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선수 최한 x 후원자 케일 : 배구선수 최한을 보고 싶다는 망상으로부터 시작된 썰.

오타와 아주 간단한 다듬기 정도만 하고 별다른 수정 없이 트위터에 썼던 썰 그대로 백업합니다 :) 따로 플롯을 짜고 쓴 게 아니고 그 때 그 때 생각나는대로 덧붙인 거라 설정 등에 오류 및 억지스러움이 있을 수 있으니 그냥 가볍게 보고 넘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오른쪽 클릭 - 연속재생







인기배구선수 최한 경기 징크스 물어보는 말에 붉은 색을 봐야 해요, 하는데 그거 케일 머리카락 색 말하는 거겠지. 근데 그걸 알리기 없는 최한 팬들이 그때부터 경기장에 죄다 붉은 거 가지고 오는 바람에 최한은 다음 인터뷰에서 '붉은 게 가득 차있으니 오히려 정신 사납습니다 붉은 건 제것만 보면 되니 마음으로 응원해주세요' 할 것 같다. 

최한은 세터였으면 좋겠다 왜냐면 그냥 내가 세터 제일 좋아하니까(... 

돈 많아서 기부나 후원 요청 들어오는 거 그냥 적당히 살펴가면서 내키는대로 후원해주곤 하던 케일이 능력은 출중한데 갑자기 부모님 돌아가시는 바람에 생계 막막해진 최한 얘기 듣고 후원해주게 된 거였으면. 근데 케일 그런 걸로 뭐 감사받고 공치사 듣고 그런 거 싫어해서 후원도 다 익명으로 하는데 최한한테도 당연히 누가 하는지 모르게 돈 주고 자기 대신 대리후견인 세워서 (아마도 론?) 챙겨주는데 챙겨주기는 또 엄청 살뜰하게 챙겨줘. 돈만 주는 게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보호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이따금 론을 통해 편지..라고 하기에도 뭐한 쪽지 오는데 이건 뭐 키다리아저씨도 아니고.. 근데 쪽지에 있는 말이라곤 [밥 잘 먹어] [연습 너무 무리해서 하지마라] 뭐 이런 것 뿐임. 첨엔 진짜 뭐하는 사람이지 하던 최한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니 그게 그사람만의 다정이라는 걸 알만큼이 되어서 점점 케일 궁금해질 것 같다 근데 론한테 아무리 물어도 절대로 대답이 없고 그래서 최한은 첫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저격함. 


"저를 후원해주시는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연락주세요." 


당연히 케일 연락 안 함. 근데 그때부터 최한이 모든 인터뷰에서 그 말을 하기 시작함. 


뵙고 싶습니다,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락주세요. 

보고싶습니다, 연락주세요.  


그 즈음 최한 인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서 네티즌 수사대 유난 떨지 뉴스에서도 떠들지 최한 선수가 그토록 찾는 후견인 과연 누구인가 막 난리나고 내가 바로 후원자다! 하면서 사칭 생기고 진짜 쌩난리가 나니 그제서야 케일 이마 짚으면서 한숨 쉬다가 론한테 쪽지 보내겠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제발] 


뒤에 붙은 제발,이 너무 귀여워서. 최한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처음 만나는데 사실 제 후견인이 그래도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최한은 저랑 얼마 차이 안나보이는 사람이 와서 당황했을 것 같다. 뭐지? 또 대리인인가? 나한테 거짓말한 건가? 하고 있는데 케일 첫 마디가 


"만나자고 난리칠 땐 언제고 표정이 왜 그래?" 


여서 쪽지의 그 사람 맞구나 딱 확신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어버릴 듯. 얘 혼자 왜 이러니 하던 케일이 혹시라도 최한이 자기한테 과하게 고마워 하거나 호감을 느낄까봐 냉큼 


"생각보다 어려서 놀랐지? 부모 잘 만나서 능력없이 먹고 살다가 그냥 돈 더 쓸 데도 없고 값싼 동정심에 너 도와주는 거야" 


이러는데 최한 눈에는 그 말 하는 케일 표정에서 어때 나 재수없지 진짜 비호감이지 그러니까 나한테 안 고마워도 해도 돼 이런 거 다 보여가지구 최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나는 거 참으면서. 


