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본 소설은 체벌 요소,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어는 바탕체로 표기합니다.












W. 편백
















- 'S, 선발에 '둘' 위치 보고해'

- 'C#3, GPS 좌표 E 구역입니다.'

- '내가 E 구역인데, 뭔 소리야.'


키보드 위로 놓여진 얄쌍한 손가락이 시체처럼 늘어진다. 화면 빛을 반사하는 안경 렌즈 너머로 날카로운 눈매가 일그러졌다. 오고 가는 무전에서 들려오는 말들, 미리 계획된 작전과는 이미 한참 동 떨어진 요원들의 GPS. 10번과 붙어 있어야 할 개별의 행방이 묘연해진 이 상황까지. 


사태를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통신망은 더이상 없다. CCTV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기에 앞으로의 상황은 추측과 상상에 맡겨야 했다.


"...보스."


C가 고개를 대각선으로 숙여 보스를 바라봤다. 현장이 이 꼴인데 팔자 좋게 누워서 명상 중이다. C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아."


그래요, 아시겠죠. 보고도 도청도 같이 듣고 있었는데 모르실 리가 없죠. 근데 그렇게 누워만 계십니까? 뻔뻔하고도 태연한 말투에 할 말을 잃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질책의 말을 간신히 넘기며 둥근 테의 안경을 벗어두고 메마른 눈을 문질렀다.


"이쯤이면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략이신 겁니까?"


저도 모르게 예의를 잃어버렸다. 하도 답답해서 그랬다. 보스도 제 사정을 아는지 저의 말투를 지적하거나 따가운 눈초리를 주진 않았다. 


물론, S가 현장에 있는 한 이 진압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리는 없다. 애초에 보스가 짜 놓은 계획대로만 움직여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놓쳤겠지. 


이제 우리가 이 작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S와 개별 뿐이 아니다. 이 밀회는 은하 기업의 단순한 소행이 아니다. 어쩌면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난 단 하나의 작은 사건일 지도 모른다. 지금부턴 그 뿌리를 찾아야 하며, 당분간은 Exi를 노리는 조직들을 캐내야 할 것이다.


개별이 현재 무전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인이어 너머로 들려왔던 도청은 상대편과 아주 밀접한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도청기를 지니고 있던 사람은 개별과 10번. 10번이 D 구역에 도청기를 설치했으나 D 구역은 비어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보를 알려준 그 도청은 개별이 설치한 것이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들은 타깃 중에서도 고급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타깃이며, 주요 인물일테다. 그리고, 요주의 인물이다.


만약 자칫하여 그들에게 개별의 위치가 노출된다면, 아주 큰 일이라는 것이다.


가파른 언덕을 등반한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보스는 천장을 향하던 눈동자를 느즈막히 C의 얼굴로 옮겼다. C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스의 눈동자가... 마치 심해 같았다. 너무 깊고 어두워서, 저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가늠되지 않는다.


"난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아."


'내 머리는 빡통가리야.' 라는 난데없는 고백에 C가 주변의 공기를 한껏 머금어 놓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입을 떼면 불경한 말만 우수수 떨어질테니까.


내가 지금 궁금한 것은 보스의 아이큐 따위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섬에 가란 말이어도 좋으니 지금처럼 넋 놓고 지켜보는 것 만큼은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다. 최소한 보스의 생각이라도 알면 이 조마조마한 마음이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텐데, 일말의 정보도 내어주지 않는다. 개별이가 위험하단 말이다.


"보스. 저는,"

"그냥 지켜봐."

"......"


나더러, 무력함을 유지하라 명한다. 그저 바라만 보라고 명령하신다. 신경 끄라는 투가 아닌, 여유를 가지라는 일종의 조언 같기도 했다.


잔뜩 뭉쳐 있던 얼굴 근육이 단박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난 가끔, 보스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매번 대책 없이 일만 저지르는 것 같았다. 뒷수습은 모조리 부하들의 몫이고, 보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우리를 우러러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그런 그가,


"난 상황을 던질 뿐이고, 그 안에서의 상호 작용은 다 저 놈들 몫이거든."


신의 위치에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내가 개입하는 건 이 작전이 끝나고 나서야."


보스는 제 할 말을 다 한 듯 배터리가 빠진 로봇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콧대과 눈썹뼈의 그림자가 그의 눈꺼풀을 뒤덮는다. C는 더 이상 그를 부추기지 않았다. 


보스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세부적인 사항 하나 하나에 대책을 세우고 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 하나를 꼭두각시로 두고 조종하지도, 극을 펼치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상황을 만들고 난 뒤 그 안에 인물을 집어 넣고 그저 지켜본다.


우리는 체스 판 위의 말이 아닌 케이지 속 쥐였다.





-





찰랑, 찰랑... 물탱크 바닥에 고인 물이 출렁거린다. 마치 하수구 안에 터 잡은 쥐새끼의 기분이었다. 사다리 끝을 붙잡고 간신히 매달려 있던 개별이 숨을 죽였다. 은하 놈들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탱크 뒤에 숨어만 있었다면 무조건 들켰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오길 잘 했다. 


