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진은 한겨울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지영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정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옆에서 따발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엄청 안전한데. 울긴 왜 울어. 언니."

"안, 안 울… 흐으윽."

"하아, 야아, 도움, 하아, 안, 되는 소리 말고…."

"변태야? 왜 이렇게 하악거려."

"숨 차서 그런다!!! 흐악."

"미안. 진아… 끄윽. 흑. 윽."

"어떡해. 괜찮아?"

"미안. 괜찮…."


지영을 보자마자 다시 주르륵 쏟아지는 눈물. 아까는 공포에 질린 눈물이었다면 이번에는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지영은 자신의 든든한 늑대이자 배우자, 시원의 눈물에 크게 놀랐지만 내색 않고 품에 꼬옥 안아 주었다. 

'아까 표정이 묘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지영은 자신의 오판을 후회했다. 

놀이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다정과 진은 도대체 몇 번이나 읽었는지 너덜너덜해진 놀이공원 안내책자를 들이밀며 무조건, 가장 인기가 있는 롤러코스터 사이클론 Z부터 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임신부인 지영은 탈 수 없었고 시원은 그러면 자신 역시 남겠다고 했지만, 지영은 시원이 자신 때문에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못 타는 건 속상하다며 다녀오라고 했다. 자신 대신에 재밌게 타고 오라며, 너 타는 거 구경하면서 네가 탄 열차 맞춰 본다는 말을 하며 웃는 지영에 시원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진다정과 함께 줄을 섰더랬다. 

그러나 몇 십분 뒤 지영이 마주한 것은 즐거움에 가득찬 것이 아닌, 공포에 질려 진에게 업혀서 반실신 상태로 돌아온 시원이었다. 


"고소공포증이야?"

"……."

"그런가 봐. 하긴 늑대는 길짐승이지."

"얌마. 말을……."

"왜 때려!"

"미안…. 한심하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주 의외야."

"야!"


깐족거리는 다정이었지만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비추었다. 출발하자마자 새하얗게 질리더니 오열하며 내린 시원이 걱정되면서도 난생 처음 와 보는 놀이공원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싫은 마음이 부딪히고 있었다. 

지영은 안달복달하는 그 모습과 실신 직전인 시원을 번갈아 돌아보고는 진과 다정에게 일렀다.


"나도 그렇고 시원이도 그렇고, 무서운 놀이기구는 못 탈 것 같으니까. 둘이 재밌고 스릴 있는 거 타고 와."

"엇갈리면 어떡해."

"우다정 너 여기 살아야지."

"바라던 바긴 한데 신혼집으론 좀 추운데."

"무, 무슨! 야. 나 또 시원 언니한테 개털려!"

"어차피 너 털 정신도 없어. 근데 진짜 괜찮아요."

"으응. 오후에 같이 타면 되지. 지금 10시니까, 점심…. 한 시반쯤 만나서 먹을까? 배고프면 간식 좀 먹고."

"네! 매지컬 파워 퍼레이드가 2시부터라니까 딱인 듯요!"

"진짜 괜찮아…?"


걱정스러운 듯 되묻는 다정에 지영은 여전히 정신이 없는 시원을 대신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떠나고 지영은 조용히 앉아 있다가 근처 자판기에서 콜라를 사 왔다. 그리고는 다시 시원의 옆에 앉아 병뚜껑을 따려는 듯 애를 썼다. 그러나 잘 따지지 않는지 끙끙거렸고, 시원은 그런 지영의 손에서 페트병을 가져와 손쉽게 병뚜껑을 따 주었다.

쏴아아 하는 듣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탄산소리와 함께 콜라 특유의 달달한 냄새가 풍겼다. 지영은 웃으며 고맙다고 답하곤 한모금 마시고 시원에게 내밀었다. 하얬던 얼굴이 붉어진 시원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고는 음료수를 받아 들이켰다. 울어서 지친 몸에 당분과 수분이 스며들었다.


