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Favourite Clothes





오래된 노트-전정국 2




"야, 정꾸. 저기야?"

"어."


무탈히 병원 근처에 도착했다. 벌써 하늘은 완연히 어두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시원히 내달리려던 계획이 무산된 충격은 여전했다. 어린 애 같다는 말을 또 듣기 되리란 걸 알면서도 도무지 시무룩한 기분을 티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이 댓발 나온 채 땅을 밟았다.


"헬멧 꼭 쓰고 가라."

"당연하지. 내가 너냐?"

"말 한번 예쁘게 한다. 이제 진짜 가."

"오냐. 이따 연락할게."


친구는 바이크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건 채로 손을 크게 두어 번 흔들어 주고 등을 돌렸다. 병원을 향해서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갑작스레 뒤에서 요란한 폭파음이 터졌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진호야!"


병원 방향으로 진입하던 승용차와 친구의 바이크가 충돌한 모양이었다. 승용차와 바이크 모두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 주위로 막 새빨간 불이 번지고 있었다. 친구는 사고 현장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지가 까만 아스팔트 위에 이상한 각도로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다급하게 뛰어가 상태를 살폈다. 진호야, 진호야 하며 이름을 몇 차례 불러 보았지만 이미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얇은 옷 한 장만 걸친 상반신에 유리 파편이 셀 수 없이 많이 박혀있었다. 끔찍했다. 아마 부딪힐 당시의 충격으로 승용차의 앞 유리창이 산산조각난 것 같았다. 

어디가 어떻게 어긋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옆에서 제발 살아나라고 손을 벌벌 떠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다행스럽게도 지나가던 행인들이 신고한 듯, 오래 지나지 않아 앰뷸런스가 왔다. 사이렌 소리를 듣자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서 병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벌떡 일어서서 앰뷸런스에 수신호를 보내려 몸을 돌린 순간, 저 너머 어둠 사이로 한 여자와 아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승용차에 타고 있다가 충돌했을 당시의 충격으로 튕겨져 나온 것 같았다. 언뜻 보아도 두 사람 다 출혈이 심했다. 순간 망설여졌다.

앰뷸런스는 한 대, 사람은 셋.

나는 내 앞에 누워있는 친구와 두 모녀를 번갈아 보았다. 세 사람 다 지금 곧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앰뷸런스 한 대로 세 사람을 동시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간 윤리와 현실의 실제 상황 속 인간 윤리의 간극을 실감했다. 계속 고통에 찬 신음만 내뱉던 여자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사, 살려 주세…."


수치심과 스스로에 대한 경멸 속에서 나는 그 목소리를 외면했다. 앰뷸런스에서 내린 구급 대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친구를 먼저 발견하게 했다. 친구는 곧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에 올랐다. 보호자 신분으로 함께 오른 나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다른 구급 대원들이 곧 구해 줄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몇 분 남짓한 시간이 백 년처럼 느껴졌다. 응급실 앞에 다다라 내릴 때까지, 어쩐지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죄책감이 지나치게 섞여 비릿했다.




 




MEDIC 05

거울을 들여다보는 동안

부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거울을 부술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을 바꿔야 한다.


 


 




내가 예민한 것은 아닐까? 스스로 검열을 할 겸, 이 증오와 미움에 당위성을 부여할 겸 당직실에 홀로 앉아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민윤기 과장은 처음 본 나를 물건 취급한 것도 모자라 레지와 인턴들 앞에서 개망신을 줬으며, 응급실에서 행한 시술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알면서도 트집을 잡아 내 자존심을 제대로 뭉개 놓았다. 그래,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제 갓 날개를 펴고 비행하는 법을 배우려는 새내기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이런 식의 가르침을 받은 인턴이 대체 어느 과에 가서 자신감 있게 뜻을 펼치겠으며, 또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분위기 흐리는 데는 또 일등일 것이 분명했다.

좋은 점은.... 글쎄, 뭐가 있더라. 하나하나 꼽으려 손가락을 다섯 개 준비했으나 곧 관뒀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하고 박식한 것으로 유명한 의사 밑에서 인턴 마지막 한 달을 버텨냈다는 훈장이 하나 주어지리라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내가 비리비리하게 말라서 멸치 냄새나 풍기는, 신경쇠약증에 밤낮 시달리는 인간이 된다는 조건으로. 아, 진짜 인턴이 다 뭐라고. 힘이 빠져 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 미이라처럼 빼싹 마른 나를 본 부모님이 오열하는 광경이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우리 아들, 많이 힘드니? 상상 속 엄마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선 아빠의 이마에 그어진 주름살도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아, 엄마. 우리 과장님 좀...!


