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호나라는 패배했다. 황제는 자신이 아끼는 술사와 함께 도망가 행방이 묘연해지고, 반란군의 수장이자 묘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지훈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도성의 곳곳에는 호나라를 상징하는 황금색 여우가 그려진 깃발이 내려오고, 묘나라를 상징하는 은백색 토끼가 그려진 깃발이 올라갔다.


황제가 된 지훈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중앙집권체제였던 호나라의 체제를 지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지훈은 호나라의 강압적인 지배체제에 불만이 많던 지방 귀족들의 자율권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각 가문의 장손을 하나씩 착출했다. 각 가문들을 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아직 불안정한 나라를 하나로 규합하고 부족한 인재를 매꾸기 위해서였다. 개방적인 어린 황제는 옛호나라의 인재도 능력이 있다면 주저없이 채용하였다. 거대한 대륙은 묘의 깃발아래에 한데 뭉쳐져 연합국과 같은 모습을 갖췄다.

그리고 이미 대륙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다니엘은 대장군의 직함을 하사받고, 유서깊은 옛 묘나라 명문에 양자로 입적되어 강씨라는 성을 내려받았다. 서역인 혼혈에, 평민 출신인 다니엘에게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거기까지가, 성우가 아는 것의 다였다. 황궁을 떠난 성우는 따듯한 남부로 내려와 작고 아담한 산에 자리를 잡았다. 춥고 메마른 북부의 바위산과 달리 사시철철 소담한 들꽃들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지성의 바위산에 돌아갈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때문에 이미 성우의 위치가 한번 발각되어, 지성이 곤욕을 치렀을 게 뻔했다. 그래도 정많고 착한 지성은 성우를 받아주겠지만, 산에 남겨진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느라 바쁠 지성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곳도 썩 맘에 들었다. 심장이 반토막 나 허약해진 성우에게는 북부의 차가운 공기보다 따듯한 남쪽의 공기가 더 맞았다. 비교적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산에는 생기가 넘쳤다. 낡디 낡은 몸이 그 생기를 받아들일 수 없어도, 그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아직 어리고 미숙한 이 산의 지신도 다른 곳의 지신들보다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산속 깊숙이 비집고 들어온 자신을 처음 보자마자, 되바라진 어린 지신이 톡 쏘아 붙이던 때가 아직도 기억나, 성우가 혼자 웃음지었다.

새끼 수달처럼 작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하는 말마다 다 맹랑했다. 산속에 조용히 자리잡은 자신을 대뜸 찾아와 이렇게 약해빠진 용은 처음 본다고 신기해 하였다. 그런 지신이 귀여워 그저 웃기만 하는 성우에게 허파에 바람도 빠졌나봐, 하고 새침하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지신은 기꺼이 성우를 받아줬다. 지신들이 용을 싫어하는 이유는 용의 지나치게 강한 기운이 땅의 기운을 흐트러트리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절반만 남아, 지신의 표현대로 약해빠진 용인 성우에게는 이제 해당되지 않는 일이였다.


지신에게는 이름이 아직 없었다. 성우가 부르기 편하기 위해서, 마음대로 대휘.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처음엔 웃긴다~, 하고 코웃음을 치던 대휘도 나중엔 그 이름이 맘에 들었던지 대휘라고 부르는 성우의 부름에 순순히 대답했다. 


제법 까칠하던 대휘도, 덤덤하고 나긋한 성우가 점차 맘에 들었는지 찾아오는 횟수가 늘었다. 전쟁을 피했을 정도로 작고 조용한 산에는 사람이 드물어, 호기심많고 생기발랄한 대휘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대휘는 척 보아도 사연이 많아 보이는 성우에게 달라붙어 매일매일 조잘거렸다. 그럼 성우는 대휘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이따금 대휘가 묻는 세상과 인간들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평온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한때 전쟁터를 휩쓸고, 심장이 오르락 내리락하던 격정의 순간들을 보냈던 게 꿈결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꼬박 일년이 흘렀다. 

