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빼꼼 열린 드레스 룸 문틈 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이곳은 성수동에 위치한 도시형 생활주택 8층 5호. 앞머리 끝이 촉촉하게 젖은 남성 하나가 다섯 벌이나 되는 니트를 동시에 들고 서 있다. 그의 이름은 김도영. 특이사항은 게이. 어제까지만 해도 남친이랑 헤어질까 말까를 서른여섯 번 고민했음. 그러나 지금은 몹시 들떠있다. 이유는?

오늘은 사랑하는 울 남친과 데이트를 하는 날이니까.

뭘 입지? 뭘 입어야 제일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럽고 잘생겼지만 예뻐 보일까. 까만색은 너무 칙칙한 것 같고, 회색은 좀 재미없어 보일 것 같다. 역시 파란색이 제일 베스트인 것 같긴 한데… 저번 데이트 때 이미 입어버린 옷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나. 도영은 양발을 동동대며 거울에 비친 시계를 힐끔댔다. 신나게 코디 놀이를 하다 보니 벌써 한 시 반이 되어버렸다. 안 되겠다. 안전빵으로 가자. 결국 집은 것은 뜬금없는 남색 셔츠였다. 올해 봄쯤, 재현에게 어울린다는 칭찬을 들었던 옷이었다.

카톡. 서랍장 위로 내팽개쳐져 있던 휴대폰이 소리를 냈다. 내 복숭아였다.


-도영씨 미안해요
-조금 늦게 도착할 것 같아요😅
-그동안 뭐라도 먹고 있어요 도착하면 전화할게


휴. 도영은 맨 가슴 위로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머리 만질 시간 좀 벌었구나. 남친 정재현은 항상 그를 집 앞으로 데리러 온다. 불행 중 다행인 부분이었다. 


얼마나?-

-삼십 분 정도😅

그런데 먹는 건 왜? 오늘 점심 안 먹어요? @.@-


카톡. 웬일로 답장이 엄청 빠르다. 도영은 서랍장에 잠시 등을 기대고 섰다.


-아 맞다
-오늘 예약한 식당이 디너가 훨씬 괜찮아서 저녁 시간으로 잡았어요
-미안 미리 말해준다는 걸 깜빡했네😅


오늘따라 땀 되게 많이 흘리네. 웃음이 쿡쿡 튀어나왔다.


괜찮아요 뭐가 미안해요-
알았어요 조심히 와ㅏㅏ-


그랬더니 달려가는 토끼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연애를 시작한 후 일주일쯤인가, 도영이 재현에게 선물해 준 이모티콘이었다. 얘는 십 개월 내내 이것밖에 안 쓴다. 가만 보면 외골수 같은 기질이 있었다.

도영은 내 복숭아와의 대화창을 천천히 스크롤 했다. 어제 여섯 시 이후로 재현에게 왔던 메시지가 하나둘셋넷… 스물세 개나 있었다. 대박 신기록이다. 운전을 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답장 속도도 꽤 빨랐다. 술 먹고 땡깡 부린 애인한테 죽까지 사다 주고. 물론 매워서 입만 대고 말았지만… 매운 걸 못 먹는다는 얘기를 적어도 열한 번쯤 했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사람 먹는 죽을 그딴 식으로 맵게 만드는 가게가 문제다. 심상치 않은 스코빌 지수를 예상케 하는 열불낙지죽!! 하는 이름도 살짝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중요한 건 내 복숭아가 죽을 사다 줬다는 사실이니까.


'내가 한 번 깨면 자는 게 좀 힘들어서요. 다른 때는 다 괜찮은데,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은 좀…'


솔직히 그땐 서운했다. 안 그래도 닿기 힘든 연락에 제한 시간까지 걸리다니.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 내 복숭아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사진)-
오늘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먹어요 @.@-
조심히 가요-

-잘했어요👍
-나 이제 집 도착했어요
-내일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맛있는 거 사줄게요. 기대해😋

맛있는 건 맨날 사주잖아요 @.@-

-이번엔 진짜 맛있는 거
-한 번쯤은 꼭 데리고 가고 싶었던 곳이에요😁

그럼 다음엔 꼭 내가 예약할게요-
맨날 나만 얻어먹는 기분이야ㅏㅏ-
이제 얼른 씻구 푹 자요-

-아직 자기엔 너무 이른데🤔
-날씨가 좋아서 자전거 좀 타고 오려고

자전거? 안 피곤해요?-

-막상 집에 오니까 쌩쌩하네
-역시 회사가 문제인가 봐

.