뭐, 그 덕에 쓸모도 없을 것 같은 도청기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생활 일본어에 능숙한 건 아니기에 무슨 대화인지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정보가 유용하다면 오늘 내가 작전을 파토 낸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지도 모르겠다.



'타앙-!!'



아 씨, 깜짝이야. 


개별은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 했다. 이 소리는 미국 지사 훈련장에서 익히 들었던 소리였다. 총성이다. 우리팀이 진입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서야 총성이 들리는 것을 보니 이제야 소탕이 시작된 것 같다. 아마 내가 켜둔 도청 때문일 것이다.


도청...


도청...?


'퐁당'



"......"



나, 이 기분 느껴 본 적 있어.


한 떨기의 희망이 '사요나라.' 하며 나를 떠나는 그 기분.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지만 붙잡을 새도 없이 멀어지는 그 좆 같은 기분. 지금 도청기가 물 웅덩이에 몸을 맡겨 점점 아래로 가라 앉고 있는 이 장면은, 옥상에서 개 팀장에게 쳐 맞다 놓친 넥타이가 바람에 몸을 싣고 나풀 나풀 날아가던 그때와 겹쳤다.


절망, 그 자체다.



"무슨 소리야?"

"젠장...! 들킨 건가...!!"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그 총성도, 도청기가 물에 빠진 것도. 왜 하필이면 지금이었을까?



"허, 허억... 지금 밖에 사람들이,"



옥상에서 내려다본 광경은 그들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기 충분했고,



좀전의 나와 같이, 쥐구멍에라도 숨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그들은.



"일단 여기에라도 숨어!!"



물탱크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







-'J#2, B2 진압 완."



"확인."



은하와의 사투는 몇 분 채 되지 않아 종결됐다. 일본에서 온 놈들이라기에 쉽지 않겠다 생각했더니, 과한 걱정이었나보다. 하긴, 아무리 적 조직이 강하다고 한들 ND에 비할 수 없지. S는 입에 물고 있던 연초의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유딩 입맛이네."


먼지 바닥을 안방 침대 삼아 엎어져 있던 10번의 머리를 피해 재를 털었다. 이건 10번에게서 탈취한 것이었다. 시가만 줄곧 펴오던 S에게 캡슐형 담배는 달아도 너무 달았다.


"...팀장님."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더니 기절한 척한 거였나. 하긴 그 정도로 때린 것도 아닌데, 교육생 일짱이면 이 정도는 버텨야지. 


그나저나 얘도 참 징글 징글하다. 본인을 그렇게 패며 추궁한 저에게 겁도 없이 말을 붙이니 말이다.


"뭐."


S는 꽁초를 바닥에다 툭 던지며 대답했다. 부드러운 동선으로 팔짱을 낀 그가 벽가에 날개 뼈를 붙이곤 10번을 내려다 보았다.



"저 왜 맞은 겁니까...?"



말투에 억울함이 잔뜩 서려있다. 당돌하면서도 예의 바른 모습에 그냥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J가 이 녀석 자랑을 그렇게 하던데, 이런 모습 때문이었나.




"싸움 잘 한다길래. 얼마나 잘 하는지 보려고."

"...거짓말."

"뭐 인마?"



S가 발로 걷어 차려는 시늉을 보이자 '으악,' 하며 머리부터 가드한다. 애초에 때릴 생각으로 들어 올린 건 아니었기에 겁만 주고 제자리에 뒀다. 하여간, 요즘 애새끼들은 꼭 맞아야 입을 다물지. 겁 대가리가 없어. 21기는 특히나 더.


"아니, 팀장님 저 밟을 때 엄청 힘 실렸던 거 느꼈거든요? 저한테 악 감정 있으시잖아요.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했는데, 그럼 때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고개를 빳빳히 쳐 들고는 본인의 애통함을 어필하는 10번에게 기어코 주먹을 내리치고 말았다. 


10번은 머리를 움켜쥐곤 불 지피듯 빠른 속도로 비볐다. 모양새만 보면 꿀밤이지만 진심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줄 알았다. 공옥순의 공포의 쓴맛은 여기에 비빌 수도 없을 거다. 지금이 한겨울이었다면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게 착실한 대답이냐?"

"아으..., 근데 2번이 뭔 생각이었는지는 진짜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랑이다, 빠가 새끼야."



10번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다시 얼굴을 바닥에 붙였다. 내가 지금 이 어린 놈의 새끼랑 뭘 하고 있는 것인지 현타가 밀려 왔다. 턱을 치켜 올린 채 천장을 바라보던 S는 시선만 아래로 깔아 10번을 내려다 보았다.


이 녀석은 눈치가 빠르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숙여야 할 때와 세워야 할 때를 안다. 


["기일이 겹쳐서, 교육생이 투입 되어야 한다고... 쿨럭, 그래서, 소규모 인원으로 발탁돼서 온 겁니다."

"이 작전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후우... 너는 네 할 일을, 하아... 하라고..."]


녀석이 말했다시피 아는 건 아는 대로 다 불었다. 개별과의 친분이 두터운 놈임에도 현 상황까지의 일을 일목요연하게 잘도 설명했다. 이 놈은 어린 새끼들 특유의 막연한 의리를 가진 놈이 아니다. 비밀 보장이 곧 의리라는 개논리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 내가 개별이 놈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이야기 한 데에는, 이 놈만의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았으면 팀장님한테 말했죠. 팀장님이 걜 죽이려고 묻는 것도 아닌데..."



