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花流水


w. 요쿠르트


:: 第十七章


* 황제국 설정이지만 고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해 조선 시대 언어가 섞여 있을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폐하, 그게 무슨-.”

 

 

요섭이 율의 후궁이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두준의 변화를 본다면 아예 예상하지 못했을 고백은 아니었다. 두준은 요섭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를 죽인 자의 자식이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제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똑같이 그의 자식을 죽이면 좀 나아질까 싶었으나, 그 대가를 아주 오랫동안 제 옆에서 천천히 시들어 고통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제 나라가 아닌, 나의 나라에서.

요섭은 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죗값을 대신 치르려 조용히 두준의 말을 따랐다. 제 의지와 상관없는 말들이 자신을 따라다녀도 조용히 제 자리에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두준은 요섭의 그런 모습들에 시선이 따라갔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동했다.

두준의 거칠 것 없는 고백에 요섭은 조금 당황하였으나, 저를 꼭 안고 파르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그의 등을 계속 토닥였다.

 

 

“어찌 저에게 그런 마음을 품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

 

“생각해보면 아주 그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거 같지는 않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요섭을 간절할 정도로 안고 있던 두준의 귀에 조용하고 나긋한 요섭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토닥, 토닥. 일정한 두드림과 함께.

 

 

“허나, 폐하의 저를 향한 그 마음이 연모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

 

“그저 저를, 동정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 황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두준의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두준의 허락 없이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그게 요섭이라고 한들 해당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요섭은 이 고백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당연히 제 사람인 요섭에게 바치는, 연모한다는 고백이.

요섭이 여즉 저를 안고 있는 두준을 살짝 떨어트렸다. 두준은 의외로 순순히 밀려났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요섭의 목덜미에 있었다.

 

 

“숙의.”

 

“폐하.”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잠시 침묵하며 각자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신중히 골랐다.

 

 

“동정이 아니다, 내 너를-.”

 

“저는 폐하의 사람이 아닙니까.”

 

 

감히 황제의 말허리를 파고든 것은 그가 총애하는 후궁의 담담한 진심이었기에, 두준은 하던 말을 멈추고 그저 큰 손의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어떤 약속이나 연모의 마음 없이도 저는 폐하 곁에 있는 폐하의 사람이옵니다.”

 

 

신중한 그의 성미가 드러나는 말이었다. 두준은 섣불리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또 몰아붙일 순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폐하께서 품은 연정이 저를 향한 동정은 아닌지,”

 

“...”

 

“...다시 한번 헤아려주옵소서.”

 

 

요섭은 두준의 입 밖으로 나온 그 ‘연모한다.’라는 말의 무게를 알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감히 두준의 심정을 모두 이해할 순 없으나, 쉽게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사이에서.

다정한 두준에게 마음이 동해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사실이었다. 깊게 생각해보지는 못했으나 어쩌면, 그 울렁거리고 애매한 마음이 두준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요섭은 그 마음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두준을 위해서.

두준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요섭의 목덜미에서 머물고 있던 두준의 양팔이 툭- 힘없이 떨어졌다.

 

 

“...황후가 너를 독살하려 하였다.”

 

“...예?”

 

“월화전에 자객이 든 날 밤, 강녕전에 자객을 보낸 것 또한 황후의 짓이다.”

 

 

두준은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진 요섭에게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요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요섭의 말대로 요섭은 자신의 사람이었다. 요섭뿐만이 아니라, 황궁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래서 이 연정이라는 마음이 더욱 귀하고, 또 조심스러웠다.

 

 

“황후의 적은 오로지 너였다. 너를 의심받게 하고, 그렇게 율에서 내치려 했겠지.”

 

“...”

 

“그래, 처음은 동정이었다. 그것은 부정하지 않아.”

 

 

그렇다고 이 마음을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요섭의 말대로 그는 항상 두준의 곁에 있을 것이었으니. 어쩌면 옆에 두고 무작정 기다리겠다는 이 마음이 강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던 자들에게 험한 소리를 들어도, 한때 황제였던 자가 그저 조용히 있는 모습에. 그래, 그 마음은 동정이었다.”

 

 

허나, 지금도 그 마음을 착각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두준의 목소리가 어쩐지 애달프게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푸른빛의 자리옷을 입고 와서 저를 붙들고 제 연정을 고백하는 것인지. 그 애달픈 목소리에 요섭의 가슴까지 저리는 듯했다.

