는 사람은 역시 그 아가씨인가? 그렇다면 한 사람 정도 덤이 따라붙어도 상관없겠지.

영령으로서도, 평상시 두 사람의 관계로서도 절대로 이상한 결론을 내린 랜서는 적당한 크기의 밀크 초콜릿과 화이트 초콜릿을 각각 하나씩 들고 아처 앞에 섰다.

“…양이 많은 거 같은데.”

“적당히 남은 거로 내 몫이라도 만들어달라고. 그 값은 치를 테니까.”

“드디어 미친 건가? 이해할 수가 없군. 허구한 날 알바만 해대더니 기강이 해이해진 모양이지. 아무리 평화롭다고 해도 네 놈이 랜서고, 내가 아처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네 놈은 뭐, 아니, 으아악! 진짜 그냥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값도 제대로 치룬 다고 했잖아.”

“나는 네 놈의 전용 주방장이 아니다. 애초에 네 놈에게 이런 초콜릿은 필요 없을 텐데? 값싼 동정을 요구하지 마라. 알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오늘 상대방에게 주는 초콜릿은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럼 지금 네가 초콜릿을 만들어 주는 사람은 네게 소중하다는 거겠네.”

“그렇지. 린은 그 마음을 받기에 충분한 여성이다. 네 놈이 아니라.”

그 아가씨라면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랜서는 자신이 소외당하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아처가 랜서에게 초콜릿을 주지 않는 건 당연한데, 그게 불만이다. 

저 무뚝뚝하게 섹시한 궁병은 랜서와 수영장도 가고, 오므라이스도 만들었다. 그 워터 파크에서 처음 본 반소매 셔츠는 꽤 좋았다. 그도 레스토랑이나 카페 아르바이트를 할 때, 언제나 입는 셔츠였지만, 궁병의 셔츠는 검은색이어서 그런지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주름이 눈길을 끌었다. 좀 더 입는 사람의 몸매를 부각하는 효과가 있었지. 가끔 바람에 말려 올라가 보이는 살결은 의외로 부드러워 보이기도 했다.

오므라이스를 만들 때는 어땠던가. 빌려준 앞치마는 미묘하게 끈이 짧아서 바싹 당겨진 허리의 천이 노골적으로 선을 드러냈지. 그 조임은 대단했다. 허리가 조이니까 괜히 가슴이 부각되어서…

랜서는 아처를 상대로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새어 나가는 생각을 다잡았다. 그야 아처가 생각보다 많이 랜서가 동할 만큼 섹시하긴 하지만, 이곳은 그런 걸 생각할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처는 랜서가 가져온 상당량의 초콜릿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랜서가 절반을 부담한다는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딱 원가를 지급했으며, 추가로 데코를 할 수 있는 작은 젤리와 별사탕을 사 갔다.



*

2월 대 히트 이벤트라는 말이 과언은 아니었나 보다. 가게는 뒤늦게 이벤트 상품을 내놓았어도, 하루 종일 들락날락한 손님들 덕을 받아 성황리에 완판할 수 있었다. 사장은 기분 좋게 원래 주기로 한 시급에 보너스를 얹어주었고,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과자들도 몇 개 챙겨주었다.

실이 거의 없다 싶은 결과물이었다. 랜서는 초콜릿 완판을 한 점장보다 더 기분 좋게 맥주 캔 하나를 사 왔다.

