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도 고양이는 단맛을 모른다. 고양이의 세계에는 ‘단맛’이라는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만 고양이에게는 무 존재인 것이다. 우리와는 같은 땅을 밟고 서 있음에도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생명체는 다양하다. 심지어는 지금 네 바로 옆에 서 있는 친구마저도 너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리라.

“세상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 던져진 후 철학자들은 이 물음에 대해 깊게 고심하며 여러 주장들을 내세웠다. 특히나 그 시점은 뉴턴이 발견한 운동의 3 법칙이 일으킨 열풍으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이 중심인 사회였기에,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식론들이 많이 생겨났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낳은 대표적 인식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경험론과 이미 인간의 이성 안에 모든 정보와 지식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합리론이 그것이다. 

‘나비는 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예로 들겠다. 경험론은 다양한 나비가 날개를 움직이며 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합리론은 날아오르는 나비를 눈으로 인식해서 이성 안에 있던 ‘나비는 난다’는 사실을 자극해 겉으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둘 다 이성에 대해 주장하지만 감성을 철저히 배제한 상태였다. 이때, 칸트가 제 3의 길을 열었다.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인식을 따른다는, 즉 각자의 욕망에 따라 구축되는 세계가 다르다는 완전히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칸트는 감성과 이성이 종합을 이루어 각자의 세계를 구축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지만 곧이어 미래에 그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났다.

강아지들이 보는 세상은 흑백이다. 개구리는 움직이는 것만 인식한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동물이, 혹은 곤충이 대부분이다. 각자에게 중요한 것만을,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만을 인식하고 자신만의 일루전을 통해 움벨트를 구축하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생물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배추흰나비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자외선과 적외선을 보는 것처럼 인간이 모르는 사실도 알고 있다.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는 그저 각자의 세상에 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쉽게 예시를 들어보겠다. 나는 A라는 아이돌 그룹을 아는데 친구는 모른다면, 친구의 세계에는 A그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A그룹의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관심을 가진 친구는 A그룹을 자신의 움벨트 안으로 새로이 넣어, A그룹의 존재를 인식한다. 이것을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구성주의 사유법’이라 부를 수 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칸트의 명언이다. 내 기준에서 이 문장의 뜻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사고, 즉, 이성적임에도 감성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 만약 이런 사고에 내용이나 목적이 없다면 그것은 움벨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아무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칸트는 이것을 공허하다고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 직관은 이성적인 일이지만 대상을 직관할 때 그것에 대한 개념이나 감성이 없다면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인식할 뿐이지, 그 대상을 자신의 움벨트 안으로 넣지는 않는다는 뜻이라 해석할 수 있다. 

경험과 이성을 통해 인식한 새로운 사실은 나의 욕망, 즉 감성을 통해 나의 세계로 들어오고, 나의 세계를 또 새로이 바꾸어 놓는다. 나의 관심사가, 혹은 재능이 유달리 집착하는 것이 모두에게 하나씩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에 시간과 관심. 더 나아가 열정을 쏟아부어 그것이 우리의 세계를 이끌 수 있도록 밧줄을 쥐여준다. 순수한 이성으로만은 우리의 세계를 구축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 이성과 감성이 조화로이 결합해야지만 세계가 탄생한다는 말. 그것이 칸트의 책 제목이 ‘순수이성비판’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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