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의 캐릭터 붕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BGM: 루시아 - 담담하게 

 

 

 

 

 

 

“야, 영은수, 괜찮아?”

 

 

원철이 물어오는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지럽다고 느끼기도 전에 은수는 어둠을 느꼈다. 블랙 아웃.

 

 

눈을 뜨자 시야에는 낯선 천장이 있었다. 알코올 냄새. 어딘가 들뜬 분위기. 은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병원...인가. 은수는 잠깐 고개를 돌린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서 얼굴을 찌푸렸다.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그냥 놔둬?”

 

 

익숙한 목소리. 낮은 목소리에 귓가가 먹먹했다.

 

 

“여긴 뭐 하러 와 계세요. 바쁘실 텐데.”

 

 

수분감 없는 목에 소리가 갈라져나왔다. 은수는 이 사람 앞에서 이렇게 누워 있는 게 못 견디게 싫었다. 은수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 앞에 서있는 창준은 평소보다 굳은 표정이었다.

 

 

창준은 은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물을 한잔 따라 건넸다.

 

 

“마셔.”

 

 

싫은데... 은수는 타는 목을 억지로 축였다.

 

은수가 링거를 맞는 동안 창준은 가만히 앉아 책을 들여다보았다. 지루하지도 않은가. 은수는 힘이 없어 굳이 창준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퇴원수속을 밟는 내내 힘없이 은수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다시 지검 들어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퇴근한다고 했어. 가지.”

 

“...”

 

하여간, 제 멋대로. 은수를 태우고 창준은 늘 가던 곳으로 향했다. 작은 오피스텔.

창준이 은수를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은수가 극구 사양하는데도 창준은 은수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이불을 끌어다 목까지 받혀주곤 어루만졌다.

 

이렇게 해놓고 또 사라지겠지. 은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 먹고 자.”

 

 

창준이 건네는 약을 대충 삼켰다.

 

창준이 계속 일어서 있는 모습을 보니 속이 탔다. 가려고 일어나 있나.

약 때문이었을까 입맛이 썼다.

 

 

“가요.”

 

“어.”

 

 

창준은 그렇게 말하곤 미동도 없었다.

 

 

더 신경 쓰기도 힘드네. 은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창준과 함께 웃고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사라졌다. 은수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문득 눈을 떴다. 꿈이었나. 고개를 돌려보니 창준이 보였다.

아직 꿈인가.

 

 

열이 많이 내린 탓인지 약간은 가벼워진 몸으로 은수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머리에서 물수건이 떨어졌다. 창준은 은수의 곁에서 곤히 잠들어있었다.

 

 

...이런다고 고마워할 줄 알아요.

 

창준이 잠든 얼굴에 가만히 은수는 손을 올렸다. 열이 오른 자신보다 몇 도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내 사랑도 그렇지. 내가 더 뜨겁고. 이 사람은 차갑고.

 

은수는 창준의 뺨을 계속 쓰다듬었다. 같은 온도가 될 때까지.

 

 

 

확 감기를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독감으로. 그러면 이 사람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할까.

 

 

은수는 열에 갈라진 입술을 살며시 창준의 것에 겹쳤다.

 

 

아픈 자신의 곁에 남아준 연인에 대한 고마움으로.

보답 받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괴로움으로.

은수는 오래도록 입술을 떼지 못했다.

 

 

 

아픈 새벽이었다.

 

 

 

창준은 눈을 뜨고 뻐근한 어깨를 폈다. 은수는 특별히 미동없이 자고 있는 듯 했다. 창준은 물수건을 내려 은수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많이 내려간 것 같은데. 물수건을 빨아와 다시 은수의 이마에 올리고 창준은 부엌으로 향했다. 죽이라도 끓여줄까.

 

 

 

창준은 서툰 솜씨로 채소를 다져 죽을 끓여냈다. 냉랭하던 집안에 훈훈한 쌀냄새가 퍼졌다.

상을 차리려는데 뒤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일어났어?”

 

“뭐에요.”

 

 

등에 얼굴을 파묻은 건지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아침. 먹어야 약 먹을거 아냐.”

 

“서비스가 좋네요. 아파서 그런가.”

 

“알면 빨리 나아.”

 

“알았어요.”

 

 

 

 

은수는 더 꼭 창준을 끌어안았다.

 

 

 

“놔. 그래야 상 차리지.”

 

“싫은데.”

 

“은수야.”

 

 

창준이 그렇게 말하며 둘러진 은수의 팔을 풀었다. 평소보다 힘이 없어 쉽게 풀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조금만 기다려. 다 됐으니까.”

 

 

창준이 간단히 상을 차려내자 은수는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이런 거 못하실 줄 알았어요.”

 

“기본은 해. 먹어봐.”

 

“먹여줘요.”

 

 

은수는 보란 듯이 입을 아 하고 벌렸다.

 

하. 애기네. 아주. 애기야. 창준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죽을 한 술 떠 후후 불어 은수에게 먹였다.

 

 

 

“먹을 만해?”

 

“으음....맛없어요.”

 

“...맛없어도 만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누가 안 먹는데요. 자, 아.”

 

 

그렇게 말하고도 은수는 한 그릇을 꼬박 비웠다.

 

 

“여기.”

 

 

창준이 내미는 약도 곧잘 먹었다.

 

 

“...착하네. 밥도 잘 먹고. 약도.”

 

“빨리 나아야 일하죠. 저 오늘은 쉬어도 되죠?”

 

“그래. 쉬어.”

 

 

은수가 다시 침대에 눕는 것을 본 창준은 곁에 앉았다.

 

“안...가세요? 근데?”

 

“나도 연차 냈는데.”

 

“...왜요?”

 

“너 간병해주려고.”

 

“저 감동 받으면 돼요? 웬일이세요?”

 

“그냥.”

 

 

창준은 그렇게만 말하고 어제 읽던 책을 꺼냈다.

 

 

“자. 자야 나아.”

 

“...네.”

 

 

은수가 다시 눈을 감자 창준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은수가 쓰러지고 창준이 은수를 들어 올려 병원에 데려가는 동안 얼마나 두려웠었는지, 걱정했었는지, 심장을 졸였는지는 다만 연차 사유 한 줄로 요약 될 뿐이었다.

 

- 일신상의 이유로 금일 연차를 신청합니다.

 

 

 

 

 

 

창준이 어제부터 붙잡고 있던 책은 아직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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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터 이벤트로 창준은수/독감 소재로 쓰게 된 글입니다.

소재를 제공해주신 gmgm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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