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hours

 

05. 토론토 아일랜드


 

핸드폰을 꺼두고 잤다. 잦은 비행으로 뒤죽박죽인 시차에 내가 자는 시간이 곧 밤인지라 최대한 잠에 방해되지 않고자 하는 습관이었다. 그래도 레이오버가 3일이나 돼서 오늘은 굳이 핸드폰을 꺼둘 이유는 없었지만 음, 솔직히 말하면 기다리게 될까 봐. 계속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또 잠을 못 잘까 봐.


*


열두 시가 넘어 눈이 뜨였다. 어제 비행을 마친 크루들은 놀이동산 팀과 쇼핑팀으로 나뉘었다. 사무장이 속한 팀은 원더랜드를, 쇼핑팀은 다운 타운을 택했다. 난 원더랜드에 가려고 했었지만 아주 혹시 오늘 전정국과 약속이 생길까 봐 빠진 상황이었다. 이렇게 혼자 토론토의 아침을 맞이할 줄 알았더라면 가는 건데. 원더랜드는 토론토로 비행을 온 승무원들의 필수 코스와도 같은 곳이다. 90도로 수직 낙하하는 놀이기구가 있다던. 펀넬 케이크가 그렇게 맛있다던. 이름도 원더풀한 원더랜드. 지금이라도 간다고 할 까. 아냐, 이미 약속이 있다고 거절한 터라 그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한다. 제길. 뭐하지.


어제저녁부터 굶어 심히 배가 고팠다. 배고프니 예민함은 덤이다. 침대에 한 시간을 넘게 더 널브러져 있었다. 룸서비스나 시켜 먹을까 하다 창밖에 하늘이 너무 예뻐서 외출을 택했다. 다른 곳에 가면 지겹도록 룸서비스를 시키니까.

최대한 바람맞은 사람의 더러운 기분을 지우고 싶었다.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편하지만, 또 스타일리쉬해 보여야 한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었다. 선글라스도 하나 챙기고. 토론토의 5월 날씨는 썩은 기분도 좋게 만들 만큼 화창했다.

핸드폰을 계속 꺼두고 싶었지만, 구글맵 없이 돌아다닐 수 없으니 전원 버튼을 눌렀다. 혹시, 문자라도 오지 않았을까.


일말의 기대를 한 건 사실이지만 연락이 와있지 않아도 뭐. 개의치 않을 수 있다. 예상처럼 비행이 끝나고 두바이로 돌아왔다는 수지의 카톡과 건강 챙기라는 엄마의 연락을 제외하곤 반가운 문자는 없었다.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

 

이턴 센터는 관광객들과 현지인으로 붐볐다. 입사하고 얼마 안 돼 처음 토론토 비행을 가고 내 페이보릿 도시가 됐는데 역시나 나이스한 사람들과 맑은 분위기가 여전했다. 분명 내가 제일 기대했던 비행인데, 지금 기분은 뭐 그냥. 그닥이다.

꿀꿀한 기분을 달래려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어야지 싶었다. 역시 비싼 게 맛있겠지 싶어 대충 근처에 비싸 보이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여기서 얼라운스를 다 써도 좋으니 맛만 있어라.

*얼라운스 : 승무원이 비행지에서 레이오버 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여비. 항공사에서 제공한다.


제일 비싼 빠에야를 주문했다. 담당 서버는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린다며 어려워 보이는 와인 이름을 추천한다. 아, 와인. 저놈의 와인.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메뉴와 와인 한 잔이 놓였다. 혼자 먹기엔 꽤 많은 양이다. 한 숟갈 움푹 퍼내어 입안 가득 넣었다. 음. 배고파서 그런지 맛있긴 하네.

외국은 한국보다 혼밥족이 많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먹으면 되는데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보지도 않는 뉴스 기사를 읽으며 식사했다.

밥을 빨리 먹는 편이 아니어서 오랜만에 여유롭게 식사했다. 조용한 레스토랑 분위기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 배를 채우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누군갈 보기 전까지.




