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골이 울린다. 커다란 말뚝을 관자놀이에 직통으로 꽂은 것 같다. 그대로 냅둬 주는 것도 아니고 일 초마다 한 번씩 자리를 옮겨 박는 감각이 든다. 도영은 최대한 대가리가 덜 깨질 것 같은 자세를 찾고자 몸을 들썩거렸다. 누군가 두통의 원인은 좆창난 자세 및 근육의 긴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뿜어져 나오는 숨 냄새를 맡아보니 이번엔 정설을 빗겨나간 것 같았다.

아오. 머리야. 도영은 축 처진 팔뚝을 들어 이마 위로 얹어놓았다. 내려앉은 눈꺼풀 안으로 눈동자가 한 바퀴 굴러갔다. 힘껏 눈을 갈라내자 술기운에 세상이 와글와글했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고 나니 고개가 앞뒤로 까딱거렸다. 제가 생각해도 대단한 모습이었다. 대체 얼마나 처마신 거면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도 만취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온몸에 피 대신 참이슬 오리지날이 흐르는 기분이다. 제 숨결에 제가 취하는 무한 굴레에 빠지고 말았다.

도영은 벽면을 짚은 채로 방 안을 가로질렀다. 심지어 양말도 제대로 벗지 않은 상태였다. 바닥엔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패딩이 있다. 내용물이 쏟아진 가방과 짓밟힌 담뱃갑이 굴러다녔다.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당장에라도 청소기를 밀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으나 일단 살기 위해서는 포션이 필요했다. 가까스로 문을 열어 낸 도영은 주방 한가운데 자리했다. 눈대중으로 오백 미리의 물을 받은 뒤 차가운 냄비 안으로 라면스프를 탈탈 털어 넣었다. 싱크대 위로 한 손을 짚고 서서 물이 끓어오르기만을 기다리는데, 목이 말랐다. 라면땅마저 그대로 투하해버린 도영은 냉장고 문을 잡아열었다.

동시에 분홍색의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도영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다 녹아버린 스크류바였다. 냉장실에 입을 벌린 채로 쑤셔 박힌 검은 봉다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호롤로로롤로로로롤로로로롤로.


순간 관자놀이가 섬찟했다. 도영은 기억상실에 걸린 여주마냥 옆통수를 짚고 휘청였다. 어지러운 눈앞으로 뜻 모를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스크류바. 입술 새를 달콤히 냉각시키던 비비 꼬였네 들쑥날쑥해. 사과 맛 딸기 맛 조아조아. 동공이 흔들렸다. 시야가 어지러울 만큼이었다.

이게 무슨 기억이지. 갑자기 웬 스크류바가… 위험한 직감이 든다. 더 이상 무언가를 복기했다간 감당할 수 없을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전두엽을 강제로 차단한 도영은 냉장실 속 봉투를 잡아챘다. 전부 스크류바였다.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쑤셔 박자마자 지잉. 휴대폰이 진동했다.


불안… 하다.


쓰레기통 페달이 딸깍. 올라갔다. 도영은 초조한 눈으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얌전히 놓여있던 휴대폰이 까무룩 빛을 잃었다. 라면 냄새가 났다. 슬슬 끓어오르기 시작한 냄비에서 실낱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영은 숨죽인 발걸음으로 식탁 앞에 다가섰다. 검지를 들어 까만 화면을 톡 건드리자 짤막한 팝업이 튀어 올랐다.


-일어났어요?


오호.


[내복숭아]


였다.


"으악!!!!"


모서리를 정통으로 부딪힌 휴대폰이 바닥 위를 튀어 올랐다. 도영은 귀를 틀어막고 바닥 위로 주저앉았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 새끼가 왜 나한테 연락을 해? 가 아닌, 결국엔 연락을 처 하는구나. 였다.

