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는 한결과 함께 본가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한결만 먼저 보내고 본가에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결이 허락하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허…허락은 아니다. 아니 유하가 봐준 것에 더 가까웠다.

누구보다도 한결이 자신과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두려울 때도 있다.

이런 걸 두고 집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하는 그 집착이 싫지 않았다. 자신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보다 더 심하면 문제겠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유하는 침대에 누워서 어느새 익숙해진 한결의 작업실에 있는 자신의 방을 살펴보았다. 본가에 있는 방보다 크고 침대도 크다. 남자 둘이 누워도 될 정도였다. 방안에 가구도 다 고급 제품이었다. 유하는 자취방에서 이사 올 때 몸만 달랑 들어왔었다.

한결에게 이미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이 편안함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유하는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 한결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2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유하가 소파에 앉자 주방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선배, 저…. 그….”한결은 유하의 눈치만 살살 살피며 말을 못 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그게…. 그 커피숍 알바 이제 그만두면 안 될까요? 오래 일했잖아요. 사실 돈도 그렇게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주말에는 같이 놀러 가고 싶어도 갈 수도 없고.”유하는 찬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어째서 한결은 내가 커피숍에서 일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지 모르겠다. 이상한 일도 아니고 나름 꽤 건전하고 좋은 알바라고 생각하는데….

얼마 전에 시급도 올랐고 사장님과 알바생 모두 마음에 들었다. 단골손님도 있어서 소소한 대화 나누는 재미도 있었다. 물론 한결의 말대로 당장은 큰돈이 되지 않는 건 맞다.

유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계속 할래. 주말에 놀러 가고 싶으면 사장님에게 미리 말하면 대타 구해주시잖아. 얼마전에 시급도 올랐어.”“그…그랬어요.”

한결은 시무룩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굵은 목울대가 넘실거렸다.

“제가 방학 때 좀 더 좋은 일자리 소개시켜주고 싶어요. 저희 회사 인턴 자리하나 만들어 줄까요? 매일 같이 출근해요.”

“뭐? 인턴?”

유하는 눈을 깜빡였다. 뭐야, 그런 대기업 인턴 자리도 경쟁이 장난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거 완전히 낙하산이잖아. 게다가 나는 딱히 그림 빼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한결이 까만 눈을 반짝이며 유하를 보았다.

“에잇, 그러면 나 낙하산 되는 거잖아. 싫어. 내 능력으로 구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앞뒤가 꽉꽉 막혔어요. 하다 보면 잘 할 수도 있고. 낙하산이면 어때요. 돈만 많이 벌면 되죠. 방학 때 잠깐 하는 건데 어때요?”

유하는 이게 뭐지 싶어서 한결의 진지한 얼굴을 보았다. 왜 이렇게 내가 커피숍 알바 그만두게 하려고 혈안이 된 거야. 게다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 더 빨리 사귀는 사이인 거 들킬지도 모르잖아. 이 바보, 멍청아.

“안 돼. 절대로.”

유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한결이 목이 타는 듯 커피를 꿀꺽 삼켰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서 카페 일 계속하려는 거 아니죠?”

“무슨 이유가 있어 내가? 그냥 돈 벌려고 다니는 거지.”

유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한결은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띠링.

테이블 위에 놓아둔 유하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한결이 냉큼 집어 들었다. 어떻게 패턴을 알았는지 능숙하게 그으며 문자를 봤다.

“야, 너! 내 패턴 언제 외웠어? 내 문자 왜 보는 거야!”

유하가 한결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어차피 한결이 본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었다. 한결이 문자를 보고 미간을 팍 찌푸렸다. 유하는 궁금해서 머리를 가까이하고 같이 보았다. 태준의 문자였다.

신작 게임 하는데 자신의 길드에 가입할 생각 없냐는 문자였다.

“선배, 태준 선배랑 게임 했어요?”

“어? 내가 게임 좀 하잖아. 이건 거절할 거야. 빨리 완성해야 할 작품이 있어서 당분간 시간이 없거든.”

한결의 입술을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두 사람 최근에 많이 친해졌나봐요?”

“어? 카페에서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태준이도 게임 잘하더라. 크큭.”

유하는 한결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면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또 질투하나 보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가. 이 정도는 평범한 친구 관계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 것 같은데…. 하필이면 이때 문자가 온 거야.

한결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일어서서 2층으로 가버렸다.

 

*

 

유하는 거실에서 파리 미술제에 출품할 추상화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났다. 원래는 알바를 하나 더 구할 생각이었지만 작품 마무리 때문에 천천히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손 교수님이 추천한다고 생각하니 유하는 왠지 자꾸만 부담스러워서 그림을 쉽게 완성하지 못했다. 고치고 또 고쳤다. 주말 커피숍 알바 빼고는 나갈 일도 없어서 외모에 신경을 못 썼다. 머리카락이 제법 길어서 목을 간지럽혔다. 작품에 집중하다 보니 머리를 다듬어 갈 시간도 아까웠다. 고무줄로 대충 머리를 묶었다. 꽁지 머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거울에 비쳐 보니 정말 여자처럼 보였다. 여자처럼 보이기는 싫지만 어차피 아무도 볼 사람이 없었기에 상관없었다. 한결이야 유하의 이런 후줄근한 모습에 워낙 익숙해서 신경도 안 썼다.