"목요일 저녁에만 정식훈련이 없어요. 매주, 안 되면 2주에 한 번이라도 만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케일은 얘가 여태 뭘 들은 거야? 하는 눈으로 야..! 이러는데 최한 뻔뻔한 얼굴로 말했으면 좋겠다.


"안 만나주시면 또 인터뷰 할 거예요." 


최한한테도 나름의 명분은 있었는데 이렇게 큰 후원을 받고 있는데 그 돈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음. 최한이 거기까지 말하자 솔직히, 솔직히, 멋지게 성장하고 있는 최한을 보는 것이 솔직히 조금 즐거웠던 케일은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2주에 한 번 저녁 먹기로 함. 그리고 그날 최한 팬들은 만들어만 놓고 하나도 안쓰고 있는 최한 인스타그램의 성의없는 프로필 [최한. 배구선수] 에 한 줄이 소리소문도 없이 추가된 거 발견하는데 [최한. 배구선수. 붉은색 좋아함] 


그렇게 둘은 2주에 한 번씩 저녁을 먹게 됨. 그동안 최한이 케일에 대해 알게된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섬세하며 말랑거리는 인간이라는 점이었고 케일이 최한에 대해 알게 된 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모르겠는 애라는 것이었다. 자기 딴에는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재수없게 구는데 도대체 왜 얘는 만날 때마다 더 자길 좋은 사람 보는 눈으로 보는지 정말 모르겠네,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애를 어케 세상에 내놓지 하는 생각을 하며 연습하다 생긴 최한 팔에 멍을 세상근심어린 표정 - 본인은 하는 줄도 모르는 - 으로 보는 케일. 


*


최한에게 있어 케일을 향한 불만은 딱 한 가지였는데 자기 경기를 보러 안 온다는 거였음. 경기 보러 안 오실래요? 할 때마다 케일은 나 배구 안 좋아함, 하곤 들은 척도 안하는데 뭐 진짜 심각하게 불만이라고 할 거까진 사실 아니지만 자기가 가장 잘하는 건 배구인데 그걸 못 보여준다는 게 내심 아쉽긴 했던 차에. 


최한은 사실 인터넷이랑 거리가 멀었는데 어느날 문득 엄청 심심하고 그냥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폰으로 웹서핑 하다가 자기 팬카페에 들어가보는데(만들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관심이 없었음. 인터넷 잘 모르기도 하고) 거기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붉은머리를 한 최한광팬()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걸 보게됨. 


붉은 머리...? 거기서 뭔가 뜨끔한 최한 게시판에서 붉은 으로 검색해서 글 읽어보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최한의 모든 경기를 보러오는 어느 잘생긴 붉은머리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차있는 거. 항상 경기 시작하고 나서 슬그머니 들어오는데 본인은 조용히 들어오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일단 머리가 튀고 그리고 진짜 조온나 이쁘고 잘생겨서 늘 눈에 띤다고 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경기 관전하는데 경기 상황이 어떻든간에 집요하게 세터만 본다고 최한광팬으로 다 소문남 ㅋㅋㅋㅋㅋㅋ 


세터 고생하면 같이 표정 일그러지고 세터 넘어지거나 충돌 있으면 세상무너지는 표정 짓고 그러다가 경기 끝나면 누구보다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고.. 중간중간 어떤 눈새팬들이 그 사람 찍은 사진도 올렸던 모양이지만 일반인사진 미쳤냐고 욕먹고 지워져서 최한은 볼 수 없었지만 말만 들어도 확실히 케일임. 나 배구 별로 안 좋아해 하고 심드렁한 척 하던 얼굴이 떠올라서 그날 밤이 새도록 최한은 잠 못자고 케일에 대한 얘기만 계속 찾아보다가 급기야 가입까지해서(가입해야만 글을 쓸 수 있음) 글 하나를 남기게 된다. 


[그 붉은머리 남자... 정말 최한 팬인 것 같았습니까?] 