왜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아래턱이 딱딱 소릴 내면서 부딪쳤다. 고개를 설설 내젓던 도영은 끝내 눈을 감았다. 회피를 하고자 차단한 시야였거늘, 기다렸다는 듯 무수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스크류바를 싹싹 비벼 먹던 궁색한 손바닥. 박승준의 등장. 과열되어 있던 전 남친과 덩달아 흥분했던 김도영.


'그럼 이번엔 네가 날 이용해.'

'…….'

'좋아해 줄게. 아니, 미칠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테니까,'


아니야. 꿈이겠지. 그만 생각해. 더는 떠올리지 말자. 도영은 파묻은 머리통을 퍽퍽 두들겼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억 속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좁아지는 미간 근육과 동시에 가로등 줄지어진 골목이 펼쳐졌다. 기억의 저편에서 재현이 말했다.


'다시 해. 나도 너 만난 거 후회 좀 해보게.'


달칵달칵. 냄비가 뚜껑을 들썩였다. 곧 있으면 넘칠 것 같았다. 도영은 손도 짚지 않고 기립했다. 벌어진 뚜껑 틈으로 매운 내 나는 수증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널 좋아하니까.'

'야. 미안한데, 나 이제 네 마음 같은 거 필요 없어. 네가 날 좋아하든 말든 알 바 아니라고.'

'기회 줘. 필요하게 만들 수 있어.'


도영은 연기를 피해 고개를 비틀었다. 그보다 더 피하고 싶었던 지난밤의 기억들이 어지러운 뇌를 가득 채웠다. 속이 역했다. 단지 숙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쎄. 그게 결국 안 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그때가 언젠데?'

'나야 모르지. 언젠 그런 거 정하고 시작,'

'아니?'


그만. 제발 그만. 도영은 맨손으로 뚜껑 손잡이를 잡아 올렸다. 동시에 와장창. 미처 열 새도 없이 놓쳐버렸다. 결국엔 냄비 표면으로 빨간 라면 국물이 흘러넘쳤다. 손가락은 홧홧했고 발끝에 채인 휴대폰은 새로이 몸을 떨었다.


'2주.'


지잉. 지잉. 전화였다. 화면 위로 선명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나, 네가 2주 동안 안 매달려서 심기가 존나 불편했거든? 그러니까 그때 안 한 거 지금부터 해. 딱 2주 줄게.'

'…….'

'2주 동안 실컷 매달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서…'


도영은 머리를 헝클어 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어느 것이 가장 급한 불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뜨거웠다. 새빨갛게 데어버린 손가락과 죽어라 달싹이는 냄비 뚜껑. 수치심에 홧홧해지는 눈밑살. 미친 듯이 진동하는 내복숭아.


'나 스크류바 사줘.'


다만… 외로이 녹아버린 스크류바는.




이토록 미지근




91.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아침이었다. 대각선으로 쏟아지는 험난한 기후에 맞서 도영은 우산을 펼쳐들었다. 소용없다는 듯 쌀가루 같은 눈발이 눈알 새로 들이닥쳤다. 새해 첫날 첫 출근 첫 발부터 겪기엔 서러운 고난이었다.

도영은 바람이 잦아든 틈을 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날씨의 지랄이 끝나는 시간을 확인할 셈이었다. 투명으로 취급하고 있는 알림 창에는 무수한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전부 주말 이틀 새 받은 것들이었다.


내복숭아 내복숭아 내복숭아 내복숭아.


이 미친 복숭아 자식. 도영은 지난 주말 간 내렸던 결론을 다시금 곱씹었다. 정재현이 미친 것 같다. 애가 이혼에 양육권까지 뺏기다 보니 결국 제정신을 놓고 만 것이 분명했다. (안)미안하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미친놈을 상대하는 건 정신과 의사들이나 할 일이지 평범한 카페 사장의 몫은 아니니까.

김 사장은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오늘은 월요일이지만 1월 1일이었다. 연중무휴 가게를 운영하는 김 사장이면 몰라도 근로소득세 신고하는 이음과 맺음 직원들은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불행 중 큰 다행이다. 미쳐버린 정재현을 일대일로 대면할 날이 24시간이나 미뤄졌다니. 