대휘에게 부탁해, 일부러 작은 산길을 하나 내었다. 혹시 다니엘이 찾아온다면 걸어오기 쉬우라고. 아침에 눈을 뜨면 성우의 일과는 그 길을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다니엘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휘만 길을 내는데 재미를 붙였는지, 아무도 밟아주지 않는 길에 하늘색, 붉은색, 노란색 꽃으로 색색이 장식을 했다. 

제 용도를 못하는 길을 바라보다 보면 여러 생각들이 성우의 머리속를 스쳐지나갔다. 혹시 다니엘이 아직 저를 못찾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제 자신이 지겨워져 좋은 인간여자를 만나 가버렸나. 그럼 가슴이 조금 쓰라려, 자유를 되찾은 심장이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았다.


오늘도 다니엘 대신 대휘만 그 길을 걸어와 쫑알쫑알 떠들다 갔다. 최근에는, 패망한 호나라 외척 잔당들이 산 아래 슬쩍 숨어들었다고 들었다. 그 중 어린 소년이 하나 있다는데, 대휘는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왜 그 아이가 맘에 드느냐?”


너그럽게 물어보는 성우에게 대휘가 얼굴을 팩 돌리고 쏴붙였다.


“맘에 드는게 아니라, 그냥 조금 신경쓰이는 것 뿐이야.”

“…그래, 왜 신경쓰이느냐.”

“그냥…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언제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대휘가 아이를 생각하는 지 표정이 들떴다.


“하지만, 진영이는 잘하는게 엄청 많거든. 거문고도 연주 할 줄알고, 목소리도 고와. 또 웃으면 얼마나 잘생겼다고.”


그 아이의 이름이 진영인가 보다. 설레임이 담긴 대휘의 조잘거림에 성우가 소소하게 웃었다. 한참을 진영에 대해서만 떠들던 대휘는 이제 진영을 볼 시간이 됐다며 매정하게 성우를 버리고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성우가 생각했다.


왜 저같은 존재들은 이렇게도 인간들에게 쉽게 홀리고 그 마음 한켠을 내주는 것일까. 

그 것은, 그들이 유한해서. 불처럼 타오르고 꽃처럼 스러져버리는 그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다니엘. 

성우 역시, 마음의 한켠에 둔 이의 이름을 되뇌였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날 찾고는 있니. 



대휘가 떠나고, 성우가 사람의 인영이 보이지 않는 길의 끝을 멍하니 바라봤다. 돌기둥처럼 그 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성우는 다니엘을 계속 기다렸다. 여전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중천에 떴던 해는 어느새 천천히 지고 붉은 노을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앉았다. 


성우가 포기하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아닌가보다, 성우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어째됬건 자신은 계속 기다릴 것이다. 일년이 가고, 십년이 가도…지긋히 오래 살아서 잘하는 것은 그것 뿐이니까.

그래도 시큰하게 눈물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써 눈물을 참아내고 성우가 지평선끝을 쳐다봤다. 붉은 빛이 내려앉은 지평선 너머로, 무언가 조금 움직였다.


산짐승인가? 성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끝을 바라봤다. 저 너머, 길쭉한 인영하나가 보였다. 



성우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다니엘이었다.



푸른꽃, 흰 꽃, 붉은 꽃. 꽃들이 가득한 꽃길 사이로 다니엘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가장 꽃처럼 아름다운 다니엘이 자신에게 오고 있었다.


붉고 둔탁한 노을의 빛을 받아, 다니엘의 흰 얼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주변을 두리번 대던 다니엘이 색색의 꽃밭속에 검은 점처럼 덩그라니 서 있는 성우를 발견했다. 성우를 본 다니엘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성우 역시 다니엘을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서로의 얼굴이 조금씩 보였다. 성우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니엘이 점점 성우에게 가까이 왔다.


마침내 얼굴을 마주했다. 바로 지척에 서로를 앞에 두고 다니엘과 성우가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에 마주보는 다니엘의 눈빛은 전보다 더 깊고 진했다. 유리구슬처럼 맑디 맑은 눈동자에 성우의 모습만이 새까맣게 담겼다.


