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氷傳



十六話



혀가 부드러이 손가락을 핥아 올릴 적마다 어깨가 오싹오싹 떨렸다. 


혀의 색은 당연히 붉거늘, 그 붉은 색이 유달리 요사스러워 보였다. 


쪽쪽, 빨기도 하고 입을 맞추는 것이… 간지럽고 무언갈 연상시켰다. 보고 있으려니 목이 마르는 듯했다.

기름에 덴 손끝은 여전히 지글지글 화끈거렸다. 

이러고 핥게 놔두면 더 아플 뿐이었다. 얼른, 찬물에 손을 담가야.


한림이 눈을 들어 혜빙을 보았다. 

애달플 정도로 속이 조여왔다. 


"…서방님, 저, 괜찮습니다. 그보다 손을 씻고 싶습니다."

"…핥으니 더 쓰리덥니까."

"다, 당연합니다! 놓아주세요."

"어멈, 물을 가져와 주겠어?"

"예에."


행랑어멈이 가져온 물 대야에 손을 씻으니 그제야 쓰라림이 밀물 같이 밀려왔다.


"으으으으…."


신음이 절로 나왔다. 물에 비친 손끝이 온통 빨개져 있었다. 

한데 이를 한림이 빤히 바라보니, 더욱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언제 가서 손님을 마저 맞을 텐가? 톡 쏘아보니 한림이 큼, 하고 헛기침했다.


"부인, 정말 그만하고 쉬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정주간에 온종일 있었답니까?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예 아픈 척을 하라는 이야깁니다."


가재 수건에 손을 닦다 멈추었다. 한림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전날 밤 혜빙은 한림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대내상과 조정 신료들이 시키는 건 다 하라고 했다.


잔치를 핑계로 대거 몰려오는 것은 한림을 질투하고, 고립시키려고 하는 심산이니. 이미 곰을 마주쳤으면 눈에 더 띄는 일을 하지 말고 그저 웅크려 버티라 일렀다. 


'그리고 저를 불러 달라 하면, 사양치 마시고 부르세요.'

'하지만, 행여나 혜빙을 죄인 만들면 어찌합니까.'

'…그래도 불러주셔야 합니다.'


당최 혜빙은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단 말인가. 오종종한 입을 저리 꾹 다물고. 

더 말려보려던 그때, 노복이 달려와 불렀다.


"나리, 손님들께서 나리를 찾으십니다."

"벌써 다 앉으셨더냐."

"예."

"가보겠습니다, 부인."

"서방님. 명심하세요. 무슨 일 있을 시엔 절대 사양하지 마시고, 저를 불러올리시는 겁니다."


거듭된 당부에 한림은 알겠다 답하고는 노복을 따라 누각으로 향했다.





한편 누각에서는,

삼삼오오 씩 모인 신료들이 대내상에게 허리를 조아리며 인사하고 있었다. 


"어르신, 개정안이 통과된 것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흠, 나야 방 사정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밖에 한 일이 없네만?"

"방 사정과 같은 신인이 폐하께 직접 상소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어르신과 같은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사실상 어르신의 공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네 발로 엎드려 학학대는 것이 곧 개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내상은 속으로 코웃음 치며 생색을 냈다. 


"어찌 나의 공이 되겠는가. 방 사정이 애를 많이 썼으니, 이번 일로 다들 방 사정이 인재임을 알고 아껴준다면 그걸로 됐네."

"아이고, 암요! 어르신의 지원을 받아, 방 사정은 점점 날아오르겠군요!"

"이거 미리 선물이라도 보내놔야 하는 것 아닌지… 하하!"


충부정랑이 하는 말은 농이 아니었다. 이는 대내상이 의도한 바였다.

저마다 서로를 힐끔대며, 누가 먼저 신인에게 줄을 댈지 재어보게 하는 것. 

한림의 움직임으로 대내상의 의도를 유추케 하는 것. 한림이 대내상의 수족인 양 보여지게 하는 것. 

조정 최고 대신과 잽싸게 한배를 탈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순진한 사위는 이를 알까 모를까. 


사위는 몰라도, 한 사람, 

제 딸만큼은 이를 짐작하고 있을 수도.



이윽고 한림이 누각 위로 오르니 다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을 닫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누각 위로 올라온 한림은 먼저 대내상과 좌상, 우상에게 간단히 인사하였다. 그리고 초대한 손님들 모두 참석한 것을 확인한 뒤, 두 손 모아 인사했다. 

 

"오늘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날 입맛을 돋우는데 초계탕이 제격이라 하여 차려보았사온데,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어서들 드시지요."


한림이 자리에 앉으니 식사가 시작되었다.


