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SE! 의 3부입니다.

1~2부를 읽으셔야 이해가 용이합니다.






RE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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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롤라





BGM: Tape Five, The Big Bang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어울릴 수 없는 소리가 가득했다. 사정이 끝난 후에도 난 여전히 소파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내쉬었고, 그건 오세훈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뒤에서 연신 허리를 흔들던 녀석은 이내 다시 여유롭게 벨트까지 찼다. 나는 한참을 헉헉거리다가 허리를 폈다. 꼭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뻐근해서 꼭 내 몸 같지 않은 몸을 움직이다 멈칫했다. 티슈를 가져다 내 뒤를 닦아주던 녀석이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 손질 된 녀석의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대기실에는 이따금 우리의 혀가 섞여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다 입술이 떨어졌고, 나는 녀석이 다시 내 옷을 입혀주는 걸 느끼며 차분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소감은?”

  “뭐가.”

  “유부남 되는 소감.”





  내 말에 오세훈이 피식 웃었다. 나는 뒤돌아 소파에 기대앉았고, 약간 흐트러진 녀석의 타이와 수트를 매만졌다. 그리고 다시 말끔해진 수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나 연이 만나고 올게.”

  “다 보고 갈 거야?”

  “아마. 끝나고 애들이랑 밥 먹기로 했어.”

  “집에서?”

  “응, 우리 집에서.”





  우리, 라는 말을 하며 생긋 웃자 오세훈도 마찬가지로 따라 웃었다. 나는 나가기 전에 녀석에게 한 번 더 키스를 해주고 다시 수트를 가다듬으며 신랑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로 향한 곳은 신부 대기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연이가 보였다. 부케를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연이가 고개 돌려 날 보았고, 그러자마자 자연스럽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내보냈다.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게 여유롭고 우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닫힌 문을 보았다. 마지막 사람까지 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대기실은 조용해졌고, 나는 그 안에서 다시 연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세훈이 보고 왔어.”

  “무슨 말씀 나누셨어요?”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방금 전까지 오세훈과 내가 한 걸 생각하면 그게 별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연이가 알아야 할 특별한 얘기는 없었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나는 연이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드레스를 입은 채 앉아 있는 그녀를 보다가 그 앞에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끝에 새하얀 웨딩드레스 천이 닿았다. 나는 그 드레스의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뭐가요?”

  “세훈이랑 결혼해 줘서.”





  내 말에 연이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도무지 연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항상 평온하고 우아하고 차분한 얼굴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잠시 연이의 얼굴을 보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연이는 생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 드레스 자락을 쥐고 물끄러미 자길 보고 있는 내 볼을 쓰다듬었다. 연이의 새하얗고 작은 손이 내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제법 따스하단 생각이 들었다.





  “해주는 거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

  “물론 세훈씨 말고.”





  그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연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고, 그건 연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보고 두런두런 얘기를 하다가 연이의 어머님이 들어오시는 통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어머님은 예전부터도 몇 번 본 적 있는 분이었다. S 그룹 회장의 첫째 따님이신 분이었고 그 말인 즉, 연이도 S 그룹의 일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님에게도 깍듯하게 인사를 드리고 비로소 신부 대기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잠깐 문에 기대 내가 방금 보았던 신랑과 신부의 모습을 되새겼다. 기분이 조금은 이상할 줄 알았는데 사실, 그건 조금도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결혼식은 으레 그렇듯 지루하고 지루했다. 나는 박찬열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그래서 오세훈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결혼식을 볼 수 있었다. 오세훈은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 딱딱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도무지 새 신랑 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박찬열을 툭 쳤다. 화인이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박찬열이 그런 내 행동에 고개를 돌렸다.





  “오세훈 표정 봐봐. 진짜 재미없어 보인다.”

  “나도 재미없는데 쟤라고 재밌겠어?”

  “근데 김민석 어디 갔어?”

  “통화하러. 이따가 우리 뭐 먹어? 국수도 못 먹고 가는데 맛있는 거 먹여줘야 해!”

  “시끄러워. 화인아. 너도 가?”