 



토론토에서의 일정을 조금 앞당겼다. 레이오버가 삼 일이라고 했던가. 박지민이 두바이로 리턴하는 비행기에 나도 타려 했다. 비록 엉망이긴 했지만 난 그 서비스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대표님, 목요일 일정 조정이 쉽지 않아요. 조율 가능한 날짜가 오늘 저녁이라는데. 도착하자마자 너무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피곤한 건 둘째치고 박지민에게 비행 끝나고 저녁을 먹자고 해둔 터라 고민됐다. 오늘 박지민과의 저녁을 포기하고 열네 시간의 비행을 택하는 편이 나으려나.


“오늘 저녁으로 일정 조정하면, 두바이로 돌아가는 걸 하루 앞당길 수 있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바이에서의 일정이 급하지 않아서 굳이 앞당기실 이유가….”

“이유가 있어서요. 오늘 저녁으로 잡죠. 미팅.”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미팅에 필요한 자료들을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행기에서 처음 서비스받은 기내식을 제외하곤 먹은 것도 없었지만 밥 먹을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피어슨 공항 면세점 입점 건을 두고 신경이 날카로웠다. 오차가 있어서 안 된다는 생각에 오자마자 서류 검토에 집중하느라 박지민에게 약속을 미루자는 연락을 깜빡했다. 이 미팅을 완벽히 끝내야 돌아오는 비행편을 바꿀 수 있다.

 

다행히 원하는 방향으로 얘기가 마무리되었다. 열한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다. 급하게 샌드위치로 저녁을 대신하고 호텔 휘트니스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아, 박지민. 완전히 잊었네.

뒤늦게 전화를 들었지만 이미 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연락을 해야겠다.

 

모닝콜이 울리기 무섭게 비서가 방으로 찾아왔다. 이턴 센터 입점 건이 타 브랜드와 경쟁으로 결렬될 수 있다며 심각하게 이야기한다. 토론토 내의 최대 쇼핑몰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곳이기에 수익을 떠나 손해를 보더라도 무조건 입점시키려던 곳이었다. 엄청난 월세를 지불 해도 꾸역꾸역 매장을 유지하는 뉴욕 소호의 매장처럼.

미팅에 가기 전 여유롭게 보내려던 오전은 새로운 피티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열한 시 반 미팅까지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서류 더미를 보다 형들과 아버지에게 SOS를 요청했다. 별개의 사업이니 구체적으로 힘을 써 줄 수 없지만, 사업 선배와도 다름없는 형들의 조언이 꽤 도움이 되었다. ‘막내가 다 컸네.’라는 큰형의 말이 오늘은 좀 뿌듯했다.


아침부터 걱정하고 수선을 떨어댄 게 민망해질 뻔했다. 꽤 장시간 진행되긴 했지만, 미팅은 매끄럽게 진행됐고 계약도 성공적이었다. 비서가 유난스럽게 굴어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덕분에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내 말에 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원래 비서와 식사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오늘은 오전부터 수고한 걸 알기에 늦은 점심 한 끼를 같이 하기로 했다. 점심이라기엔 이른 저녁에 가깝기도 하다. 임 비서는 평소에 말수가 적고 사무적인 스타일인데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옆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넨다. 나도 성공적으로 끝마친 미팅에 기분이 들떠 꽤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임 비서님이 드시고 싶은 걸로 하죠.”

“정말요? 제가 알아본 곳이 있긴 한데….”

“가시죠, 그럼.”


비서가 날 데리고 간 곳은 분위기가 괜찮은 스페인 레스토랑이었다. 여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분위기다. 비서는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냐며 식당 곳곳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SNS를 위해 눈에 담기 전에 카메라에 먼저 담아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터라 비서의 행동이 달갑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아마 오늘 이후로 다시 식사하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후 일정이 없어 와인도 한 잔 마셨다. 저녁엔 박지민이랑, 아. 박지민. 연락하는 걸 또 잊었다. 식사를 마치면 전화부터 해야겠다.

한참을 재잘대며 밥을 먹던 임 비서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맛이 없나. 난 괜찮은데. 내가 불편한가.


“저, 대표님….”

“왜요?”

