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따고 공부를 하고 틈틈 아르바이트까지 라며 바쁘게 1년이 흘러갔다. 그간 이민형과 싸우며 죽네 사네 떠들던 순간들보다 회사에서 받은 불합 통지가 훨씬 더 무섭다는 현실을 슬슬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어차피 단번에 잘 될 거라는 기대 따윈 하지도 않았고 기약 없을 날들에 대한 각오도 단단히 다지긴 했지만, 잔뜩 지친 채로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갈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허했다. 아쉽긴커녕 떨어져있어 오히려 편한 점이 더 많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 큰 침대에 누울 때, 이민형의 빈자리가 덜컥 느껴지곤 했다. 여전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주고받고, 이민형이 쉬는 날이면 악착같이 서울로 올라오니 일주일 이상 얼굴을 못 보는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통산 5번째 불합격 통지를 받고 허무해진 지금 이 순간, 당장 이민형이 보고 싶었다. 그러게 뭐하러 어려운 길을 돌아가냐며 시비 거는 말들도, 잘 때면 숨막힐 정도로 꽉 안아 가둬두는 품도 갑자기 그리워졌다. 나 진짜 사랑하나 봐. 새삼스러운 애정을 되새기며 그대로 식탁에 엎드려버렸다. 밥 차려먹는 게 너무 귀찮아서 대신 사 온 빵은 아직 한 입도 먹지 못 했다. 뒤늦게 포장을 뜯다가 오늘 불합격 통지를 받은 회사의 제품이라는 걸 깨닫고는 먹고 싶은 마음이 뚝 사라져버려서. 배는 고픈데 아무것도 먹기 싫을 수가 있나. 도저히 음식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이민형이 끓여준 짜고 싱거운 죽 따위가 먹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는 지 생각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이민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뭐 해. 집 도착했어?”

  “응. 아까.”

 -“도착했는데 왜 연락을 안 해. 진짜 집 맞아? 제논가 뭔가 그 새끼랑 있는 거 아니고?”

  “아깐 집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라니까... 의심되면 영상통화 걸든가.”



 익숙하게 의심부터 하고 보는 이민형한테 따질 힘도 없었다. 내가 걸어? 심드렁하고 흐물거리는 말투로 되물었지만 이민형은 아무말이 없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근데 목소리가 왜 그모양이야.”

  “떨어졌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냥… 기분이 좀, 별로.”



 수화기 너머로 땅 꺼질 듯 큰 한숨 소리가 넘어왔다. 당장 그만 두라고, 리조트든 호텔이든 일자리를 알아봐줄 수 있는데 뭐하러 고생하냐며 성질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중일 거다. 같은 주제로 지난 달에 뒤집어지게 싸운 이후로 이민형은 꾹 참는 중이었다. 이민형의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쉬운 방법인 만큼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젠 두어 달에 한번 가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도 이민형의 도움을 받아 일하는 것만큼은 아니라며 강력하게 반대하셨다. 특히 나와 이민형 같은 사이에선 더더욱 안 된다고.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못하면, 옆에 나란히 서는 게 아니라 서서히 잡아먹히고 말 거라던 말씀이 꽤나 마음에 깊게 남았다. 


 사람 많은 곳에만 가면 현기증을 느끼며 이민형을 붙잡아 의지하던 날들도 있었다. 이민형 없인 로션 하나 제대로 못바를 만큼 바보가 됐던 끔찍한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 비하자면 이젠 나도 이민형도 꽤나 정신을 차렸지만 우린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했다. 최소한으로 그어둔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이민형이 날 잡아먹고 내가 이민형에게 전부 내맡기지 않도록.


 내 되새김과 함께 의도치 않게 정적이 길어졌다. 오래 참지 못하는 이민형의 짧은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싶진 않아서, 얼른 주제를 돌렸다.



  “너 밥은? 밥 먹었어?”

 -“먹었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넌 안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 근데 손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 지금.”

 -“그럼 시켜서라도 먹어. 대신 시켜 줘?”



