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도 유중혁이 자신에게 고백해오는 장면을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짝사랑이 이토록 긴 시간 이어질 줄 몰랐던, 아직 유중혁을 향한 마음이 그를 갉아먹지 않았던 때의 일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방과후 빈 교실에 유중혁이 자신을 찾으러 왔을 때, 무더운 여름 나란히 그늘 아래를 걷다 나뭇잎 틈새로 비친 햇살이 드리운 옆얼굴을 보며, 그리고 어느 추운 겨울 제 손에 끼워진 끝부분이 남는 유중혁의 장갑을 내려다 볼 때 그러했다. 물론 이러한 단 꿈은 유중혁에게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 한 번 산산조각이 났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유중혁이 제게 자신도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상상은 무척 달았다. 유중혁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받고 사귀는 것을 몇번이나 보고 제 마음이 가망 없음을 깨달은 후에도 아주 가끔씩은 같은 광경을 떠올렸다. 유중혁을 둘러싼 무수한 관계가 바뀌는 동안에도 자신은 유중혁의 곁에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어쩌면 언젠가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상상은 달콤하기는커녕 더한 허탈함과 괴로움을 불러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아예 떠올리지 않게 됐다. 김독자를 사랑하는 유중혁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오히려 유중혁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명료하던 것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기도 했다. 이제는 꿈에서조차 유중혁은 김독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이 꿈이었으면. 한때는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으나 김독자는 차라리 이것이 전부 깨고 나면 사라질 일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 손등에 얹힌 무게와 체온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제게 향하는 유중혁의 눈은 그 언젠가 자신이 그를 바라볼 때와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거짓말."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김독자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장난삼아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거니와, 십년도 넘게 짝사랑 해온 상대의 감정은 읽으려 들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고 말았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간 유중혁의 손은 뜨거운데도 김독자의 손끝은 차가워졌다. 유중혁은 재촉하지 않고 김독자의 침묵이 끝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긴 침묵 끝에 제가 해야할 말을 찾아낸 김독자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랑의 타이밍이라는게 정말로 있나봐.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은 각각 다르다고 하더니."

"김독자."


부디 목소리가 형편 없이 떨리지 않기를. 울지 않고,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제대로 해낼 수 있기를. 김독자는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유중혁을 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제대로 웃고 있는지 스스로는 확인할 길 없었으나 유중혁의 표정이 굳고 있는 것을 보니 썩 괜찮은 모양이었다. 


"내 사랑과 네 사랑은 스치는 순간조차 없었네."


김독자가 유중혁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제 손을 빼내었다. 김독자는 지금 이것이 실로 낯선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제가 생각했던, '나에게 고백해오는 유중혁'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 말을 거절하는 김독자는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수백번도 더 상상했지만 말이다. 살다 보니 유중혁이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날도 오는구나. 그리 생각하자 이번에는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손끝은 차갑건만 유중혁의 손과 닿아있던 손등은 여전히 따뜻했다. 왜 이제야 하고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서글프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뭐랄까. 김독자는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을 무어라 설명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이제는 정말로 제 마음이 끝이 났다는 것만 실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썩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음, 오늘은 이만 가는게 낫겠지? 다음에 보자. …너만 괜찮으면."


이것을 하나의 결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흐름을 더 이어가서는 안되었다. 여전히 멈추어있는 유중혁에게 눈짓하며 김독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만 괜찮으면' 이라는 것은 오늘의 만남을 파하는 것에 대한 양해가 아니라 유중혁이 다음에도 저와 친구로 만날 의향이 있다면 오늘 일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가 채 두 걸음을 떼기 전 다시 억센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김독자, 나는 아직 너와 할 이야기가 남았다."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너도 충동적으로 한 말일테니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아니. 네 말대로 우리의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이 이상 어긋나게 할 수는 없다."


그 말을 하는 유중혁은 약간 괴로워 보였지만 그만큼 단호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한 김독자가 손목을 비틜어 빼내려고 했으나 단단한 손아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도 김독자가 아플 정도로 세게 쥐고 있지는 않았다. 결국 김독자는 현관이나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유중혁의 집 소파에  팔을 붙들린 채 앉아있게 되었다. 마음은 접었다지만 그래도 김독자는 여전히 유중혁에게 무른 구석이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내리눌렀다. 유중혁은 일견 차분해 보였으나 뭐랄까 굉장히, 복잡해보였다. 김독자는 그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을 하나하나 읽을 수 있었다. 괴로움, 그럼에도 김독자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고집, 제게 품은 마음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들여다보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무심한 얼굴에 비교적 다양한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개는 한심해 하거나 열 받아 하는 표정을 짓게 하곤 했지만 말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유중혁의 기분을 남들보다 잘 파악하는 편이기도 했다. 김독자는 이 와중에 그것을 태연하게 분석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는 남의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뭐, 이제 와서는 반쯤 남의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조금 매정한 말이지만 유중혁의 마음은 결국 김독자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김독자가 제 지독한 짝사랑을 스스로 해결했듯이 말이다. 해결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유중혁은 그것으로 납득할 수 없으리라고 막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겠지. 김독자는 침묵한 채 유중혁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먼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언제부터였지?"