그래, 아는 거다. 내가 그 놈과 썩은 동앗줄 같은 관계로 보여도 결코 끊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걸. 한 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 녀석에서 어쩐지 내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판단 센스는 웬만해선 얻어내기 힘드니까.



"...걘 저한테 아무것도 안 알려줍니다."



근데, 이 놈에게서 어쩐지 씁쓸한 감정이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 놈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S가 깊은 시름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새끼. 똑똑한 새끼. 무모하고 대담무쌍한 새끼. 작전 투입도 처음이면서 어떻게 그걸 다 파악하고 행동을 옮겼는지.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레 또 깨닫는다. 그 도청기를 개별이 설치한 것이라면, 그는 이 작전에 있어 벌써 공을 세운 것이었다. 소탕에서 진압으로 변경한 이유가 이 사업에 대한 배후가 있을 거란 여지를 얻었기 때문이니까.


["보고 호출엔 왜 대답 안 했어."

"인이어가, 고장, 흐아, 났습니다."

"개새끼야, 인이어 관리 똑바로 안 해?"

"억, 아니, 악!"]


대답이 없었던 건 이 놈 뿐만 아니라 '둘', 그러니까 개별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즉슨 처음부터 조작된 인이어를 수령했다는 것이겠지. 어딘지를 알아야 찾아가서 뭘 하든지 할텐데 인이어도 먹통이고, GPS는 이 새끼가 가지고 있고, 도청기에선 더 이상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GPS는 또 왜 뜯어서... 하." 



팀장님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 바람에 잘 정돈된 머리가 부슬부슬하게 흩어졌다. 그래..., GPS. 안 그래도 개별의 GPS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몇 번은 걷어 차였었지. 암암... 한 10년은 더 늙은 듯한 몰골을 흘끔 흘끔 바라보던 10번은 S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딴청을 부렸다. 


이 새끼 봐라, 지한테 불똥 튈까봐 눈 피하네? S가 그걸 또 놓치지 않고 살벌한 눈빛으로 10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호랑이 앞의 얼룩말이 이런 기분일까? 설레는 일도 아닌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몇 십 초가 흐르고 나서야 10번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근데, 안 바쁘십니까...? 저랑 이러고 있을,"

"여기 봉쇄 됐어."

"......네?"



넌 쳐 맞느라 정신이 없어서 몰랐겠지. D 구역이 무너짐으로써 E 구역의 퇴로가 막혔단다. 여긴 무기고와 입구를 공유하는 곳이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뭘 어떡해, 나가야지."



...여긴 창문도 없는데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팀장님을 바라보니 그는 혀를 쯧, 차며 품 안에 넣어둔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도시락통 같이 생긴 사각형의 물체를 한 손에 쥐고,



창고의 가장 끝 부분에 집어 던졌다. 그가 내 머리를 감싸고 함께 엎드렸다. 



'콰앙-!!'


그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쿵, 쿠웅!'



벽이 무너져 내렸다. 


뭐... 뭐야...? 방금...? 내가 방금 뭘 본 거야? 성대를 잃은 사람처럼 '아...와...어...' 소리나 내며 무너진 벽 사이로 드러난 밖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어안이 벙벙했는지 입이 쩍 벌어진 것도 모르고 멍때리고 있다. 


연기가 서서히 걷혔다. 사람의 실루엣이 선명해진다.


"......"


그 곳엔 우리 조직의 사내들이 입을 쩍 벌린 채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많이 놀라셨죠...? 



벽을 개 박살 낸 장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옷에 묻은 먼지를 턴다. 악마가 깨어나듯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뚫린 벽을 넘었다.



"와 씹..."



존나 멋있어.






-






"인원이 이게 끝이야?"

"예."


속옷만 걸친 채 포박 되어 있는 놈들을 차례차례 지나쳐 온 S가 J#2에게 물었다. J#2를 비롯한 우리 조직원은 S가 오기 전에 이미 인원을 체크하여 하급 직원 놈들과 고위 간부 같은 놈들을 나누어 꿇려 놨기에 곧장 대답 했다. J#2가 내민 명단을 받아 든 S는 다시 한 번 인원을 훑었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 놓여진 건 이 기지에서 발견 된 문서와 물품들이었다. 하나 하나 던져가며 살펴 봤지만 그다지 쓸만한 것이라곤 누구의 것들인지 알 수 없는 전화번호부가 다였다. 그래도 놈들에게서 빼앗은 휴대폰에서 만큼은 뭐가 나올 것이다. 


"이건 도착하자마자 정보팀으로 넘겨."

"예!"


"후우..."


이제 남은 과업은 개별을 찾는 것이다. 배 대리에게 인원 확인을 지시했지만 아직까지 개별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지끈 지끈 거린다. 


그리고, 여전히 쎄하다. 이 느낌이 도무지 가시질 않는다. 


S가 눈을 치켜 뜨고 주변을 훑었다. 우리 직원들 비롯해 속옷 차림의 은하 일당들이 그의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그가 기다란 기럭지를 성큼 성큼 옮겨 나란히 꿇어 앉아 있는 간부들 앞에 섰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S의 동태를 쫓고 있었다.


