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재밌는데, 내가 남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


그 말에 게이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김 샜다는 표정이었나. 게이는 전반적으로 표정이 별로 없었다. 동생 엿 먹이고 싶을 때나 나오는 웃음 띤 얼굴이 전부였다.


'얘기 다 끝났으면 일어난다. '

'너무 정 없네. 이것만 비우고 가자.'


흥미도 떨어졌고, 주머니에선 정호석으로 추정되는 진동이 계속해서 울렸다.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이런 종류의 인생도 있구나.’정도가 게이에 대한 감상평이었다.

일어서는 나를 올려다보며 정 없다고 말하는 게이의 얼굴은 역시나 무표정이었다. 진짜 정 없어 보이는 애가 그런 말을 하니까 기분이 살짝 애잔스러워졌다.







정상인

writer.라이트








한 시간 공강을 틈 타 소운동장 야외벤치에 누워 있었다. 요즘 볕이 좋아 밥을 안 먹어도 졸음이 절로 밀려왔다. 아아…. 겨울 오면 뒤지는 거야…. 눈을 감고 되는대로 떠오르는 생각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민 오빠 안녕하세요!! 저 민영이에요 헿ㅎㅎ...바쁘세요?] 12:40PM

진동이 울려 배 쪽에 놓아두었던 폰을 집어 들었다. 살짝 눈이 부셔 오른쪽 실눈만 간신히 뜨고 읽어 내려갔다. *추가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사칭에 주의하세요.* 전민영이었다. 축제가 끝난 지 3일만이었다. 문득 마지막 잔을 같이 비웠던 게이의 동그란 버킷햇이 떠올랐다. 한참 폰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 늦게 연락드렸죠? ㅠㅠ바로 연락하면 부담스러우실까봐 기다렸어요.]

[혹시 시간되시면 밥 한 끼 하실래요? 제가 살게요.] 12:43pm

몇 분 후 연달아 진동이 울렸다. 명백한 읽씹이었는데 3분 만에 추가로 카톡이 날라 왔다. 사랑만 받고 자랐다더니, 눈치 없는 척을 참 잘했다. 제가 살게요? 어차피 지불은 복학생 남자 선배의 몫이란 걸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저 사실 자과대 가는 길에 오빠 닮은 사람 본 것 같아요. 지금 소운동장이시죠!!!] 12:50PM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넉넉한 회색 후드 위로 낙엽이 몇 장 떨어져 있었다.

 








"맛있다. 안 드세요?"


전민영이 제법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파스타를 돌돌 말아 먹었다. 팔짱을 끼곤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쭉쭉 빨아 마셨다. 주위에서 힐끔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전민영이 먹다 말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속삭인다. 오빠 또 울 학교 페북에 사진 뜨는 거 아니에요? 나까지 찍히면 민망하겠다. 전민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자급자족 쇼에 할 말이 없어져 창밖을 바라봤다.

전민영은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카톡을 씹은 이후로도 굴하지 않고 밥, 밥, 밥거리며 연락을 했다. 먹고 떨어지라는 심정으로 약속을 잡아 학교 앞 파스타 집에 데려다 놓긴 했는데, 영 입맛이 없었다.

얼굴이 닮지 않은 형제나 남매는 분위기라도 비슷한 게 정석이었다. 게이의 얘기가 사실이긴 했는지 전민영과 게이의 접점이라곤 단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민영이 크림파스타를 다시 포크로 돌돌 집어 말아먹었다. 입에 묻히지도 않고 잘만 먹더니, 내가 빤히 쳐다보자 어설프게 먹는 시늉을 했다. 입술 밖을 벗어난 크림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질 법도 한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와 눈을 마주친다.


"저 뭐 묻었어요?"


어설픈 여우는 곰보다 못했다. 귀여워 보이던 얼굴도 이젠 그냥 넙대대해 보였다. 게이는 존나 잘생겼던데.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꼭 무슨 법칙처럼 양자나 입양아는 본 자식보다 얼굴도, 능력도 월등했다. 현실에서도 가능한 일이구나 싶었다.


"응. 더럽다."


앞에 놓여 있던 휴지를 전민영 오른 손 앞으로 밀어주었다. 아주 잠깐 표정이 굳은 게 보였지만, ‘감사합니다.’ 하며 해맑게 인사해왔다.


"오빠 카페는 제가 살게요!"

"네가 밥 산다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빨며 말하자, 전민영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것도 찰나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갔을 정도였다.


"그럼 오빠가 카페 사주…."

"농담."


빌지를 들고 일어섰다. 살짝 굳어있던 전민영의 표정이 금방 풀어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오빠 카페 어디 갈까요?"

"밥 먹자며. 카페까지 가는 게 코스야?"


전민영이 내 물음에 굴하지 않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 오빠한테 관심 있어요."