 손도 까딱하기 귀찮다는 말 그대로 알아들은 이민형은 친절하게 대신 시켜주겠다고 했다. 실없이 픽픽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다고 했지만 영 못 미더운지 이따 뭘 먹는지 찍어서 보내라는 명령이 이어졌다. 누구보다 엉망진창 제멋대로 사는 이민형이 날 걱정하며 잔소리하는 건 언제 들어도 어이없었다. 영양제가 어쩌고 하는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그대로 흘려보냈다. 이젠 대충 자장가 정도로 들리는 지경이었다. 눈이 감기고 뜨이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이민형.”

 -“왜.”

  “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목요일에 돌아왔으니까… 이틀 전. 왜?”

  “그것밖에 안 됐나…”



 좀… 보고 싶네. 식탁에 엎드려 귀 위에 핸드폰을 얹어둔 채로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수화기 너머는 한참이나 조용했다. 뭐야. 듣고 있어? 이민형? 끊어졌나 싶어 귀에 얹어뒀던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톡톡 두드릴 때. 쾅, 하는 소리가 스피커폰도 아닌데 크게 들려왔다.



  “뭐야? 거기 천둥 쳐?”

 -“세 시간이면 돼. 아니다, 지금 시간은 차도 안 막힐 테니까, 두 시간.”

  “...뭐?”

 -“간다고. 지금.”

  “뭔… 뭔, 헛소리야. 너 내일 새벽 출근이잖아. 안 돼. 오지 마. 다시 들어가, 빨리.”

 -“보고 싶다며.”

 


 묵직하던 소리의 정체는 아마도 이민형이 방문을 여는 소리인 것 같았다. 급발진에 잠이 전부 달아났다. 밤 9시. 아닌 밤 중에 200km도 넘는 거리를 오겠다는 이민형을 말리느라 한참동안 애를 먹어야 했고, 괜한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





 내가 힘들지 네가 힘들어?


 이해 안 간다는 듯, 한 술 더 떠 화라도 난 듯 쏘아붙이던 이민형을 겨우 진정시키긴 했지만 뒤끝이 길었다. 제 비위 맞춰주려고 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냐는 둥, 진짜 간다고 하니까 막상 싫었냐는 둥. 그냥 정말, 피곤할까 봐 걱정됐던 것뿐이라고 수없이 되풀이했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나도 진짜 보고 싶었는데. 어쩌면 이번엔 내가 더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억울했다. 그리고 한참 늦잠을 자고 일어나 침대 옆 빈 자리를 크게 느끼고 나선, 조금 후회했다. 이민형이 고생하든 말든 오게 놔둘 걸 그랬다. 그랬으면 지금쯤 이민형이 잠 덜 깬 얼굴을 찌푸리며 내 등을 더듬고 안아줬을 텐데. 더 자자며 이불을 끌어올려 햇빛을 가렸을 텐데.


 핸드폰 캘린더를 확인했다. 이민형이 서울로 올라오는 휴일까지는 아직도 5일이나 남아있었고, 그걸 제외하면 오늘부터 이민형이 올라오기까지 사이의 날짜들은 하얗게 비워져있었다. 본격적으로 면접을 보러 다니다보면 민폐 끼칠 일이 생길 것 같아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는데 한동안은 예정된 면접도, 다른 일정도 딱히 없었다.


 지도 어플을 열어 아무 생각 없이 집과 리조트까지의 경로를 찍어본 건 그다음. 평일 오전의 애매한 시간대 때문인지 평소보다 예상 시간이 짧게 찍혀있었다.



 >> 스케줄 바꿨어

 >> 오늘 3시 퇴근하고 내일 오후 출근이야

 >> 시간 많아

 >> 근데도 가지 마?



 그리고, 꼭 나를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밍 좋게 이민형한테 문자가 날아들었다. 항상 그렇듯 친절함은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문장을 볼 때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덜 뜨인 눈을 비비며 이민형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저 스케쥴이면… 딱 괜찮겠는데. 대충 계산을 마치자 잠잠했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충동적인 계획 앞에 어쩐지 기분이 좀, 들떴다.





**




 

 이민형에게 가기로 마음 먹었다. 대신 이민형 모르게.  