“혹시 저 뒤에… 계신 분… 아는 분이신가… 해서요.”

“뒤라뇨?”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시는데….”


토론토에 아는 사람이 있던가. 임 비서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


임 비서의 얼굴이, 아니 내 뒤통수인가. 아무튼 이쪽을 뚫어질 기세로 쳐다보고 있는…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에 돈을 두고 일어서는…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려 나가는.


박지민. 형, 어디가?


“임비서님. 미안해요. 천천히 먹고 나와요. 항공권 변경 잊지 마시고요.”


당황하는 임 비서에게 지갑에서 아무 카드나 꺼내 건네곤 곧장 레스토랑을 뛰어나왔다.

어떻게 형은 사복도 내 스타일이냐.

매끈한 다리를 들어낸 짧은 반바지를 입은 박지민이 발을 쿵쿵 구르며 앞질러 간다. 혹시 내 연락 기다린 건가. 그래서 저렇게 삐졌나.


“형!”


이제 형이랑 호칭이 꽤 자연스럽다. 다 들었으면서 박지민은 못 들은 채 하며 걸음의 속도를 높인다.


탁, 박지민의 어깨를 잡았다. 뚝 하고 걸음을 멈춘 박지민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날 쳐다본다.


“여기서 다 보네?”


아오. 또 연기 하는 것 봐.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어. 너도 먹는 거 아니었어?”
“다 먹었어요.”
“그래? 그럼 수고.”


수고. 수고란다. 게임 하는 초딩도 아니고 수고가 뭐야. 돌아서서 가려는 박지민의 손목을 잡아챘다.


“형, 나 오늘 일정 다 끝났는데.”


사실 입점할 매장에 가 보려고 했지만 그건 임 비서를 시키면 될 일이다.


“근데?”

“어제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너무 바빴어, 대신 오늘 좋은 데 가요.”

“어제? 어제 뭐? 아- 우리 만나기로 했었나?”


이 깜찍한 생명체를 어떡하지. 일단 내가 잘못했으니 맞춰 줄까. 놀려줄까.


“뭐야, 까먹은 거예요? 나는 괜히 형 걱정했네.”


바빠서 걱정할 틈은 없었지만, 일단 내가 잘못했으니 박지민의 연기에 맞춰 주기로 했다.


“나도 크루들이랑 맥주 한잔하느라. 좀 바빴어. 많이.”

“아, 그랬구나. 크루들이랑 노느라 많이 바쁘셨구나. 오늘은 뭐해요?”

“저녁에 애들이랑 놀이동산 가기로 했는데. 원더랜드 알지? 근데 왜?”


어 뭐지. 진짠가. 오늘 저녁은 진짜 같이 먹을 수 있는데. 안 가면 안 되나.


“Hey Jimin!!”


놀이동산 가는 걸 취소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뒤에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세 명의 무리가 달려왔다.


“지민! 여기서 보네.”

“오늘도 약속 있어서 원더랜드 팀에서 빠졌다더니 친구 만나러 온 거야?”

“네가 갑자기 안 가겠다고 해서 조안나가 서운해했어.”

“맞아. 어제 맥주도 끝내줬는데,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저녁에 만난다는 사람은 만났어? 그분이 이 분?”


하이톤의 여자 무리가 순식간에 나와 박지민을 둘러싸고 떠들어 대기 시작한다. 보아하니 같은 크루 같고, 어제 직원들과 맥주를 마셨다는 건 뻥인 것 같고, 오늘 원더랜드에 간다는 것 또한 개구라인 듯한데.

설마 오늘까지 나와 놀게 될까 기대한 거 아니지? 그렇지 형?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어제 너네랑 펍에 갔었잖아.”


얼굴이 새빨개진 박지민이 당황하며 말을 지어낸다.


“지민! 낮부터 취한 거야? 너 어제저녁 약속 있다며. 조안나한테 마스크팩도 빌려 갔다던데?”

“맞아. 그 사람이랑 오늘도 만나야 한다며. 아니야?”


계속되는 삼인방의 공격에 박지민이 어퍼컷에, 카운터펀치까지 맞아버렸다.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박지민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와인을 좀 마셨더니 정신이 오락가락 하나 봐요.”