백일몽에 몰두하려는 찰나, 주머니 속 호출기가 진동했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 민윤기 과장의 호출이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의 결론은, 도주였다.






건조하고 차가운 날씨였다. 로션을 제대로 바르지 않은 얼굴을 스치고 가는 찬 바람 때문에 양쪽 뺨이 따갑고 화끈거렸다. 하나만 하면 참 좋을 텐데. 긴장감에 잔뜩 심약해진 내 마음을 증명하듯 이마에서는 연신 땀이 송글송글 돋아났다.


"아… 손 아파."


손바닥을 펴 보니 빨갛게 부어 있었다. 역시 너무 무리였나? 하지만 이 정도 속도가 아니라면 얼마 못 가 잡힐 게 뻔했다. 아직 병원을 벗어나려면 한참 남았다. 앞길이 구만리라는 말을 이런 상황에서도 활용할 수가 있었던가. 아무튼 조금 지나면 곧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이 나올 예정이었다. 거기서부턴 속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 하나로 버티는 중이었다. 나는 아릿한 고통 속에서도 열심에 열심을 더하고 있었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제발 민윤기 과장한테만 안 걸리게 해 주세요."


언덕을 내려가며 주문처럼 간절하게 몇 번이고 빌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나가던 행인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시선 따윈 내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민윤기 과장한테 안 잡히고 병원을 빠져나가는 게 지금의 버킷 리스트, 일생일대의 목표니까. 그렇다. 맑은 날, 조금은 쌀쌀하지만 화창한 이 대낮에 나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빠져 나가는 희대의 탈주극을 벌이고 있었다. 새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채.


 


*


 [민윤기 시점]



"도망갔다고?"

"네… 당직실까지 찾아가 봤는데, 그게…."


내내 옆에서 쭈뼛거리던 김태형 레지가 조심스럽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무슨 대단한 소식인가 싶어 잠시 구석으로 향했는데, 예상보다 꽤 황당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감추지 못한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잡아서 대령하라고 엄포를 놓고 싶었지만, 지금 전정국 인턴 하나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술 실습을 멈출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인턴들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수술이 세팅되고 있는 수술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이 진행될 수술장 안에는 여러 명의 다른 스태프들이 신속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수술의 집도의인 내가 마취의에게 인튜베이션intubation이 잘 되었는지 재확인차 물었다.(물론 마취의가 그런 실수를 했을 리는 없겠지만, 기관 내 삽관 중 레지 1, 2년차들도 간혹 실수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다.) 

인튜베이션(intubation, 기관 내 삽관) 전신 마취 시 초반 환자의 정맥에 약을 주입하는데, 수면 상태를 신속하게 유도하기 위하여 마스크를 통한 호흡을 잠시 실시한다. 다음으로 마스크를 환자 입가에 대고 주머니를 짜는데, 사실 보는 것처럼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마스크를 환자 안면에 적절히 밀착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경우 바람이 샌다. 이 단계가 완료되고 나면 수면 상태인 환자의 구강을 통해 튜브를 넣게 되는데, 이때 부드러운 튜브가 기관 내로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관 내 삽관이라고 한다. 참고로 튜브가 기관 뒤에 위치한 식도로 잘못 들어가기 쉽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기관은 숨 통로이며 폐로 통하고, 식도는 밥 통로이며 위로 통한다. 만약 튜브가 식도로 들어가게 될 경우 위에 바람을 주입하게 되고, 배만 부르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마취가 완료된 후 이제 혈압을 측정하는 레지 1년차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단계에서 내가 수술복으로 환의할 동안, 인턴들은 이 모든 상황을 수첩에 적는 것이 보통의 순서였다.


"오늘 수술은 환자가 고령임을 감안하여 흉강경으로 수술할 겁니다. 흉강경은 학생 시절 이론으로 배운 바 있어 이미 알겠지만, 가슴에 수술 도구가 들어갈 수 있게 구멍을 뚫어 시행하는 수술입니다. 개흉 수술에 비해 비교적 수술 부위가 작고 수술 시간도 짧은 것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환자의 회복 속도 역시 개흉 수술에 비하면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빠릅니다."


환자의 가슴에 세 개의 구멍이 생겨났다. 뒤따라 흉강경 기구가 준비되었다. 누워있는 환자 곁으로 다가간 나는 가위 손잡이처럼 생긴 흉강경 수술 도구의 조종기에 손가락을 넣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폐암과의 전쟁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마치 습관처럼, 평소에 의무적으로 짓던 미소가 자연스레 사라졌다. 아무리 경험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매 수술마다 또다른 경우의 수가 붙기 때문에 의사는 늘 긴장 상태여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면 함께하는 이들 역시 긴장하는 법이다. 최대한 능수능란하게 흉강경 수술 도구를 조작했다. 