S가 가장자리에 있던 놈의 이마에 총을 겨눴다.


"이름."


안 그래도 홀딱 벗겨져 바람 한 결 한 결이 시릴텐데 이마에 총구가 닿으니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제 앞에 선 남자의 위세에 짓눌려 입술을 파르르 떤다.


"...야, 야마구치..."



겁도 없이 Exi를 건드려 놓고 목숨은 아까운가 보지. S는 명단과 이름, 목소리를 다시 대조했다. 이 놈은 도청기로부터 들려오던 목소리와 다르다. 그는 미련도 없이 옆의 놈에게 넘어가 총구를 겨눴다.



"김성남..."



도청기 속 목소리를 잡아내야지, 그래야지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개별의 위치라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텐데. 


어째서 겹치는 놈이 한 놈도 없단 말인가. S의 인상이 흉하게 찌그러졌다. 설마 이 상황에서 목소리를 변조해낸 놈이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독심술을 할 수 있는 놈이 아니고서야 제 의도를 어찌 알고 그딴 짓을 하겠는가. 목소리의 떨림만 들어도 그들은 현재 머리를 굴릴 만한 배포가 없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그럼 저 속에 있나. S가 하급 조직원들에게 눈을 돌렸다. 죄다 눈을 피한다. 본인의 정체를 들킬까 두려워서? 아니다, 그저 제 머리에 총구가 밀어질까 겁을 내는 거다.


애초에 저런 쪼렙들이 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어.


역시나 변수를 배제할 수 없다. 주어진 정보가 다 맞아 떨어질 리가 없는 데다, 이 작전은 처음부터 엉터리였으니까. 원래 기약 된 것보다 밀회 인원이 더 증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면, 이곳을 더 샅샅이 뒤져 봐야 한다.


[- '은하가 Exi의 비공식 산하 기업이니까요.'

- '그렇다면 공식적으로 스카우트 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도청기로부터 전해 들은 그 목소리를 다시 회상했다. 내가 무언가 놓친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혹, 내가 기억하는 바가 다른 게 아닐까.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무방비한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사색을 깨트릴 수 없었다. 무슨 사정인진 몰라도 팀장님이 이렇게 말 없이 고심하시는 것은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다는 뜻이니까. 



[- '그러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 '똑..., 똑...,'

- '...그 분은, 찰랑..., 어떤 사람인가요? 찰랑...,']



그러고 보니, 물 소리 같은 게 들렸던 것 같은데. 설마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건가? 


아냐, 그렇진 않을 거야. 어떤 또라이가 바다에서 밀담을 나누겠어. 


그럼 그 소리는 뭐지. 지하도 안인가?


"하아..."


오랜 시간 침묵하던 S의 한숨 소리에 적진 마저도 제 머리에 구멍이 뚫릴까, 발악 한 번 하지 않고 숨을 죽였다. 떠도는 공기마저도 그의 눈치를 보듯 낮게 가라 앉았다. 생각의 결말을 맺으신 걸까? 모두가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 사태에 대한 설명을 촉구하는 부담스런 시선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손을 귓가로 가져다 댄 뒤, 인이어를 삑, 눌렀다.


"...오십쇼. 더는 안 참습니다."


그 잔잔한 음성은,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바다와 같았다. 요원들은 굳이 묻지 않아도 무전을 수신한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S가 존대를 하는 사람은 보스 밖에 없다. 


그나저나... 더는 안 참겠다뇨. 오라뇨...?


이건 폭풍전야가 아니라 나비의 첫 날갯짓이었다. 큰 일 났다. 보스의 용안을 보게 생겼다. 뒤늦게 앞 일을 예측한 요원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흰 지금 팀장님과 함께 있는 것만 해도 좌불안석인데 보스까지 오신다고요? 그들 사이에 눈짓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야야 바짝 긴장해ㄹ,



- '배, 지원 요청. 옥상에 타깃 셋이 더 있습니다.'



일동, 얼음. 



배 대리의 목소리가 골 안에서 메아리치듯 울린다. 도르마무, 도르마무, 도르마무. 분명 무전은 한 번 울렸는데 그 잔상은 분신술을 쓴 것 마냥 반복되어 맴돌았다. 


우리가, 옥상을... 안 갔었나...? 


갔다. 분명히 갔었다. 근데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헌데, 어째서... 


상황이 자꾸만 더 가혹하게 흘러간다. 와중에 이 가운데 낀 10번만 현재의 기류가 이지경이 된 원인을 알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선배님들은 어쩐지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뭐야, 왜 그러는데? 


콰앙-!!


와, 간 떨어질 뻔. 정적을 깨는 둔탁한 굉음에 하마터면 심장을 토해낼 뻔 했다. 어떤 새낀가 했더니 팀장님이다.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려 있다. 또 폭탄이라도 집어 던진 건가 했더니 바닥에 나무 의자가 분해되어 있었다. 설마 저걸 발차기 한 번으로 부순 건가...? 난 그런 발로 쳐 맞았던 거야? 내 뼈 무사하니? 


"2팀은 따라 오고, 나머진 여기서 대기."