.

.


앙다문 입술 새로 혀끝이 빼꼼 나왔다. 평소였음 '푹 자요' 이러면 대충 달 이모티콘이나 띡 보내거나 영원히 읽지도 않았을 텐데. 이래서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말이 있는 걸까. 싸웠다기엔 김도영 혼자 밤새도록 운 게 전부였지만, 어찌 됐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영은 콧노래를 흥얼대며 나머지 단추를 채워 나갔다. 왠지 오늘은 완전 기분 좋은 데이트를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16.

"왜 이렇게 얇게 입고 왔어요. 따뜻하게 입으라니까."

"뭐 어때요. 안에만 있을 건데."

"오. 방금 대사 섹시한데."


재현이 능글맞게 눈썹을 씰룩였다. 뭐라는 거야. 도영은 괜스레 툴툴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내렸다. 원래의 김도영이었다면 부끄러워할 감도 못 되는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걸 말하는 게 정재현의 얼굴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도영은 발그레해지는 볼따구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기다리는 동안 뭐 좀 먹었어요?"

"네? 어…"


그랬을 리가. 도영은 예기치 못하게 벌어 버린 삼십 분을 모조리 머리 스타일링에 쏟아부었다. 그래놓고 결과는 이제 갓 말린 생머리였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바람에 십오 분 전 머리를 다시 감고 말았다.

길어지는 정적에 재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영은 습관적으로 그의 눈치를 봤다.


"안 먹었어? 왜."

"아니 그냥… 시간이 좀 애매하기도 해서. 재현 씨는요?"

"나도 당연히 안 먹었죠."

"아, 뭐야."


놀랐잖아요. 왜 그렇게 말을 심각하게 해. 도영이 재현의 팔을 장난스레 콩 두들겼다. 동시에 꽉 붙잡힌다. 구멍 빵빵 뚫린 컵홀더 위로 맞잡은 손이 뒹굴었다.

찔끔. 도영은 어깨를 떨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면 종종 이렇게 손을 잡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불시에 붙잡힌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최근 몇 달간은 아예 없던 일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되바라졌었던, 머지않아 정재현을 완벽히 꼬셔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초기에나 벌어졌던 현상이었다. 당연히 손을 내미는 주체 역시 김도영이었다. 운전 중인 재현의 허벅지에 손바닥을 쫙 펼쳐 두고, 얼른 잡아요. 아 빨리 잡아요. 하면서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려야만 마지못해 잡아 주곤 했었는데.

맞닿은 손바닥에서 심장이 뛴다. 갈수록 부끄러워지고 주눅 드는 김도영은 재현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실수로 잡은 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눈치 없이 가만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점심은 간단히 룸서비스 시켜 먹을까요?"

"네… 네. 좋아요."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닌데. 진짜 좋아요…"


도영은 창문을 찔끔 열고 심호흡했다. 손 하나 잡은 걸로 얼굴이 터질 듯하다. 재현의 엄지가 그의 손등을 문질렀다. 요만큼 열려 있던 창문이 바닥까지 지이잉. 내려갔다.

어라. 도영이 내린 게 아니었다. 


"좀 덥네요."


띵. 빨간 불이 들어왔다. 재현이 핸들을 쥐고 있던 왼손으로 가슴팍을 팔락거렸다. 멈춰버린 창밖으로 살살 녹는 바람이 나부낀다. 얼굴 온도만으로 백 도를 찍은 김도영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게요. 가을 날씨가 무슨…"




이토록 미지근



 

17.

그들도 커플인데 당연히 섹스를 한다. 사귄 지 겨우 이 주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기, 도영 씨."

"응?"

"저, 잠깐. 잠깐만요.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응. 원래 처음은 다 그런 거야."