  칭얼거리는 박찬열을 무시하고 화인이의 어깨를 톡톡 쳤다. 주례사를 듣고 있던 화인이가 고개를 돌렸고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집에 갈 인원을 생각하며 이따가 뭘 먹을지를 한참을 생각했다. 눈앞에 보이는 결혼식은 뭐, 내 알 바 아니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부리나케 호텔에서 나왔다. 우리, 라고 하는 건 역시나 나와 경수, 백현이, 민석이, 종대 그리고 박찬열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여기에 화인이도 끼게 되었다. 뮤지컬 배우인 화인이와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녀석이 박찬열과 만나게 됐다는 말을 듣고는 진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더 놀란 건 내가 알기도 전에 이미 둘은 만난 적이 있었고, 잠깐 헤어졌다가 지금 다시 만난 거라는 얘기에 더 황당했다. 하지만 그래도 금방 수긍했다. 왜냐하면 둘은 생각보다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화인이라면 박찬열이 되게 귀찮고 성가시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화인이는 녀석을 굉장히 성가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막내 동생 같은 어리광을 다 받아주었고 때때로 박찬열에게 기대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서로 기대고 기대는 게 그 둘이 연애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차를 타고 나와 오세훈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내 차에 김종대와 김민석을 태웠고 도경수는 변백현과 함께 왔다. 그렇게 시끌벅적 소란을 피우며 집에 도착해서는 각자 먹고 싶은 걸 시켰다. 김민석은 아무 거나- 라는 말만 남긴 채 TV 리모컨을 쥐었고 나와 김종대는 고심 끝에 치킨을 종류별로 세 마리 시켰다. 백현이와 경수는 족발과 보쌈을 주문했고 박찬열과 화인이는 피자 두 판을 시켰다. 모든 걸 다 주문하고 나서는 잠깐 산책하러 간다는 백현이와 경수에게 술심부름을 시켰다. 도경수는 잔뜩 못마땅해 했지만 백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네! 하고 밝게 대답했다. 나는 배달 음식이 올 때까지 늘어지게 누워 TV를 보았다. 그러다 내 머리맡에 화인이가 앉았고 나는 화인이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김종대의 다리 위에 내 다리를 올려놓았다. 김종대는 아무렇지 않게 내 다리를 주물렀다.





  “형 근데 이렇게 먹어도 돼? 관리 중이잖아.”

  “하루 먹고 하루 또 빡세게 운동하면 되지. 내가 오늘 같은 날까지 풀떼기만 먹어야겠냐?”

  “그러고 보니까 이사님 곧 도착하시겠다. 신혼여행 어디랬지?”

  “몰라. 무슨 섬이랬는데 이름 자세히 안 들었어.”

  “이사님 소유?”

  “응.”





  박찬열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던 화인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화인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멍하니 TV를 보던 녀석이 그 소리에 고개를 아래로 내렸고, 내가 웃는 걸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내 이마를 톡 때렸다.





  “웃지 마. 기분 나빠.”

  “내가 내 맘대로 웃지도 못 하냐!”

  “어. 내 허락 받고 웃어.”

  “세훈이한테 이른다!”

  “일러라?”





  피식 비웃은 화인이가 내 볼을 꾹꾹 아프게 눌렀다. 나는 그런 녀석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고 하다가 마침 산책에서 돌아온 도경수와 백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들의 손에는 술이 잔뜩 들려 있었다. 우리는 또 신나서 술을 냉장고에 넣고 와인 셀러에서 와인도 몇 병 골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 음식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각에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밥을 먹으면서는 정말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나와 종대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백현이는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경수와 민석이는 역시나 조용했다. 박찬열도 우리 틈에 끼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들었고 화인이는 그런 박찬열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다른 무리에 꼈다. 그 다른 무리라는 건 시끄럽지 않은 무리, 그러니까 경수와 민석이가 있는 무리였다. 저 셋은 정말 조용히 술만 마셨다. 하필 또 술 센 셋만 모인 통에 그 테이블은 안주가 제일 적지만 이상하게 술은 제일 빨리 없어져버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신나게 먹고 마시는데 세훈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는 박찬열을 위해 폭포주를 제조하다가 바로 후다닥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 바람에 박찬열이 한껏 아쉬워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게 아니었다. 나는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올라 전화를 받았다.





  “자기야!”

  [저녁 먹고 있어?]

  “응! 곧 출국하겠네?”

  [응. 저녁 뭐 먹고 있어?]