"날씨 좋다."

"…응."

"미안. 내가 놀고 오래서. 많이 무서웠지."

"…아냐. 안전한 놀이기구인데. 내가 바보같이 굴었지. 뭐…."

"바보같기는? 사람마다 다 다른 거지."


시원은 자신을 긍정해 주며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는 지영을 바라보았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발발 떠는 자신에 산만한 늑대가 이깟게 뭐가 무섭냐며, 다 마음 가짐 문제니까 무서워도 참아 보라며 으름장을 놓던 양모와 부친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부드러운 공감과 조용한 위로.

시원은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지영이 콜라를 마시고 싶어 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깟 병뚜껑에 씨름하지도 않았을 것도 잘 알았다. 모든 건 의기소침해진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시원은 늘 지영이 꿈만 같았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그리고 미안. 걱정했지."

"응. 걱정은 했어. 고소공포증 있다고 얘기 왜 안 했어. 무서웠잖아. 힘들고."

"…잘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너말고 내가 잘 보일 사람이 누가 또 있어."

"음…. 우리 아기랑, 우리 엄마 아빠랑 수아?"

"아. 그건 그렇네. 그래도 너만큼은 아니야."

"알아. 농담이고. 더 잘 보일 필요 없어. "

"그래도…."

"나중에 같이 비행기 타고 여행 갈 때는 내가 손 꼭 잡아줄게."

"지영아…."

"나도 너한테 잘보이고 싶었는데 잘 됐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는 지영에 시원은 행복감에 심장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더 잘보일 수 없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시원과 지영이 실내 놀이기구를 타며 멜로 드라마를 찍고 있는 동안, 나머지 두 사람은 청춘 코메디를 찍고 있었다. 후룹라이드며 바이킹을 타고 예전부터 있던 360도 회전 롤러코스터도 탔다. 그 과정은 모두 발발거리며 달려나가는 다정을 진은 긴다리로 성큼성큼 따라잡는 식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롤러코스터어서 내린 뒤, 웃기게 찍힌 사진을 보며 진이 폭소하는 동안 다정이 사라졌다.


"우다정!!! 야! 다정아!!"


아무리 빽빽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지 않는 답에 진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떡하지. 엇갈린 건가. 아니 엇갈리기라도 한 거면 다행이지. 길을 잃은 거면? 어디서 울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아니면… 누구한테 납치라도 당한 거면? 

솔직히 우다정은 돈도 무지 많은 집 손녀에, 무지무지 귀엽게 생겼다. 성격이 조금 포악하긴 했으나 체구도 작고 하찮기 짝이 없는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뛰어다니며 다정을 찾았다.

그러던 다정은 어이없게도 제 눈높이와 꼭 맞는 상태로 저를 발견하더니 꽥 소리를 내질렀다.


"도진!!!!!!"

"우다, 에엑?!"

"앗……! 일행 보여? 찾아써?!"


웬 외간 여자에게 반쯤 안겨서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부르는 다정에 진은 눈이 반쯤 돌아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14.8


"아니. 그니까 다짜고짜 애를 때려눕힌 게 지금 자랑이라는 거예요?"

"서, 서율아. 나 괘, 괜찮아! 통뼈니까!"

"아니…. 제가 잘못을 하기는 했는데. 우리 애를 그쪽이 안고 있으니까. 저는 납치라도…."

"우리 지호가! 이 선하고 순딩이 같은 애가! 납치요?!!"


서율이라고 불린 여자가 진에게 지호라 불린, 하얗고 까맣고 코 크고 눈 크고 눈썹은 진했지만 멍멍이처럼 순하디 순한 눈매의 여자의 얼굴을 들이댔다. 진은 자신이 보기에도 진짜 무해하기 짝이 없는 얼빵한 얼굴에 할말이 없어졌다. 게다가 이건 제 과실이 100%인 건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니까 나를 아무리 사랑해도 처음 본 사람한테 덤비면 어떡해? 얘 나쁜 애 아니야."