장소는 일박에 십구만 원 하던 비즈니스호텔 디럭스 룸이었다. 예약자는 김도영. 정재현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들어 온 롤이었다. 문짝을 열어젖히고, 카드 키를 쏙 끼워뒀을 때. 빈틈 없이 메워진 더블 침대를 바라보며 재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도영 씨. 왜 더블 룸으로 잡았어요? 혹시 예약이 잘못됐나?

이게 미쳤나. 분개한 김도영은 무작정 재현을 침대 위로 자빠뜨렸다. 그럼 설마 연애하는 사이에 트윈 룸을 잡아야겠냐? 맹한 얼굴의 정재현은 턱살을 접어가며 고개를 주억댔다. 저는 아예 방을 두 개 잡았었어요. 저나 걔나 편하게 자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었어서… 어쩌구저쩌구.


"재현 씨."

"… 네?"

"설마 혼전순결이에요?"

"그건 아닌,"

"그럼 됐네. 허리 들어 봐요."


적 저적 저기 저기 잠깐만요. 도영 씨. 도영 씨!!! 아 알았어. 안 박아. 안 박아. 둘은 허리춤을 잡고 잡힌 채로 한참을 실랑이했다. 그러다 결국 빡. 얼굴이 차이고 만다.

후. 도영은 이제 막 풀어낸 버클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 도영 씨. 괜찮아요?"

"안 괜찮으면 어쩔래. 바지 벗어줄 거예요?"

"그건 좀."

"아. 진짜… 얘 왜 이래."


의외의 복병이다. 여태 수많은 헤남들을 겪어봤지만서도 이런 식으로 재미없게 구는 애는 처음이었다. 혹시 얘… 신체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도영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발발 떠는 재현을 훑어내렸다. 이미 그의 지퍼는 아주 가슴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 그래. 봐줬다. 확인만 하자. 끝까지 안 갈게요."

"무슨 확인을… 한다는 거예요?"

"바지. 벗어 봐요."


네? 재현이 무릎을 얼싸안았다. 도영은 양손으로 그의 발목을 쭉쭉 펼쳤다.


"아, 형 못 믿어? 진짜 좆만 잡고 잘게."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솔직히 말해요. 혹시 거기에 자신 없어요?"


파닥파닥 몸부림치던 재현이 뚝 정지했다. 그러더니 세상에서 제일 얼탱이 없는 사람처럼 코웃음을 픽픽 날렸다. 아… 무슨. 설마요. 미쳤어요? 재현의 두 눈이 무슨 일인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됐네. 도영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엄마야. 이게 뭐야. 도영은 까무러칠 뻔한 상체를 애써 고정시켰다. 기가 팍 죽는다. 내가 감히… 전하를 몰라뵈옵고.


"… 뭐. 억울할 만하네."

"……."


크흠. 큼. 쿨럭. 쿨럭쿨럭. 평화로운 디럭스 룸 안으로 정적이 맴돌았다. 사실 속으로는 환희를 금치 못했다. 힐끔 바라본 재현도 은근 뿌듯한 표정이었다.

도영은 꼬물락꼬물락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재현의 다리를 제 쪽으로 잡아 돌리고는 그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뭐 하는 거예요? 재현이 일어나려는 태세를 취했다. 아 쫌 가만히 있어 봐. 도영은 그의 허벅다리를 찰싹찰싹 후려쳤다.


"하다가 도저히 못 하겠으면 말해요."

"……."

"근데, 아닐걸."


아아. 가엾은 헤남이여. 오늘 너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 것이다. 김도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살면서 만나 본 남자는 열여덟 명. 잠깐 자고 말았던 썸남 연락남은 만난 것으로 치지도 않으며, 김도영의 월세를 자진하여 납부했던 호민이는 옥타곤 브이아이피, 우읍. 아 나 진짜 이런 사람 아닌데 너만 보면 미칠 것 같다던 현국이 형아… 우욱.


"알았어. 그만해요."

"……."

"그만하고 올라와. 목 다쳐요."


재현이 도영의 볼을 둥실둥실 토닥였다. 꼭 지가 낳은 새끼 보듯이. 애를 가르치는 아빠처럼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춰 주었다. 이보다 맛도리인 것은 있을 수 없겠다 생각했던 도영은 의아하게 눈을 꿈뻑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이 정갈하게 눕혀진 뒤였다. 그날도 도영은 남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살면서 단추가 이토록 천천히, 다정하게 풀린 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돼요?"