"예!!!"



잔뜩 경직되어 있던 요원들은 데시벨 배틀을 하듯 우렁차게 대답했다. 물론 개중에는 10번도 있었다. 2팀은 홀연히 자리를 뜬 S의 뒤를 쫓았다. 계단을 오르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





끼릭, 끼릭... 


콰앙-!!


녹슨 문 고리를 두어 번 돌려도 제 기능을 못한다. 안 그래도 모자란 인내심이 바닥난 와중에 이런 허접이 문까지 지랄이다. 세 번이나 아량을 베풀 만큼의 신사는 아닌 지라 냅다 걷어찼다. 그렇게 세게 찬 것도 아닌데 문짝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2 팀원이 공포에 질린 것도 모르고 자꾸만 성질을 부린다. 저들을 향한 분노도 아닌데 단전이 시렸다.


무슨 만화 효과 마냥 문짝이 뒤로 누우며 새 공간을 드러냈다. 초록색 페인트가 온 바닥과 벽에 발라진 그곳의 한 가운데, 배 대리가 서 있었다. S의 흉포를 익히 경험해왔던 그는, 제가 직접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문이 부숴질 것을 예측하고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오셨습니까?"


그나저나 왜 너 혼자세요?


무전에 따르면 타깃이 무려 셋이나 더 있다고 했다. 헌데 왜 이곳은 텅텅 비어 있냐는 말이다. 배 대리가 놓칠 일도 없는 데다, 순순히 놓아 줄 리도 없다. 무력 다툼이 있었다면 그의 상태는 이렇게 멀끔해선 안 된다. 자꾸만 예상을 벗어난다. 또 어떤 변수인 거냔 말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타깃은."

"그,"



배 대리가 원래 이렇게 말을 못 했나?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모습에 S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크으으... 코노야로!!!"

"살려줘!!!"



S를 포함한 지원군들이 동시에 고개를 틀었다. 그 곳엔 노랗고 동그란 거대 물체가 서 있었다. 


물탱크가 말을 하네...?


생긴 것도 무슨 심심이 같은 게 일어랑 한국어를 번갈아가며 뱉는다. 분명 여긴 현실 세계인데 몬스터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벙찐 얼굴로 노란 물체를 바라보는 요원들을 마주한 배 대리는 본인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미간을 매만졌다. S가 다시 배 대리로 눈동자를 옮겼다.


설마, 그 찰랑 거리던 소리가... 그럼...



"...예. 거기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일본산 담배갑, 꽁초. 사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아주 적합한 곳, 옥상.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며 추측한 것이 무색하게 평범한 장소였다. 하다못해 하수구까지 의심했는데, 그 물 떨어지는 소리는 물탱크였다니. 그럼 개별이 그 망할 놈의 새끼는 저 안에 있었다는 뜻이냐?



'까악... 까악...'



이 타이밍에 까마귀가 울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과 하필 맞아 떨어진 효과음에 팀원들은 올라가는 광대를 주체하려 입술을 깨물었다. S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람 새듯 푸스스 웃었다. 까마귀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지금 보스의 계략에 휘말려 뭔 짓거리들을 하고 다닌 건지 모르겠다. 체념과 허탈함이 공존하는 실소를 뱉은 그거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둘'은."



정수리가 건넨 말을 용케도 알아 들은 배 대리가 거대한 물탱크 뒤로 시선을 보냈다. 노란색 몬스터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녀석이 움찔 거렸다. 우물쭈물하던 녀석은 그 곱상한 눈을 한 번 딱 감았다 뜨더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박..., 차박... 예사롭지 않은 발소리에 S가 느직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둘'의 인영이 드러났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채, 물방울들을 메마른 바닥에 툭툭 떨구면서.


쟤가 왜 여기 있어...? 작전팀에 소속되어 있는 요원들은 물탱크 뒤에서 나온 인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 달 전 사무실에서 팀장님께 흠씬 얻어 맞았던 '교육생'이었으니까. 방금까지 현장팀 교육생인 10번도 봐 놓고도 놀라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팔과 목에는 열상을 입은 듯 선홍빛 혈액이 살결을 타고 있었다. 물에 젖어 피가 중화되어 그렇지 하나 하나 뜯어보니 상처가 한두 개가 아니다. 설마, 혼자서 셋을 상대하기라도 한 것인가?


S는 개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돌진했다. 오랜만에 S의 살기를 읽은 개별은 재빨리 배 대리의 뒤로 몸을 숨겼다.



"셋 셀 동안 나와. 하나, 둘,"



저 인간의 카운트 다운 속엔 '둘 반'이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저 인간을 이길 사람은 없고, 어차피 저 인간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저와 개팀장 사이에 끼어버린 대리님은 몹시 난처해 보였다. 이 사람 뒤에 숨어 있다고는 하지만, 개팀장이 명령하면 옛다 대령할 것이 분명하다.


개별은 눈을 질끈 감고 S의 앞으로 나갔다.



짜악-!!