  “치킨이랑, 피자랑, 족발이랑, 음 또... 보쌈!”

  [몸에 안 좋은 것만 잔뜩 먹네?]

  “응~”





  내 말에 오세훈이 간지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나 또한 온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나는 쿠션을 끌어안고 헤실헤실 웃었다.





  “연이는? 밥 먹었어?”

  [아니, 속 안 좋대서 안 먹었어.]

  “아, 진짜? 그래도 결혼식이라고 긴장을 했나. 세훈이는?”

  [나도 안 먹었지.]

  “왜?”

  [어떻게 나만 먹어.]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 오세훈은 분명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는 그 말에 퍽 기분이 이상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상황이 이렇기에 그걸 티낼 수가 없었다. 예상했잖아. 이런 거 다 이미 예상했던 거잖아. 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라도 먹지.”

  [타면 먹을게.]

  “또 바로 옆 자리면 어떡하려고? 그럼 또 안 먹을 거야?”

  [칸 자체가 다른데, 뭐.]

  “아... 전용기야?”

  [그럼.]

  “연이는 어디 있어?”

  [옆에. 바꿔줘?]

  “어? 아, 아냐. 속 안 좋다며. 그냥 쉬게 둬.”





  그냥 두면 정말 바꿔줄 것 같아서 나는 손사래까지 쳤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나는 잠시 소파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이미 기분 좋게 취한 것 같았다. 사실 나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는데 그냥 기분이 그랬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누워 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고 종대 옆에 앉았다. 뭐, 어때. 


  그렇게 오세훈의 결혼식을 끝내고 난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나는 오세훈을 볼 수 없었다. 신혼여행 한 번 존나 오래 간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들어보니 보통 다들 일주일은 간다고 했다. 내가 뭐 결혼을 해봤어야 알지. 나는 일주일씩이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여행을 간 오세훈을 생각하며 괜히 툴툴거리게 됐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전화하고 문자도 해주는 녀석을 생각하며 기분을 풀었다. 나는 오세훈이 찍어서 보내준 바다 사진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보니까 또 예뻐서 내 생각났어? 그래서 나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나는 스케쥴 차 이동하는 벤 안에서 사진을 넘겨보며 조용히 웃었다. 귀엽긴.


  아침부터 시작한 화보 촬영은 자정이 돼서야 끝났다. 하지만 나는 바로 집에 가지 못 하고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 한 회의실에서 이제 꽤 자주 보는 것 같은 중국어 선생님을 만났다. 원래도 중국어는 배우고 있었지만 요즘에는 점점 더 그 횟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찍은 드라마가 중국에서 방영되었고 그게 엄청난 대박이 터지는 통에 나는 요즘 중국 스케쥴도 꽤 많아진 차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동할 때처럼 중국어도 마찬가지로 배우기 시작했고, 나는 이렇게 스케쥴 틈틈이 와서 열심히 배웠다. 


  새벽 두 시 쯤에야 수업이 끝나서 이제 집에 가서 좀 쉬려는데, 선생님이 내게 또 숙제를 내주셨다. 나는 선생님이 꼼꼼하게 적어주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힝- 하고 울상을 지었다.





  “나 잠은 언제 자라구요~”

  “할 수 있어요.”

  “못 해, 못 해. 나 못 해.”

  “핸드폰으로 녹음해서 바로 보내주셔도 되니까 꼭 하세요. 하루에 한 문장씩이라도 좋으니까 매일 매일, 아셨죠?”

  “너무해.”





  내 투정에 선생님은 그저 웃기만 했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회의실에서 나오면서 괜히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이마를 댄 채 터덜터덜 따라가자 선생님이 푸스스 웃는 게 느껴졌다. 





  “피곤하세요?”

  “응. 선생님도 피곤하죠?”

  “네. 저도 오늘 밤새고 왔다구요.”





  내 머리를 부스스 쓰다듬은 선생님과 재잘재잘 떠들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먼저 차를 끌고 나가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바로 벤에 올라탔다. 운전석에는 내 매니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도 못 한 김종대가 있었다. 아, 김종대는 지금 내가 있는 회사의 대표 이사이자 내 전담 매니저이기도 했다. 오세훈은 정말 내 계약이 끝나자마자 바로 나를 빼냈고, 그렇게 1인 소속사를 차려주었다. 이 회사의 모든 일은 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년부터는 이 곳에 김민석도 들어오기로 했는데 그것도 녀석의 계약 기간이 끝나는 때에 맞춰서 계획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회사의 현 대표는 김종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예전처럼 현장까지 오가거나 밖으로 도는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녀석이 온 건가 싶었다. 나는 핸드폰을 보다가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녀석을 보았다.