“성우.”


다니엘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 눈가를 적시려고했다.


“...생각보다 오래걸렸네.”

"그렇게 도망쳐버렸으면서, 그런 말 하기야.”


다니엘의 말이 자신을 질책했다. 미안하면서도, 너무 좋아서 성우가 웃어버렸다. 웃는 바람에 조금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나왔다.


“지훈을 설득하고, 널 찾는데..딱 일년이 걸렸어. 성우 넌 날 골탕먹이는데..정말.”


다니엘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다니엘의 까만 눈이 흐려졌다 다시 또렷해졌다. 다니엘이 성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손끝을 잡았다.

성우의 손가락 끝을 잡은 다니엘이 신중하게 그 끝을 매만졌다.


“매일 도망만 치는 사람을, 아니 용을. 뭐가 좋다고. 나도 미련스럽기 짝이 없다.”

“….미안해, 다니엘.”


미안하다면서도, 성우의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미워죽겠다.”

“…..”

“네가 그날 아침, 그렇게 없어져버려서…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다니엘이 계속 성우에게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호나라 망한거, 어떻게 보면 다 네 덕이야. 내가 성우 네가 도성의 감옥에 있다는 거 듣고 미친 개처럼 싸우면서 처들어갔거든. 부하들까지 다 나 욕했어, 돌았다고."

“그랬..구나.”

“근데 기껏 도성 문부수고 들어가니까 넌 또 없고.”

“그건….다 널 생각해서. 내가 네 옆에있으면…”

“쉬. 쉬.”


다니엘이 조용히 하라고 성우의 입에 손가락을 갔다 댔다. 더이상 변명을 듣고싶지 않다는 눈으로, 다니엘이 성우를 내려보다 와락 깨안았다. 강한 힘에 끌어안겨, 성우가 다니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성우 네가 말한대로…다른 사람들도 만나보고..높은 지위도..넘치는 재산도 가져보고..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다 가져봤어. 근데,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좋은 건 너야.. 너뿐이야.”

“……”

“네가 주는 것들만이,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야.”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 만같았다. 결국, 성우의 두 눈에서 아롱아롱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다니엘이 성우의 몸을 잡고 살짝 떼어냈다. 다니엘의 얄쌍한 눈매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심지어 수확제날 네가 줬던 황금검도 아직도 갖고 있어.”

“…..그걸 왜..싸구려일 뿐인데.”

“그렇다고 하더라. 칼날도 두세번이나 부러져서 몇번이나 갈아끼웠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듯 다니엘의 허리춤엔 아직도 그 검이 꿰어있었다. 낡아버려 금박이 벗겨져 초라한 황금검이 석양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다 전장에서 큰일나면 어쩌려고..!”

“뭐 안다쳤으니까 됐잖아.”


나무라려는 성우의 말을 다니엘이 막았다. 이제 다 커버린 다니엘을 말로도 이길 수 없었다.


“성우 너야말로, 나한테 심장같은 것을 맘대로 줘버리고.”

“…….”

“나에게 그것도 말하지 않고..”


다니엘이 고개를 푹 떨궜다. 끝까지 숨기려고 했는데, 어디서 들어버렸나. 성우가 손을 들어 다니엘의 가슴을 매만졌다. 지금 여기, 자신의 심장 반쪽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손끝으로 자신과 똑같은 기운이 전해졌다.


“그래놓고 도망치고…넌..정말..어리석고..미련하고…나보다 더..”


다니엘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숙였던 고개를 다니엘이 번쩍 들었다.

다니엘의 눈빛이 곧게 성우만을 바라봤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같이, 다니엘의 눈도 타오르는 것 같았다.


“숨바꼭질에서 지면 소원을 들어줘야하잖아.”

“응..그랬지.”

“내 소원은 하나밖에 없어. 성우, 내 옆에 있어줘.”


단호한 다니엘의 말에, 성우의 가슴이 뛰었다. 반만 남은 심장이, 나머지 남은 심장에 반응해 미친듯이 요동쳤다. 


