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곡 추시겠어요?"



클로에는 머뭇거리다가 내민 남자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춤은 거의 춘 적 없어요."



손을 마주잡자 주변 여자애들에게서 환호와 함께 박수소리가 들렸다. 


꽤 인기가 있는 남자아이인 것 같았다. 


아픈 곳은 없는지 클로에와 면식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괜찮아요. 이쪽으로."



마을 사람들은 작은 악기를 가져와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닥불에서는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조금씩 돌며 서로 맞춰나가던 춤사위는 점점 격렬해졌다. 


그와 비례해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며 기온이 내려가고, 안개도 짙어 졌다.



클로에는 간만에 모든 근심을 잊고 흥겨운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춤을 배워본 적은 없지만, 주변 사람들이 추는 것을 따라했다. 


작은 마을의 전통 춤 답게 상당히 단조로운 동작의 반복이었고, 주변 사람들도 클로에와 같은 동작을 하며 웃고 있었다.



즐거움을 느끼는 건 그렇게 큰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단조로운 생활 중에 있는 약간의 자극과 축제, 주변 사람들과의 동질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클로에씨."



"네?"



잠깐 곡이 끝나고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춤을 추던 남자는 클로에를 불렀다. 


정신이 들자 온 몸을 격하게 움직여서 땀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양이 풀 뜯는 걸 본 적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클로에는 가볍게 듣기가 힘들었다. 


저 얼굴과 목소리,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던가?



"그냥 들판에서 하얀색 무리가 풀 뜯는 걸 본 정도에요."



클로에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잔디 사이에 길이 닦이면 보통 그 옆쪽 초원에서 초식동물들을 풀어놓고 풀을 뜯고는 했다. 


영지마다 목초지를 설정해두는 경우도 있지만, 명확한 경계를 구분해두기가 힘들어 그냥 풀어놓는 경우가 많았으니... 


클로에도 몇 번 보긴 했다.



"양은 풀을 먹으면서 뿌리까지 다 뜯어먹죠. 


그래서 관리를 다시 해주지 않으면 다시 잔디가 자라지 않아요."



아 그래서 나온 소리가 공유지의 비극이었던가. 


모든 소작농의 초식동물들이 그 곳을 먼저 들렀다가 자신들의 목초지로 가니까... 


결국 그 곳은 가장 빠르게 황폐화되는 지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양들은 한 번 풀을 먹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해요. 


풀이 맛있는 건지, 그 먹는 행위 자체에 빠지는 건지."



다음 곡은 좀 걸릴 것 같았다. 


연주를 하던 마을 어른들도 다들 술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클로에도 익숙하지 않은 춤사위에 많이 지쳤으니 딱히 상관이 없긴 했다.



"그래서 양을 치다가 잠깐이라도 정신을 팔면, 양들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지거나 숲 안쪽으로 들어가서 찾기 힘들게 될 때도 있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가요?"



클로에는 슬슬 이 사람이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양에 빗대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은데...



"... 제 앞 집에는 루네라는 여자애가 살았어요. 


저는 프로얀 마을에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뤼비네이츠로 자리를 옮기면서 헤어졌지만. 


아마 운이 좋다면 이 마을에 살고 있을 수도 있겠죠."



루네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은데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변에 끼어있는 옅은 안개처럼, 무언가가 머리 속에서 기억나는 것을 막고있는 느낌이었다.



"누구입니까 당신? 


이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모를 리가 없는데?"



모두 모여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마을이었다. 


찾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쉬울 것이다.



"당신이 걱정되는 것 뿐이에요.


바로 앞에 놓인 작은 즐거움 때문에 그쪽으로 걸어가다보면, 결국 원래의 길로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이름을 알려주겠어요? 슬슬 무서워지려 하는데."



"조심해야 해요. 


풀만 따라가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중이거나, 위험한 맹수들이 사는 숲 속 일수도 있으니까."



클로에는 얼굴을 굳히고 긴장하며 마법으로 몸 상태를 체크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당신 혹시 알렌인가요?"



남자는 피식 웃으며 클로에의 손을 놓았다.



"당신 일행은 술이 너무 약한 것 같네요. 


이미 술에 취해 잠들었어요."



이미 춤을 추기 시작할 때 부터 두 사람이 뻗을거라고는 예상했다. 


아마 고된 노동이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하니 긴장을 놓아버린 거겠지. 


클로에가 춤을 추기 전부터 술을 멈추지 않고 들이붓고 있었다.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양치기는 클로에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리고 안개 저편에서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작은 짐승이 메에,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잘 생각해 봐요."



클로에는 그 말을 기억했다. 


다만 당장은 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나에게는 중요해요. 


당신이 어떻게 다시 내 앞에 나타났는지, 저 양들은 뭔지..."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조금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목숨이었다. 


조금 더 단호하게 말을 끊고 돌려보냈다면 죽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클로에는 결국 구하지 못했다. 


도움만 잔뜩 받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위령(慰靈) 뿐이었다.



"만약 정말 당신이라면, 이게 환상이거나 가을 밤 꿈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잠깐이라도 당신을 만난 거라면..."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양치기의 손을 잡았지만, 알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클로에를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과하고 싶어요. 제가 부족했어요. 