  “왜 네가 있냐?”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수업은 잘 들었어?”

  “응. 안 피곤해?”

  “피곤해~ 나 오늘 형 집 가서 자도 돼?”

  “그래. 나야 좋지.”





  방금 전까지는 정말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는데 지금은 꽤 멀쩡했다. 나는 김종대와 재잘재잘 떠들며 집으로 향했고, 간만에 외롭지 않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러다 새벽녘에 잠이 깼다. 선잠을 잔 것 같았다. 이상한 꿈을 꾸긴 한 것 같은데 그 꿈의 내용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 리 없으니까. 나는 멍한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김종대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지금 당장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그러든가 말든가 잠만 잘 잘 것 같았다. 나는 김종대의 나른한 숨소리만 들리는 침실을 둘러보았다. 예전부터 새벽의 이 침묵이 너무 싫었다.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공포도 한 몫 했다. 그래서 이렇게 새벽에 깨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게 깼을 때 내 옆에 아무도 없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싫었다. 나는 멍하니 종대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세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는 새벽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받지 않는다 한들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세훈과 7년 째 연애를 하면서 터득한 나름의 자신감이었다. 나는 오세훈 덕에 살아가고 있지만 오세훈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자립심을 길러야만 했다. 그게 내가 오세훈 옆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이유이자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괜히 이불을 매만지며 손가락을 배배 꼬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움찔 놀란 것도 한 몫 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녀석이 다시 한 번 준면아- 하고 불렀을 때 조용히 웃었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한국 새벽 아니야?]

  “응, 맞아.”

  [깼어?]

  “응. 그냥 눈이 떠졌어.”

  [종대씨는?]

  “자. 아주 세상모르고 ㅈ... 종대 옆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내 말에 오세훈이 다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처럼 쿨쿨 자고 있는 김종대를 보다가 어휴,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오면서 피식 웃었다.





  “네가 보낸 거였어?”

  [응, 이쯤 되면 너 외로울까봐.]

  “내일은 누구 보내려고 했는데?”

  [백현이랑 경수씨.]

  “모레는?”

  [박찬열.]

  “그 다음은 김민석?”

  [응, 그리고 그 다음은 나.]





  나는 오세훈이 돌아올 날을 계산해보다가 피식 웃었다.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봄날의 밤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내가 자주 앉는 의자에 앉았다. 이따금 오세훈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는 곳이었다. 나는 두 다리를 모아 안고 그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세훈아.”

  [응.]

  “지금 통화해도 돼?”

  [당연하지.]

  “이상하네.”

  [뭐가?]

  “그냥. 계속 눈치 보게 돼.”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더 말하지 않아도. 오세훈은 내 말 뜻이 뭔지 단번에 이해한 것 같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세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우리 사이에 자리한 새벽 같은 침묵을 곱씹는 수밖에 없었다. 그 조용한 틈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내가 먼저 입을 떼려는 순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하자고 한 거야.]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방금 내뱉은 말에 괜찮다, 난 괜찮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나는 지금 전혀 괜찮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니고 녀석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그 말이 꽤나 야속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세훈을 탓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정말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건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오세훈은 싫다고 했지만 내가 설득했고 이해시켰다. 


  우리 버틸 수 있어. 우리 할 수 있다고. 네가 결혼만 하면 너도 행복해질 수 있고 나도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세훈아. 결혼하자. 결혼해주라, 날 위해서. 





  “알아.”

  [알아?]

  “응...”

  [근데 왜 그런 말을 해.]

  “.....”

  [속상하게.]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핸드폰 너머로 오세훈의 얕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모르겠다. 지금 정말 내 기분을 모르겠어.





  [준면아.]

  “응.”

  [네가 하자고 한 거지, 그치.]

  “... 응.”