"네? 그냥… 똑같은… 데."

"뭐가 똑같은데."

"그냥. 넣고 흔드세요. 모르는… 건가?"


단번에 찌질해진 김도영은 입을 오므렸다. 흐음. 재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라."

"… 그럼 뭐가,"

"도영 씨가 좋아하는 곳이 있을 거 아니에요."


어딘데. 어떻게 해줘야 좋아요? 알려 줘요. 나는 잘 모르니까… 재현이 허둥지둥 도영의 허벅다리를 잡아 올렸다. 그래도 자세는 잡을 줄 아는 모양인지 앉은 위치도 정확했다. 숫기를 잃어가던 도영의 눈동자에 이채가 뿅. 맴돌았다.


"그럼… 뭐. 내 가방에 젤 있는데. 일단 그것부터 가져와 봐요."


도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살면서 해본 섹스 중, 단연 그날이 최고였다.




18.

그때 우리 재현이 참 귀여웠는데. 아니, 멋있었는데. 섹시했다.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풋풋함은 덜해졌다. 이젠 살짝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아니, 저… 재현 씨."


재현이 이번에 예약한 방은 무슨 국가 원수들이나 묵을 법한 다이닝 룸에 초대형 욕조, 널따란 통유리까지 두루 갖춘 '초특급 리얼 딱 봐도 개 비싼' 룸이었다. 원래도 호화로운 방을 턱턱 잡아주긴 했지만 이처럼 대가족 사이즈의 방은 최초였다. 내가 감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처음에는 방이 잘못 안내된 줄 알았다. 먼저 들어선 재현이 겉옷을 거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도영은 실내화에 발을 넣었다. 일단 향기로운 어메니티 핸드워시로 손을 씻고, 아니 무슨 이렇게 넓은 방을 잡았어요. 하면서 소파 위에 가방을 탁. 올려놨을 바로 그때.


"재현 씨… 좀."

"응?"

"아니, 너무 갑자기… 이러니까."


등 뒤에서 재현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셔츠 단추는 풀지도 않고 무턱대고 맨살부터 지분대더니 목선을 따라 입술을 쪽쪽 부딪쳤다. 도영 씨. 살 빠진 것 같아요. 허리가 너무 얇아. 귓가를 달구는 그의 숨소리가 유난히 거칠었다. 뜨끈한 손가락이 갈비뼈를 타고 지나 유두를 빙빙. 지분거렸다.


"으윽. 아. 재현, 씨…"

"네. 도영 씨."

"무거워요. 이러다 넘어져,"


도영은 체중을 실어 엉겨 붙는 그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재현은 도영을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실히 이끌었고, 털썩. 그러다 보니 침대 위였다. 현재 도영은 들썩이는 재현의 머리통을 진정시키듯 쓰다듬는 중이다. 

음. 도리어 역효과가 난 듯했다.


"잠깐, 잠깐. 좀 천천,"


재현 씨브븝. 뭐라 말도 하기 전에 입안이 꽉 틀어막혔다. 뒤통수가 절로 젖혀질 만큼 거칠고도 다급한 키스였다. 마치 이 순간 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꼭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도영 씨."

"네, 네."


얌전히 채워져 있던 셔츠 단추가 와다다 풀려나갔다. 이미 바지는 저 멀리 어딘가에 허물처럼 늘어져 있을 것이다. 허망하게 벌어진 가슴팍 위로 재현의 입술이 파묻혔다. 도영은 사자 밑에 깔린 토끼처럼 온몸을 버둥댔다.


"오늘따라 왜, 왜 이렇…"

"도영 씨. 도영 씨."

"이름은 또 왜, 자꾸,"

"보고 싶었어요."


재현이 도영의 목덜미와 가슴팍을 헉헉 배회했다. 살결을 하나하나 음미하기보다는 사료통과 간식 통을 허겁지겁 배회하는 욕심꾸러기 강아지 같은 태도였다. 얘가 왜 이래. 머리를 밀치고 붙들어 봐도 소용이 없다. 지금의 정재현은 날뛰는 한 마리의 짐승이다. 도영은 결국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어, 어제도 봤잖, 아…"

"도영 씨 웃는 거. 웃어 줘요."