도영은 가뿐한 마음으로 눈발 휘날리는 거리를 걸어갔다. 물론 발은 무거웠다. 우산을 힘껏 쳐들고 있는 양손이 부러질 것 같았다.


빵.


별안간 클락션이 울렸다. 도영은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도영 씨. 미안해요. 내가 좀 늦었죠."

"……."

"얼른 타요. 많이 춥,"


씨발. 미친 복숭아다. 이 미친 새끼가 기어코 집 앞까지 찾아왔다. 도영은 전장으로 진격하는 병사마냥 우산을 추켜들고 질주했다. 헥헥 벌어진 입으로 눈비가 들어찼다. 그래봤자 오십 미터에 십이 초 걸릴 속도였다. 슬슬슬슬. 자꾸 얼굴 옆에서 따스한 히터 바람이 불어왔다. 도영을 쫓아 저속으로 운행 중인 E클래스 창문 새로 나오는 바람이었다.


"도영 씨. 그러다 넘어져요."


앞에 잘 보고 뛰어야지. 어깨 더 곧게 펴고. 호흡 유지해야 오래 뛸 수 있어요. 따라해요 습습 하하 습습 하하. 누가 보면 쟤가 김도영 코치인 줄 알겠다. 그렇다면 김도영은 육상선수처럼 굴어준다. 그냥 선수도 아니고 올림픽 출전 선수다. 그 어떤 방해공작에도 도영은 오직 앞만 바라보았다.

빵. 빵. 빠아앙. 삼 차선을 달달대는 E클래스 뒤로 볼멘 클락션이 튀어나왔다. 도영은 반사적으로 돌아갈 뻔한 고개를 고정했다. 고지가 머지않았다. 꿈에 그리던 버스정류장이 전방 십 미터 앞으로 다가왔다. 도영은 이를 악물었다. 차선을 변경한 버스의 몸체가 E클래스를 추월하고 있었다.


"잠깐 실례할게요."


삑. 삑. 희망의 소리가 아득해졌다. 숨 막히는 질주를 끝낸 도영이 버스 안으로 흡수되기 직전이었다. 계단 위로 올라서려던 그의 발이 공중을 부유했다. 줄을 서 있던 탑승객들이 허우적대는 도영을 한 번씩 돌아 보았다.

인간들의 의아한 눈초리가 멀어졌다. 아니, 멀어지는 건 김도영이었다. 등 뒤를 습격한 정재현의 손에 의해 짐짝처럼 옮겨지는 중이었다. 

탁. 그토록 피해 다녔던 E클래스 조수석 문이 개방됐다.


"뭐, 뭐야?"


쿵. 도영은 쑤셔 넣어졌다.


"이, 이게 지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달칵. 빠르게 문이 잠겼다. 바깥에 대고 팔뚝을 털어내던 재현이 옆을 돌아보았다.


"도영 씨 데리러 왔어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뭔 개소리를, 문 당장 안 열어?"

"네."

"뭐?"

"네. 안 열어요."


부웅. 미친 복숭아가 액셀을 거침없이 짓밟았다. 앞으로 기우뚱 쏟아지던 도영은 다급히 안전벨트를 잡아내렸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다. 띵띵대며 재촉하는 안전벨트 미체결 알림도 한몫했다. 어쨌든 불가피한 상황이었거늘, 미친 복숭아가 이런 말을 지껄였다.


"그러게 왜 고집을 부리고 그래요. 어차피 탈 거면서."


빡. 복숭아의 대가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손날을 하늘 높이 추켜세운 도영은 고함을 내질렀다.


"내려!!!"




92.

카운터 안쪽엔 조그마한 라디에이터가 있다. 도영은 그 위로 젖어버린 바라클라바를 널어놓았다. 폭발적으로 내리던 눈은 어느새 입자가 조그마해졌다. 날씨 어플에 의하면 오전 중으로 그친다는 소식이었다. 