오랜만에 맛보는 손맛이다. 개 팀장 앞에 서자마자 세차게 고개가 돌아가고 말았다. 입에서 피 비린내가 들어찼다. 물에 젖어 있는 탓에 마찰력이 상승해 고통은 배였지만 다행히 맷집이 버텨주었다. 몸도 아주 약간 휘청였을 뿐 넘어가진 않았다. 어쩌면 각오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개팀장이 옥상에 다다른 순간부터 맞을 걸 예상했으니 말이다.



"내가 다신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물탱크 뒤에 숨어 있었더니 기어이 불러 내놓고 적반하장이다. S의 맹렬한 눈빛에 개별은 지지 않고 차디찬 시선으로 맞대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감히 S를 저런 눈빛으로 보다니. 요원들에게 있어서는 시도 가치도 없을 만큼 승산 없는 짓이었다. 일종의 자살 행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어린 놈을 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그 짓 역시 자살 행위와 같았다.



"야이 섀끼들아!!! 당장 안 열어?!!!"

"너네 다 후회할 거야!!!"



야 이 넌씨눈들아... 제발. 낄 때 안 낄 때를 가리란 말이야. 물탱크 안에서 발광하는 소리에 배 대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S의 뒤에서 눈치를 살피는 요원들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눈치가 있다면 알아서 이 놈들을 잠재워야 한다.


"계집년 같이 생긴 놈. 내가 얼굴 똑똑히 기억해뒀어! 여기서 나가면 너부터,"


타앙-!!


총알이 물탱크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눈치 없이 고함을 치던 놈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S는 저의 그늘 아래서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개별을 내려다 봤다.


"너, 이따 봐."







*







"야 이 시발놈아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오오."



개 팀장한테서 벗어났더니 10 새끼가 지랄이다. 제 멱살을 쥐고 이리 저리 흔들며 거의 통곡을 했다. 눈물도 안 짜고 있으면서 우는 소리는 대체 왜 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선배 요원에게 맡겨진 채 건물 밖으로 이송된 개별은 제 2 후발대로 온 의료팀에게 넘겨졌었다. 의료 팀원을 따라 섬 끝으로 가니 부상자와 10번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자라나는 새싹의 특권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의 작전 진행 상황에서 개별과 10번은 배제되었다. 듣자 하니 보스께서 여기로 당도하셨다던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뭐, 문제 없이 일이 진행됐으면 그만이니. 


그나저나 이 새낀 어디서 뭐하다 다친 건지 모르겠다. 팔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멍이 들어 있었다. 의료 팀원의 말에 따르면 좀이따 ND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할 것 같댄다. 물론 10번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했지만. 



"근데 너 왜 생쥐 꼴이냐? 그리고 왜 지혈을..."

"...아."



말로 설명하기엔 좀 복잡한데.



"...타깃, 물탱크에 집어 넣다가."

"뭐?"



나도 그 좁아 터진 곳에서 사무라이를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단다. 


생존 본능에 몸 맡겨 무지성으로 싸웠더니 기억도 가물 가물하다. 그냥 물탱크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사람 멱살을 잡고 안으로 당겼었다. 맨 마지막 놈이 하필 칼을 들고 설치는 바람에 여기저기 긁혔지만. 


물탱크에서 빠져나와 입구를 틀어 막을 때도 정말 힘에 부쳤었다. 아마 배팀장님이 날 발견하지 않았다면, 적들 중 한 명이 칼이 아니라, 총을 가지고 있었다면. 난 지금 쯤 시체가 되어 물 위를 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개별은 껍질이 다 벗겨진 손바닥을 바라봤다. 지금이야 소독도 하고 붕대도 감았으니 볼만하지만 아깐 정말 흉측했다. 그리고 따가워 죽는 줄 알았다.


10번이 개별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체의 안위 뿐만 아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후일이다. 그는 보스의 지시를 어겼다. 그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돌아가면 필시 대가를 치룰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작전 팀장님 마저도 네 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어쩌려고 그러냐..."


우린 뙤양볕 아래에 앉아 있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근데 왜, 


내 머리 위로 그늘이 진 것일까.



"닮았네."



끼기긱, 귀신의 부름에 응답하듯 고개를 돌린 10번은 온통 검은색인 남성을 보고 소리 없이 질겁했다. 앞에 있던 의료 팀원 역시도 의료품들을 정리하다 낯선 목소리에 몸을 튕겼다. 인기척도 없이 우리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개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본인의 턱을 뒤에서 끌어 당기고 있는 남성에 개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눈이 심해처럼 새까맣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데다 역광으로 얼굴 전체가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그 눈빛 만큼은 정확히 개별을 향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위엄과 위험이 느껴졌다. 


적은 아니다. 그의 주위에 서 있는 조직원의 옷깃에 ND의 마크가 새겨져 있다. 미스테리한 남성은 개별의 허연 볼살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돌아섰다. 개별은 그가 직접 손을 떼기 전까지 뿌리치지 않았다.



"데리고 와."

"예."



남자의 지시에 요원 둘이 개별을 일으켜 세웠다. 10번도 따라 일어났지만 그들을 불러 세우지 못 했다.


부하 직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라면 적어도 팀장 급 이상.


ND에 숨겨진 팀이 하나 더 존재하지 않는 이상 저 사람은 팀장이 아니다.


그럼 그보다 더 위.



보스다.