아니 이 새끼가 진짜. 웃게 해야 웃든 말든 하지. 저항 없이 늘어져 있던 두 다리가 냅다 벌어졌다. 무릎을 세워 앉은 재현이 그 사이로 성큼성큼 자리했다. 덜그럭. 그의 벨트가 풀려나갔다. 이 소리가 이렇게나 공포적인 사운드였나. 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19.

아… 허리야. 재현 씨. 나 디스크 터진 것 같아요. 도영은 매가리 없는 고개를 툭 떨궜다. 몸이 하도 흔들리다 보니 이젠 멀미까지 도지고 있었다. 애써 구부려 끌어안고 있던 두 다리도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아. 재현이 드디어 도영의 몸을 끌어안고 엎어졌다. 재현 씨. 수고했어요. 도영은 들썩이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제발 이제 그만합시다. 라는 뜻이기도 했다. 힐긋 올려 본 탁자 위 시계는 오후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식당 예약… 여섯 시라고 하지 않았어요?


"… 지금 몇 시예요?"

"여섯 시…"

"여섯 시?"


재현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맞닿아있던 뱃가죽 위로 끈덕한 액체가 주욱. 늘어졌다.


"아… 미안해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몰랐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나갈 힘도 없어…"


재현 씨 먼저 씻고 와요. 나 도저히 몸을 못 일으키겠어요. 도영은 흐느적흐느적 손사래를 내질렀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재현은 이미 샤워가운을 입고 있었다. 맨몸의 김도영은 이불을 찝찝하게 끌어올렸다. 끈덕한 뱃가죽을 당장에라도 닦아내고 싶었지만… 다리 사이도 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재현이 탁자 위 생수병을 가볍게 집어들었다. 꿀꺽. 꿀꺽. 꿀꺽. 시원하게 넘어가는 그의 목울대를 바라보며 도영은 손을 뻗었다. 재현 씨. 나… 텅. 반절 남은 물병이 탁자 위로 돌아갔다. 

도영은 어중간하게 뻗고 있던 손을 이불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어, 도영 씨."

"… 왜요."


나도 갈증 나는데. 나도 좀 주지. 입이 뾰족해질랑 말랑 아슬하다. 도영은 시선을 홱 돌려버렸다. 그래봤자 소심하게 이십 도 가량이긴 했다.


"눈 부었다."

"… 재현 씨가 자꾸 울려서 그렇잖아요."

"만두 같아요."


재현이 집게손으로 도영의 눈꺼풀을 집어 올렸다. 그러더니 쿡쿡 웃는다. 너는 이게 재밌냐. 도영은 그를 위아래로 흘겨보았다.


"됐어. 미워요."

"왜."

"갈수록 밀어붙이는 거 알아요? 나 오늘은 진짜 좀 놀랐단 말이에요."

"오늘따라 예쁘길래."


재현이 도영의 볼 위로 손가락을 쿡 찍었다. 코 위에도 콕. 이마랑 입술에도 콕콕. 퉁퉁 부은 눈두덩이는 조물조물. 적응이 되지 않는다. 도영을 바라보는 두 눈에서 꿀이 뚝뚝 흘렀다.

단단히 뭉치려던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도영은 이불을 동그랗게 끌어안았다.


"… 내가 예뻐요?"

"어…"


재현의 입꼬리가 슬 내려갔다.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는 좌우를 살핀다. 당황한 눈치였다.


"미안해요. 혹시 실례되는 말이었어요?"

"실례? 무슨 실례?"

"아니 난… 도영 씨를 여자로 생각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정말, 그냥 칭찬이었어요. 혹시 오해할까 봐."


쿡. 도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얘는 진짜 못 말리는 헤남이다. 어떻게 십 개월이나 만났는데 아직도 이럴 수가 있나. 둥그렇게 키워졌던 재현의 두 눈이 살살 가늘어졌다. 도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뭐야. 왜 웃어."

"그냥요."

"그냥 뭐."

"재현 씨 이제 큰일 났다 싶어서요. 어떡해요? 이제 남자가 막 예뻐 보여가지고."

"아니, 나는 그 말이 아니라."