 매번 이민형이 서울로 올라왔지 내가 내려갈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었다. 이제 할아버지가 유언장에 명시해두신 유배 아닌 유배도 끝나기 직전이라 한번쯤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더 솔직한 이유를 대자면 그냥 할 일도 없고 기분이 울적해서. 여태껏 취업 준비로 바쁘기도 했고, 못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이민형이 올라오니 아쉬울 것도 없었는데 이제서야 이민형을 먼저 찾게 되는 게 조금 치사하긴 했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한번도 그걸로 서운해한 적 없는 이민형이니 내가 먼저 내려가면 무조건 반기고 좋아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차를 운전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이민형이랑 돌아다닐 때면 항상 이민형이 운전을 했고. 오랜만에 혼자 운전석에 앉는 게 왠지 낯설었다. 네비게이션에 리조트 주소를 찍어넣자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표시되는 긴 동선을 볼 때는 잠시 막막함까지 느꼈지만, 연락도 없이 몰래 찾아간 날 보고 이민형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면 즐거움만 남았다.



 >> 뭐 해

 >> 사진 보내



 막 차에 시동을 거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받는 똑같은 패턴의 똑같은 연락. 아무 감흥조차 없을 만큼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리 이민형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단 생각에 자꾸만 픽픽 웃음이 샜다. 몇 안 되는, 평범한 연인 같은 순간이기도 했고. 뭐하냐고 물을 걸 대비해 아까 집에서 찍어온 침대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졸려. 더 잘 거야. 운전 중엔 바로 대답하지 못할 테니 미리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답장하고 천천히 차를 뺐다. 


 오후 2시. 

 서울에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흐리던 날씨가 내려가는 내내 조금씩 개기 시작하더니, 도착하고 나자 꼭 다른 세상인 것처럼 화창해져 있었다. 아직도 자? 언제까지 자. 운전하는 사이사이 도착해있는 이민형에게 방금 일어났다는 답장을 보냈다. 리조트 건물과 거리가 있는 야외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긴 했는데, 커다란 골프장을 품고 있는 리조트의 사방으로 끝이 안 보이는 넓은 부지를 한번 둘러보자 슬슬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이민형이… 어디 있지…

 여태껏 들은 이야기들로 대충 어느 건물에서 일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체크인 데스크가 있는 본관 건물만 해도 으리으리하게 컸다. 게다가 여기서 갑자기 이민형을 마주친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조차 없었다. 그냥 서울을 내려오는 것만이 내가 세운 계획의 전부였다. 그제서야 너무 대책없이 찾아왔나 싶었다. 괜히 머쓱한 기분에 주변을 쭈뼛대며 본관 로비로 들어갔다. 잔잔한 곳에 평화롭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그리고 여유로운 듯 부지런한 듯 돌아다니는 직원들. 저 직원들 사이에서 이민형도 같은 옷을 입고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낯간지러웠다.


 일하고 있어? 이민형에게 문자를 보내지만 바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마 일하는 중인 것 같았다. 뭐 엄청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할 것도 아닌데 괜한 긴장으로 마른침이 다 넘어갔다. 혹시나 이민형을 마주치면 일이고 뭐고 우선 달려올 것 같아 들키지 않도록 가장 구석에 있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퇴근하면 리조트 구경시켜달라고 할까. 이민형이 사는 집도 처음 가보겠네… 퇴근한 이민형과 할 거리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며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울도 집도 아닌 곳에서 이민형을 만날 생각을 하니 괜히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2시 50분. 이민형의 퇴근이 10분 남은 찰나, 남자 하나가 내 앞을 지나쳐 걸어갔다. 술에 취한듯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걷다가 주변에 지나가는 다른 손님에게 괜히 시비를 걸어대는 남자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잠깐 고개 갸웃하는 사이 남자는 로비를 지나쳐 옆 건물로 들어갔다. 별 미친 새끼 다 보겠네… 방금 남자에게 시비 걸렸던 아주머니 한 분이 혀를 쯧쯧차는 혼잣말을 듣다가, 문득 떠올랐다. 객실의 모든 수전을 틀어놓고 체크아웃해서 이민형을 열받게 했던 남자. 그 이후로도 카지노장에 와 종종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그 남자였다. 미친 새끼라 똑같이 칭하던 이민형의 목소리가 겹쳤다. 남자의 얼굴 역시 이민형이 몇 번 사진을 찍어 보여준 적이 있어 낯이 익었던 거였다.