이대로 가다간 박지민의 새빨간 얼굴이 터질 것 같아 내가 인심 좀 써줬다. 박지민 어깨에 손을 두르며 대답하니 ‘So cute’이라며 깔깔대며 웃는다. 마스크팩까지 빌렸어? 이 형 진짜 골때린다.


“지민, 그럼 좋은 시간!”


‘Have fun!’을 외치며 떠나는 무리에게 손 흔들며 인사하고 아직 내 팔에 안에 들어와 있는 박지민을 쳐다봤다.


“오, 오해하지 마. 나… 어. 다른 친구 만나기로 했었거든.”


이 형은 자존심 빼면 진짜 뭐가 남을까? 고슴도치야 뭐야, 난감하면 삐죽 가시나 세우고.


“그래요? 그 친구랑 언제 만나는데요.”


속아주는 척을 하지 않으면 박지민의 자존심에 엄청난 금이 갈 거 같아서. 봐준다 내가.


“몰라, 이따가.”

“그 약속 취소하고 나랑 놀면 안 돼요?”

“….”

“그때 진 빚 몸으로 때워야죠. 나랑 놀아 오늘.”

“…그러던가.”


마지못해 선심 써준다는 듯한 말투에 금방이라도 골려주고 싶었지만, 그럼 그냥 가버릴 것 같아서 참았다.

나 형이랑 데이트해보고 싶거든 진짜.


박지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보니 무슨 데이트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운 곳 말고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 토론토 아일랜드로 향했다. UCLA 시절 방학마다 미주와 캐나다 여행했을 때 가봤던 곳 중 마음에 드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경치가 괜찮은데, 사람이 그다지 붐비지도 않는.


차에 탄 내내 박지민은 말이 없었다. 아마, 내가 자신이 개구라친 것들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하는 중이겠지. 저 높은 콧대, 저거 어떻게 눌러주지?

뷰티 페어 화장실에서 박지민을 봤을 땐 성격이 좀 있어 보이긴 해도 착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기분이 나쁠 만 한대도 도와주려 했으니까.

점심을 대접했을 땐, 푸드파이터인가 싶다가 내 말에 곧이곧대로 당황하는 얼굴이, 참 표정을 참 못 숨기는구나 싶었고. 내 호텔 룸에 와선 당돌하고, 도발적이고, 생긴 거와 다르게 야하다? 물론 내 앞에 돈 봉투를 던져줬을 땐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기도 했고. 비행기에서 다시 마주쳤을 땐 당황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며 자존심 좀 심하게 부리는 타입인 걸 알았다. 그리고 그런 뻔뻔함이 귀여웠고.

미워서가 아니라, 귀여워서. 당황하는 표정이 재밌어서 저 높은 콧대를 좀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놀리지?


아일랜드에 도착해 선착장에 갔다. 박지민은 꽤 신나 보이는 표정이었다. 쟤 콧구멍 커졌다 지금.


“페리 타고 들어가면 섬 나와요.”

“뭐 남이섬 같은 건가.”

“남이섬 가봤어요?”

“당연하지.”

“난 안 가봤어요.”

“촌놈이네.”

“다음에 데리고 가주던가.”


대답 안 할 줄 알았지. 역시나 박지민은 말없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페리가 도착하고 물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섬 안에 도착해 총총 걷는 박지민의 손을 잡고 싶었다. 아, 형 같지도 않게 생겨 가지곤 되게 좋네.


한적한 호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니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고작 오늘 보는 게 세 번째인데 처음은 술에 취해 말보다 몸의 대화가 앞섰고 두 번째 만났던 비행기에선 역할 놀이에 심취해 제대로 된 말을 섞지도 못했다.


“어때요?”

“뭐가.”

“여기요, 첫 데이트 장소로 합격?”

“첫 데이트일지, 마지막 데이트일지 어떻게 알아?”

“왜 몰라요, 내가 아는데.”

“그니까 네가 어떻게 알아.”

“좋으니까.”