환자의 가슴에 난 구멍 밖, 내 손과 모니터 속 수술 도구들의 움직임을 인턴들이 바쁘게 좇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것처럼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 장면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수술은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나는 빠르고 정교한 손놀림으로 이 한없이 좁은 공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암세포가 자라난 환자의 폐를 잘라낼 수 있는 상태로 만들기 위한 준비였다.


"흉강경 수술은 임상실험을 많이 해 본 사람일 수록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새로운 흉강경 수술 도구가 나올 때마다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역시 흉부외과 의사의 일이기도 합니다."


절제와 봉합을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는, 집게같이 생긴 특수 도구가 가슴 구멍을 통해 환자의 폐 부근으로 접근했다. 그 집게가 폐의 병변 부위를 덥석 물었을 때, 흉강경 도구를 다루는 내 손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가위로 무언가를 자르듯 집게로 폐를 순식간에 잘라내는 동시에 잘린 양 단면을 깔끔하게 봉합해야 한다. 그런 뒤 빠르고 정교하게 수술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그때까지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암세포가 침범한 폐를 잘라서 꺼낼 때에는 몸속에 미리 의료용 비닐봉투를 넣어 그 안에 절제된 폐를 담은 후 흉강을 통해 몸 밖으로 꺼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도의란 수술장에서 일종의 지휘자와 같습니다. 집도의만 잘해서도 안 되고, 모든 스태프들이 함께 잘해야 수술이 완벽하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수술장의 모든 상황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진정한 집도의의 역할인 것이구요."


시계를 보니 예상 시간보다 약간 빠르게 마무리된 것 같았다. 긴장으로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손끝이 풀리며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태연한 표정으로 모자를 벗으며 수술실을 나섰다. 내 뒤를 김태형 레지가 뒤따랐고, 그 뒤로 인턴 둘과 다른 레지 2, 3년차들이 함께 따랐다. 수술실 마무리는 마취과와 레지 1년차들이 할 것이다. 


"과장님, 회진…."

"잠시만."


김태형 레지의 회진 얘기에 나도 모르게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미안한 마음이 아예 안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피곤함과 짜증이 순식간에 몰려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외래 진료, 수술, 회진. 거기에 틈틈이 논문 검토까지 해 줘야 하는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은 사실 아무나 감당하기 힘들다. 밤을 지새운지 오늘로 벌써 나흘째. 꿈길을 걷는 듯한 느낌 속에 오후를 맞은 나는 의사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거기다 수술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전정국 인턴 도망>이라는, 평이한 단어들의 환장할 조합까지. 나는 잠시 그렇게 서 있다 곧 다시 고개를 두어 번 절레절레 젓고는 웃었다. 김태형 레지가 움찔, 몸을 조금 뒤로 뺐다.


"김태형 선생님."

"네?"

"나와 나머지 레지와 인턴들은 오후 회진을 돕니다. 그리고 김태형 레지는."

"……."

"전정국 인턴을 잡아옵니다. 당장."



*


 


"헉, 헉."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분명 지민이 형이 이 길이 지름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장장 두 시간 반을 헤매서 찾은 나의 탈출구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쪽문이냐는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작은 문과 맞먹는 크기였다. 물약이나 쿠키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었다. 여긴 팍팍한 현실이니까. 이건 나를 엿먹이려는 지민이 형의 치졸한 장난임이 분명했다. 워낙 큰 대학병원인데다 대학교와도 붙어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들어서면 그대로 실종자 되기 십상이었다. 망할 병원. 후원금이 얼마나 많은 건지, 곳곳에 환자들을 위한 정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비슷한 모양이 한두 개가 아니라 길이 더욱 헷갈렸다. 


"어? 저긴가?"


그렇게 휠체어를 타고 개처럼 고생한지 딱 두 시간 반 만에 쪽문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의 문을 발견했다. 좋아. 대충 보니 저기로 나가면 집에 가는 택시도 잡을 수 있겠어. 더욱 부어오른 손바닥에 더욱 힘을 주어 휠체어를 굴렸다. 스스로의 처지가 딱했지만 나는 진지했다. 일단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말해야겠어. 다른 병원으로 옮겨달라고. 


"민윤기 과장하고 지내느니 그냥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게 올바른 선택 아니냐, 진짜."

"왜?"

"왜냐면 민윤기 과… 으악!"