 성질 불같은 이민형은 그 남자가 나타날 때마다 자주 시비가 붙었고, 한번은 경찰을 부를 정도의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는 이민형이 아니라 할머니한테 들었다. 사건사고 많은 카지노 특성상 경찰 부를 일이 많을 텐데 리조트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할머니의 귀에까지 들어간 거라면, 경찰을 부른 이유가 남자보단 이민형이라는 걸 유추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 하루 일과를 거의 다 알려주는 이민형이 말했을 법도 한데 그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이민형이 사고를 친 거라는 쪽에 신빙성을 더했다. 다행히 어느새부턴 안 보여 한 시름 놓았다는 얘길 할머니한테 들었었는데, 다시 나타난 모양이었다. 


 마침 이민형에게 연락이 왔다. 곧 퇴근한다며 보내준 사진에는 카지노장의 입구가 찍혀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분명 저 남자가 향한 곳은 카지노일 테고, 이민형은 지금 카지노 앞에 있었다. 필히 마주치면 또 사달이 날 거라는, 경험으로 아는 강한 직감을 느꼈다. 곧장 본관 로비를 벗어나 남자가 들어간 옆 건물로 향했다. 


 멀찍이 건물 입구를 등지고 서 있는 이민형의 뒷모습과, 비틀비틀 걷는 주정뱅이의 인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편의점에서 내게 추근덕대던 남자를 피가 터질 정도로 때리던 이민형의 모습이 스쳐가고 있었다. 분명, 분명 무슨 일이 또 날 것 같은데. 초조하긴 했지만 괜히 내가 끼어들었다가 일을 키울지도 모른단 생각에 몸이 뻣뻣하게 굳던 때, 이민형이 뒤를 돌았다.



  “뭐야. 너 이 새끼, 아직도 여기서 일 해? 사람을 그렇게 패고도? 어?”



 남자와 이민형이 마주봤다. 원래도 아무 표정 없던 이민형의 표정이 남자의 삿대질을 마주하고 좀 더 험악하게 굳고. 남자는 비틀대며 낄낄 웃었다. 어린 놈의 새끼가 뭐. 또 때리게? 쳐 봐. 등등. 이민형을 약 올리듯 이어지는 말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내가 아는 안하무인에 인내심마저 없는 이민형이라면 분명, 때릴 타이밍이었다. 이민형이 치켜드는 팔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그런데 그 다음이 의외였다. 누가 맞아 엎어지는 소리도, 주변의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도, 카지노를 지키고 서 있는 경호원들이 달려오는 구둣발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음가 없이 딱딱한 이민형의 목소리만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면, 치켜든 팔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조용히 머리를 쓸어넘기는 이민형이 보였다.



  “어떻게 들어오긴 뭘. 내 발로 들어왔지. 왜. 내가 들어오면 안 될 데라도 왔어?”



 여전한 시비조로 남자가 맞받아치고. 이를 악 문 이민형이 카지노의 경호원에게 턱짓을 했다. 내보내요. 이민형이 더 직책이 높은지는 모르겠지만, 명령조의 말에 고개 끄덕인 경호원이 남자를 반쯤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긴 한숨을 뱉어내던 이민형의 시선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흔들렸다. 반쯤 찌푸린 채 집중하듯 날 바라보던 이민형의 표정에 당황이 스며갔다.


 얼떨떨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내가 본 건, 여태 내가 알던 이민형이 아니었다. 당연히 또 무슨 일이 나도 날 줄 알았는데. 아수라장이 되고 할머니 귀에 다시 들어갈 만큼 아찔한 상황이 또 되풀이될 줄 알았는데. 억지로 참고 있는 기색까지 지우진 못했어도 이민형은 예상과 다르게 침착하고 또 차분했다. 


 카지노 입구에 걸린 커다란 시계가 마침 3시 정각, 이민형의 퇴근 시간을 알려왔다. 이대로 바로 끝인 건지, 아니면 퇴근 전에 뭔가 할 일이 더 남았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너… 너 뭐야? 너 왜 여기있어?”

  “야…”

  “집이었잖아. 이제 일어났다며. 뭔데? 언제 왔는데?”

  “잘했어… 잘했다.”