김 사장은 한가로이 작업대 위를 닦았다. 꽈배기 모양으로 짜 낸 행주를 착착 겹쳐두고 나니 할 일이 끝나버렸다. 더군다나 공휴일엔 오픈 시간이 한 시간 미뤄진다. 회사 건물에 입점해있는 가게 특성상 손님도 절반 이상은 줄어들었다. 매일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가끔은 이런 한가함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더더욱 할 일이 없었다. 도영은 왁스 칠 수준으로 빛나는 홀 바닥을 지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스스슥.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미쳐버린 전 남친 정재현이 물먹은 대걸레를 이끌며 입장했다.


"어디 더 닦을 데 있어요?"


쟤 아직도 안 갔니. 도영은 카운터 위로 양팔을 뻗어 무너졌다. 알아서 창고 문을 개방한 재현이 대걸레를 세로로 세워 놓았다. 정재현은 청소를 아주 잘했다. 손도 빠르고 힘도 좋았다. 가장 뛰어난 것은 맷집이었다. 아무리 등짝을 휘갈겨도 멀뚱한 눈만 끔뻑거렸다.


"도영 씨. 아침 먹었어요?"

"……."

"내가 나가서 뭐 좀 사 올까? 아니면 뭐라도 만들어 줄,"

"정재현 씨."


도영이 불시에 뒤를 돌았다. 오목히 굽혀진 그의 팔꿈치에 재현의 복부가 맞닿았다.


"네?"

"……."


재현이 몸을 뒤로 물렀다. 도영은 그의 낯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길어지는 정적에 재현이 시선을 회피했다. 뻔뻔하게 입을 놀리던 몇 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입가에 주먹을 말아 쥐곤 헛기침을 큼큼대더니, 얼씨구. 이젠 얼굴까지 빨개졌다.

저도 제가 하는 짓이 비정상이라는 건 아나 보다. 도영은 쓴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있는 재현을 향해 테이크 아웃 컵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나 마셔요."

"… 내 거예요?"

"네. 그거 가지고 얼른 가. 이 정도 있었으면 됐잖아요."


재현이 공손한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그러는 동안 둘의 손끝이 살짝 스쳤다. 도영은 그의 온기가 남은 손가락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재현은 웬일인지 눈으로 감동을 먹고 있었다. 도영이 건넨 커피를 쪽 빨아마신 직후였다.


"… 기억하고 있었구나."

"……."

"투 샷 추가 맞죠? 나 이거 되게 먹고 싶었는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도영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탈탈 털었다.


"도영 씨. 고마워요. 난 도영 씨가 정말 다 잊어버린 줄 알고,"

"네네. 알겠으니까 얼른 썩 가요."

"왜요?"


재현이 금세 해맑아졌다. 얘가 진정 내가 아는 정재현이 맞는 건가. 도영은 가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왜긴 왜야. 그럼 뭐 하루 종일 여기 있으려고?"

"네."

"뭐?"

"네. 하루 종일 있을 거예요."


이 미친 복숭아가 진짜 왜 이래. 도영은 벌어진 입으로 기함을 토해냈다. 재현이 도영을 끔뻑끔뻑 쳐다보았다. 예의 그 뻔뻔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도영 씨가 허락했잖아요."

"내가 언제 뭘 허락했는데?"

"지난 금요일에 분명,"

"아아아. 됐어요. 나 그날 필름 싹 끊겼어.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


할 말을 마친 도영은 단호히 뒤를 돌았다. 애먼 행주를 집어 들곤 닦일 대로 닦인 작업대를 문질렀다. 그러나 머지않아 내팽개치고 만다. 옆통수를 때리는 길쭉한 그림자 때문이었다.


"아 좀. 왜요." 


도영은 신경질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양손에 커피를 그러쥔 재현이 아랫입술을 후웅. 내밀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기억 못 할 수가 있어요?"