딱! 한 사람분의 비좁은 텐트 안에서 랜서의 심정을 대신하는 통쾌한 소리가 울렸다. 이거를 마시려고 내가 일을 하는 거지! 윗입술에 작게 묻어난 거품 속에 랜서는 낮에 만났던 검은색 셔츠의 남성에 대해 완벽히 흘려보냈다. 애당초 그 아처에게서 초콜릿을 받는다는 호사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순간 충동에 취해서 저지른 거뿐. 그의 억지 때문에 아처가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니 속은 꾸물거리며, 불편함을 호소했다. 그런 귀찮은 생물을 직시하는 얼굴이 보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좀 상냥하게 대해야 했을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그와 아처가 사이좋은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아서 그만두었다. 이건 생리적인 문제다. 세상은 넓으니까 숙적과 연인이 되는 녀석들도 있겠지. 허나, 그 속 편한 관계는 랜서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랜서와 아처는 가끔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부둣가에서 종일 낚시를 한다. 마땅찮은 낚시터에서 드물게 튼실한 전갱이가 잡히면, 그 자리에서 제법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는다. 그 평화에 희미한 유대감이 자리한 걸지도. 어쩌면 랜서는 전갱이 요리에 집중하는 다물린 입술을 제게 끌어당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토오사카 저택. 지나치게 웅장한 정원의 풀숲에 숨어서, 무뚝뚝한 관리인이 서번트여서 필요 없는 챙 넓은 밀짚모자를 들추는 일을 원한 걸까. 꼬맹이 시절을 부정하는 녀석은 꼬마보다 더 주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니까, 과일을 담은 상자를 배달하던 도중에 랜서에게 발견되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편하게 고개를 뒤로 젖혔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처는 절대 그런 녀석이 아니다. 그는 랜서의 접촉을 허용하지 않았다. 여름에서 겨울까지, 일 년을 끈질기게 이어진 구애에도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라도 이 거리에서 소멸되어 좌에 기록으로만 남을 추억을 쌓기 싫다는, 시시한 이유는 아니다. 자연스러운 이끌림이라고, 랜서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아니다.

랜서를 싫어하지 않았다. 안온에 길들여진 세계를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아직 그가 아처에게 아무 신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신호가 반드시 아처에게 닿았다고 확정 지을 수 없다. 신호를 내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여건도 내어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이든 관계는 어렵다. 호쾌한 켈트의 전사라도 사람의 마음은 쉽게 얻지 못한다.

랜서는 확실히, 비교하자면, 한 트랙 앞선 주자였다. 뒤에 오는 녀석들보다야 상황이 나아서 열심히 달렸다. 그래도 1등에게는 한 발자국이 미치지 못해서 초조하다.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 앞서거나 골에 들어가는 일은 원치 않다. 2등이라는 자리에는 1등만 잡을 수 있다면 승부의 결과 따위 생각하지 않는 변질자들밖에 없다.

그놈은 왜 랜서의 1등으로 있어서 마음을 뒤숭숭하게 들쑤시는지 모르겠다. 랜서는 꿀꺽 목울대를 연신 움직여 맥주를 삼켰다. 안주 없이 마시는 술은 속이 쓰려온다.

“한겨울의 텐트라니.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나?”

“서번트라서 얼어 죽을 걱정은 없거든…… 아처?”

“무슨 귀신 보는 눈이냐, 랜서.”

텐트를 열지도 않아 안이 보이지도 않으면서 눈도 좋다. 랜서는 다 마신 맥주를 구겨 아직 새 술이 남은 봉지 안에 황급히 숨겼다.

올 줄 몰랐다. 어째서 온 거냐. 입술을 짓이기며 흘린 말은 텐트 밖까지 나갔지만, 상대방에게서 반응은 없다. 차라리 이대로 뒷걸음질 치며 다시 돌아가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방금까지 따끈따끈하게 아처를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린의 초콜릿을 만들었는데.”

“어, 어어. 아가씨는 마음에 들어 했어?”

“그 녀석이 하지 않을 나비 모양 플레이트를 한입 크기 초콜릿에 전부 올려뒀다. 린의 기품에 어울리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초콜릿을 만들었지.”

“좋아했겠네. 네가 만들었으니 맛도 일품이었을 거 아니야.”

“당연하다.”

“그럼 된 거 아니야?”

제발 말 좀 똑바로 해라! 뭐가, ‘된 거 아니야?’라는 거야! 랜서는 오늘따라 방정맞게 제멋대로 말을 하는 입을 룬마술로 봉하고 싶었다. 확실히 아처가 매일같이 구박하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다.

초콜릿을 받고 싶은 거잖냐. 딱 보니까 그에게 초콜릿을 주러 온 거 같은데!

텐트는 서번트인 랜서가 주인이기에, 따로 겨울 대비를 하지 않아 매우 기본적이고, 얇은 천 하나로 이루어진 형태였다. 중고가라면 5천엔 이하에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태를 보아하니 3천엔 정도로 샀을 법한 작고 후진 집이었다. 밖에서도 안에 움직임이 매우 잘 보이는.