 여전히 실감이 안나는 듯 벙찐 이민형에게 천천히 걸어가, 그대로 껴안았다. 어른스러운 이민형이 낯설면서도 대견했다. 그간 이민형이 내 앞에서 남들에게 부리던 난동의 장면들을 고개 저어 떨쳐내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뱉었다. 이건, 난동의 파편들이 떨어져간 자리에 새롭게 각인되어 길이 남을 한 장면이었다.


 동료로 보이는 누군가가 이민형에게 오려다가 멈칫거리며 멈춰서는 게 어깨에 반쯤 가려진 시야로 보였지만 딱히 부끄럽진 않았다. 남들 시선 상관 없다는 듯 나를 끌어안거나 치대던 이민형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끔은 눈치 없이 굴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는 거구나. 이민형은 가끔이 아니라 문제긴 하지만. 이민형은 당황하며 마주 안지도 못하고 밀어내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평소와 완전히 반전된 역할이 그냥, 재미있었다.



 


**





  “진짜 나 보러 왔어?”

  “그럼 너 말고 강원도에 내가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아까 나 왜 안았어? 너 남들 앞에서 그러는 거 질색하잖아.”

  “그러게. 미쳤나 봐.”

  “다르게 좀 말해 봐.”

  “뭘. 뭘 어떻게 다르게.”

  “...너 여긴 왜 갑자기 내려온 건데?”

  “그냥. 심심해서.”

  “그게 다야?”

  “그럼 뭐.”

  “누가 심심하다고 서울에서 강원도를 오는데? 똑바로 말해.”

  “아…! 보고 싶어서. 너 보고 싶어서 왔어. 됐지?”



 대화 내용만 보자면 귀여웠지만 분위기는 꼭 취조실에서 유도신문 당하는 것 같았다. 조금씩 대화의 범위를 좁혀가며 몰아붙이는 이민형에게, 결국 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낯간지러운 건 우리에게 안 어울린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민형은 이따금씩 나를 강제로 쪼아대며 낯간지러운 대답을 기어코 얻어가곤 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굳어있던 얼굴이 풀렸다. 퇴근길 마주치는 동료들이 인사해왔지만 이민형은 건성으로 고개나 까딱거리고 바로 내 손을 깍지껴 잡았다. 동료 한 명의 눈이 붙잡은 손으로 향하는 게 괜히 부담스러웠다.



  “좀… 놓고 걷자.”

  “너는 안아놓고 손 잡는 게 뭔 대수라고.”



 보란듯이 꽈악. 잡은 손에 힘이 들어찬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그냥 적당히 체념하고 신난 듯 빨라지는 이민형의 걸음에 반쯤 끌려갔다. 차 어디 댔어? 따로 다니기 싫어. 네 차로 다니자. 내일은 네가 나 데려다줘. 이미 정해놓고 통보하듯 전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민형을 기다리며 계획했던 모든 걸, 했다. 아니 그 이상을 했다. 넓게 펼쳐진 초원 같은 골프장도 구경하고, 조성된 정원과 워터파크까지 둘러봤다. 이민형은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여긴 뭐 하는 곳이고, 저긴 또 어떤 곳이고 하며 설명을 덧붙였고,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민형의 모든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다음엔 리조트를 벗어나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시내에 위치한 시장으로 갔다. 복작거리는 좁은 시장통을 오가는 사람들과 자주 몸이 부딪혔지만 낯선 이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 악몽 같던 지난 어느 때처럼 두렵지도 않았고 시끄러운 소음이 날 불안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이민형의 옷자락을 간절하게 붙잡고 숨듯이 매달리지 않아도, 이젠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펄떡거리는 활어가 이민형의 옷에 물을 튀길 때는 웃음이 터졌다. 짜증스럽게 옷을 털어내던 이민형도 결국 같이 픽 웃으며 내 입에 음료 빨대를 물려주고, 우린 커다란 슬러시를 나눠먹으며 활기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그 느낌이 좋았다. 


 느릿하고 여유롭게 걸어다니며 시장을 전부 훑어보고 나올 때쯤 배가 고파졌고. 밥 먹자는 말에 갑자기 멈춰선 채 이민형이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살이 빠졌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나를 잡아끌며 앞장 섰다. 향한 곳은 시장 바깥 쪽에 위치한 대게집이었다. 