"아. 내가 또 멀쩡한 사람 하나 게이 만들었네."


이 업보를 어떡하지. 나 이러다 지옥 가면 어떡해요? 도영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장난스레 재현의 볼을 쿡 꼬집으려는데,

올라가려던 손이 멈칫했다. 재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 네?"

"또… 라니. 혹시 전 사람을 얘기하는 거예요?"


어… 당황스럽다. 도영은 입을 헤 벌린 채 눈을 굴렸다.


"아니… 나는 그 뜻이 아니고."

"씻고 올게요."

"아니, 저기…"


사실 그 뜻 맞았다. 전 사람은 물론이요 그전 사람, 그 전전 사람, 그 전전전전… 아무튼 김도영에게는 너무 일상 같은 일이었기에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물론 정재현은 모르고 있다. 김도영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헤남들을 만났는지. 스트레이트했던 그들의 인생 경로를 얼마큼이나 멋대로 꼬아놨는지에 대하여.

근데 알면 좀 어때. 어차피 과거 일 아니야? 그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인가. 어찌 보면 김도영이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단, 그들이 김도영으로서 각자의 숨겨진 이면을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굳이 김도영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남자를 만났을 수도 있는 사람들인데…


"화났어요?"

"내가 무슨 화가 나요."


재현이 고개를 휙 돌렸다. 누가 봐도 삔또가 상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기분이 좋지. 도영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눈치껏 앙다물었다.


"아아. 재현 씨. 왜 그래요."

"……."

"내가 그래 봤다는 게 아니라, 그냥 허세 같은 거였어요. 허세도 아니지. 그냥 장난. 완전 백 퍼센트 농담."

"……."

"내가 설마 재현 씨 앞에서 과거 얘기를 꺼내겠어요? 감히 이 이쁜 얼굴 앞에서?"

"내가 예뻐요?"

"완전. 수지 같아요."

"……."


음… 아닌가. 송혜교인가? 아니다. 전지현 같아요. 도영은 재현의 팔을 껴안듯 흔들었다. 위아래로 삐죽이던 재현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 어떡해. 너무 귀엽다. 당장에라도 볼을 주욱 늘리고 싶었다.


"아이구. 오늘 진짜 이상하네."

"… 내가?"

"웬일이에요? 안 하던 질투를 다 해주고."


아 귀여워. 재현 씨도 이럴 줄 아는 사람이었… 그의 볼을 향해 올라가려던 손이 또 멈칫했다. 재현이 눈을 느리게 끔뻑이고 있었다. 싸늘하다기보단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게 더 무섭다. 그가 이럴 때마다… 어떤 말을 들어버릴지 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기에.


"질투… 라뇨?"


도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좌우를 구르던 재현의 눈동자가 도영을 차분히 응시했다.


"… 왜요?"

"아니요. 이런 걸 질투라고 하기엔…"

"……."


흐음. 재현의 코끝에서 가벼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별말도 안 했는데 벌써 주눅이 드는 기분이다. 꼭, 도영 씨 되게 노답이네요. 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남의 연애사를 가지고 내가 왜… 질투를 해요?"

"남… 의 연애사요?"

"그쵸? 제 연애사는 아니니까."


재현이 얼떨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이 남이지 가족은 아니니까. 반박할 필요도 없을 만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말이라도 좀.


"이건 예의의 문제잖아요. 현재 만나는 상대한테 과거 얘기를 한다는 건…"

"……."

"글쎄요. 이게 질투랑 무슨 상관이지? 난 잘 모르겠는데."


재현이 옅게 실소를 터뜨렸다. 맨몸으로 앉아있는 제 연인을 무슨 외계인 보듯이 바라보면서. 그래. 미안하다. 내가 감히 예의도 없이 너한테 질투를 바랐구나. 도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문으로 가득 찬 그의 눈을 더는 볼 자신이 없었다.


"정말 모르겠어서 묻는 거예요. 내가 질투를 해야 해요?"


어지러운 매트리스, 서로의 살을 실컷 섞었던 흔적 위로 선이 쭈욱. 그어진다. 그대로 김도영이 앉아있는 쪽만 푹 추락하는.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별 의미 없이."