*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임에도 이곳은 어두웠다. 주변은 온통 콘크리트로 덮여져 있었고, 필라멘트 전구 하나로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다. 곰팡이와 먼지로 뒤 섞인 듯 퀘퀘한 냄새가 기관지를 타고 넘어왔다. 포도청으로 연행하듯 개별을 끌고 온 요원들은 남자의 손짓 한 번에 조직원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을 때,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문고리에다 걸었다. 


개별에게 터벅 터벅 다가간 그는, 무릎을 짚고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까는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흉터가, 개별의 눈 안에서 반짝였다.



"네가 별이구나?"



'별'. 꽤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겠다. 네 놈이 아주 끔찍해 하고, 진저리 치는. 남자는 저를 노려보는 눈빛을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이 아이, 역시 그 여자와 닮았다. 


그가 개별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한 손에 잡힐 만큼 얄쌍했다. 악력을 가하면 곧장 혀를 내밀고 기절하겠지. 혹은 비틀어서 한 방에 죽여 버릴 수도 있겠군.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할 상상을 하던 남자는 대충 잔인한 생각을 떨쳐내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물탱크에서 S가 주워 온 도청기를 아이의 허벅지 위에다 올려 놓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거 네가 설치한 거 맞지?"



큰 아빠가 조카 다루는 듯한 말투였다. 자상하지만 만만하진 않은, 부드러우나 아주 강한. 이는 여유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분명하다. 굳이 겁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긴장하는 카리스마와 포스의 소유자다.



"...예."

"난 물탱크에다 설치하라 한 적 없었는데."



꿀꺽, 목젖이 뻐근하게 곤두박질 쳤다. 갈증이 나는 것도 아닌데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이 위압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는 저 눈빛은 소름 끼치다 못해 공포감을 자극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더니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이 사람이 '보스'라는 건 설명할 것도 없이 명백하다. 본인 입으로 '난' 물탱크에 도청기를 설치하라 한 적이 없다 했으니까. 


근데, 명령불복종으로 저를 처벌할 것이라면 굳이 이렇게 단 둘이서 면담할 필요가 있나? 아무나 시켜 날 가두고 처벌하면 될 일이 아닌가.


날 여기로 부른 데에는 필시 목적이 있다.


"그래서요?"


음?


얘 봐라? 제법 당돌한 대꾸에 내가 다 무안할 지경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깜빡이던 그는 머지않아 소리내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너 진짜 용맹하다."


내 앞에선 J도, C도, S도 죽을 못 쑤는데. 거의 울 지경까지 웃던 그가 눈에 맺힌 눈물을 검지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이 아저씨는 대체 뭐하는 놈이지?' 라는 눈빛이다. 


그래, 그 얼굴. 그 행동. 그 표정. 그녀를 쏙 빼닮았다. 그를 쏙 빼닮았다. 


그래, 그래야 윤팀장의 아들이고 내 핏줄 같은 형의 아들이지.



"네 덕에 아주 값진 정보를 입수했어. 그 덕에 S가 작전을 비틀어서 소탕이 진압 작전으로 변경됐고 이젠 배후가 누군지 찾기 시작하겠지."

"...아."

"크게 공로할 거야."



...좋아해야 하는 건가? 그치만 뭔가 이상하다. 이는 희소식인데 이런 말을 굳이 이렇게 음침하고 은밀한 곳에서 한다는 게 말이다. 내게 치하할 것이 공로의 상이라면 굳이 보스가 나서지 않아도 전달할 수 있는 소식이다. 헌데 왜,



"머지 않아 작전 팀원으로 진급하게 되겠지."

"네?!"



그게 씨발 어떻게 공로죠?



개별이 벌떡 일어나며 반발했다. 순식간에 보스의 인상이 차갑게 굳어졌다. 싸늘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칭찬하는 듯 하더니 지금은 숨결 하나로 여길 모조리 얼게 할 수 있을 것 만큼 아찔했다. 개별은 저도 모르게 멈칫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젠장, 또 역광이다. 그 심해 같은 눈동자가 저를 또 꿰뚫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홀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모자를 벗어도 그 눈빛 하나 만큼은 암흑 같았다. 그의 얼굴에 대쪽 같이 새겨진 흉터까지도 나의 공포심에 일조했다. 몇 번이나 쓴 침을 삼키는지 모르겠다.



"싫어?"

"네."



남들이었으면 저의 눈초리에 쫄아 곧장 입을 다물었을텐데 이 놈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뱉는다. 이쯤 되니 S가 왜 이 놈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매질을 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성질에 이 당돌함을 좋게만 봤을 리가 없지.


보스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개별의 눈을 맞췄다. 그의 목덜미를 감싸고 뚫어져라, 빤히. 그 곱상한 얼굴을 마주봤다. 개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이 경직되었다. 눈 없는 귀신의 얼굴이 내 앞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명령, 한 번 어기고 나니까 두 번은 쉽지?"

"......"



보스.


이 커다란 조직의 보스는 아무나 맡는 게 아니다. 타인을 장악하는 아우라를 지닌 사람은 S라고 생각했는데, 그 못지 않게, 아니 그를 가뿐히 넘기는 풍채다. 그와는 다른 결이다. S는 그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 반면, 이 사람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작전팀 소속도 아닌 놈이 작전을 뒤 흔들면,"



본디 인간은 자신이 가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총살."