  “여기 맛있대.”

  “와 본 적 있어?”

  “아니. 같이 일하는 애가 그러던데.”

  “너 동료들이랑 막… 말도 섞고 그래? 사적인 얘기도 해?”

  “뭐하러 해. 쓸데 없이.”

  “...그럼 어떻게 알았어?”

  “그냥, 남들 떠드는 거 들었어. 언제 너랑 한번 가면 좋겠다 싶어서 기억해뒀던 거야.”



 의외인 면을 또 발견한 줄 알았지만 그것까진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민형에게 사적인 사회성까지 기대하긴 무리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끌려들어간 식당에서 이민형은 회와 메인메뉴인 대게를 상다리 부러지도록 가득 시켰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 좋은 것도 잠깐이고 얼마 못 먹어 슬슬 배가 불러왔지만,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면 이민형이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쳐다봤다. 더 먹어. 결국 명령 같은 말과 감시하는 시선 아래 숨 쉬는 게 힘들 정도로, 포식을 넘어 과식을 했다. 



  “진짜… 더는 못 먹겠어.”

  “응. 무리하지 마. 체 해.”



 계속 먹으라고 강요할 땐 언제고. 꾸역꾸역 다 먹었더니 이제서야 체하니까 무리하지 말라는 이민형이 어이 없었다. 헛웃음을 터뜨리자 이민형은 어깨 한번 으쓱거리고는 계산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길게 늘어져 앉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때였지만 점점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 초여름에 바깥은 이제야 아주 조금 어스름이 졌을 뿐 아직은 밝았다.


 슬슬 다시 여름이 오고 있었다. 악다구니 같은 감정이 지독하게 끓어 넘치던 여름이. 서로의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던 여름이. 



  “나갈까?”

  “응. 배부른데 좀 걷다 가자.”

  “그래. 여기 앞에 해변이 제일 예쁘대. 그것도 몰래 들었어.”



 이젠 수면 아래로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감당 가능할 온기만 표면에 남긴, 우리의 여름이, 다시.


 

 


**





  “안 졸려? 너 오후에 출근도 하잖아. 우리 그냥, 자자…”

  “일출 보고 싶다며.”

  “그건 그냥, 강원도니까 한번 해본 말이고…” 



 어슴푸레 푸른 빛이 돌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에 이민형이 날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어제 스치듯 일출 얘기를 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일출을 보러 가자고 했다. 됐다며 이민형의 팔을 침대로 잡아끌었지만 이민형은 다시 눕는 대신 억지로 내 몸을 일으켜세웠다. 껴안듯 몸이 겹쳐진 채 내가 정신을 차리길 기다리며, 얼굴 곳곳에 입술을 찍어눌렀다 떼길 느릿하게 반복했다.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쓸어넘겨주기도 했지만 간지럽고 평화로운 손길에 잠이 깨긴커녕 오히려 더 잠이 쏟아졌다. 몸에 완전히 힘을 빼고 안긴 채 꾸벅꾸벅 졸다가, 은근슬쩍 다시 누우려 했지만 날 붙잡은 이민형은 벽처럼 꿈쩍도 안 했다. 일어 나. 빨리.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후로도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다. 도저히 잠이 안 깨서 안 가겠다고 이불을 뒤집어 쓰자 이민형은 한숨과 함께 아예 이불을 뺏어 바닥에 던져버기기까지 했다. 푹- 가라앉는 이불의 차분한 소리와 콘돔 껍질들이 경박스럽게 바닥을 긁는 소리가 교차하고. 그 순간 잠이 확 깨버렸다. 잠시간의 멋쩍은 침묵 후에 결국 나는 더 억지 부리지 않고 일어났다.


 이민형의 아파트에서 해돋이로 유명한 해변까지는 차로 20분. 내가 안 일어나겠다고 미적거리며 실랑이가 길어진 탓에 지금 출발하기엔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결국 우린 나가는 대신 거실의 커튼을 활짝 걷어내고 집에서 해돋이를 보기로 했다. 높은 층의 창밖으로는 시야에 가리는 것 없이 넓게 펼쳐진 해변이 전부 보였다. 



  “나갈 필요 없었네. 여기 뷰가 이렇게 좋은데.”



