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와 호위 사이 일이 어떻게 되었든간에 융롱이 오고 나서 소나무 소리 들리고 냇물 졸졸 흐르는 산 속의 왕부에 조금 더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영녕 외에, 아니, 실제로는 영녕도, 왕부의 새로운 식구이자 말썽꾸러기인 융롱을 마음에 들어했다. 시녀들은 같이 깔깔거리며 장난칠 수 있고 무거운 짐도 번쩍번쩍 들어 나르는 융롱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며, 벌써부터 멀쑥하니 이목구비에 윤곽이 드러나는 그 얼굴이 자라면 분명 무척 잘생겼으리라고 다투어 장담하곤 했다. 


서융롱은 새벽이면 뒷마당으로 나가 목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였으며, 그 몸짓은 벌써부터 소리가 고요한 경지에 이르러 영녕의 독서가 방해가 되지 않았는데, 다만 영녕이 책을 읽다가 한 번씩 고개를 돌리면 창 밖으로 나무와 사람의 그림자가 한 덩어리의 바람이 된 듯 훌훌 나부끼는 모습이 보일 따름이었다. 융롱은 산을 타고 별별 열매를 따 오기도 했으며 때때로 산에 피는 나리꽃이며 붓꽃 같은 것을 발견하면 한 아름씩 꺾어 왔는데 이 또한 시녀들이 반겼다. 영녕으로 말하자면 거칠 것 없던 생활에 잔소리할 일과 대꾸를 들을 일들이 한아름 끼얹어졌다. 그가 융롱과 잘 지낼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엄정히 따지고 들었을 때 자신이 윗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치만 언니……." 하고 융롱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때, "아니, 그러지 않겠다." 한 마디로 정말 필요할 때라면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서융롱은 '그치만 언니' 의 어느 부분이 기각당하든 몇 다경 후면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날과 달이 흘러 더운 여름이 지나갈 즈음에 림은 융롱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초적인 호신술을 배우기로 했다. 림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무사가 하는 말에 일리가 있었다. 문무겸비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이란 갖추어 두는 편이 좋은 것 같았다. 융롱은 영녕의 곁에 있겠다고 말했지만, 만약에 그들이 언젠가 아주 멀리, …… 가게 된다면, 영녕은 생각한다. 최소한 스스로 검을 들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돌이켜보면 그런 자질을 갈고닦는 군주와 공주들도 퍽 많았다. 검을 들 수 있고 싶다고 하자 융롱은 생각보다도 본격적인 요청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요?"

"그래.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좋은데……, 네. 익혀 두시면 좋겠지요."


융롱은 말을 덧붙이려다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는데?" 영녕이 놓치지 않고 묻자, 

"힘드실 수도 있다고 여겨서요."

"그것만은 네가 지나친 염려를 하는 게야. 배움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 차근차근 익히고 쌓아가면 경지에 이르는 것이니."

"과연 군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시작하지요." 


먹 가는 냄새와 글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소리, 그리고 뒷마당에서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아 휘두르는 모습이 만추의 절경 안에 깊어 갔다. 단풍 사이로 상록수가, 푸른 솔 뒤로 금빛 단풍이 이어져 굽이굽이 흐르는 계하왕부의 가을이었다. 





계절은 빠르게 돌아 계하왕부가 있는 진산에도 살구꽃이 피는 시절이 왔다. 겨우내 융롱은 영녕군주에게 검을 들고 자세를 잡는 것부터 검술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으며, 자연히 이에 따르는 병법에도 관심이 생긴 군주와 함께 평소에는 손이 잘 가지 않던 병서를 읽었다. 본래는 이론으로만 알 따름이었던 병법이었으나 융롱으로부터 실제 병영에 관한 이야기며 유명한 전투에서 있었던 세세한 일에 관해 듣자 영녕에게 그것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용인술과 정치, 외교의 지식에 더불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치로 보였다.


물론 융롱에게 경서를 읽히겠다는 영녕의 뜻도 말릴 수가 없었다. 봄이 돌아왔을 때 융롱은 문학과 경학의 책들을 한 권씩 떼고 고사집(古事集)을 읽기 시작한 참이었다. 둘 다 어찌나 부지런한지 게으를 틈 없는 겨울이었다. 날이 추워도 융롱은 죽순처럼 쑥쑥 자랐고 영녕 또한 보다 어엿한 주군의 풍모를 갖추어 갔다. 이제 날이 풀리고 얼었던 물이 새 소리를 내면서 졸졸 흐르니 융롱은 그전까지도 뛰어다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왕부와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꼭 물이 잔뜩 오른 제비, 신난 망아지, 아니, 저 가볍고 날랜 몸은 몸집이 커다라면서도 어느새 성큼 물러나고 다가와 있는 구름 같다고 영녕은 평했다.