 

 

“...곧,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민 죄로 황후에 대한 처분이 내려질 것이다.”

 

“...”

 

“허나, 황후는 많은 사람 중 하필 그대를 적으로 삼았기에 이리 변을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두준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섭과 눈을 마주쳤다. 요섭에게 강요할 마음이 없었으나, 아이처럼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이만큼 크고 무겁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연모하는 마음은 저잣거리의 평범한 사내처럼 지극히도 모순적이었다.

 

 

“언제나 남을 더 위하려 하는 것은, 내 잘 알고 있다.”

 

“...”

 

“한 번 정도는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지 않겠느냐.”

 

 

멀어졌던 요섭에게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간 두준이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이상,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

그대로 뒤를 돌아 월화전을 나섰다. 모두가 고대했던 큰일이 있는 날이었으며, 썩어버린 싹을 시원하게 짓밟아놓았지만, 황궁 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강녕전을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언제 왔는지 모를 동운이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월화마마와 이야기는 잘 하셨습니까.”

 

“...모르겠구나. 잘 한 건지, 아닌지.”

 

 

동운은 묵묵히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며 느릿하게 걷는 두준의 뒤를 따랐다. 사랑에 빠진 제 하늘에도 반짝이며 하늘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별들이 가득 수놓아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의금부는 황후와 좌의정을 비롯한 역도들로 가득 찼다. 의금부의 수장인 판의금부사는 황명을 받들어 역모에 가담한 자들을 추국하였으나, 두준의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역도들은 입을 모아 역모를 이끈 수장으로 좌의정을 지목했으며, 좌의정 또한 그에 부정하지 않았다. 황후도 제 아비에 대해, 역모에 대해 그저 입을 꾹 닫고 있을 뿐이었다. 조용히 자신에게 내려질 처분을 기다리며.

 

 

“마마, 오랜만에 오셨,”

 

 

아, 아이고. 폐하. 이 늙은이가 폐하를 몰라뵙고-.

의금부가 바삐 돌아가고 있는 동안, 두준은 이런저런 일로 바빠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선대황제의 사당에 들렀다. 들르지 못한 이유는 많았으나, 이제야 들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제 아비를 죽인 자의 자식을 연모하게 되어,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선대황제의 어진을 보고 죄를 고하면 조금 괜찮으려나. 두준은 사당을 관리해주는 늙은 궁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폐하께서 워낙 신경을 써주셔서 평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황궁 안의 사당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고, 늙은 궁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온화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냄새도 어쩐지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듯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헌데, 기다리던 이가 있으셨나 봅니다.”

 

“아, 월화마마께서 종종 사당에 들르시곤 합니다. 그래서 전 월화마마께서 온 줄 알고...”

 

 

...요섭이? 숙의가 이곳을 왜 왔다는 것인가. 두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기도 전에, 궁녀의 입에서 그간 요섭이 사당에 얼마나, 왜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에 두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월화마마께서 책봉되신지 얼마 안 됐을 때, 처음 이곳에 오셨습니다. 선대황제 폐하를 이리 만든 월화국의 황제라기에 걱정이 되어 몰래 지켜봤으나, 묵묵히 향을 꽂고 한참 어진을 바라만 보다 가셨습니다.”

 

“...얼마나 자주 왔습니까, 숙의가.”

 

“요즘은 발길이 조금 뜸하시긴 하나, 처음 율에 오셨을 땐 자주 오셔 이 늙은이의 말동무도 되어주셨습니다. 걱정과 달리 선한 분이신 듯해 안심했었지요.”

 

 

두준과 궁녀의 발길은 자연스레 사당 안으로 향하였다. 그녀는 느리지만 익숙한 듯이 향을 두준에게 건넸으며, 두준은 향을 초에 가져다 대었다. 늙은 궁녀는 평온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어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하루는 왜 이곳에 오시는지 여쭈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저 향만 꽂고, 어진을 바라보다 고개만 숙이고 가시기에.”

 

“숙의가 무어라 답하였습니까.”

 

“제 아비가 저지른 과오를 속죄하러 온다 하였습니다. 감히 용서는 바라지 않으나, 그래도 아비 대신 자식이라도 사과해야 하지 않겠냐며.”

 

 

두준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을 피워 어진 앞의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한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어진을 바라봤다. 선대황제 폐하, 두준의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용서하는 마음은 덕을 쌓는 일이라 일렀다. 가장 나쁜 사람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두준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여전히 잘 이해는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폐하. 폐하를 배신하고, 칼을 들이밀어 죽인 자도 용서하실 수 있으십니까. 두준의 아버지는 답이 없었다. 그저 같은 표정으로 두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저 또한 오늘, 선대황제께 속죄하러 왔습니다.”