랜서가 안에서 텐트를 열려고 하는 모습은 매우 잘 보였다. 그는 텐트의 지퍼를 내리려고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가까이 오지 말고, 손을 움직이지 말고 들어라.”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 개가 아니지. 개라는 호칭을 싫어해도, 그는 맹견이라는 별칭을 지닌 서번트였다. 주인님에게 개라고 불리는 마당에 말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는 동작이었다. 밖에서 안이 잘 보이는 이상으로 안에서 밖은 훤히 보였다. 아처의 품에서 손바닥보다 약간 큰 박스가 나오는 걸 랜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확인 가능했다는 말이다.

“린에게 줄 초콜릿을 만드는 와중에 네 놈의 부탁을 잊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걸 줄 의무도 없는 사람에게 노동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겠지. 밤중에 두근거리며 텐트 안을 채우던 심장 소리가 빠르게 줄어든다. 괜한 기대를 했다. 그런 녀석이 아닌데도.

텐트를 내리려던 손을 떨궜다. 수그린 몸을 일으켜 적당히 앉았다. 더 들어봤자 그의 기분만 상할 거 같지만, 대체 무슨 말을 더하려는지 확인만 하는 거야. 별 기대는 안 하지. 내가 저 너구리한테 속은 날이 몇인데. 개는 개라도 말귀 못 알아듣는 멍청한 개가 되면 안 되잖아.

“원래 린의 초콜릿은 커다란 나비를 모티브로 화려한 보석 결정처럼 데코를 할 예정이었다. 계획대로 됐으면 네가 준 초콜릿조차 부족했을 테지.”

“그 말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네.”

“맞다. 오히려 다행인 일이지.”

뭐가 다행인데? 라는 말을 안 할 정도의 정신머리는 붙어 있었다. 랜서는 숨을 참고 주먹을 쥐었다. 그와 아처 사이에는 손짓 하나로 찢어질 얇은 천밖에 없다. 반대쪽 천에서 긴장한 뜨거운 숨이 불어왔다.

이게 뭐라고. 아처의 손은 여전히 상자를 놓지 않고 있다.

“초콜릿이 많이 남았다.”

“어.”

“너무 많이 남았는데.”

“내가 많이 챙겨 넣기도 했지.”

“……한 마디를 줄여라, 랜서.”

너도 잔소리는 그만하지. 나는 네가 왜 왔는지 충분히 눈치챘는데. 언제까지 튕길 거야? 상대방의 입은 다물어졌다. 대답은 뭐, 직접 보면서 하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처는 도망가지 않았고, 그는 초콜릿을 손에서 놓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더라. 한밤중에 주변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조용하고 은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아채는 이는 한 명도 없겠지. 딱 좋은 상황이다. 

랜서는 그들 사이를 막는 천을 치웠다. 앞에 선 이는 하얀 머리카락을 내려뜨리고, 여전히 칠흑의 셔츠를 입은 순한 남자. 주변이 어두워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이 상할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남자가 귀엽다고 느껴지는 건 사랑이지요. 랜서의 보잘것없는 신호를 알아들어서, 머뭇거리면서도 거부하지 못한 서번트입니다. 뛰던 걸음을 늦추다가는 3등에게 추월당할 거 같아서. 그래도 2등에게 잡히고는 싶어서. 작은 바통만을 다음 타자에게 넘기는 듯 쥐고 있네요.

수줍은 1등에게 손을 뻗었다. 아처는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랜서에게 이끌려 텐트 안으로 들어왔고, 초콜릿을 그의 품에 안겼다. 무사히 건네받은 신호에 대한 또 다른 신호에는 어떤 마음을 담으면 될까? 무엇이 됐든 2월 대히트 이벤트보다 중요할까? 무사히 초콜릿을 먹게 됐다는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추운 겨울밤이라는 날씨는 문제가 되지 못했다. 서번트는 추위에 큰 영향을 받는 몸이 아니었고, 텐트 안에 온도는 점점 올라갔으니. 키스할까? 한쪽의 질문에 다른 쪽은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입을 맞춘다. 손을 잡아 좀 더 깊이 끌어당긴다. 초콜릿은 잠시 저 구석으로 치워지고, 두 사람은 몸을 겹쳐 서로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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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랜서가 받은 초콜릿은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의 위스키 봉봉이었다고 한다.

느긋하게 쓰고 싶은 걸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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