  [난 하고 싶지 않았어. 그것도 알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네가 하라고 해서 한 거고, 네가 원해서 한 거지만 이거 너 혼자 한 결정 아니야. 나도 한 결정이야. 너 혼자 서운하고 속상한 모든 거 짊어지지 않아도 돼.]

  “.....”

  [애초에 서운해 하지 않기로 약속한 거, 나 그것도 안 믿었어. 어떻게 안 서운해. 나였으면 이미 너 이혼시켰어. 누가 감히 내 준면이랑 결혼을 해?]





  진지한 목소리로 하는 장난에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서늘한 봄바람에 괜히 코가 시큰한 척 헛기침을 했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해. 눈치 보지 말고, 응? 천하의 김준면이 왜 남 눈치를 보고 기가 죽어.]

  “치, 서운하다고 하면 뭐. 올 거냐?”

  [어딜?]

  “한국 올 거냐고~”

  [아직 며칠 남았잖아.]

  “재밌냐? 거기 재밌어? 나 빼고 연이랑만 둘이 노니까 재밌어?”

  [몰라. 밥 먹을 때만 봐. 밥 먹고 따로 쉬니까.]

  “... 야, 그래도 신혼여행인데 뭔 이혼 여행 간 사람들처럼 그러냐?”

  [내가 한 게 결혼이긴 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울적했는데 금세 또 기분이 풀려버렸다. 나는 오세훈이 가봐야 한다고 할 때까지 테라스에 앉아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아까의 그 속상한 모든 기분은 다 사라져 있었다. 새벽의 지독한 침묵도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곤히 잠든 종대를 끌어안고 다시 행복하게 잠들 수도 있었다. 아, 보고 싶다. 우리 세훈이, 너무 너무 보고 싶어.


  그렇게 하루하루 손꼽아 오세훈을 기다렸다. 오세훈이 도착하기로 한 날에는 아침부터 알람도 없이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일을 하다가도 오세훈의 전화를 기다렸고, 내가 하도 난리를 쳐서인지 매니저들이 오히려 발을 동동 굴렀다. 연락 오면 자기들이 제일 먼저 알려줄 테니까 제발 촬영 생각 좀 하라고. 나는 그런 녀석들에게 괜히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도 핸드폰을 놓지 않았다. 내가 대사도 다 외웠고 세팅도 다 했고 준비 안 한 건 뭔데? 그냥 핸드폰 좀 쥐고 있기로서니 말이야! 감히 나한테! 그런 잔소리를 하다니! 자꾸 그러면 줌묘니! 아주 뚁땽해! 어? 죵말죵말 뚁땽해!


  그리고 촬영을 마치자마자 나는 바로 핸들을 잡았다. 매니저들이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매니저들이 가져온 내 차를 끌고 바로 오세훈의 회사로 향했다. 오세훈은 귀국하자마자 바로 회사로 갔다. 하여튼 일 중독은 어떻게 못 고치나?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얼른 녀석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실실 웃으면서 주차를 하고 바로 또 신나서 사장실로 올라가는 일도 즐거웠다. 아, 오세훈은 결혼 직전에 K 미디어 총괄 사장이 되었다. 그게 결혼 조건이었으니 뭐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이사에서 사장이 되면 뭐가 다른 것 같냐고 물었을 때 오세훈은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피식 웃었었다. 그리고는 내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사님이 해주는 키스랑 사장님이 해주는 키스는 뭐가 다른데?


  그 말에 나는 또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고, 그런 나를 끌어안으며 오세훈도 한껏 기분 좋아했다. 물론 그 전에야 또 엄청 싸우긴 했다. 싸운 이유는 결혼 때문이었다. 오세훈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버텼고 나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싸웠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생각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일단 지금은 우리 세훈이를 보는 게 더 중요하거든!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바로 사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세훈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들어섰는데 그러자마자 멈칫했다. 안에는 오세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훈이는 데스크 앞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그 앞에는 연이가 서 있었다. 아, 맞다. 둘이 같이 들어왔었지. 왜 그걸 깜빡했을까. 나는 아차, 싶었다가 다시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근데 왜 둘이 같이 회사로 왔어? 





  “안녕하세요.”





  생긋 웃은 연이가 반갑게 날 맞이했다. 나는 그런 연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팔을 뻗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고 평온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연이가 이내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런 연이를 안아주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여행은 좋았어?”

  “네.”