익숙하다. 이젠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럼 다행이고. 사실 좀 놀랐어요. 왜 갑자기 과거 얘기를 하나… 아, 농담이었다는 건 이제 알겠어요."

"……."

"쉬어요. 씻고 올게요."


재현이 도영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떠나는 발소리가 무거운 데 없이 가뿐했다. 반면 김도영의 머리는 돌덩이를 올려둔 듯 묵직하다. 그가 버리듯 뱉은 말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어떻게든 의미를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기어코 그를 이해해 내기 위해서. 더는 섭섭해하지 않으려고. 혼자 남겨진 침실에서 만큼은 울고 싶지 않으니까.


… 내가 질투를 해야 하냐고? 정말 모르겠어서 묻는다고.


갈증이 난다. 도영은 탁자 위 물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20.

샤워를 끝내고 나온 시각은 일곱 시 반이었다. 도영은 머리를 이리저리 털어가며 어둑해진 창밖을 응시했다. 제 돈 주고는 못 볼 밤 한강의 풍경이 화려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입고 있는 샤워가운의 촉감은 부드럽고, 명품 마크 붙은 어메니티들 덕에 살엔 윤기마저 돌고 있다. 얘는 도대체 어느 집 자식이길래 이렇게나 돈을 물 쓰듯 뿌리는 걸까. 고작 남밖에 안 되는 김도영과의 하룻밤에 뭐 하러 이런 무리를 했을까. 전 여친이랑은 방을 각자 잡았댔으니 이 정도면 무리도 아니겠지만. 

도영은 거울 속 자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호화롭고도 초라하다. 따뜻하면서 춥고, 즐겁지만 외로웠다. 서운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화를 낼 만큼 감정이 격하진 않다. 그를 사랑하지만 마음 놓고 불타오르기엔 온도가 모자랐다.

이도 저도 아니다. 이토록 미지근한 연애가 세상에 또 있을까.


"… 뭘 이렇게 많이 시켰어요?"

"많이 먹으라고. 어서 앉아요."


소리가 들리는 대로 따라가 본 다이닝 룸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룸서비스가 도착해 있었다. 가운데에는 케이크도 있다. 아. 허리 아파. 의자를 빼 앉으려는데 인상이 확 구겨졌다. 관심도 없는 정재현은 식기만 달그락달그락 세팅하는 중이었다.

도영은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의자를 빼 앉았다. 애써 평온하고픈 미간이 어색하게 펼쳐졌다.


"아, 식사 전에 줄 게 있어요."


샤워가운 차림의 재현이 와인을 꼴꼴꼴 따라 주었다. 가만히 놀기만 하는 도영의 손에 식기를 쥐여주고는,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숙여 커다란 상자를 내밀었다. 명품 로고가 박힌 상자였다. 도영은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 이게 뭐예요?"

"이번 주에 우리 삼백 일이었잖아요. 기념일 선물."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어야죠."


상자 속에는 네모난 명품 백이 들어 있었다. 대책 없이 반지부터 들이미는 애는 있었지만 백을 주는 애는 또 처음이다. 재현 씨. 고마워요.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재현이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들썩했다. 사실 그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백 가지로도 모자랐다.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마음에도 없는 김도영이 삼백 일까지 챙겨 버리면 너무 질려할까 봐 굳이 챙기지 않은 것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

"어서 먹어요. 음식 식겠다."


재현이 도영의 접시 위로 샐러드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튼실하게 갈라진 그의 팔뚝을 바라보며 도영은 낯선 감정을 느꼈다. 얘는 참 뭘까. 어떻게 매번 서운함과 감동을 동시에 줄 수가 있는 것일까. 나를 왜 만나나. 좋아한다는 말은 해준 적도 없으면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건 또 무슨 뜻이지.

도영은 포크를 쥔 채 망설였다. 재현이 수북이 쌓아 준 샐러드가 가슴 앞으로 다가왔다. 얇게 썰린 오이 조각이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채소 중에 오이가 제일 싫다고,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고 저번에도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잠잠해진 도영 앞에서 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겹도록 다정한 표정이었다.


"저… 재현 씨."

"응?"