순식간에 댓글 수십개 달리는데 하나같이 말도 마라 그 눈을 보면 사랑 아니라고 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거의 세상에 오직 너만 보여 수준이다, 간증글 쏟아지고 사이사이 [근데 이 글 말투 좀 낯설면서 익숙한 거 나뿐이야...? ...한이니?] 이런 댓글 달리기 시작해서 최한 식겁해서 글 지운다. 글이 갑자기 지워지니까 갑자기 게시판 술렁임. 

- 아 모야 드립친 건데 지우니까 존나 쎄하잖아 저 사람 지금 가입해서 저게 첫글인거암?? 

- 말도안되는 궁예질 ㄴㄴ 한이 인터넷 잘 안 한댓잖아 

ㄴ안하는거지 못하는건 아니잖아 아니 그냥 글이 존나 이상하니까 ㅋㅋ 왜 지우냐거.. 

막 이러는데 최한은 그때 이미 폰 끄고 누워서 발버둥치는 중이었음. 막 꿀 떨어지는 눈으로 봤다느니 세터만 봤다느니 그건 사랑에 빠졌다고 안 할 수가 없었다느니 그런 말들 자꾸 속을 간지럽게 하겠지. 그리고 갑자기 케일이 너무 보고싶어져서. 아침이 밝자마자 최한 케일에게 연락함.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


[무슨 일 있어?] 


시간 없어. 주말에 널 왜 만나. 그런 대답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최한은 생각지 못한 되물음에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또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음 도대체 저 말 어디에서 또 걱정거리를 혼자 느낀 건지 짧은 문자였지만 최한을 걱정하는 마음이 툭툭 묻어났어. 이러면서 왜 맨날 못된 척, 이기적인 척, 무심한 척을 하는지 몰라. 이렇게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마음을 가져놓고서. 그런 생각을 주억거리며 최한은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액정을 눌러 답을 보냈음. 


[보고싶은 영화가 있는데, 같이 볼 사람이 딱히 없어서요] 


사실 무슨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모르지만. 


[..무슨 영화가 보고싶은데] 


대답은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한 채 무심한듯 다정했음. 안봐도 뻔했지 같이 볼 사람이 없다는 최한의 말이 또 마음에 걸렸을 거야. 부모가 없고 가난한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이야 케일의 머릿속에 차고도 넘칠 테니까. 최한은 그런 케일의 마음이 또 따뜻하고 따뜻해서 서둘러 지금 상영하는 영화 중 예매율이 제일 높은 영화가 뭔가 대충 둘러보곤 그 영화 제목을 보냈고 얼마 안가 답이 왔음. 


[토요일 두시까지 준비하고있어 데리러 갈 테니까] 


토요일. 최한은 배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연습에 집중이 되지 않는 일이 뭔지 깨달았지. 그렇게 마침내 토요일이 되었고 정말 집 앞까지 최한을 데리러 온 케일은 최한을 데리고 극장의 프라이빗관을 빌려서 영화를 보여줌. 팝콘이랑 콜라도 사고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데 요즘 전세계 흥행 중이라는 히어로무비는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어. 최한은 내내, 어두운 극장 안 화면 불빛에 비친 케일의 얼굴을 힐끔거리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부족한 건 아무 것도 없어보이는 사람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한 걸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갑자기 밀려왔어. 최한은 생각했음. 만약 동정이라면. 이 모든 게 그저 저를 불쌍히 여겨 동정하는 거라면. 그러면 그가 더 오래 자신을 동정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것조차 자신은 소중했으니. 


영화가 끝나고 재밌었냐 묻는 케일의 물음에 최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음. 뭘 봤어야 알지. 그리고 둘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감. 어쩐지 로맨틱한 조명이 가득한 고급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아 식사를 하자니 왠지 손바닥이 간질거려 최한은 몇번이나 바지에 손을 문질렀음.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이 모든 하루가 마치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혼자 얼굴을 붉히다가 문득 팬카페에서 봤던 붉은머리를 가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최한이 입을 열었어. 


"서브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요즘" 


케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게 보였지 최한은 그가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졌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을 이었지. 


"본 적이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제 서브폼이 엉망이거든요." 