"술 먹었잖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다시 만나자고 해놓고,"

"뭔 개 같은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어요?"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세 시 반에요."

"와. 얘 진짜 미쳤나 봐. 야. 내가 언제 다시 만나자고 했어. 매달리기만 하랬,"

"오. 기억력 좋네."

"……."


아. 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분하다. 이딴 단순한 계략에 말려들어가다니. 어느새 아랫입술을 쏙 집어넣은 재현이 뒤를 돌았다. 짤랑. 때마침 첫 손님이 등장했다. 새해에도 공부를 쉬지 않는 김주영 학생이었다.


"그럼 나는 저쪽 의자에 앉아서 매달리고 있을게요. 도영 씨는 편하게 일해요."

"……."


재현의 등짝이 여유로이 멀어졌다. 그가 의자를 빼 앉은 곳은 카운터 바로 앞자리였다. 도영은 묵묵히 정면만을 응시했다. 주문을 하는 손님 뒤로 뽀얀 전 남친 얼굴이 걸려 있었다. 조명에 반사되는 피부가 새하얀 백지 같았다. 숱 많은 머리 위로는 천사 같은 링이 감돌고 있었다. 속눈썹이 얼마나 긴 거면 뺨 위로 그림자가 져 있었다.


잘생기긴 뒤지게 잘생겼다. 똑땅이 아빠 새끼 주제에.


도영은 홀을 향해 위아래로 눈을 흘겼다. 그러던 중 재현이 입모양으로 말을 걸었다. 힘내요. 이러면서 싱긋 웃는다.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을 좌우로 방방 대면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도영은 못 본 척 원두를 갈았다. 한가로운 공휴일 오전이었다.




93.

사실 도영에게는 자그마한 로망이 있었다. 극강의 현실력을 자랑하는 그인 만큼, 아예 허황된 꿈은 아니었으나 감히 입 밖에 내긴 어려운 것이었다. '내일 빨간 날인데 재현 씨 일정 없으면 잠깐 가게 들러서 놀다 갈래요?' 라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뭐 하러 그리 끙끙 앓았는지 모르겠다. 그게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고.

처음으로 운을 띄운 것은 몇 달 전 추석 연휴 직전이었다. 수많은 빨간 날들을 지나 드디어 말할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때 둘은 호텔 안에 있었다. 온종일 섹스를 하다 서로의 몸에 기대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재현 씨는 다음 주에 뭐 할 거예요?"

"응? 다음 주? 갑자기 웬 다음 주?"


그들이 즐겨 찾는 호텔 협탁에는 늘 작은 달력이 세워져 있었다. 호수마다 디자인이 다른 건지 저번 주에 봤던 것과는 또 다른 색깔이었다. 도영은 달력에 꽂혀있던 시선을 위쪽으로 옮겨냈다. 그의 앞머리를 이리저리 꼬아대던 재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다음 주에 연휴 엄청 길잖아요. 추석이랑 대체공휴일도 있고 개천절까지."

"아. 그렇구나. 잊고 있었어요."

"뭐야. 재현 씨 직장인 맞아요?"


재현이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멈춰있던 손을 펼쳐 도영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이번에 공략하는 곳은 정수리였다. 도영은 자연히 그의 가슴팍 위로 볼을 기댔다.


"도영 씨는요?"

"나는 뭐… 출근하겠죠? 소망이가 본가에 간대서 주말에도 나가야 될 것 같아."

"추석인데?"

"원래 우리 가게 연중무휴예요. 저번 설날에도 그랬었잖아."

"아. 그랬었지."


뭐야. 기억도 못 하고. 도영은 가늘게 좁힌 눈을 치켜떴다. 어차피 가슴팍에 눌려있는 중이라 재현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재현이 뻘소리를 했다. 도영 씨는 머리가 엄청 까만 것 같아요. 이미 열두 번은 했던 말이었다.