융롱이 살구 꽃가지 하나를 째로 꺾어 와 난초가 음각으로 새겨진 백자 화병에 꽂아 놓은 날이었다. 마당으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영녕의 현의당에는 사늘하지만 향긋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들어왔고,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나서 자리에 마주앉은 참이었다. 꽃 향기가 사방에서 짙었고 미리 준비해 둔 붓과 벼루가 은은한 먹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가뜬한 차림인 영녕이 붓을 들었다.


"언니, 계주 완성 일대에 수해가 발생해 백성들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랍니다." 


오는 손님이 아니라면 받지 않는 성격인 림에 비해 융롱은 종종 왕부에서 산을 내려가 바로 아래 있는 마을에 들렀다 오곤 했다. 몇 달에 한 번은 대장군저가 있는 수도까지도 가서 양친에게 안부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소식들을 듣고 오기도 했다. 엊그제 떠난 융롱은 오늘 아침에 막 계하왕부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래?"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일인데, 작년에 내기로 한 수로 공사가 지연되어 넘치는 물에 쌓던 중인 방벽이 도리어 무너졌다고 합니다. 천자께서 구호를 명하시고 태자 전하께서도 일선에 사람들을 보내셨다고 해요."


영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해 발생하는 일이라면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요, 그에 대비한 수로 공사가 예정되었다 함은 방비책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인데 어찌 일이 위험한 상태가 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가 화를 불러들인단 말이냐."

"계주후 허상달이 가을부터 공사를 중단시킨 탓이라 합니다."

"왜?"

"거기까지는……."


영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조모 되는 선황제는 여러 왕국으로 분리되어 다툼이 끊이지 않던 천하를 하나로 통일해 천자의 나라를 이루었다. 고모인 지금의 황제는 그 나라를 이어받아 부강하게 길러내고 있으나, 7국 12주에 이르는 너른 제국을 아직까지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각지는 천자의 명을 받기는 했으나 이전부터 지역에서 득세하던 호족들이 제후의 이름으로 다스리고 있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나라의 번영이나 백성들의 삶보다 그 자신의 영달이나 권력의 유지, 호화 사치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이들도 차고 넘칠 것이었다. 영녕이 중얼거렸다.


"천하에 근본이 되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이라 했거늘……."

"짐작이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별 것 있겠어. 며칠 후의 내일은 보나 몇 달 후의 미래는 고려치 못하는 어리석은 치자의 잘못일 것이다."


세상사에서 길흉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지만 알고 대비할 수 있는 자연의 문제에 충분히 마음을 쓰지 않아 불러오는 문제는 사람이 할 일을 덜 다했음이라는 것이 영녕의 견해였다.


"천자 한 사람의 현명함만으로 대국의 구석구석을 모두 다스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천자는 현명한 인사를 발굴해 내고 적소에 배치하여,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이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하지만 한 주를 한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관리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그 모든 사람의 됨됨이를 살필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렇기에 공과 과를 정확히 나누고, 신상필벌로 이어지는 규율을 성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율을 다스리면 그 율로써 만방의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지. 세상 모든 사람이 선인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으니 좋은 규율과 모범이 되는 선례가 나라의 분위기를 이루면 어리석은 이들도 절로 따를 것이라. 또한 그러한 나라라면 은거하고 있던 현사(賢士)들도 기꺼이 뜻을 펼치러 나서지 않겠느냐."

"언니께서는……."


융롱이 가만 림을 바라보았다. "응?"


"참으로 후계에는 뜻을 두지 않으십니까?"

"그런 말은 어찌하여 하니."


계승인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요, 이미 더 나이가 찬 유력한 후보자들이 이미 경합을 벌이고 있는 마당이었다. 지금으로서 영녕군주는 후계 문제에 나설 만한 기반조차 없었다. 융롱도 그 정도는 짐작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러니까……. 일신의 것 아닌 민생과 같은 대의(大義)를 품은 바 없으시냐는 뜻이었습니다."

"뜻이라."


그것은 물론 있었다. 민생과 부국과 강병 모두가 지금의 영녕이 강학하고 때로 융롱과 말을 나누며 자리잡은 사상 가운데 있었으니까. 영녕은 또래나 비슷한 나이 군주들보다도 몇 배는 명석할 머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계주의 수해에 관해 이야기하고 상주문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니."

"그러하지만……."


융롱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살구꽃 흩날리는 문 밖을 바라보았다. 꽃그늘이 지는 만큼 문 안으로 만들어지는 그늘도 있어 봄이 몰아치는 마당 밖은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거실에 비해 찬란하도록 밝아 보였다.