형이 좋으니까. 또 만나고 싶은데. 형은 어때요. 하고 싶은 질문은 많은데 꾹 다물린 박지민의 입술을 보고 참았다. 저렇게 표현 안 해서 연애는 해봤나 몰라.







“좋으니까.”

좋아? 뭘 좋아? 내가 좋은가? 전정국에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잘생긴 얼굴에 꽤 괜찮은 매너, 돈도 많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저런 앨 옆에 두고도 호감이 안 간다면 그게 이상한 게 아닐까.


내 평생 만나보지 못할 사람이다. 우연한 기회로 지금 내 옆에 있지만 안 보고 살려면 절대 마주칠 일 없는 그런 사람. 물론, 완벽에 가까운 그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며 거짓말이지만 그러기엔 두려움이 먼저다. 분명 끝이 아름답지 않을 거라는. 상처받는 쪽은 가진 자보다 못 가진 자가 될 거라는 불문율. 평범한 나를 호기심에 만나보고 싫증 나면 쉽게 버릴 수 있는 그런 삶. 괜히 마음만 깊어지면 내가 받을 상처가 너무 커서 지레 겁을 먹고 시작하지 않는 그런 사랑. 우리 둘이 사귀게 된다면 늘 안달나는 사람은 내가 되겠지. 게다가 아까 식당에서 본 예쁜 여자들을 품에 끼고 살 것 같은.


근데 그 여자는 누구지. 친구라기엔 멀어 보이고 직장 사람이라기엔 가까워 보였다. 전정국의 넥타이를 고쳐 매줄 만큼.

아무튼 나와 전정국은 딱 그런 관계이다. 아찔하지만 결국 상처만 남을 미래가 보이는 그런 관계.


딱히 대답 하지 않았다. 아, 나 금사빠아닌데. 고작 본 지 몇 번이라고 이런 고민을 하다니. 컨트롤을 잘해야겠다. 위험해, 위험하다고.

술김에 키스뿐 아니라 섹스 직전까지 간 사인데, 나란히 앉아있는 게 괜히 간지럽고 민망하다. 역시 술을 마셔야 하는 건가.


“술 마실래?”


대낮에 호수 벤치에 앉아있다가 묻기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술? 술은 왜요?”

“그냥.”

“싫어요.”

“왜?”

“맨정신에 하고 싶어.”

“뭐, 뭘 해?”

“대화.”

“아,”


바보 같은 소리가 나갔다. 그래 대화지 뭐겠어. 뭘 기대한 거야 미친.


“형 진짜 섹스밖에 몰라요?”

“아니거든!”

“암튼 뭐가 됐든 술김은 싫어요. 그러려고 데이트하자고 한 거 아니야.”


이 어린 재벌은 나름 진지한 얼굴이다. 아, 좋아지면 안 돼. 그냥 호감에서 끝. 좋아지지 말자.

별다른 말 없이 벤치에 멀뚱히 앉아있다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일어섰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너무 늦게 일어나서 그런가? 밥 한 끼 먹고 전정국과 산책을 조금 했을 뿐인데 시간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은 쓸데없이 예뻤다.


“형, 저기 봐요. 토론토 시내 엄청 예쁘죠.”

“와아….”


전정국이 내 양어깨를 잡곤 몸을 뒤로 돌렸다. 어둠이 칠해지는 하늘 아래 보이는 토론토 시내가 아름답다.


“….”


그가 뒤에서 양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교차하고 몸을 붙여 안아온다. 백…백허그인가….

왜 이런 스킨십을 하냐고 묻는다면 우스울까, 우린 이미 키스도 했는걸.

그래도,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이런 포옹은 싫다고 얘기할까. 너무 촌스러운 걸까. 그냥 지금 본능에 충실하면 되나. 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엉켰다. 차라리 원나잇이라면 쉬울 것 같다. 아님 썸을 타는 기간만 됐어도. 전정국과 나는 썸 타기에도 만나지 고작 이틀이고, 그리고, 그리고…. 어쩌면 오늘 이후로 만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도무지, 이런 사람과 관계를 이어간다는 게 상상 안 간다.


“또 머리 굴리네요.”