"재현 씨. 그래서 뭐 할 거예요?"

"글쎄? 나도 본가에 가겠죠?"

"연휴 내내?"

"아니지. 당일만."

"그럼 남는 날에는요?"

"글쎄요. 근데 도영 씨는 머리가 되게 까만 것 같다."

"……."

"신기해요."


신기하긴 뭐가 신기해. 한국인 머리가 다 거기서 거기지. 맥락을 잃은 대화에 신경질이 났다. 도영은 고개를 탈탈 털어 남친의 손을 떼어냈다. 끙. 재현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주아주 가끔씩, 무언가가 진심으로 아쉬울 때 내는 소리였다.

뭐야. 귀여워. 도영은 재현의 손을 끌어당겨 다시 제 머리 위로 올려두었다. 그랬더니 좋다고 또 이리저리 헤집어댔다.


"아. 나도 본가 가고 싶다."


도영은 가슴팍에 모으고 있던 팔을 더듬더듬 뻗었다. 팔뚝 밑으로 남자친구의 탄탄한 복부가 지나갔다. 맨몸으로 누워있던 탓에 느껴지는 감촉이 생생했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진짜 피부만 덜 좋았어도 이렇게까지 봐주진 않았을 텐데.


"도영 씨는 본가 안 가요?"

"네. 갈 새가 없어요. 소망이 때문에."

"힘들겠네. 쉬지도 못하고."

"뭐… 힘들지는 않아요. 빨간 날에는 손님들이 확 적어져서."

"그래요? 다행이네."

"다행은 아니죠. 매출이 바닥인데. 한가하면 시간도 안 가고 엄청 지루해요. 같이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나는 또 혼자만 있으니까…"

"그럼 안 됐네."


와. 존나 영혼 없어. 도영은 또 한 번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재현의 눈동자가 젖혀지는 김도영 정수리를 따라 이동했다. 붙들고 있던 머리카락은 놓지도 않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움직였다간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였다.


"그래도 추석 당일에는 형이랑 사촌 누나들이 놀러와 주기로 했어요. 내가 심심하다고 놀러와 달라고 했거든요."

"잘 됐네요."

"재현 씨는 당일에만 본가 간다고 했죠?"

"네."

"… 그렇구나."


빵빵 부은 볼이 재현의 가슴팍 위로 짓눌렸다. 도영은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다른 날은 뭐 하는데. 애인 가게 좀 들렀다 가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입 밖을 탈출하지 못한 목소리가 가슴속으로 떨어졌다. 켜켜이 저장되어 있던 응어리 위로 폭. 쌓였다.


"근데, 도영 씨는 머리가,"

"까맣겠죠."


정수리를 공략하던 재현의 손이 뒤통수로 넘어갔다. 감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머리가 덕분에 완벽한 새집이 됐다. 도영은 이불 속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집중한 정재현 눈엔 뵈지도 않았다.


"네. 엄청 까매요."

"그렇겠죠. 엄청 까맣겠지…"

"신기하다."

"네네. 그래요…"




94.

이제 와서 되돌아보니 드디어 이해가 간다. 헤테로 전 남친 정재현이 그 많던 빨간 날마다 기를 쓰고 가게에 들러주지 않았던 이유. 지금의 도영은 그것이 '똑땅이' 때문이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모처럼의 빨간 날에 자식새끼를 등한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똑땅이한테 가서 비행기나 둥가둥가 태워줄 것이지, 헤어진 게이 애인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도영은 몸을 완전히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미친 복숭아 정재현이 카운터를 당당히 꿰차고 있었다.


"주문 확인할게요. 검은 밤 아이스 두 개랑 푸른 밤 따뜻한 걸로 하나, 녹차라떼 휘핑 많이많이하고 어니언 베이글에 크림치즈 추가 맞으세요?"

"네. 맞아요."