"고마워요. 너무 고마운데…"


도영은 숨죽여 마른 입을 할짝였다. 폴폴 스미는 오이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어… 그러니까. 재현 씨는…"

"네. 말씀하세요."


재현이 사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오히려 풀어졌다. 진짜 힘 빠진다. 도영은 그를 향해 중얼대듯 질문했다.


"재현 씨는 나 왜 만나요?"


음. 재현이 이 말에 무려 고민을 시작했다. 튼실한 팔뚝은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가장 예쁘게 잘린 조각 하나가 접시 위로 올려졌다. 정확히 오이 위였다. 도영은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았다.


"도영 씨랑 있으면 즐거워요. 재밌고… 마음도 편하고."

"내가 좋기는 해요?"

"… 무슨 뜻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재현 씨랑 내가 하는 게 정말 연애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 그래요?"


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심각한 의문을 떠안아버린 사람 같았다.


"그럼… 이게 연애가 아니고 뭔데요?"

"……."

"난 도영 씨랑 연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같이 호텔에서 이러고 있지 않을까요?"


짠. 와인잔 두 개가 몸을 부딪친다. 도영은 가만있었기에 재현이 저 혼자 툭 친 것이었다. 와중에 건배를 하네. 도영은 잔뜩 구겨지는 입술 새로 와인을 집어삼켰다.

그래. 쟤 말이 맞다. 이건 연애다. 확실히 연애가 맞긴 한데… 부족해.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아. 김도영은 뜨겁고 싶다. 호화로운 호텔에서 배고픔을 느끼며 몸을 섞다 명품을 선물 받기보다는, 오이 빠진 김밥을 사 들고 집에 찾아오는 남친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싶었다. 속 시원하게 질투도 하고 싸워도 보고 싶다. 밤새 마음껏 통화도 해보고 싶고… 좋아해 사랑해가 듣고 싶었다. 숙제 같은 기념일을 챙기기보단 정신 차려보니 일 년 이 년이 훌쩍 지나가 있는, 김도영은 정재현과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데.


"도영 씨."

"……."

"어… 나는, 아직 우리가 덜 만났다고 생각해요."

"덜… 이요?"

"나는 도영 씨 오래 보고 싶어요. 도영 씨가 생각하는 대로 아직 마음에 확신이 없는 것도 맞아. 그런데, 아직은 그걸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아서."


수북한 접시 위로 고기가 또 올라왔다. 얘 일부러 이러나. 또 오이 위였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해요. 왜 안 먹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러게요."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박아댔니. 내가 배고프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도영은 최대한 오이가 닿지 않은 풀때기를 골라 입안으로 깨작깨작 집어넣었다. 그래 봤자 한 번씩은 싹 버무려진 것들이었다. 도저히 넘기기가 힘들었다. 결국 아직 새것으로 남아있는 파스타를 헤집다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와인을 연거푸 홀짝이던 재현이 걱정스러운 표색을 했다.


"도영 씨. 혹시 어디 아파요?"

"아뇨. 배불러서요."

"얼마나 먹었다고."

"너무 졸려서 그런 것 같아요. 이만 자야겠어요."

"그래도 조금만 더,"

"아니요. 여기서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요."


도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재현이 덩달아 식기를 내려놓았다.


"도영 씨. 같이 가요."

"아니, 아니에요. 양치하고 올게요. 재현 씨는 더 먹어요."

"어디 아픈 거죠?"

"진짜 아니에요. 제발. 신경 쓰지 마세요. 미안해요. 이렇게 준비해 줬는데."


천천히 먹고 와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게요. 도영은 부러 밝은 모습으로 손바닥을 흔들었다. 다급하게 일어나려는 재현의 어깨를 잡아누른 뒤 도망치듯 다이닝 룸을 빠져나왔다. 걸을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아까 보니까 엉덩이에 손바닥만 한 멍도 생겼던데.

배가 너무 고파. 햄버거가 먹고 싶어.

찢어질 듯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아래로 축 꿰매진다. 따뜻한 램프 조명에 두 눈이 너무 시렸다.


'나는 자신 있는데. 나, 재현 씨가 나 완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어요.'

'글쎄요. 그게 결국…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도영은 욕실 문을 등지고 주저앉았다. 소리 없는 눈물만 차곡차곡 쌓아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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