영녕이 보기에 융롱은 기세가 호방하고 고려하는 시공간의 범위도 컸다. 서 가의 본가가 있는 화남부터 수도까지 천릿길, 변방의 병영부터 수도의 거리와 황궁까지 두루 돌아보며 자란 영향이 클 것이다. 그 날 연회장에서처럼 융롱은 먼 거리라도 한달음에 달려가고 달려올 것 같았으며 천하를 아우르는 인물이 될 것 같았다. 제국의 대장군으로 이처럼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심심하지 않니? 라고, 자신있게 데려온 융롱에게 그래서 림은 어째서인가 자꾸만 묻게 되었고 심심할 새 없이 몸을 휘두르고 산을 쏘다녀 호위를 하기는 하는 것이냐고 잔소리를 붙이다가도 문득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말에,


"아무래도 언니께서 심심하셔서 그러신 것이지요? 맞아요, 매일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몸을 단련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과 부대끼는 것도 사람이 사는 데 필히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랬어?"

"수도로 나들이나 갈까요?"


라고, 융롱은 여상스럽게 권했다. 


"귀찮은 일이 많을 텐데." 


영녕은 가장 마지막으로 자신이 왕부에서 내려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군주께서 행차하신다며 시녀들이며 시위, 가마끼지 한바탕 준비를 하느라 수선이었다. 그에 비해 홀로 훌쩍 움직일 수 있는 융롱은 태생이 몸이 가벼웠다.


"언니랑 저랑 둘만 가지요."


시원시원한 그 말에 영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만?"

"네, 둘이서. 평소 차림 그대로로요."


이건 확실히 새로운 제안이었다. 림은 어릴 적부터 언제고 황실에서 봉작을 받은 황실의 일원으로서만 행동하고 움직였지 평복을 입고 거리로 나가 본 적은 없었다. 외출을 한다고 하면 계하왕부 영녕군주의 격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옷차림이며 장식이며 하는 것들이 당연스레 따라붙었고 그것이 제갈림이 외출을 귀찮아하는 큰 이유 중 하나였던 것이다.


"부왕께서 허락하실까."

"될 것 같은데요."


 ……조금 설득하면요. 하고 융롱은 덧붙였다. 만 한 해 가량 계하왕부에 있던 시간이 차 가는 융롱은 이제 왕부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성정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슬쩍 덧붙인 그 말은 영녕의 부왕인 계하왕이 염려가 많으면서도 유한 사람이어서 그리 강하게 반대 의견을 세울 것 같지 않다는 짐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둘이서 하는 외출은 융롱이 생각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무가의 아이들은 걸음을 걸을 수 있을 적부터 들을 뛰어다니고 말을 타는 법을 배우면 수십 리 길도 저들끼리 다녀오곤 합니다. 제가 언니를 모시고 수도로 나간다고 하면 언제고 제가 다니던 길, 알고 있는 대로로 떳떳이 다닐 터인데 위험이 되는 일이 무어가 있고 누가 되는 일이 또 무어가 있겠습니까?"


그 길들 가운데서도 영녕은 아직 보지 못한 길이 많을 것이었다. 호기심과 다소의 즐거움이 일어 영녕은 융롱의 제안을 수락했다. 융롱은 군주를 모시고 외출한다고 집안에 연통을 넣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영녕의 시녀인 유수와 융롱이 동시에 현의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수는 굳은 표정이었되 융롱은 언제나와 같은 낯빛인가 했다. "무슨 일이야?" 영녕이 물었다.


"저, 군주께서 수도로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황궁에서 초청이 도착했나이다."

"황궁에서?"

"예, 태자 전하와 1황녀이신 소양공주께서요." 


유수는 이걸 어떡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영녕은 황궁에서 열리는 종친 연회에 손님 중 하나로 참석하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이렇듯 유력한 인물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웬만한 유력자가 아닌 대 하제국의 태자 전하와, 그와 동시에 손꼽히는 황위 계승 후보자인 소양공주가 동시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내다니. 종친 연회나 왕부에 방문하는 손님을 맞는 정도의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꾸며 드리고 선물은 뭘 준비하며 혹시 근래에 황궁 주변에 도는 소문이나 유의할 점은 있는지 알아보고 주의를 드려야 하고, 쏟아져 내리는 할 일 목록에 유수는 거의 아득해 보였다.


본래라면 왕래조차 없을 한적한 계하왕부에 이렇게 두 사람이 직접 초대를 보낸 것은 아마도 서융롱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영녕은 대충 알겠다는 표정으로 끄덕이고 유수에게 너무 많은 준비는 할 필요가 없다고 일렀다. 물론 걱정이 한 움큼도 덜어지지 않은 것 같은 유수는 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알아봐야 하나 싶은 얼굴로 말씀 받잡겠다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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