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왜 아무도 없어?"

"와, 이씨. 신동이 우린 사람도 아니냐."

"구지호 어디 갔어?!"

"몰라. 술 먹여서 집에 간 거 아냐. 너처럼 걔도 바쁜가 보지."

"아 뭐야. 진짜? 언제 나갔는데."

"한 15분 전? 에저녁에 버스 탔겠다."


조모임 1, 2를 끝내고 겨우겨우 화장을 하고 도착한 후배들의 일일호프였다. 오랜만에 지호 얼굴도 보고, 요새 분통터지는 상황에 술도 마시고, 잘하면 구지호 또 자신의 집에서 재우기까지 하려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뽕도 찍는 알토란 같은 계획이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 


"아 뭐야...."

"안 붙잡았다고 우리를 족치진 말라고. 최선을 다했다고. 지가 집에 간다는데 우짜노."

"그래. 술이나 마셔. 술이나."

"개짜증나. 구지호."


서율은 맥주잔에 소맥을 1:1로 말면서 인상을 썼다. 서율의 짐작이 맞다면 구지호는 지금 백섭된 상태였다. 다시 학기 초, 아니. 2년 전 그 여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물론 깨톡을 하면 받고 밥도 한두 번 더 같이 먹었지만. 그 망할 놈의 근로장학을 시작한 뒤로는 묘하게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다. 


[전혀 모르겠어. 이해가 안 가던데?]

"뭔 흰소리야. 굳이 전화를 해서."

[아니. 뭘 이해를 해야 돕든가, 상담을 해 주든가 하지. 나는 전혀 이해가 안 가.... 왜 좋아? 대체?]

"구지호의 구질구질한 매력을 왜 몰라!"

[아니. 너무 찌질하던데. 눈도 못 마주치고.]

"그 순진하고 샤이한 게 매력이라고."

[순진? 주위에 라이벌만 둘이라며...? 아무튼 잘 해 봐.... 난 모르겠어.]


조력자라고 포섭해 놨더니 지호를 만나고 와서는 하는 말이 저랬다. 학교는 왜 와 가지고. 우리 구지호가 뭐가 어때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민둥맨둥한 얼굴로 돌아다녀도 귀여운 구석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사실 무엇보다 빡치는 건 자신의 상황이었다. 지호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든, 세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남일처럼(남일이 맞다) 굴든, 알아도 모르는 척 접근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물리적으로 짬이 나지를 않았다. 

'문디 새끼들... 마 다 골수를 뽑아가 으깨놓든가 해야지'

어딜 가나 일정수의 또라이가 있다는, 소위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진리였다. 그런데 일정수가 너무 많을 수가 있나? 또라이도? 


조모임 1. (1) 할머니 장례식, 친구의 실연, 이번엔 늦잠. 조모임 날마다 일이 터지는 대환장 경영대 1학년. (2) 라떼충에 컴퓨터는 스타랑 롤밖에 못하는 사과대 4학년 복학생(27살) (3) 좋은 사람인 척 '좋다 대박이다'만 연발하고 파일 열어도 안 보는 놈 (4) 불쌍하고 심 약한 경영대 3학년.


그래도 여긴 그나마 나았다. 멀쩡한 경영대 3학년이 한 명은 있었고, 거지같이 해 오긴 했어도 해 오긴 했으니까. 문제는 4인 1조인 조모임 2, <소비자 마켓팅>이었다. 


조모임 2 (1) 자체휴학 (2) 분단위 스케줄 뺀질이 (3) 경영대 3학년 남자애. 


4인 1조인데, 결국 조모임에 나오는 건 두 사람이었다. 뺀질이는 얼마나 바쁜지 심지어 전화도 매번 통화 중이었다. 서율은 이쯤 되면 통화중이라는 메시지가 컬러링인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두 사람이 꾸역꾸역 하면 목이 막혀도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열심히 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 망할 (3)도 문제였다. 


26.2.


"서율아!"

"응?"

"나 너 좋아하냐?"


지랄. 지가 김우빈이야? 상속자야? 왜 팀플에서 연애질이야!!! 조장이라는 새끼가!!! 서율은 혀끝에 멤도는 욕을 꾹 참아내고 불쾌감을 숨겼다. 


"글쎄 잘 모르겠네?"

"아핫. 좋아한다는 뜻이야. 서율이 드라마나 밈 잘 모르는구나?"


알아. 알아 이 새끼야. 눈치없는 새끼야. 지금 '꺼져. 나 너 죽이고 싶냐?' 이러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 위트 있게 에둘러 거절했는데. 확인사살당하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났나.


"하하. 미안. 내가 누굴 만날 여력이 없어서."


짭웃음(^^)을 지으면서 꽤나 직구를 던졌다. 근데 문제는 상대가 구지호보다도 눈치를 밥 말아먹은 인간이었다는 점이었다.


"아, 그래? 하긴 요새 팀플 많지? 그럼 일더 썸 타 볼래? 어때?"

"하아?"