물론 사실이 아님. 최한의 서브폼은 국대감독부터 시작해 내로라하는 선수들에게도 모두 극찬을 받는 정말 완벽에 가까운 폼이었음. 서브 가르쳐줄 때 예시영상으로 쓰일 정도였고 극강의 공격력을 자랑해 서브포인트로 득점을 쓸어담는 수준이었으니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지금 최한이 얼마나 기막힌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었을 거야. 세터인 최한의 별명은 '서비스에이스'였는데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있는 거였지. 


"도대체 어떻게 고쳐야할지 모르겠어ㅅ.. " 


그리고 최한이 거기까지 말을 했을 때.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니 폼이 얼마나 완벽한ㄷ...!!" 


연달아 흘어나오는 말도 안 되는 최한의 말에 케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가 아차 싶어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 물론 이미 늦었음. 케일은 눈앞에서 빙긋빙긋 웃는 최한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속았다는 걸 알았지.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어 자기가 매번 경기를 보러 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머릿속이 복잡했어. 몰래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자신이 이미 최한광팬으로 소문이 파다하다는 걸 짐작도 못하는 케일이었던 것.. 그런 케일에게 이윽고 웃음을 멈춘 최한이 말했어. 


"앞에 앉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어주세요. 경기 시작 전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낭패라는 표정을 하는 케일을 보며 최한은 다음 경기부터는 경기장에서 케일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걸 확신했지. 그리고 그 담부터 최한의 팬들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 최한이 항상 허공 어딘가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하는 의식 같은 행동을 매번 하는 것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더 자주 밥을 먹고, 종종 영화를 보고, 가끔은 통화를 하면서 시간이 흐를 것 같다. 그 사이 최한은 프로팀에 입단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케일의 후원은 끝나지만 서로 그냥 아무 말도 안 한 채 연락은 계속 이어갈 것 같아. 그러다가 어느날 여느 때처럼 케일이 최한 경기 보러 갔는데 경기 중간에 최한 팀 선수들끼리 사인이 안 맞아서 최한이랑 동료랑 허공에서 부딪히게 됨. 공중에서 중심이 흐트러진 최한이 불안정한 상태로 착지하는데 그 순간 케일의 눈에 최한 무릎 삐끗하는 게 보여서 저도 모르게 케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다. 순간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갑자기 일어난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는데 그 때 최한이 무릎을 붙들면서 쓰러지겠지. 경기 중단되고 팬들 막 소리지르고 난리나고 그 가운데에서 케일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음. 케일의 눈에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진 최한의 표정이 각인처럼 남아있고 본인은 우는지도 모른 채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서있는 케일을 챙겨서 나온 건 론이겠지. 


최한은 바로 병원으로 실려가고 케일이 그 병원에 도착했을 때 최한은 이미 수술실에 들어간 후일 것 같다. 병원측에서 케일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는데 케일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있고 론이 대신 최한 군의 후견인이자 보호자입니다, 하고 대답할듯. 이미 후원은 끝났지만 최한과 후원자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였으므로 병원에서도 딱히 더 말은 없었고 몇 시간이나 이어진 수술실의 앞에서 케일은 내도록 울고 있었음. 론이 대신 대답한 '보호자입니다'라는 대답이 연신 귓가에 맴돌았어. 보호자인데. 내가 저 아이를 지켜주어야하는데 지금 이 순간 케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 처음 경기장에서 최한을 봤을 때. 한여름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최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 최한이 괜찮을 수만 있다면 내 무릎을 대신 가져가도 좋아, 그런 생각을 하다가 케일은 문득 깨닫겠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최한이 자신의 삶에 들어와있음을. 


*


최한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새벽이었어 언제 잠들었지...? 뭔가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서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최한은 이내 자신이 경기 중에 무릎을 크게 다쳤고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챘음. 결국 수술을 했구나, 의외로 담담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다리 상태를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있어 고개를 돌려보니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케일이. 거기에 최한의 손을 꼭 붙든 채로 엎드려 잠들어있었음. 