 

“...”

 

“헌데, 고하지 않아도 어쩐지 죄가 덜어진 듯합니다.”

 

 

폐하, 저는 감히 용서를 바랍니다. 입이 닳도록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셨으니, 이런 저의 죄도 용서해주시겠지요.

두준은 아버지에게 당신을 죽인 자의 자식을 연모한다고, 그리 속죄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속죄하지 않아도 선대황제는 이미 용서를 했을 것이라, 감히 그리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철없게도 자신이 연모하는 자가 이리도 속이 깊은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어쩌면 선대황제께서 뒷목을 잡으실지도 모를 일이지.

 

 

“마마! 얼른 밖에 나가보셔요!”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인 것이야.”

 

 

두준이 월화전에 걸음 한 후, 요섭은 자의로 월화전에만 머물렀다. 가만히 앉아 서책을 읽다가도, 점잖게 서예 연습을 하다가도 두준과 서신을 주고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기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찻잔의 물이 넘치듯 화선지를 먹으로 물들여 애꿎은 종이만 수장 망쳐버렸다. 밖으로 나서면 행여나 주군과 마주칠까 하는 마음에 월화전에만 갇히듯 한 것인데 어째 눈앞에 그가 없어도 종일 두준이 떠올랐다.

 

 

“마마! 얼른이요, 얼른!”

 

 

어린 나인이 요섭을 재차 부르며 귀여운 호들갑을 떨었다. 자연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요섭이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나인은 자연스레 이엄을 요섭이게 둘러주었다. 언젠가 두준이 언젠가 챙겨주었던 것이었다.

 

 

“보세요, 마마!”

 

“...와-.”

 

 

어린 나인의 재촉에 간만에 요섭이 월화전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순간 보이는 풍경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나, 하늘로 뻗은 나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황자 시절 월화에서 딱 한 번 본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닿는 더 하얀 눈송이의 차가움 싫지 않아서 요섭은 살짝 손바닥을 펼쳐 뻗었다. 그 손바닥 위에 눈송이들이 꽃신을 신은 아가씨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낙하하는 율의 꽃잎 같구나.”

 

“어릴 적에 눈을 본 것이 다였다고 하신 것이 기억이 나, 이리 눈이 쏟아지는 걸 보자마자 마마께 달려왔습니다!”

 

“마음씨도 곱구나, 너는.”

 

 

요섭의 다정한 말에 어린 나인은 히히-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고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으나, 요섭은 자꾸만 두준이 생각났다. 내리는 눈이 진실로 율의 꽃잎 같아서 그 상징이 하필 황제여서. 지아비 생각이 나는 것이 당연했으나 요섭은 커지는 생각들을 치워버리려 노력했다.

 

 

“마마-.”

 

“...어?”

 

 

눈 내리는 하늘만 멍하니 보는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금위장 복장을 한 기광이 뜀박질이라도 한 듯 모자란 숨을 깊게 내쉬며 요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월화에서 쉽사리 볼 수 없었던 눈이 내리고 있었고, 율의 내금위장 복식을 갖춘 기광이라니.

요섭은 새삼 이곳에서 세 계절이나 보냈다는 것을 실감했다. 요섭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광에게 평소와 같이 웃어 보였다.

 

 

“훈련은 어쩌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냐.”

 

“눈이, 내려서.”

 

 

마마께 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리 달려왔습니다.

요섭을 폐하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기광은 어느새 마마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얀 율 꽃잎이 흩날릴 때 와서 하얀 눈송이가 내릴 때까지의 계절을 보냈다.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변하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관계가 변하고 있었다.

 

 

“이리도 고운 눈을 보고 나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아 기분이 좋구나.”

 

“...마마.”

 

 

요섭은 흘러온 계절을 되짚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고, 그동안 자신의 어떤 것이 변하였는지. 이곳에 처음 오게 됐을 땐, 덫에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도 있었으나, 생각보다 괜찮게 흘러갔던 날들 또한 있었다. 월화에서부터 함께 지냈던 기광만을 의지해서 평생, 죽을 때까지 그리 살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늘, 모든 역도가 처분을 받는다 합니다.”

 

“...벌써 그리 되었구나, 시간이.”