당신을 말려들지 않게 했어야 해요. 


당신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최선을 다했지만, 클로에의 손으로 잡지 못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의 생이 행복했냐 하면 그렇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사람에게서 도망쳐 들판에서 행복을 찾았지만, 그게 과연 사람의 행복일까.



"아뇨, 클로에. 당신이 사과할 건 아니에요."



양치기의 뒤쪽 숲 속에서 다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느 새 마을 사람들은 자리에 널브러져 자고 있거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노랫소리와 음악소리도 모두 끊겨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그대로 사용한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밤 하늘에 걸린 달은 거의 중천에 떠 있었으니 잘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모두 사라진 것은 누가 보아도 이상했다.



"당신 덕분에 마지막으로 좋은 꿈을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양치기가 보이는 것 만큼 이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눈 앞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던 양치기가 다시 멀쩡히 걷고, 자신과 춤까지 춘 것이다.



"알렌,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서 죽지 않아도 되었다. 


죽을 이유도 없었고, 그저 자신이 조금 더 유능하고 잘 살필 수 있었다면 분명히 아직 살아있었을 것이다.



"나는 들판과 양을 사랑했어요. 


당신 덕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한 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어요."



풀에 덮인 푸른 들판과 그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사랑했던 양치기는 마지막으로 양의 배웅까지 받고, 미련 없이 웃으며 저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클로에는 그 때 처럼 양치기를 보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몰려와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 울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될 텐데, 미안하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오히려 클로에의 눈물을 양치기가 닦아주고 있었다. 


마을에서 받은 옷을 입어 아무리 보아도 마녀로 보이지 않는 클로에는, 영락 없이 울고 있는 또래 여자아이로 보였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지나간 과거에 자신의 일부를 나눠준 사람이라는 뜻일 거에요."



양치기는 그렇게 말하며 클로에의 새끼손가락에 걸려 있는 꽃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것 만으로도 꽃 반지는 다시 봉오리가 핀 것처럼 화사하게 생기를 되찾았다.



"지나간 사람과, 물건과, 시간에 자신의 일부를 두고 온다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죠."



클로에는 어느 빵집 아들의 생명을 구하며, 자신의 마음을 열어 그 사람을 도왔다. 


그 때의 추억을 되짚으면 짚을수록 클로에는 뿌듯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치기를 생각할수록 클로에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웃음을 주고, 힘들게 하고, 때로는 북돋아주고... 


그걸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를 겁니다."



"좋은 추억이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저는 아니겠네요."



클로에가 남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적어도 이 사람 앞에서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으니까.



"아뇨. 그건 그냥 운이 좋은 사람이죠."



양치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양 손은 비어서, 양치기의 지팡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클로에와 양 손을 잡고 춤도 출 수 있었겠지. 



하지만 양치기가 클로에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나자 왼손에 지팡이가 나타났다.



"좋은 사람이란 과거에 좀 더 많은 자신을 두고 온 사람일 겁니다. 


그 만큼 최선을 다해 과거를 살았다는 뜻일 테니까."



텅, 하고 나무로 된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렸다. 


세번째로 양치기의 뒤에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만 너무 안 좋은 일에 마음을 줘서 지치지 않기를 바랄게요. 


지쳐서 주저앉기에는, 당신의 손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잖아요."



"하지만 살면서 신경쓰이는 건 항상 나쁜 일 아닌가요. 


좋은 일보다 많이 있기도 하고요."



당신이 죽은 것 처럼, 이라고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클로에가 선의로 한 일이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온 적은 충분히 많았으니까.



"하하. 당신이 했던 말을 돌려줄게요."



양치기는 그렇게 뒷걸음질 치며, 지팡이를 이용해 천천히 양치기의 인사를 했다. 


클로에는 자신이 인사를 하면 정말 마지막 일까봐, 손을 흔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세상은 아름답잖아요?"



"어떻게...?"



그 이야기는 빵집 아들에게 해준 것이지, 양치기에게 해준 적은 없었다. 


당장 이승을 떠날 사람에게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으니까.



"그 꽃 반지가 저에게 전해줬어요."



양치기는 밝게 웃으며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당신이 필요한 곳에 있기를 바래요. 


물론 힘들겠지만, 아프겠지만."



양치기는 지팡이를 바닥에 두드렸다.



[딸랑]



그제야 방울이 울렸다.



"꿈이 아무리 달콤해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양치기의 인사가 끝났다. 


클로에도 마지못해 손을 흔들어 양치기의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그 양치기는 끝까지 웃으면서 다시 이승 너머의 안개로, 피안(彼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클로에의 시야가 외곽부터 윤곽이 사라지며 무너져내렸다. 


누군가의 심상세계에 접근하듯이, 빨려들어가는 것 처럼 하나의 점을 향해 원형으로 시야가 뭉개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지쳐 쓰러져 누워있기에는 아직... 저는 조금 더 걸어야 해요."



스승님도, 알렌도, 결국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고, 클로에가 필요한 곳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까 달콤한 꿈에 빠져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른쪽 눈에서 흘린 눈물과 함께, 클로에는 자신이 마차에서 사용했던 마법을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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