 나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결국 나가지도 못한 게 미안해서, 괜히 더 뻔뻔하게 말했다. 그럼 아무 반응도 없이 분주하게 주방을 돌아다니던 이민형이 김이 나는 머그잔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걸어왔다. 흰 마시멜로가 점점 녹아내리는 코코아 두 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 걸 안 좋아하는 이민형의 취향은 아니었다.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소파를 지나쳐 창 앞 마룻바닥에 털썩 앉았고, 그럼 이민형도 따라와 내 옆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웬 코코아. 너 오면 같이 마시려고 사놨었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받아들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나랑 가려고 대게집도 알아봐두고 코코아도 사 뒀으면서, 왜 오라고 한번도 말을 안 했어?”



 까치집 지은 머리로 이민형이 멀뚱히 날 바라봤다. 일어나지 얼마 안 된 이민형은 평소보다 좀 더 물렁한 인상을 줬다.



  “귀찮을까 봐.”

  “...”

  “너 맨날 바쁘잖아. 고생하는 거 아는데 어떻게 오라 그래. 이 먼 데를.”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 담백한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언젠가 내가 내려올 날을 생각하며 나와 갈 곳을 알아보고. 나와 마실 걸 사 두고. 


 매번 취업으로 싸우긴 했지만 이민형은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 했다. 아니, 꺾지 않았다.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이민형을 문득 깨달을 때면 멋쩍고 어색하고 간지러웠다. 그러니까 짧게 말하자면… 좋았다. 변한 게 아니라 어쩌면 이민형은, 우리는, 지겹게 실수하고 싸우며 배워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똑바르지 못해도 삐뚤지는 않게 사랑하는 법을.


 코코아를 한 입 마신 이민형이 바로 잔을 내려놨다. 너무 달아. 토할 것 같아. 찌푸려진 피곤한 얼굴 위로 점점 밝아지는 바깥의 빛이 덧씌워지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나야 백수라 상관 없지만 이민형은 어제도 일 했고 오늘도 오후가 되면 또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단 건 아예 먹지도 않는데. 마음이 너울거렸다.



  “이민형.”

  “응.”

  “사랑해.”

  “...응?”

  “몰라. 근데 꼭 지금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벙찐 채 날 뚫어져라 보는 이민형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바로 코코아 잔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따끈하고 달달한 게 입을 채우고 목을 넘어내려갔다. 빨갛게 달궈진 수평선 위로 마침 해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눈이 부신 광경 속에서 내 마음 위로도 저 해 비슷한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 같은 벅차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요즘 그냥, 되는 일이 없으니까... 우울했어. 혼자 그 큰 집에 있으니까 더 무기력했고. 너 보면 좀 나아질 것 같아서 온 건데… 진짜 효과 있네. 진작에 한번 와볼 걸. 이렇게 좋은데.”

  “...”

  “와… 저기 밖에 봐. 예쁘다. 그치. 나 지금 여행 온 것 같아.”

  “...”

  “우리 나중엔 제대로 여행도 가자. 나 제주도도 중학생 때 수학여행 말곤 안 가봤어. 그때 네가 괴롭혀서 재미 하나도 없었는데. 다시 가면 이번엔 좀… 재밌지 않을까.”


 

 머그잔을 손에 쥔 채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돌아오는 대답이 하나도 없길래 의아해져 고개를 돌려보면, 아까와 같은 자세 그대로 여전히 날 바라보는 이민형의 시선을 맞닥뜨렸다. 왜… 뭐. 왜… 부담스러운 눈빛에 주춤 몸을 뒤로 물리자 이민형이 내 손에 들린 잔을 뺏어 바닥에 내려놨다.



  “키스할래. 꼭 지금 해야될 것 같아.”



 뭐 언제는 허락 맡고 했나. 받아치기도 전에 이민형의 입술이 겹쳐졌다. 세게 밀어붙이는 힘에 몸이 넘어갈 뻔했지만 이민형이 단단히 붙잡아 막아줬다. 푸른 사위로 붉은 해가 엉키고. 내 그림자도 이민형의 그림자 안이 아닌 옆에 놓인 채 나란히 엉키고.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편 어그로 스포:

 얘네... 또 싸운다고요...? 여주가... 미미미국에 간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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