“사랑해. 몇번을 말해도….왜 매번 아쉬운건지…성우, 사랑해. 네가 영원한 건 없다고 했지만.내가 숨쉬는 동안은 영원히 널 사랑할거야.”

"...난, 나도..."


말를 채 잇지 못하고 성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성우를 다니엘이 애타게 바라보다 다시 그러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완전히 맞닿았다. 그제서야 하나가 된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발치 아래, 오소소 피어난 꽃들이 바람에 날려 주변을 나부끼었다. 석양이 하나가 된 두 사람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사랑해, 내 심장. 내 노란 꽃. 내 아름다운 것.


그제서야 성우가 몇번이나 다니엘의 귓가에 되뇌이듯 속삭였다. 







Epilogue 



성우와 다니엘은 그 길로 같이 긴긴 여행을 떠났다. 대륙엔 두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너무 알려져, 다니엘은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의건이라는 어릴적 가명을 쓰고 다녔다. 

여행길에, 한번쯤은 지성의 얼굴을 봐야할 것 같아 북쪽으로도 거슬러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지성은 여전했다. 사람들을 통해 이말, 저말을 전해 들은 것인지 성우와 다니엘을 보자마자 지성은 뿔난 얼굴을 하고 어째서 전쟁같은 것에 껴들었냐고 나무랐다. 한참을 나무라고 난 뒤에는, 반푼이 용이 되버린 성우에게는 혀를 차고, 다니엘은 아주 잘 컸다며 연신 칭찬했다. 변하지 않은 편애에 성우가 작게 투정 했으나, 지성은 무시하였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버린 것엔, 지성은 뜨악한 얼굴을 하고 성우에게 양심이 있냐고 잔소리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지성은 결국 웃으며 둘을 축복해줬다. 늘 함께 행복하라는 지성의 진심어린 말을 소중하게 가슴에 받아 담고, 다니엘과 성우는 바위산을 떠났다. 

그후로도 대륙을 종횡무진하는 여행을 계속 이어갔다.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피해 둘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는 사이 금새 십년이 훌쩍 지나갔다. 대륙은 삐걱거리면서도 점차 안정되어갔다. 지훈은 생각보다 썩 괜찮은 황제였고, 그의 신념처럼 예전보단 더 많은 이가 보다 고루 풍족하게 살았다. 그 풍족함이 뒷골목 곳곳으로 뻗쳤냐,에는 의문은 있었지만. 그래도 전보다 나은 세상이었다.

아직 왕권은 불안정하고, 호나라 잔당들이 작당을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럭저럭 평화는 유지되었다. 옛 호나라 출신의 대단한 술사 하나가 나타났다는 소문도 바람처럼 스쳐갔다. 성우는 그 소문을 그냥 흘려버렸다. 그들은 그들대로, 잘 살아가겠지.


십년이란 시간 속에 대륙을 떠돌았던 다니엘과 성우의 이름도 점차 옅어졌다. 처음 떠돌던 몇년간은, 특히 다니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곤욕이었는데, 이제 대륙을 호령했던 다니엘의 이름도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잊혀져만 가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아쉽지 않냐고 묻는 성우에게 다니엘이 전혀, 하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애초에 성우 네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 오래있고 싶지 않았어.”

“왜?”

“귀족 치들하고는, 안맞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다니엘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보니 도성에서 호위무사를 했다는데, 그때 단단히 더러운 꼴을 많이 봤나 보다. 


“그것보단, 너하고 이렇게 자유롭게 있는게 훨씬 좋아.”


다니엘이 한치도 구김없이 밝게 웃었다. 다니엘의 말에 안심하며 성우가 따라웃었다. 웃고 있는 다니엘의 얼굴은 20대 청년 그대로 해사하고 맑았다. 

십년이란 세월에 불구하고도 다니엘은 그다지 나이를 먹지 않았다. 성우에게 나눠받은 심장의 탓인지 다니엘의 몸은 보통 인간보다 느리게 늙어가는 듯 했다. 반면, 약해진 성우는 전과 같지 않게 조금씩 신체가 노화하는게 느껴졌다. 둘의 시간은 이제 엇비슷하게 흘러갔다.