"는 즈응흐 흐르…."

"히익."

"아무튼. 길 잃은 꼬마 보호해 줬더니! 아주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꼬마라니. 17살 레이디 우다정이야."

"아! 나는 18살 구지호야!"

"구질호?"

"지, 지호!"

"우리 도진이랑 동갑이네."

"서율이랑두 동갑!"


지호와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다정에 진은 제 오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금 허탈해졌다. 저 어리바리까는 예쁜 구질이 같은 애가 우리 지랄맞은 꼬마를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죄송해요. 우리 꼬마 걱정돼서 제가 실수했어요."

"허. 사과해서 해결되면 경찰서는 왜 있어?"

"도진. 우리 변호사 잘해. 걱정 마."

"입 좀 닥쳐!"


도움 1도 안 되는 말만 지껄이는 다정을 참다 못한 진이 윽박지르자 지호가 와락 쫄았다. 그 바람에 서율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지호는 용기를 내서 쭈뼛거리면서도 서율의 어깨를 꼬옥 안고서 말했다.


"자기야. 나 통뼈고 그냥 몸통박치기라서 한개두 안 아파써! 봐 봐. 자기가 좋아하는 내 복근도 멀쩡해!"

"대낮에 뭘 뒤집어 까는 거야…?! 진짜…. 아무튼 조심해요! 진짜 우리 지호가 착해서 봐 준 줄 알아."

"미안해요. 진짜."

"그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봐 주자."

"너는 그쪽이잖아. 왜 네가 용서하고 난리야?"

"대신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어쨌거나 구질이가 나 안아올려 줘서 도진 찾았으니까."

"허어? 아, 안 돼. 코 묻은 돈 아껴…!"

"여기서 코는 네가 제일 흘릴 것 같은데."

"흥. 우리 지호 비염이긴 해도 코는 안 흘리거든?"

"자기야아. 다른 거는 흘리는 거 같자나…."

"워워. 뭐 동갑이니 말 놔도 되지? 얘가 싸가지는 없지만 돈은 좀 있어. 나도 용돈 두둑하게 챙겨 왔고. 미안하니까 팝콘이랑 음료수라도 사 줄게."


깍듯한 사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제서야 세모나던 서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은 지호도 객관적으로 눈에 띄는 미인이었지만 서율 역시 다른 유형으로 굉장히 화려한 미인이라 생각했다. 킁킁 하고 페로몬을 맡으니 개과 비슷한 것도 같은데, 뭔가 약간 낯선 느낌도 있었다. 아무튼 보기 좋으면 좋지 하는 생각에 진은 스낵을 파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아, 아하. 둘은 비스트타운에서 언니들이랑 왔구나아."

"우리는 레이크시티에서 왔어."

"둘도 그렇고 그런 사이야?"

"웅…? 그렇고?"

"사귀는 사이냐고. 맞아. 우리 자기야."

"히히."


진은 시원지영과는 다른 유형의 닭살(염병)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카라멜이 잔뜩 묻은 팝콘을 골라 하나씩 다정의 입에 넣어 주고 있는 자신을 보고 서율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고마워. 어쩌다가 만난 거야? 다정이랑."

"지호가 앞도 안 보고 걷다가 다정이한테 걸려 넘어질 뻔했대."

"걸리다니. 누굴 짐짝같이."

"아마 너 찾느라 쟤도 정신없어서 부딪힌 거겠지."

"지호는?"

"아…. 나두 서율이 잃어버려 갖구우…."

"화장실 간다고 했는데, 못 들어 놓고서는. 잃어버리기는."

"미안…."

"너무 다그치지 마. 내가 보니까 착한 구질이야."

"애 이름 구질이라고 부르면서 다그치지 말라는 게 앞뒤가 맞는 소리야?"

"오. 서율이 맞대거리 엄청 잘한다."