문에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이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김석진 과장님이었다. 그것도 입에 웬 막대사탕 하나를 문 채였다. 화들짝 놀란 나는 무리하게 방향을 돌리다 그만 휠체어와 함께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쓸린 팔과 다리에 흙이 잔뜩 묻었고, 먼지가 들어간 듯 눈도 따끔거렸다. 말끔했던 가운도 엉망이 되었다. 쪽팔림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김석진 과장님은 놀란 듯 서둘러 다가와서 나를 일으켜 주며 괜찮냐고 물었다. 당신 같으면 괜찮겠어요? 나는 탈출 계획이 좆됐음을 마음 깊이 느끼며 가운을 툭툭 털었다.


"괜찮아? 놀라게 하려고 한 건 아닌데."


퍽이나.


"무튼, 일어날 수 있겠어?"

"네? 아, 네."

"못 일어나겠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부축해 줄게."

"예…?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내가 널 업을 수는 없잖아?"

"네, 그렇죠, 아니요. 저, 그런 게 아닙니다. 저, 과장님, 제발, 제발…."


순간적으로 나올 뻔한 욕을 침과 함께 시원하게 삼켰다. 과장님, 설마 지금 민윤기 과장님한테 가려고 하시는 건 아니죠? 과장님은 환한 미소로 나를 돌아보며 내 팔뚝을 단단히 쥐셨다. 방향은 역시나였다.

엄마… 살려 줘, 제발. 


 

*



다 큰 남자 둘이서, 그것도 의사 둘이 남사스럽게 꼭 붙어 걸어오니 당연한 수순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들러붙었다. 영국 왕실의 대관식처럼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병동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내가 체념했다는 것을 연신 어필했음에도 김석진 과장님은 나에게 꼭 붙어서 손을 놓지 않으셨다.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아까 휠체어는 실습 겸 한번 타 본 것이라고 횡설수설 변명을 시도했지만 내 말은 모두 흘려 듣고 계신 것이 분명했다.


"다 왔다."


머리에 피가 쏠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다. 


"민윤기, 들어간다? …어? 회진 중인가."


과장님은 의아한 어투로, 여태 꼭 붙어서 온 사실을 부정하는 양 나를 의자 쪽으로 슬며시 미셨다.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 눈을 꾹 감은 채로 과장실에 발을 들인 나는, 민윤기 과장의 부재 소식에 안도하는 마음으로 재빠르게 눈을 떴다.


"…일리가 없지."


아, 제발.


"안녕? 도망간 인턴 씨."

"과장님, 저기 그게…."

"긴 말 필요없이, 일단 휠체어 값부터 월급에서 제하겠어. 고철 덩어리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아니, 그건…."


그걸 어떻게 그새 아셨어요. 나는 천천히 후보를 탐색했다. 김태형 레지, 박지민 인턴, 또….


"둘이 할 얘기가 많아 보이네. 난 나중에 올게."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과장님, 제발 가지 마세요. 이대로면 여기서 살인 사건 한 건 날 것 같거든요? 나의 간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김석진 과장님은 웃으며 방을 나갔다. 나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분명히 모른 척한 것 같다.

흉부외과 과장실을 배경으로 방금 도망갔다가 잡혀온 인턴 전정국, 그리고 살얼음도 다 박살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민윤기 과장이 투탑 주연으로 앉아 있었다. 폭력성이 짙은 영화니까 19금 딱지가 붙지 않을까.


"전정국 선생님."

"…네."

 

비장한 각오를 한 나는 떨지 말고 담대하자는 무언의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민윤기 과장을 바라보자, 묘한 표정을 한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조용한 과장실 안에 발소리가 일정하게 울려퍼졌다. 아, 또 왜 이러실까. 갑자기 모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살려는 드릴게.' 나는 지금 그 앞에 앉은 상대방의 기분에 백 번 공감할 수 있다. 발끝부터 전신까지 서늘함이 퍼졌다. 과장님은 내 옆에 천천히 앉았다.


"손이 많이 부었네요."

"아, 저, 그게."

"얼마나 빨리 도망가려고 안달했으면."


과장님의 흰 손이 내 손을 천천히 잡았다. 지금 이 순간, 상사 앞에서 혀 깨물 용기가 없는 모든 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싶어졌다.


"그러나 한 번만 더 이런 일로 나를 신경쓰게 한다면."

"……."


과장님이 느닷없이 내 손을 틀어쥐더니, 일순간 세게 잡아당기며 자신이 앉은 방향으로 끌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끓는 듯 아프고 쓰라린 손바닥이 세게 눌렸다. 나는 자동으로 억, 하고 짧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 가까이 들리는, 민윤기 과장의 피를 말리는 한 마디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절대로 가만두지 않아."


아,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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