  “그래, 잘 쉬고 왔다니까 다행이네. 그럼 이제 가봐.”





  내 품에서 고개를 뗀 연이가 네?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연이의 두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두 손에 부드럽게 들어온 연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긋 웃었다.





  “이제 네 할 일 끝났으니까, 가라구.”

  “... 아, 네.”





  잠깐 당황한 것 같던 연이가 이내 다시 차분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 돌려 세훈이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먼저 가볼게요. 이따 들어오세요?”

  “아니요.”

  “오늘은 아니죠?”

  “예. 당분간 집에서 지낼 겁니다.”

  “그럼 들어오실 때 먼저 언질 주세요. 어머님이 식사 하고 싶으시다고 하셨거든요.”

  “네,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연이는 모를 지도 모르겠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오세훈은 지금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전혀 다정한 태도가 아니었다. 그런 세훈이와 나를 번갈아 보던 연이가 이내 생긋 웃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럼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 오빠.”





  연이가 말하는 오빠가 나인지, 아니면 오세훈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일단 응- 하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나는 데스크에 살짝 걸터앉았고 오세훈은 여전히 의자에 기댄 상태였다. 그렇게 연이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나는 바로 뒤로 끌려갔다. 내 뒷덜미를 잡아챈 오세훈이 그대로 날 끌어당겼고, 나는 바로 몸을 돌려 녀석의 다리 위에 마주보고 앉았다. 우리는 서로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정말 숨이 다 막힐 정도였다. 잠깐 숨이라도 돌리고 싶었지만 한순간도 오세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양가적인 감정은 아마 녀석도 다르지 않을 게 뻔했고 결국 우리는 정말 숨이 턱 끝까지 찼을 때 동시에 입술을 뗐다. 나는 의자를 짚은 채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오세훈은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꽉 쥐고 있었고,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오세훈이 먼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 가슴팍에 이마를 툭, 기댔다.





  “나 나쁜 신랑이야?”

  “누구한테?”





  내 말에 오세훈이 한참동안 큭큭 웃었다. 나 역시 웃으면서 그런 녀석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새카만 머리칼에 꾹 입을 맞추었다.





  “준면이한텐 좋은 신랑인데, 연이한테도 물어볼까?”

  “됐거든요.”

  “연이가 착해서 다행이다, 그치. 아무리 정략결혼이어도 이런 식이면 화날 것 같은데 말이야.”

  “너무 믿지 마.”

  “왜? 연이 착하잖아.”

  “이 바닥에서 누굴 믿어?”





  내 품에 안겨 한껏 귀여움을 받던 오세훈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 가슴팍에 고개를 괸 채 몽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을 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그 이마에 촉, 뽀뽀를 했다.





  “알았어, 우리 자기만 믿을게.”

  “옳지.”

  “준면이 착했으니까 그럼 신랑이 상 주나?”

  “어떤 상 받고 싶은데?”

  “음, 준면이도 가고 싶으니까 신혼여행!”

  “... 지금? 어디 가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여행은 무리니까 일단 약식으로 하자!”

  “약식으로?”

  “응! 첫날밤부터!”





  내 허리를 지분거리던 녀석이 풉, 하고 웃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끌어안으며 실실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과 함께 오피스에서 나왔을 때에는 우리 모두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찰싹 안겨 있었고, 오세훈 역시 날 꽉 끌어안은 채 걸음을 내딛었다. 나는 오세훈의 품에 안겨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배시시 웃었다.





  “여보라구 불러두 되나?”

  “언젠 안 불렀어?”

  “히히, 여보~”

  “네, 여보.”

  “근데 여행 갔다 오면서 내 선물도 안 사왔어?”

  “있잖아, 여기.”

  “어디?”

  “나.”

  “... 하여튼 있는 새끼들이 더 해.”

  “여보, 어디 가. 같이 가요.”

  “싫어요. 준면이 화났어요.”

  “왜 화났어요, 여보?”





  아, 진짜. 화난 척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니까. 하여튼 오세훈 이 새끼. 나랑 연애하면서 끼 부리는 것만 배워가지고 말이야. 나는 툴툴거리는 척을 하다가 결국 웃음이 터져서 다시 다정하게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꼭 마주잡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웃었다. 


  세훈아. 자기야. 여보야.


  결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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