남들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둘만의 시간 속에, 성우와 다니엘은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것을 봤다. 정처없이, 맘닿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여행을 했다. 


해안가 도시를 돌아다니다 진짜 서역인을 보기도 하였다. 전해듣기만 했지, 실제로는 처음 서역인을 본 성우와 다니엘은 아,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감탄했다. 높은 코에 푹 파인 짙은 이목구비가 다니엘하고는 새삼 달랐다. 닮은 건 흰 피부와 모래색 머리 뿐. 오히려 더 닮아보이는 건 성우라고, 다니엘이 성우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 대륙을 벗어나, 배를 타고 서남부의 커다란 섬나라에도 가봤다. 그 곳에서 다니엘은 처음으로 성우 외의 용을 마주쳤다. 예전에도 몇번 그런 일이 있던 성우는 꽤 덤덤했지만 다니엘은 흥미로워하며 용에게 여러가지를 캐물었다.

아직 인간의 수명 절반도 살지 못한 외국의 어린 용은 장미같은 미소년의 외양을 하고있었다. 어린 용의 본체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은청색 비늘의 용이었다. 어느 부지에서 귀족 아이인 양 행세하는 녀석은 지금은 라이관린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뱃사람들을 통해 대륙어를 조금 배웠다는 어린 용이 어설픈 대륙어로 이야기했다. 


“나, 당신들 알아요.”

“…어떻게?”


궁금해서 묻는 성우에게 용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대륙에, 어느 넋빠진 용이 인간한테 심장을 절반이나 떼줬다고 들었거든.]


뒷 말은 아직 유창히 구사할 수 없는지, 섬의 언어로 말하는 어린 용의 말을 알아듣고, 성우가 돌처럼 굳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다니엘이 뭐라고 하는거야? 하고 묻는 말에는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 사람이 그렇게 좋아?]


천진하게 묻는 어린 용에게, 성우가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아직도 어린 용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한 다니엘이 성우를 채근했지만, 성우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다니엘의 손을 꽉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용이 순수히 감탄했다.


“대단하네요, 너희 둘.”

“너..너희? 야, 너 18살밖에 안먹었다며.”

“음..대륙어 잘 몰라요..”


어린 용의 반말에 다니엘이 발끈했지만, 대륙어는 잘 모른다며 어린용이 딴청을 부렸다. 자국어로도 반말을 툭툭 내뱉는다는 사실은 성우가 숨겨주었다.


한동안 섬에서 어린 용과 머물다 성우와 다니엘은 다시 대륙으로 돌아오는 배편에 몸을 실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북풍을 타고 배는 대륙을 향해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없는 선박에 다니엘과 성우, 단둘이 나와 밤바다를 함께 구경했다. 불빛 하나 없는 새카만 바다위로, 총총히 별들과 은하수만 쏟아지게 눈부셨다.

성우가 아무 말없이 다니엘에게 기대 그 별들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이 믿겨지지 않아, 꿈을 꾸는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다니엘과 떨어져 있는 동안 성우는 늘 다니엘과 함께 있는 꿈을 꾸었다.

그 중에서도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꿈을 떠올리며, 성우가 잠시 애상스런 기분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성우의 기분을 읽어낸 다니엘이 눈치빠르게 물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그냥. 예전에 꿨던 꿈이 생각나서.”

“어떤 꿈이었는데”

“음…내가 인간이 된 꿈. 그래서 너와 거리를 걷고, 집을 얻어 같이 살고..같이 늙어가는 꿈이었어.”

“그런 꿈도 꿨어?”


다니엘이 신기하다는 듯, 동시에 기뻐보이는 눈으로 물어봤다. 쑥스러워져, 성우가 수줍게 웃으며 응,하고 대답했다.


“지금이랑 거의 비슷하긴 하네. 인간은 아니지만…”


다니엘이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다니엘은 아직도 성우의 심장을 나눠받은데 죄책감이 있었다. 다니엘의 죄책감을 없애주고싶어, 성우가 다정하게 뒤에서 다니엘을 껴안았다. 