"시작을 묻는 거야, 아니면 끝을 묻는 거야?"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야 무겁게 들려온 목소리에 김독자가 되물었다. 끝이라는 단어에 근사한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지는 것은 모르는 척 했다.


"시작, 이 언제였는지 알고 싶다."

"뭐, 이제와서 비밀로 하는 것도 좀 웃기니까. 음, 중학교 3학년때부터였어."

"……."

"…너무 길어서 좀 질렸지? 그냥 비밀로 할 걸 그랬네."


유중혁의 침묵을 달리 해석한 김독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꾸준히 연애를 해온 데다 애인과 헤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유중혁이 저를 좋아하게 된 거 ㅅ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이야기일 터였다. 그 전까지 유중혁에게 김독자는 그냥 친구였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친구로 여기고 대한 사람이 사실 그 시간 중 대부분 제게 연애감정을 품어왔다면 소름 끼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김독자는 유중혁을 친구로서도 아끼고 좋아했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해봐야 변명 같기만 할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로 인해 유중혁의 사랑이 빠르게 끝맺는다면 그건 다행이었다. 친구로 지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김독자의 짝사랑은 충분히 괴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유중혁에게는 최대한 그런 시간이 짧았으면 했다. 마음의 무게가 다를 수도 있기야 하지만.


손목을 붙잡은 유중혁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 시간을 가늠해본 걸까. 김독자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흐리게 웃었다. 아무리 마음을 접었다지만 유중혁이 자신을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건 괴로웠다. 천천히 손을 빼낸 김독자가 제 손 끝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의 시야에 다시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들어왔다. 유중혁의 손이 이번에는 손등이나 손목을 잡는 대신 손바닥과 손 바닥이 맞닿도록 단단히 깍지끼어 감쌌다. 눈을 돌리고 싶지만 고개를 들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핏줄이 돋은 유중혁의 손을 보고 있으니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미안하다."


망설임이 담긴 짧은 사과에는 채 말이 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김독자는 그 말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동시에,


"왜 네가 미안해."


무척 이해하기 어려웠다. 화가 나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의아했다. 유중혁을 내치기 위해 부러 매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김독자는 정말로 그것이 유중혁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는 사내에게 김독자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중혁, 그냥 그건 나의 마음이었어. 네가 강요했던 게 아니고 그냥 내가 너를 좋아했던 것 뿐이야. 보답을, 그러니까 네가 나를 좋아해주길 바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런 상상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니까."


김독자가 생각하기에 스스로의 목소리는 제법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를 기만한 것은 김독자 쪽이었다. 그 말들은 사실 그가 스스로 되뇌곤 했던 것이기도 했다. 부당하게 유중혁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 또 오래도록 품어온 마음의 이름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여전히 유중혁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김독자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진짜로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잖아. 그냥 내가 멋대로 좋아했을 뿐인걸. 그리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네게 도움이 되거나 뭐 대단한 걸 해줄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네가 나한테 준 게 많다면 많았지. 고등학교 때 네가 나  송민우한테서 구해준 거 기억나? 그 때 이후로 나 괴롭히는 사람도 많이 줄었잖아. 어디 그 뿐이야? 이렇게 코코아도, 마시지 않으면서 날 위해서 사다두는 거잖아."

"……."

"음, 그리고 너는 내가 너 좋아하는 걸 몰랐으니까.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만. 아무튼, 새삼스럽지만 말하다 보니 너무 나한테 과분한 친구였네.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나는 너에게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유중혁이 우정이란 이름으로 제게 준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본 김독자가 머쓱한 표정을 했다. 정말 자신은 유중혁에게 받은 것이 많았다. 유중혁이 나누어준 마음이 없었으면 김독자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저 바닥에 있었겠지. 그야말로 독자獨子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니 제가 그토록 오래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자신은 이제 정말로 괜찮았다. 그러니 유중혁이 괜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김독자가 그를 짝사랑해온 시절을 죄스럽게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유중혁이 김독자를 좋아하는 이유 역시 '김독자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김독자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유중혁은 서글프고 조금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유중혁이 나 때문에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데.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하다 못해 상처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때가 맞지 않는 사랑이었고, 김독자의 것이었던 김독자의 사랑이 유중혁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되었다. 사랑의 순간이 맞물리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까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더라도 괜히 거기에 십수년의 무게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김독자는 유중혁의 짝사랑이 오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중혁의 마음을 감히 재단하려는 것이 아니고, 유중혁은 저와 달리 감정을 제대로 주고받을 줄 아는 강한 사람이었으니 금세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물론 그 후에 친구로 지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김독자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오탈자는 회지로 나올 때 수정됩니다...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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