지랄 염병한다고 하려는 건 꾹 참은 서율은 거절을 거절로 못 알아 처먹는 상대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냥 발표고 뭐고 아디오스 짜이찌엔을 바로 외치기엔 개발이든 괴발이든 빌려야 할 처지였다. 서율은 한숨을 쉬고 그냥 다른 화제를 꺼내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나 그 미적지근한 태도가 화근이었는지 미친 조원의 끊임이 없는 플러팅이 시작되었다. 조모임에서도 쓰잘데기 없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데 진을 뺐고, 수업이 끝나도 들러붙어 밥을 같이 먹자며 따라왔다. 서율은 니가 니 몫을 하지 않아서 나는 밥이고 자시고 주먹밥 하나 먹고 조사하러 가야 하는데 너는 이런 나한테 작업을 거냐며 계속 점수를 깎아내려갔다.

그리고 오늘 또 쓰잘데기 없는 스몰톡으로 시간을 보내고 수확없는 조모임을 마치고 늦게야 후배들 일홒에 간다고 일어나는 서율을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소개해 달라는 둥, 자신도 술 좋아한다는 둥, 소맥을 기가 막히게 만다며 따라 들어오려는 것도 짜증났는데, 말을 돌리며 오늘 분배한 내용 조사해 오라는 인사에 던진 답변이 기어코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


"아, 누가 데이트 해 주면 열심히 할 텐데~~."


서율은 그냥 용단을 내렸다. 어차피 이 새끼 이 꼴이면 있어도 방해만 될 게 뻔했다. 손절각이 떴다. 


"야."

"어? 왜~~?"

"난 너랑 데이트고 뭐고 팀플 외엔 할 생각 없고."

"아."

"팀플이 백 개든 이백 개든 끝나도 너랑 사귈 마음은 쥐똥에 있는 박테리아 눈꼽만큼도 없거든? 진짜 작작해? 넌 뭐 팀플이 네 연애하라고 내 준 건 줄 알아?"

"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더 심한 말 하고 싶은 거 참은 건데."


그렇게 입씨름을 하는 동안 망할 구지호가 가버렸다. 서율은 역시 쌍욕을 했어야 했다고 후회를 했다. 개망신을 줬으니 조별발표는 이제 개인발표가 되어 버리겠지만. 오늘은 짜증나서 마셔야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야. 야. 야 천천히 마셔. 신동 왜 이래?"

"몰라. 야 왜 이래?"

"냅둬. 팀플 두 갠데. 조원들이 개새끼래."

"신동 손절왕이잖아. 주식도 코인도 조원도 딱 타이밍 재서 손~절!"

"시끄러워."

"그래서 거의 혼자 하나 봐."

"헐. 고생이네."


후배들이 엉망진창으로 태워온 계란말이를 텁 입에 넣으면서 동기들은 서율을 위로했다. 세희는 안쓰러운 듯 서율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넋두리를 했다.


"그래도 신동의 귀요미 구지호라도 있음 얘 기분이 쫌 나았을 텐데."

"그니까 말이야. 전화한다고 잠깐 나갔다 오더니 사색이 돼서 가 버리더라고."

"뭐야. 뭐야. 구지호 누구 만나나?"

"오. 그러게 솔직히 성격이 좀 답답해도 얼굴은... 히익."


서율의 무서운 안광에 동기는 쫄아붙어서 어우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제학과 3학년 중에 구지호가 신서율의 키링걸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아마 구지호밖에 없을 터였다. 


"야, 그래도 네가 구지호 면 세워 준다고 해서 애들 족보도 안 주고 지호한테 받아가라고 했어. 임마."

"맞아. 2학년들도 아까 보니까 잘하드라."

"지호 얼굴 좋아 보여?"

"어. 뭐 더할 나위 없던데."

"에이씨."


술잔을 꺾는 서율을 동기들은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후배들을 불러 추가주문을 했다. 



27.3.


"...."


며칠 잘 자지도 못하고 과제니 팀플에 매진하던 서율은 오늘도 도서관 그룹 스터디실에서 밤늦게까지 조모임1을 하다가 생산성 없는 대화에 짜증이 나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대충할까 싶었지만 모든 수강생과 교수 앞에서 잘하는 건 고사해도 망신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 결과 이렇게 됐다.

그러나 더 짜증이 폭발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상아인 것 같은 인물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긴가민가해서 보고 있던 게 문제였다.

'뭐 하는 조합이야. 셋이서? 구지호는 쟤랑 이 시간까지 공부 같이 한 거야?'

상아를 만나러 걸어오는 인물은 누가 봐도 지호와 하얀이었다. 팔짱까지 끼고선 다정하게 나오는 꼴에 서율은 아무 말도 못했다.


"짜증나...."


어떻게 해야 하지. 당장 가서 뭐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모르는 척 우연을 가장할까. 전화라도 할까.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 피곤에 절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서율은 일단 담뱃불을 비벼 끄고 잠시 눈을 감았다.




"서율아. 서율아."

"으응...."

"히. 졸리지."