리조또라도 먹을 걸 그랬나.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연거푸 두 잔째 마시니 속이 쓰라렸다.


"지금 당장 대답 안하셔도 돼요. 저 알게 되신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쉽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었어요."


교수면담까지 30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른 볼 일도 없고 시간 때우기도 애매해 카페로 들어와 앉았다. 전민영은 끊임없이 조잘대기 바빴다. 나는 그저 원목테이블에 새겨진 나이테를 따라 그리고 있었다. 꼭 유두같이 생긴 반점이 눈에 띄었다. 시시했다.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

"네?"


구구절절 고백하는 와중에 대뜸 가족관계를 물어오는 과선배의 의중은 무엇일까. 크게 뜨여진 전민영의 눈동자에서 미약한 지진이 느껴졌다. 나는 심심하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날 잘 아는 정호석이나 우리 가족들이었다면 '저 새끼 또 시작이네.' 했을 것이다. 밥풀 포물선 게이 생각이 나서 물은 것이 아니라, 묻는 와중에 게이 생각이 났다. 가끔 나도 내 의중을 따라잡기가 버거울 때가 있었다.


"어 그…왜요?"


전민영이 되물었다. 거절당해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캔디 스타일처럼 굴던 방금 전과는 살짝 다른 텐션의 경계심이 보였다.


"그 때 그 분 네 오빠 아니야?"


잘생기셨던데.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올려 준 미니젤리를 씹으며 물었다. 딱딱하고 질겨서 한참을 씹어줘야 했다. 침샘에서 끊임없이 아밀라아제가 분비되고 있었다. 전민영이 갑자기 입 꼬리를 축 내리며 앞에 놓인 카페모카를 한 입 마셨다. 전민영이 오른 손으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꽂더니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곤 나와 눈을 맞췄다.


"친오빠 맞아요. 맞는데…그게 좀 말하자면, 하."


전민영이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다. 아니에요, 그냥…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

"정말…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안 썼는데?

전민영은 파스타를 먹을 때부터 자급자족 쇼에 엄청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운을 띄우곤 꽤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연기가 제법이었다. 가족사를 이미 알고 있는 나로썬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과연 전민영의 입에선 어떤 스토리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인데?"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이쯤하고 일어서야 하는데. 그냥 요즘 근래 들어 가장 흥미 돋는 일이 이쪽 남매일이라 입이 맘대로 놀려졌다. 전민영은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사실 친오빠는 아니고, 엄마 아빠가 착하신 분들이거든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딱해서 데려왔다고 들었어요. 어쩌다보니 같이 살게 됐고요."


계속해보라는 식으로 눈을 두 번 깜빡여줬다.


"커가면서 오빠가 저한테 질투를 좀…하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친자식이다 보니까. 하…."


전민영은 작정을 한 듯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눈시울이 붉어진 티를 냈다.


"그 때부터 좀 못살게 굴어요. 그리고 이건…사실 아무한테도 말 안한 건데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 99%는 이미 비밀이 없는 사람들이다.


"정국오빠가…그러니까 제 친오빠처럼 구는 오빠가, 저를 좀 여자로 보는 것 같아서 요즘 힘들어요."


스트라이크.

물론, 순순히 친오빠라고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점도, 자신이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라고 말하리란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민영 입에서 나온 마지막 발언은 내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나는 잠깐 사이에 둘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리를 굴려 보았다. 사실 애초에 머리를 굴릴 것도 없었다. 게이가 동성이 아닌 이성에 관심 있다는 논제 자체가 넌센스였다.

나는 여전히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어깨를 떠는 전민영의 얼굴을 관찰했다. 스스로를 보호해주고 싶은 이미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거기에 '여자'라는 키워드를 얹어 성적 판타지를 더하려는 시도도 칭찬해줄 만 했다. 애초에 게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일어나자."


어떤 위로의 말도 없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전민영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아직 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인 듯 했다.


"여기 더 있을 거야?"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큰 지진을 일으켰다. '너 이 새끼 내 말 듣긴 한거야?' 전민영의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아아. 이야기는 잘 들었어. 힘들겠네."

"…."

"화이팅."


여전히 대답 없는 전민영에게 손 인사 후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상경대까지 달려가기엔 살짝 늦은 감이 있었다. 나는 금방 눈물의 모노쇼를 잊은 채 짜증을 내며 셔틀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로부터 한 달이 흘렀다. 볕 좋은 날은 다 지나고,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고 있었다. 꿀 같은 금 공강을 만끽하기 위해 여태 침대에서 몸을 붙인 채 누워 있었다. 찬바람이 살짝 벌어진 창문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왔다. 덮고 있던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냈다. 방 밖으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아들 아직 자는 중이니? 엄마 목소리에 뒤이어 박지호의 어눌한 음성이 드문 들려왔다.