자신은 아이를 줄 수도 없고, 더이상 부귀영화도 줄 수 없지만. 오직 줄 수 있는 것은 이 애정 뿐이니까.



“이제, 그만 떠돌아다닐까.”


성우에게 끌어안긴 다니엘이 조용히 말했다. 성우가 다니엘을 끌어안았던 팔을 조금 풀었다.

이 생활에 질린걸까, 덜컥 겁이 난 성우에게 다니엘이 고개를 돌려 뒤돌아봤다. 다니엘의 눈이 일자로 접히며, 긴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집을 만들자, 성우. 아담하게 오두막을 짓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 네 꿈대로 같이 늙어가는 거야.”


성우가 그제서야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 거기에 성우 네가 좋아하는 노란꽃을 가득 채우고…아, 지성형이 올 수 있게 바위산 근처에 지을까..”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다니엘에 성우가 와, 하고 얼굴에 가득 웃음을 담았다. 행복이란 것이 넘쳐, 성우의 반쪽자리 심장을 흠뻑 적셨다. 다니엘이 그런 성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잔뜩 입맞춤을 퍼부었다. 단비같은 입맞춤에 취해 성우가 눈을 감았다.


유한하기에, 더 소중한 것.

불처럼 타오르고 꽃처럼 피어나, 그것들처럼 스러져버리는 것.


그런 것을 마음에 품고, 결국 그와 같이 되버렸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사랑해, 습관처럼 둘이 서로에게 속삭였다. 이제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End-














================================


드디어 길고 길었던 썰이 끝났습니다. 제가 썼던 썰 중 가장 길었네요..!

원래는 우화형식으로 짧게 풀려고 했던 걸 잔뜩 욕심내버려, 11편만에 완결이 났네요..ㅎ


판타지 시대극...잘 쓸 수 있을까, 걱정 됬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완결은 났습니다.


이번 썰은 제가 쓰고 싶었던 망상의 총 집합체라,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읽어주신분들도 그랬었다면 좋겠네요 ㅎㅎ 승국 망국 플은 예전부터 한번 써먹고 싶었고, 한번 쯤은 워너원 멤버들이 모두 들어간 썰을 쓰고 싶었거든요. 비중차이는 많이 났지만, 그래도 마지막 편에 모두 쏟아넣었네요.

(사실 더 장편이 될뻔한걸 편수가 두자리수가 넘어가니 초조해져서 많은 캐릭터들 분량이 덩겅덩겅...추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구성은 꽤 오랫동안 했지만 역량부족으로 나중에 써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을 너무 일찍 써버린것 같기도 해요. 더 잘 쓸 수는 없었나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그런 부족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구독자 1000명 돌파 소소한 이벤트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이 썰 쓰면서 넘어버릴 줄 몰랐는데 생각보다 빨리 넘어버려서 타이밍이 좀 늦었네요 :) 

리퀘박스정도의, 별거 아닌 이벤트지만 제 글들을 읽어주시고 구독하시는 분들에게 나름 감사의 표시...입니다.

곧 공지 올릴테니 자유롭게 참여 부탁드려요 ㅎㅎ

늘 댓글과 좋아요, 그리고 부족한 글에 과분한 후원도 모두 고맙게 받고있습니다. 덕분에 힘내서 글 쓰고 있어요. :D 감사합니다.






+ 쓸모없는 부록 TMI (too much info) 


- 다니엘이 집나간건 19살, 분쏘단을 만난건 20살. 그리고 전쟁터에 나간건 22살. 그 후 산에서 성우를 다시 만난 때는 23살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선 33살.

- 민현에게 선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

- 선대의 모티브는 알렉산더 대왕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남색을 했다는 야사가 있고, 열병으로 일찍 죽었음)

- 딥휘의 원래 설정은, 진영이는 민현의 이복동생. 대휘는 그의 책사였다. 

- 호나라, 묘나라 이름은 각각 민현 - 여우(호) / 지훈 - 토끼(묘)에서 따왔다.



DD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