 

“여기 계속 계실 것입니까.”

 

 

요섭은 말없이 계속 하늘을 바라봤다. 기광은 요섭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계속 하늘만 보는 제 주인을 바라봤다. 제가 아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백이었다면, 가장 먼저 눈 오는 하늘을 바라보는 제 주인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하늘은 여전히 요섭이었다. 기광의 눈에 그는 여전히 높고,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내가 가서 무얼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눈에 띄면 그들을 놀리는 꼴밖에 되지 않겠니.”

 

“저였다면.”

 

 

그것은 수십 번의 계절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가서 손찌검이라도 하고 싶을 심정일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인에게 어찌 손찌검을,”

 

“마마께선 항상 저에게 스스로를 우선으로 두라고 하셨지요.”

 

 

그랬지. 요섭의 조용한 대답이 눈송이와 함께 천천히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은 않았다. 기광의 겉모습은 변하였으나, 두 사람의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헌데, 어찌 마마께선 스스로를 우선으로 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

 

“전 단 한 번이라도, 마마께서.”

 

 

기광은 진심으로 바랐다.

 

 

“이기적일 정도로 스스로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다 쫓겨나면, 그땐 제가 뭐라도 벌어오지 않겠습니까.”

 

“쫓겨날 정도로 못되게 굴란 것이냐.”

 

“굶어 죽지는 않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제.

요섭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자, 기광은 제 주인을 향해 씩- 웃었다. 두 사람이 살던 월화에선 첫눈이 내리는 날, 황제에게 허언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기광의 제 주인을 향한 말에는 거짓이 단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도 평생, 죽을 때까지 없을 것이었다.

 

같은 날, 황후를 제외한 모든 역도가 황제의 처분을 받았다. 좌의정의 최측근은 사약을 피할 수 없었고, 몇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가장 먼저 사약을 받을 줄 알았던 좌의정은, 의금부의 추국을 견디지 못하고 옥에서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제 아비의 죽음을 옥에서 듣게 된 황후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금일 경술년 무자월 갑자일, 황후 민 씨를 서인*으로 삼고, 황후의 자격을 삭탈한다.”

* 서인 –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차디찬 자리에 앉아있는 황후를 황좌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는 두준. 그의 명을 읊어 내려가는 대신. 그녀의 곁에 서 있는 교태전의 궁녀들. 몇 되지 않은 자들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황후의 추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후의 폐위에 교태전의 궁녀들은 울음을 터트렸으나, 황후는 울지 않았다.

 

 

“이에 출궁할 것을 명하니, 민 씨는 지엄한 황명을 받들라.”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민 황후는 분명 대역 죄인이었으나, 그에 비해 황후에게 내려진 처벌은 가벼웠다. 허나, 그 누구도 이 처분이 가볍다고 여기지 않았다. 좌의정과 황후가 의금부에 끌려갔을 때부터, 궁 밖 사가에 머물던 식솔들은 어디론가 도망갔을 것이다. 아비인 좌의정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언제나 두 손 가득하게 권력과 재물을 쥐고 살던 황후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율의 역사상, 가장 초라하고 가장 잔인한 폐위였다. 하물며 그 순간 내리고 있는 눈송이조차도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은 그리 생각하였다.

 

 

“마마-.”

 

 

두준의 명을 받은 황후는 자신이 머물던 교태전에서 화려했던 머리 장식, 그 어떤 장신구 하나 없이 빠져나왔다. 그녀를 위해 울어주는 것은 황후가 나서는 길에 서서 제 주인의 마지막을 위해 허리를 숙인 궁녀들뿐이었다. 황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준비된 가마를 향해 느리게 걸었다.

그 울음소리 사이로, 뒷짐을 진 두준이 교태전을 찾았다.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 사이. 황후와 두준의 눈이 마주쳤다. 추국을 받을 때도 절대 열리지 않았던, 끝내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황후의 입이 열렸다.

 

 

“...단 한 순간도,”

 

“...”

 

“폐하를 마음에 품은 적 없습니다.”

 

 

그래. 그저 정치적으로 이용당했을 뿐인 악연이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마지막으로 부릴 수 있는 자존심이었다. 두준은 황후의 무례에도 그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황후는 마지막으로 두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쌓이지도 않을 눈이 무수히도 내리는 추운 날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폐하.”