오늘은 엄마 아빠가 시골로 1년간 귀농생활을 하러 내려가는 날이었다. 상주에서 곶감하시는 외할머니 적적하단 핑계로 잠깐 시골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라고 했다. 자세히 들어보면 은퇴설계를 상주에 맞춘 눈치였다.


"일어났네. 우리 지민이. 엄마 아빠 지금 내려가니까 형이랑 밥 잘 챙겨먹고 학교 다녀. 맨날 시켜만 먹지 말고, 알았지?"


대답 없이 식탁 의자에 앉아 캐리어를 꺼내오는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가 부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소리 나게 쳤다. 엄마가 말씀하시면 대답을 해야지. 너 형한테 야야 거리면서 개기지 말고 임마. 알았어? 형 말 잘 들어. 아빠가 잔소리를 끝내고 뿌듯하단 얼굴로 신발을 신었다. 바퀴달린 캐리어를 일부러 마루로 차버렸다. 저놈 새끼가. 손을 올리는 아빠를 보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씻고 나오니 집이 휑했다. 신발장 앞에 놓여있던 박스들도 치워져 있었고, 캐리어도 없었다. 그 때 박지호가 전화를 받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네…정국씨. 도착하시면 연락주세요. 네에."


정국? 어쩐지 익숙한 이름에 박지호를 한 번 쳐다봤다. 배가 고팠다. 소파에 눕듯 앉은 날 보며 박지호가 말을 걸었다.


"지민아. 엄마 아빠 가셨어."

"알아."


협탁에 있는 리모콘을 들어 티비를 틀었다. 무직뱅크에서 방랑소녀단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축제 때 들었던 그 노래였다. 순간 잊고 있던 게이의 모습이 전두엽을 강타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형."

"으응?"

"방금 통화한 사람 이름 뭐야?"

"아, 정국씨?"


'정국오빠가…그러니까 제 친오빠처럼 구는 오빠가, 저를 좀 여자로 보는 것 같아서 요즘 힘들어요.' 전민영의 목소리가 빠르게 역 재생됐다.


"안방 세놓으신 거 그 세입자 구해졌다고 했잖아. 너네 학교 학생이라던데. 정국씨라고 오늘 오실거야."


박지호가 내 눈치를 보더니 급히 소파 옆으로 와 앉았다.


"지민아. 부…불편해도 참자. 우리 용돈 하라고 엄마가 나름 신경 쓰신 거니까…."

"성이 뭔데?"

"성? 아, 같은 학교라? 우와 혹시 아는 사이인가 ?그럼 진짜 신기하겠다, 지민아. 잠시만! 폰에 입력해놨어."


박지호가 신난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폰을 뒤적였다.


"여깄다! 전…전 씨네. 전정국씨."


전 씨가 맞았다. 같은 학교. 전씨. 정국. 전민영 오빠 전정국.

사실 풀 네임을 다 듣고도 설마 싶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그 게이일리는 없을 것이다. 반복되는 우연치고 좋은 결말은 없었다. 박지호를 향해 머리를 한 번 끄덕여줬다. 나는 이내 머릿속 게이를 지워내고 방랑소녀단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바보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머리 염색했네."


캐리어 하나와 제법 큰 배낭가방을 신발장 앞에 내려놓으며 게이가 말을 걸었다. 검정색으로 염색한 내 머리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게이가 컨버스 끈을 단정히 풀어 헤쳤다. 문을 열어주는 나를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어 보였다.

박지호는?

나 마중 나오신 분?

엉 우리 형.

웰컴드링크 사신다고 엘레베이터 눌러주시고 밖으로 나가셨어.

그 놈의 오버는 진짜.


"근데 너 우리 집인 거 알고 들어 온거냐?"


게이가 내 질문에 새삼스럽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네 이름도 모르는데?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비치된 슬리퍼를 신는다. 굳이 내 존재를 알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반복되는 우연이 신기하다기 보단,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방은 어디야?"

"저기. 안방이니까 깨끗하게 써."


안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뒷말은 삼켜도 될 말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보다 깨끗이 쓸 거란 것 정돈 알고 있었다. 깔끔한 남색코트를 입은 폼이 제법 다부져 보였다.


"야 전정국."


바퀴가 닿지 않게 캐리어를 살짝 들며 이동하던 게이가 발을 멈췄다. 나는 여전히 식탁에 팔짱을 낀 채 기대 있었다. 이번에도 놀란 기색은 별로 없었다.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니까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하는 눈치였다.


"박지호 여자 좋아해. 어벙해보여도 건들지 말라고."


나는 또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게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올렸던 눈썹을 내렸다가 이내 김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알았어. 그럼 넌?"

"뭐."

"넌 건드려도 되고?"

"미친놈아."

"농담."


반복되는 우연치고 좋은 결말은 없었다. 전정국을 이 집에 들인 걸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나의 미친 촉이 서서히 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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