"우리 서율이 말 진짜 잘해! 공부도 잘해! 그리고 예쁘고…! 착하고…!"


줄줄이 이어지는 칭찬의 쓰나미에 진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율을 돌아보았지만 서율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착한 건 잘 모르겠는데…. 진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렇냐며 웃었다. 


"너네는 이거 먹고 뭐 타러 갈 거야?"

"우리? 우리는 범퍼카 타러 갈 거야."

"범퍼카? 개재밌겠다. 나도 갈래."

"오 쩌네. 사람 많은 게 재밌기는 하지. 같이 가도 돼?"

"낄끼빠빠 잘 모르는구나. 너네."

"된단 거야 안 된단 거야."

"히.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아. 서율아."

"하. 지호가 맛있고 카라멜팝콘이 귀여워서 봐 줬다. 같이 타러 가."

"무슨 소리야. 식인종인가."

"미, 밈이야! 그…. 엄청 유명한 TV쇼에서…."

"자세한 어원까지?! 대단한데."


진이야 사교성이라고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고, 서율 역시 자신을 뜯어먹으려고 알랑방귀를 뀌거나 하지 않는 두 사람이 나쁘지 않아 어울려 줬다. 그리고 다정은 자기가 넘어질 뻔해 놓고는 진과 떨어진 걸 깨닫고 울먹이는 저를 보곤 화들짝 어떡하냐며 다친 데 없냐며 사탕까지 사다 준(바친) 눈치 없지만 착한 구질이가 꽤 마음에 들었다. 지호는 그냥 다정이가 귀엽고 내추럴 본 인싸 진이 신기했다. 그 결과 이상한 만남이었지만 네 사람은 어색하지 않게 친해졌다. 


"꺄악!!"

"문디야. 파뜩 안 가고 모하나."

"아. 서율아. 잠깐, 잠깐만…. 아악!!"

"으아. 자기야아."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다더니 아까 지호가 맞은 걸 복수라도 하는지 서율은 범퍼가 핸들을 잡자마자 진을 신나게 들이받았다.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받힌 탓에 진 역시 열이 바특 받아 지호를 향해 핸들을 꺾었다. 지호는 이미 다정에게 들이받힌 뒤였는데 옆에서 진까지 박아 버리자 화들짝 놀랐다.


"꺅!"

"뭐야? 귀?"

"으아아. 놀라따아!"

"뭐야. 귀여워. 개야?"

"지호는 라쿤이야. 그리고 방심은 금물이야. 우다정."

"!!!"


서율이 신나게 다정까지 들이받고 유유히 사라지자 다정은 억울한 듯 삿대질을 하며 진에게 붙잡자며 애원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는 스킬 없는 스킬을 다 동원해 서율의 차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행운이 따라 주고 지호가 걸리적거리며 치인 덕에 결국 서율은 예의상 내 준 지호와의 접촉 사고를 제외하고는 안전운전을 마치고 범퍼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통통한 줄무늬 꼬리까지 내놓고 징징 우는 지호를 달래 주는 서율의 꼬리 역시 붉은색이 섞인 통통한 줄무늬였다. 진은 어디서 본 것 같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데 다정이 툭하고 던지며 둘에게 말했다.


"레서판다가 생긴 건 졸귀탱이어도 사납다던데. 딱 맞네."

"아아! 레서판다구나!!"

"너구리 커플. 몰랐어? 바보"

"너구리 아니거든. 레서판다도 라쿤도?"

"히히. 진이는 멍멍이지?"

"응. 얘는 뭐게요."

"음. 지옥에서 온 치와와?"

"아니거든."

"스무고개 하는 거야? 재밌겠다!!"


결국 마지막 질문에 서율이 뱀이라고 맞추었지만 다정이 '바베이도스 실뱀'이라며 땡이라고 고집을 피우는 까닭에 네 사람은 한참 더 입씨름을 하고 나서야 꼭 놀러 오라며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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