누각 주위를 작은 연못이 휘감고 있었다. 동실 뜬 연잎과 자줏빛 연꽃, 누각에서 떨어진 곳에 선 버드나무까지. 고즈넉하고도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알록달록한 고명의 초계탕을 먹으며 감상하니 초대받은 자들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감돌았다. 함께 차려진 고기 산적과 튀김과도 잘 어울렸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한림! 그간 어찌 관리하셨습니까?"

"사실 부끄럽게도 얼마 전 혼인하기 전까지는 저 혼자 살아, 정원에까지 신경 쓸 짬이 없었습니다. 안사람을 맞이하고 나서부턴 안사람이 신경을 많이 써주었지요."

"부인께서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어쩐지 대내상 댁 정원과 분위기가 비슷하더라니…"


한 신료가 눈치 없이 중얼거리니 옆에 있던 다른 신료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내상이 헛기침하니 신료 몇몇은 다시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식사가 마무리되고 술상이 차려졌다.

밥상을 물리고 각자의 앞에 술상이 차려지니, 좌상 대훤이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대내상을 향해 물었다.


"어르신! 예까지 오셨으면 따님을 뵙고 가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 그렇습니다! 방 사정과 함께 밤을 새우며 내조를 했다던 부인 말씀이시지요. 한번 뵙고 싶습니다."


좌상이 운을 띄우니 중정대신 윤 소정이 받았다. 한림의 부인을 보여달란 말을 한림이 아니고 대내상에게 하다니, 일부 좌중의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대내상은 한림을 향해 태연하게 물었다.


"방 사정, 다들 이리 청하는데 어떤가. 인사라도 시켜줌이."

"안 그래도 꼭 인사시켜드리고 싶었으나, 오늘은 안사람의 몸이 편치 않다고 하여 저어됩니다."

"허허… 친정에 있을 때도 같은 핑계를 대며 손님들 앞에 나서질 않더니, 시집간 후에도 똑같구나."


아니…

아무리 딸이라고는 하나 출가외인인데, 남의 부인을 두고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나?

어느 남편이 자기 부인을 쉽게 보여주겠는가.

하지만 상대가 대내상이었기에, 신료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어느 하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제각기 가슴만 벌렁댈 뿐.


한림은 대내상을 똑바로 마주 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유랑, 안사람을 데려와 주게."


이걸 받아준다고? 의외로 금방 허락하니 좌중이 놀랐다.

드디어 방 사정이 아내 길들이기에 성공하였는가. 슬며시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자도 있었다.



이윽고 혜빙이 유랑과 함께 누각에 당도했다. 

말로만 듣던 한림의 아내, 대내상의 넷째 여식의 등장에 좌중은 크게 숨을 삼켰다. 


한림의 옷과 결을 맞춘 감색의 포에, 옥색 저고리, 감색 치마를 입고, 진주 패물로 손목과 귀, 머리를 장식했으니 그 모습이 가히 귀부인의 자태였다. 

이 여인이 중경 거리를 말달리던, 그 말괄량이가 맞단 말인가?


'결혼 전에는 혜빙 소저로 불렸던가. 나는 기러기도 떨어뜨릴 미인이다.'

'아름답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군.'

'과연 선남선녀끼리 만났구먼. 부럽기도 하여라.'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저마다 언감생심의 꿈을 꾸는 신료들이었다.

누각 아래에서 혜빙이 두 손 모아 평절했다.


"소첩 인사드리옵니다."

"부인, 몸은 괜찮습니까."


한림은 진심으로 혜빙을 걱정했으나 혜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예." 라고 답할 뿐이었다.


"이리도 훌륭한 분들께서 서방님을 알아봐 주시고 지원해주셨다는데, 어찌 소첩이 나와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인! 초계탕이 아주 맛있었습니다!"

"영광입니다."


공손하게 두 눈을 내리깔고 인사하니, 좌중 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마다 방 사정과 부인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칭찬하였다.

대내상은 몹시 흡족해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방만한 여식이었거늘, 네 훌륭한 지아비를 만나고 아주 잘 길든 모양이구나."

"소첩, 과거 아버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네 이제 알면 되었다. 그런 치기 어린 시절을 겪으며 숙녀가 되는 것이지.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이구나. 방 사정을 만나게 한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


일전에는 오랑캐 집안이다 소문을 퍼트려서 넣었던 혼담도 취소케 하시더니. 역시 본인이 혼례를 성사시키시기 위함이셨던가. 

당시 먼저 혼담을 넣었던 윤 소정은 헛헛한 기분에 몰래 안주를 집어 먹었다.


"부인, 여름이라고는 하나 밤공기가 목을 상하게 할까 걱정입니다. 이만 들어가세요."

"……그럼."