 

 

나라에 큰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날 궁의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다. 황후의 빈자리, 좌의정의 빈자리.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 또한 두준의 몫이었기에, 할 일이 많아 오히려 앞으로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갈 듯했다. 허나, 두준은 그 일들을 딱 하루만 미루고자 마음먹었다. 최악의 지아비였던 두준이 황후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

 

 

“내 여기 있는 건 어찌 알고 온 것이냐.”

 

“발길이 닿는 대로 왔을 뿐인데, 마침 이곳에 폐하가 계셨던 것뿐입니다.”

 

“빈말이라도 날 보러왔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무겁게 자리 잡고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니,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두준은 해가 질 무렵, 날이 춥다는 동운의 만류에도 기어이 중화전을 나섰다. 그리고 속절없이 조용한 궁 안을 거닐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한 돌다리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연꽃이 다 져 초라해진 연못을 바라봤다.

 

 

“빈말이라도 하고 싶으나, 정말 발길이 닿는 대로 왔을 뿐입니다.”

 

“너도 참.”

 

“헌데, 폐하의 생각을 하며 걸어서 그런지, 이 발이 폐하가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느리게 내리고 있는 눈송이가 초라해진 연못의 공간을 모두 채울 듯 그 위로 살포시 떨어지고 있었고, 두준의 허전한 옆자리는 요섭이 채웠다. 요섭은 오늘 궁에서 있었던 일, 그 어떤 말도 묻지 않았다. 두준은 그의 말에 자신과 함께 연못을 수놓고 있는, 떨어지는 눈송이만을 바라보고 있는 요섭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참 아름답게 낙하하지 않습니까, 폐하.”

 

“...”

 

“월화는 워낙 따뜻하여, 살면서 이 아름다운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어릴 적 본 것이 다였으니까요.”

 

 

그마저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요섭은 이 돌다리 위에 서 있으니, 어쩐지 율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다리 난간 위에 앉아있는 저를 보고 안절부절하던 기광과, 그런 제가 죽으려 그 위로 올라간 줄 안 두준. 그의 등장에 놀라 연못에 빠질뻔한 요섭을 잡아줬던 그 날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가시 돋친 눈빛을 쏘아대던 때가.

 

 

“하여 눈이 내리는 날엔 황제에게 거짓을 고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있었지요.”

 

“...그래, 한번 말해준 적이 있지 않느냐.”

 

“그날도 율 꽃잎이 이 눈처럼 아주 예쁘게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아마 두준의 장난에 처음 장단을 맞췄던 날이었을 것이다. 꽃잎을 눈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거짓을 고해보라고 하던. 두준의 질문에 모두 거짓으로 답할 수 있었던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이리도 모든 기억이 두준과 이어져 있으니.

 

 

“율의 천지가 모두 폐하의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일 수 있으나.”

 

“...”

 

“돌이켜보면 율에서의 기억엔 모두 폐하가 있었습니다.”

 

 

두준은 연못에 닿아 울리는 요섭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두움과 고요함, 그 사이를 나긋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한참을 고민하다 신중하게 제 진심을 꺼내 보이는 말들이 듣기 좋아서.

 

 

“저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연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허나, 폐하의 생각을 떨쳐내려 해도 잘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두준의 시선에도 물 위에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송이만 바라보고 있던 요섭의 시선이 그와 맞닿았다. 옅은 불빛만이 깔린 어둠 속, 새하얀 눈송이가 두 사람을 비추는 듯했다.

 

 

“그것도 연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

 

“저 또한 폐하를,”

 

 

...연모합니다.

참으로 멀리 돌고 돌아온 고백이었다. 이리도 흉흉한 일이 벌어진 날, 거짓말처럼 하늘에선 쌓이지도 않는 눈송이가 그들의 고백을 기다렸다는 듯이 끝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요섭은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 수 없었다. 다만, 오늘 마침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으며 제가 있던 곳에선 황제에게 거짓을 고해도 되는 날이었다. 요섭은 그 거짓을 고해도 되는 첫눈 뒤에 숨어 제 진심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시린 날이었으나 망설임과 부끄러움 때문에 수차례 짓씹은 요섭의 입술이 잘 익은 홍옥처럼 붉어져 있었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삐져나온 새빨간 거짓말 위로 부디 첫눈이 쌓여 두준에게 닿을 땐 새하얀 진심이 되기를.






이 마지막 장면 하나를 보고 싶어서 낙화유수를 쓰게 되었다고,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길고 길었던 낙화유수도 이제 점점 끝이 보이네요...!

글에 대한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duyo_g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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