귀에 속닥거리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자 도서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호가 모자를 써서 동그래진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속닥였다. 경제학과 1학년 전공 필수의 어마어마한 시험범위에 삼삼오오 모여 도서관에서 시험 전 밤샘을 하던 날이었다. 미리 계획적으로 시험 공부를 했던 서율이었지만 벼락치기를 하는 지호가 남는다기에 냉큼 옆자리를 꿰찬 거였다. 


"응."

"잠깐 바람 쐴래?"

"응...."


지호의 손에 뺨을 비비며 서율은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호가 입고 있던 체크셔츠가 자신의 크롭티 위에 걸쳐져 있었다. 서율은 어깨에 올려진 셔츠를 잘 여미며 건조해진 코를 훌쩍였다.


"감기 걸렸어? 에어컨이 세지...?"

"으으응. 자서 건조해서 그래. 비염 있어서."

"나두 비염 있어! 우리 똑같네."

"기뻐할 공통점은 아니지만, 그렇네. 지호 뭐 마실래?"

"나... 음. 서율이 너는?"

"너 또 나랑 똑같은 거 마시려고 그러지."

"히히."

"조지아 마실래. 노란색."

"응. 그거 맛있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천원짜리를 꺼내서 펼치고 있는 지호에 서율은 키득키득 웃으며 신용카드를 찍고 음료 두 개를 뽑았다. 지호는 울상이 되어선 돌아보았다. 


"내가 사주려구 했는데에...."

"그거 들어가지도 않겠어. 구겨져서."

"힝. 넌 공부도 다 했는데 남아 있는 거잖아. 미안한데...."

"나도 내일 같은 시험 보는데 뭐가 미안해?"


서율이 네일 때문에 캔을 못 따고 딸깍거리고 있으니 지호는 말 없이 자신이 딴 캔을 건네곤 서율의 손에서 커피캔을 받아들었다.


"나, 난 좀 이따 마시고 싶은데. 따 버려서.... 바꿔 줄래?"

"그냥 따 주고 싶어서 따 준 거면 더 좋겠는데!"

"...사실 따 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하하. 응. 고마워."


사소한 배려가 마음에 들어서 서율은 피식 웃으며 고맙다고 손을 잡았다. 귀까지 벌게져서는 아니라고 손톱 부서지면 큰일이라며 손을 내저으며 자기 손톱이 들렸던 이야기를 늘어놓는 지호가 퍽 귀여웠다. 


"어?"

"억. 또."


한 바퀴 산책을 하고 돌아오자 자리에 놓여 있는 캔커피에 서율은 빈축했다. 지호는 처음만큼은 아니었지만 놀란 눈으로 서율과 커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후우."

"서율이 예쁜 건 모자를 써도 숨겨지지 않나 봐."

"뭐래. 아.... 왜 이렇게 공부하는 데에서 수작들을 부리는지."


서율은 쪽지를 읽고 반듯하게 접으며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지호의 시선은 여전히 커피에 고정되어 있었다. 먹을걸 버리긴 아깝고 세희한테 주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마시고 싶은 건가 싶어 서율은 (약간 불만스레) 지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구지호는 신서율을 실망시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실 거야?"

"아니. 세희 주려고."

"글쿠나? 휴우."


이번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호에 서율에게 확신을 주었다. 지호 역시 자신에 대해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그게 물론 진지한 무언가는 아니고 본인은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편지로 마음 전하는 건 되게 대단한 것 같아. 뭔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펜팔 같고....]

서율은 맨 처음, 같이 공부를 하다가 쪽지를 받았을 때 (그날 이후로 서율은 풀메하고 도서관 오는 걸 그만 뒀다) 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그 말만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말고 지호와의 시간을 방해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포스트잇을 갈기갈기 찢어놨을 터였다. 

따지 않고 산책 내내 시원하라고 제 손에 쥐어줬던, 이제는 미지근해진 지호의 캔커피를 슬그머니 가지고 왔다. 그리곤 지호가 귀마개를 끼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대며 열공을 하는 동안 조용히 포스트잇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응?"


왼쪽 옆구리를 찌르는 감각에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왼쪽을 쳐다보았다. 서율은 천연덕스럽게 교재를 넘기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는 지호는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교재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좀 더 강하게 찔러 왔다.


"아야!"

"크흠."

"죄송합니다아...."


비명에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자 지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곤 서율을 억울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은근 장난꾸러기긴 했지만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러고 돌아보니 서율이 작게 책상 위를 콩콩 두드리고 있었다. 


"어. 우와."


제 캔커피에 붙은 자그만한 포스트잇에 지호는 감동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별 내용은 없었지만 처음 받는 쪽지라는 것에 감격한 것 같았다. 

물론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지호 자리에 놓여 있던 초코우유와 포스트잇은 지호가 보기도 전에 서율이 치워 버렸지만. 항의하려는 듯한 발신자에게 "제 친구가 초콜릿 먹으면 열흘 동안 토사곽란하는 지병이 있어서요."라고 핑계를 대는 건 덤이었다. 물론 그건 지호는 오늘 아침에도 수업 때 초콜릿을 까먹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애인 있어요."라는 말은 그거에 비하면 한없이 하양에 가까운 회색빛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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