"잠깐."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혜빙을 대내상이 불러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인가, 한림이 놀라 돌아보았다.

혜빙은 예상하였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았다.


"인사라는 것이 그리 말로만 하고 가는 것을 인사라 하더냐. 이리 올라와 대신들에게 술 한 잔씩 따르고 가야지."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때까지 희희낙락하며 보고 있던 자들도 굳었다. 

순식간에 좌중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무리 딸이라 해도 이제는 엄연히 여염집 정실부인이었다. 작부한테 하는 것처럼 술을 따르라 말라 어찌 명령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5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을. 이 어찌도 냉혹한 명인가.


"알겠습니다."

"……!!"

"이 자리에 계신 모두께 따라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럼 손님을 가려 대접한단 말이냐. 올라오너라."


대내상이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백자기 술병은 남자가 들기에도 족히 무게가 나가 보였다.

혜빙 소매 속의 주먹이 꾸욱 쥐어졌다.


'아버님은 한림이 자기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단 걸, 모두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 한림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충성해줄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처럼 길 수 있는지. 

그리고 여식은, 이 영혜빙은,

시집가서 제 뜻을 꺾고 난 후, 정말로 지아비의 뜻에 따르고 친부에게도 충성할 생각인지. 


'반항하면 기세를 꺾어줄 심산이겠지.'


술병을 든 대내상의 팔을 한림이 잡아 내리려 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어르신… 어르신의 뜻은 알겠으나 좌중의 수가 많고, 오늘은 정말 부인의 몸이 좋지 않습니다. 술 따르는 여인이 부족했다면 부를 터이니 안사람은 이만 물러가게 해주세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이 집에 늙은 종복밖에 없는 것을 다 아는데 달리 누굴 부르겠다는 건지."


대내상은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이에 분위기를 읽고 삼가지는 못할망정, 대내상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요, 거 부인의 술 한 잔 받아 봅시다!"

"절색의 미녀를 아내로 맞았으니 좀 더 즐기시지요, 방 사정. 이 또한 흥 아니겠습니까."


흥은 무슨 흥. 이 사람들이. 

한림이 화를 주체 못 하고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혜빙이 치맛자락을 모아 잡고 누각 위로 올랐다.


"…부인!"

"마님!"


그 단호한 기세에 한림도, 유랑도 동시에 혜빙을 불렀으나 들었는지 말았는지.

대내상으로부터 조용히 술병을 받아 들어 맨 끝자리에 앉은 정랑들부터 차례로 따르기 시작했다. 


"…."

"고, 고맙습니다, 부인."


한 명 한 명… 공손하게 따랐다. 쪼르륵. 술잔에 따뜻한 술이 담기고.

누가 봐도 혜빙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거운 술병을 기울이느라, 한 잔 두 잔 따를 때마다 집중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허허, 부인…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얌전하게 구는 부인을 만만하게 보고. 이렇듯 수작질을 부리는 인사도 있었다. 

혜빙이 술을 따를 때 일부러 고개를 돌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 자도 있었고.


"방 사정께서 밤에 얼마나 재미를 보실지… 아아, 부럽습니다."


대놓고 희롱하는 언사에, 듣는 당사자는 물론이요 제대로 된 정신이 박힌 신료들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유쾌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을 무슨 생각으로 시키셨단 말인가? 

안타까워한들 어찌하리오. 속으로만 혀를 찰 수 있을 뿐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이지 않은가. 한림은 치욕에 몸을 떨었다. 

어찌하여 이 부당한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일정한 자세로 일일이 앉았다 일어나길 반복하다 보니, 서른 번째 되는 사람에게 이르자 과연 그 혜빙도 버티기 힘들어했다. 시비의 부축도 받지 못하고, 무거운 도자기 술병을 가는 팔로 안은 채 무게 중심을 잡는 것만도 대단했다. 


서른두 번째에 앉은 사람에게 술을 따르고 일어날 때였다. 

혜빙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


무게 중심을 잘못 잡아 앞에 놓인 술상으로 엎어지려 했다. 

자칫 술병이 깨지기라도 하면, 주위 사람은 물론이요 병을 안고 있던 혜빙이 크게 다칠 터였다. 한데 술을 받은 사람은 잡아줄 생각도 못 하고 보고만 있었다. 


"혜…!"


위급한 상황에 한림이 반사적으로 일어난 그때, 

누군가 강하게 혜빙을 붙들어 잡아주었다.

키 6자가 넘는 건장한 사내였다. 


"괜찮으십니까."


백자기 술병째로 혜빙의 양팔을 싸안았으니, 지켜보던 이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잡아준 자는 한림이 궁에서 처음 사귄 동료, 인부사정 김회였다.




17화에서 계속.



CHEON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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