새까만 눈동자, 그 심해 같이 깊은 눈동자가 날 집어 삼킬 듯이 바라본다. 여태껏 느껴본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다. 온 몸이 꽝꽝 얼어 붙었다. 난 이 사람에게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는데, 그 어떤 욕설도 듣지 않았는데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리고 그 짓에 가담한 자 역시,"



심장이 너무 크게 뛴다. 조만간 가슴을 찢고 튀어 나올 기세로 요동친다.



"총살."



10번.



"그래, 네 친구."



쿵. 빠른 맥박 끝에 가슴이 아래로 철렁 내려 앉았다. 이 망할 작전에, 당신의 농간에, 나의 독단적 행동에 10번까지 휘말리고 말았다. 대체 왜. 그 만큼은 여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 혼자만 움직였는데, 대체 왜냔 말이다.



"10번은 보스의 작전에 임했습니다!!! 왜 걔까지,"

"방관도 죄지. 네가 루트에서 떴을 때 보고하지 않았던 순간부터 공범이었어."



잔뜩 상기되어 있던 개별의 낯짝에 핏기가 쭉 빠졌다. 반짝이던 그 눈알에 빛이 저물었다.


당했다. 처참하게 발렸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날 여기에 끼워 넣은 것이 분명했다. 기존의 작전을 따를 걸. 그 병신 같은 내용에 응했어야 했는데, 병신. 시험 당하고 있었다는 걸 다 알면서도, 보기 좋게 놀아나 버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 위를 칭칭 감고 있던 붕대가 진물과 피에 젖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보스에게 개별의 현 감정 따윈 중요치 않았다.



"아가,"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처럼 나즈막히 말을 걸어왔다. 개별이 눈을 치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선택해."



아랑곳하지 않고 묻는다.



"작전팀으로 돌아갈지, 10번과 함께 죽을지."



















+




"보스, ...어떻게 됐습니까."

- '작전팀으로 가겠대.'

"결국엔 그렇게...,"

- '걘 S가 그렇게 싫나?'

"예?"

- '갑자기 울어서 당황했어.'



"하아... 보스, 나이가 몇 갠데 어린 애를 울리시고..."

- 'C. 요즘 나한테 불만있어?'

"아닙니다... 예, 죄송합니다..."



- '걔 눈이 진짜, 윤팀장 닮았더라.'

"예, 닮았죠... 아들인데..."

- '우는 것도 똑 닮아서 못 때렸어.'

"때려서 울린 거 아니었습니까?"

- 'C.'

"...죄송합니다. 실언 했습니다."



- '나 그래도 나름 신사야. S가 걔 죽일 기세길래 일부러 걔 부르고 S 먼저 보냈어.'

"예..., 아주 멋지십니다."

- '...거기로 혜성이 갈 거야. 잘 챙겨서 내일 와.'

"...예? 아니, 보스, 보ㅅ,"



하, 진짜... 짜증난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여러분. 편백입니다. 한 사흘 만이네요. 조금 더 일찍 올리고 싶었는데 글을 수정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더라고요. 그래도 좀 일과 시간에 올리고 싶었는데 자꾸 늦은 새벽에 올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올리지 않으면 짬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이 시간에 올립니다.

드디어 보스와 개별이 만나네요. 그닥 좋은 첫인상은 아니겠습니다. 적어도 개별에게 보스란 그렇겠죠. 어쩜 두 형제가 저렇게 다르게 지랄 맞은 건지... 내 새끼지만 참 지랄 맞습니다. 사실 모든 캐릭터가 각기 다른 지랄로 지랄 맞긴 해요. ND가 지랄력으로 직원들을 채용하나 봅니다. 허허허. 그래서 이 소설의 커플링은 지랄공 X 지랄수 랍니다. 근데 공이 더 지랄. + 지옥에서 온 혐관... 전 너무 맛있네요...ㅎㅎ

글이란 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뭔가 더 적합한 표현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는 않네요. 누가 제 상상을 영화관에서 상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글태기가 오기라도 한 건지...

저는 글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창작물을 즐긴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가끔, 저를 놀라게 하는 미장센이 등장하곤 해요. 올 초에 핫했던 좀비물에선 빨간 넥타이를 남주와 여주가 손목에 묶고 다니던 장면이었고, 현재 핫한 드라마에선 여주인공이 노크를 할 때 문을 '똑똑, 똑' 하고 두드리는 등의 설정이었죠. 볼 때마다 개별이와 S가 떠올라서 혼자서 흠칫 흠칫 한답니다. 아무래도 창작자들 사이에선 생각이 자주 겹치나 봐요. 이런 자극을 받을 때면 뭔가 마음이 불타는 느낌이 있습니다. 더 생각하고 더 고안해봐야겠다는?

장편 소설을 연재하면서 무럭 무럭 성장하고 있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의 덕입니다. 저 혼자서는 결코 오지 못 했을 길인 것 같습니다. 썰로 멈추지 않고 하나의 소설로서 자리 매김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목요일이네요. 주말이 멀지 않았습니다. 비, 더위 조심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

트위터: @PB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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