그림을 그릴 때는 옷에 물감이 묻지 않도록 긴 앞치마를 입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치마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흐음….

붓에 물감을 묻혀서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자꾸만 딴생각이 떠올랐다.

하아…. 집중해야 하는데.

창밖을 바라보니 하늘이 구름 한 점이 맑았다. 모처럼 한가롭고 평화로운 하루였다.

한결은 회사에 갔다. 한나가 위경련으로 고생한 후에 걱정을 많이 되는 눈치였다. 이제 한결의 나이 20대 초반이었다. 한 기업을 맡기에는 부담이 클 것이었다. 그래서 요즘 그렇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본가에 갔다 온 이후로 한결은 조금 더 유하에게 관심을 쏟는 것 같았다. 아니 집착하는 거 같았다. 잠깐 외출이라도 하고 오면 누구를 만났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편의점에 과자 사러 갔다 와도 전화가 왔다.

원래 그런 녀석이었던가.

유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사귀기 전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방금 전에도 전화가 왔었다. 오늘은 일하는 틈틈이 전화하거나 톡을 보냈다.

톡의 내용은 주로 '뭐해요?' '밥 먹었어요?' '어디에요? 등등 별 시답지 않은 내용이었다. 답을 안 해주려고 하다가 한결이 섭섭해할 것 같아서 유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집착하는 바보 녀석 이거나 먹어랏!

유하는 얼마 전에 한결이 선물한 토끼 이모티콘을 보냈다.

하트를 뿅뿅 날리는 하얀 토끼였다.

뭐 별로 뜬금 없었지만 이런 귀여운 이모티콘을 한결은 굉장히 좋아했다.

곧바로 한결이 곰돌이가 입술을 쭉 내밀고 뽀뽀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어휴…. 이거 왠지 이모티콘도 닭살스럽다. 참 한결스럽다. 크큭.

 

한결에게 선물 받은 전자시계가 창가의 햇살을 받아서 반짝였다.

같이 카페 알바하는 시계 덕후 지후가 이 시계에서 말해줬다. 스위스 시계장인 지베르니가 만든 작품이 맞다고 했다. 주문 제작 상품이고 시세가 칠백에서 팔백 만원 선이라고 했다. 일종의 예술작품이고 전 세계에 몇 개 없는 희소성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고 했다. 사귀기 전에 받은 선물인데 그 가격에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희귀한 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 NASA의 최신 GPS 기술이 들어있다고 했다. 핸드폰은 대략 몇 미터 이내 이런 식으로 조금은 두루뭉술하게 위치가 뜨는데 이 시계는 지구 어디에 있어도 위도와 경도를 한 점으로 정확하게 찍어서 그 사람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했다.

뭐야? 그게. 미아 방지 같은 건가. 아니다. 스토커 같은 거다. 한결이라면 위치를 감시할 목적인 게 분명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실망하면서도 그 집착에 가까운 애정에 기쁜 건 왜 그럴까? 어휴, 나도 이제 나를 잘 모르겠다.

단지, 이제 내가 한결을 많이 좋아하게 된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시계를 매일 차고 있으니깐.

사랑의 전자발찌다.

문득 학기 중에 학교 안에 어디 있어도 한결이 나타났던 사실이 떠올랐다. 유하는 처음에는 감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신기가 있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유하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바보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다. 이때는 계속 그리기보다는 쉬어야 한다. 유하는 소파에 피곤한 몸을 눕혔다. 한결이 없는 공간은 쓸쓸하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이 고요하고 약간의 쓸쓸함이 작업하는데 영감을 주기도 했다.

유하는 팔로 눈을 가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유하는 현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결인가? 오늘은 일찍 들어오네.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소파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서서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예상외로 김 비서와 함께 웬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할머니는 유하를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잠시 멈춰서서 유하를 빤히 보았다. 김 비서는 어쩔 줄 몰라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유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하듯 말했다.

“역시 네 생각이 맞았구나.”

유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빛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할머니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날카롭고 무서운 눈빛이었다. 상대방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어딘가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결코 평범한 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건 한나 누나의 눈빛과 많이 닮았다. 아니 똑같았다.

유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공포심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두근두근.

들켰다.

한결이랑 사귀는 것을 들킨 게 분명했다.

그럼 저 사람은 나이대로 보아 한결의 할머니가 분명했다. TV 뉴스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저 최 회장님. 이분은…. 생각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단지 선배일….”

당황한 김 비서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유하를 위해서 뭔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제대로 말을 못 하고 더듬거렸다.

유하는 평소 모습과 달리 허둥지둥거리는 김 비서를 보니 더 떨렸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최 회장은 성큼성큼 유하에게 다가갔다.

딱딱하게 굳어서 멍한 유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유하는 낭떠러지 앞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다. 오금이 저렸다.

할머니가 손을 뻗었다.

때…때리려나 보다. 한결이 꼬신 남자라고 한 대 칠 건가 봐.

그래 나 맞아도 싸지.

어차피 이런 각오도 없이 한결을 사귄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칠지 몰랐어.

유하는 맞을 준비를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김 비서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안타까운 듯 유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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