아, 나한테 이 사람이 있었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최한은 미소를 지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삶의 전반에 걸쳐 매순간순간마다 최한은 이제 정말 자신은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살았지만 그 서러움이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될 때 중 하나는 당연히 아플 때였어. 가볍게는 감기서부터 크게는 운동을 하다 다쳤을 때. 혼자 약을 먹고 자신의 몸을 챙기고 정신을 잃을 만큼 앓다가 일어났을 때도 여전히 혼자여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밥을 차려 먹어야했던 그런 순간들은 셀수도 없이 많아서 최한은 차라리 나는 그런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어.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가 정말 힘들 것 같았거든. 그런데 눈을 뜨니 케일이 있는 거야. 자신이 약하고, 아프고, 힘든 순간에. 이 새벽을 혼자이지 않게 케일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이런 사람을. 

어떻게 이런 사람을. 

최한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히. 


최한을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가만히 케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방금 그런 감정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당황스럽거나 놀랍거나 두렵진 않았어. 그냥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그러기 위해 태어났던 것처럼. 그를 사랑하는 자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졌어. 그리고 그 때. 최한의 손길에 케일이 짧게 반응을 하더니 이내 부스스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음. 


"집에 가서 주무시지 그랬어요, 허리 아프게 왜." 


최한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반쯤 넋이 나가있는 케일을 향해 최한이 먼저 말을 걸었어. 그 목소리가 너무 태연하고도 담담해서. 다친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게 그렇게 여상해서. 그래서 오히려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졌어. 그게 케일에게는 더 아프게 느껴졌거든. 케일은 애초에 위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음. 그의 주변에 딱히 위로를 건낼만한 사람도 없었고 위로를 해주고 싶을 만큼 가까운 사람도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서 케일은 그 애를 다독여주고 싶은데. 아프고 두려울 것이 뻔한 그 애를 어른스럽게 달래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런 말이 안나왔어. 괜히 입을 열었다 주제넘는 말을 하고 그 애를 더 상처 입히면 어떻게 해? 그래서 케일이 겁을 먹고, 그런 주제에 최한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최한이 다시 말했음.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말에 케일은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았어. 프로팀 입단한지도 얼마 안 됐는데 갑자기 당한 무릎부상이 얼마나 속상할지 짐작도 안 가. 케일은 겁이 나서 입을 열었어. 


"괘, 괜찮아, 한아. 잘.. 수술 잘 됐대 응?" 


넘 무섭고 당황해서 케일은 자신이 그 애를 한아, 그렇게 부른 줄도 모르고 있었음. 그리고 케일도 모르는 그 호칭을 듣고 마음이 벅찬 최한이 말을 이었음. 


"저요.. 저 말이예요.." 

"응. 응. 괜찮아. 조금만 재활하면.. 아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그랬어. 괜찮아. 내가 있어줄게" 


한아. 내가 있어줄게. 

그 말이 최한의 마음에 어떻게 쌓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최한은 더 두면 자기 대신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케일의 뺨을 그제야 부드럽게 감싸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장 필요했던 말을 꺼냈어. 


"좋아해요, 케일님을. 제가. 좋아해요." 


케일의 말이 멈췄어. 움직임도 멈췄어. 하지만 최한은 멈추지 않았지.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무서워서 모르는 척 한 것 같아요. 제가 밉다고 하실까봐. 절 안 보고싶어 하실까봐." 


사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 세상 못된 척을 어설프게 하는 걸 처음 봤을 때부터. 아마도 그 때부터. 


"그런데 이제 못참겠어요. 더 참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누가... 누가 저보다 먼저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꼭 준비라도 한 것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최한의 목소리 앞에 케일은 여전히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하고 있다가. 


"그래서 말하는 거예요. 좋아해요. 도망가지 말아주세요. 저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케일의 입술이 그제서야 조금씩 움찔거렸어. 

내가 너를. 내가 어떻게 너를. 


"저를.. 좋아해주세요" 


내가 무슨 수로 너를 미워하겠느냐고. 마치 태양을 바라보듯 그렇게 절대적인 애정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너를. 세상 무엇보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너를. 내가 무슨 수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그 말이 떨리고 쑥스러워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않아 입술만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케일에게 이윽고 최한의 숨결이 천천히 다가왔고, 그것이 그들의 마법같은 첫키스였어. 





fin. 



좋아하는 것을 씁니다. 판소 덕질 중. 트위터 @blanket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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