내 정수리에 얼굴을 얹은 그가 얼굴을 돌려 고개를 숙이곤 날 바라본다. 너무 가깝다.


“입 튀어나온 것 봐.”


긴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꾸욱 누른다. 눈치 없는 심장이 떨린다. 이런 남자를 마다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껍데기가 좋은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자꾸만 마음이 간다. 뷰티 페어에서 점심을 챙겨주던 모습과 비행기에서 콜 벨을 누르지 않고 날 쉬게 해준 모습을 보면 어쩌면 마음도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계속 이 사람의 장점을 찾고 있다. 고작 하루인데 말이다.


“친하게 굴지 마.”


마음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자꾸 다정하게 굴지 마.


“싫어요?”


뭐가, 친하게 구는 게? 아님, 네가? 뭐가 싫냐는 거야? 뭐가 됐든 싫지 않다는 게 내 마음인데, 솔직한 말이 나가지 않는다.


“모르는 척 잘하네요.”

“….”

“나한텐 다 보이는데.”


전정국이 감싸 안은 내 어깨를 더 조여온다. 아마 내 심장 소리가 그의 팔 언저리에 느껴질지도 모른다.

몸을 비틀어 품 안에서 빼냈다. 나를 바라보는 전정국의 눈빛이 낯설었다. 본 적 없는 눈빛이다. 저 눈동자에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아 다시 괜한 기대를 하게 된다. 그래도, 어차피 이 관계에 끝엔 상처가 남을 거란 걸 안다.


“넌 쉬워서 좋겠다.”

“무슨 말이에요?”

“차라리 너랑 원나잇을 하라면 하겠어. 근데, 이렇게 하루 만에 간지럽게 구는 건 불편해.”

“그게 쉬운 거랑 무슨 상관이야. 형 말대로라면 원나잇이 더 쉬운 거지.”

“서로 몸이 쉬운 건 괜찮아. 욕구만 풀고 끝내면 되니까. 근데 마음이 쉬워 버리면, 한 명은 상처받겠지.”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말해요. 자꾸 뭐가 쉽다는 거야.”


계속 다정했던 전정국의 목소리에 짜증이 베여있다.


“네 마음이 쉽다고. 쉽게 좋아하고, 쉽게 질릴 거잖아. 호기심에 한 번 찔러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사람 찾아가면 그만이잖아.”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나에 대해 알아요?”

“알게 된 지 고작 이틀이야. 제대로 얼굴 보고 말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마치 썸이라도 타는 양 이렇게….”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렇게, 이렇게 뭐. 기대하게 만든다고? 흔들리게 만든다고?


“혹시 겁나서 그래요?”


너무 빠르다. 감정의 속도가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나 안 쉬운데.”

“….”

“진짠데. 기간이 중요한가. 그건 그냥 숫잔데.”

“….”

“이것도 거짓말 같으면 밀어내요.”

“뭘? 읍-”


두 번째 키스다. 진한 포도향이 났던 호텔에서의 키스와 다르게 아주 조심스럽고 친절한 입맞춤이다.


굳게 닫힌 입술을 혀끝으로 살살 간지럽히다 손으로 천천히 내 아래턱을 내린다. 못 이기는 척 입이 벌어지고 아주 다정하게 그의 따듯한 혀가 입 안로 밀고 들어온다. 소극적인 나를 달래듯 치열 하나하나 고르게 훑는 그의 부드러운 혀를 감싸 안았다. 마주한 혀가 뒤엉키며 젖은 소리를 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허리를 감쌌다. 전정국은 나를 안심시키듯 큰 손으로 내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 키스가 너와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 조금 무섭다.


한참을 마주한 입이 떨어지고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 숨을 몰아쉬었다. 전정국이 조심스레 내 턱을 들어 올린다. 아마 마주친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나 지금 되게 떨리는데. 형이 믿어줬으면 좋겠다.”


역시나 ‘나도’라는 이 두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꾹 다물린 내 입술에 전정국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앞장서 걷는다.


“가요. 섬에서 나가자.”


토론토 아일랜드. 이 섬을 나가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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