"베이글은 지금 주문이 밀려있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후. 쏟아지는 한숨에 김 사장 앞머리가 쉴 새 없이 펄럭였다. 어지럽게 광광대는 그라인더 앞에서 도영은 이마를 훔쳐 닦았다. 그러는 사이 줄지어 붙어있던 감열지가 또 한 장 추가됐다. 김 사장이 만들어내야 할 음료의 목록이었다.

청력을 영끌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범인은 최근 컴백을 마친 모 아이돌이었다. 여기서 고작 삼 분 거리에 있는 용도 모를 건물에서 팝업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후문이었다. 1월 1일이랍시고 13시 01분부터 선착순 포토카드 증정 행사를 한다는데, 지금은 14시 38분이었다. 어찌 된 게 갈수록 손님이 더 들어온다. 그들의 손바닥엔 전부 투명한 필름지로 감싼 포토카드가 들려있었다. 대부분 20대로 보이는 여자 손님들이었으나 액면가가 만만찮은 남자들도 몇 섞여있었다.


"혹시 세리 구하세요?"

"아니요. 저는 이로…"


심지어 이곳에서 교환을 한다. 테이블 위로 수십 장의 포토카드를 바자회마냥 늘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덕분에 새해 첫날부터 최고 매출을 이룩했다. 이러한 영광의 순간을 소망이도 아니고, 어째서 전 남친 정재현과 함께해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도영은 살살 아득해지려는 눈가에 힘을 실었다. 동시에 코앞으로 머그잔이 다가왔다. 맹물이었다.


"도영 씨. 물 한 모금 마셔요."

"……."

"입술 마른 거 봐. 괜찮아요?"


도영은 다가온 손을 팽 밀쳐냈다. 재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재차 컵을 들이밀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언제까지라니?"

"안 나가? 여기가 지금 어디라고 기어들어,"


여기 주문이요. 카운터 앞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도영의 손에 컵을 쥐여준 재현이 후다닥 뒤를 돌았다. 아이고 머리야. 도영은 혈압 오르는 뒷목을 쥐고 휘청거렸다. 야무지게 찍히는 포스 옆으로 영수증이 둘둘 나오고 있었다.

저거 제대로 찍고 있는 거 맞긴 한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김 사장은 컵을 개수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주문부터 빼고 생각하자. 대충 보이는 주문서만 해도 스무 장은 족히 넘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도움이 됐다. 샷은 내리는 족족 어느 순간 멀쩡한 아메리카노가 되어 있었으며 옆에 두기만 했던 빈 우유통은 알아서 폐기가 되었다. 들끓는 손님에 비해 쌓인 설거지도 얼마 없었다. 무엇보다 한동안 얼음을 푼 기억이 없었다. 제빙기 앞을 굳건히 지키고 선 전 남친 때문이었다.


"저기요."

"네?"

"비켜요. 얼음 좀 푸게."


도영은 스쿱을 든 손을 휘휘 저었다. 동시에 재현의 얼굴 위로 음험한 그림자가 졌다. 김 사장의 손에 들린 스쿱을 홱 빼앗더니 어깨를 옆으로 죽 밀쳐냈다. 뭐야뭐야. 얘 왜 이래. 속절없이 밀려난 도영은 게걸음을 걸었다.


"미쳤어요?"


도영은 저도 모르게 빽 고함을 쳤다. 와글와글 대기하던 손님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딘가 격분한 모습의 전 남친은 미친 속도로 얼음 컵을 생성해 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연속 여덟 컵이었다. 여태까지 봤던 정재현의 모습 중에 가장 빨랐다.


"아니, 무슨 이렇게 많이,"

"주문 밀렸어요. 얼른 가서 샷이나 뽑아."

"저기요. 나 혼자 알아서 한다고요."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혼자 해요."

"미안한데 나 여기 사장이거든요? 언제는 혼자 아니었는 줄,"

"그러게요."

"……."

"내가 진작 몇 번 나와봤어야 했는데."


할 말을 잃은 도영의 입이 열린 채로 정지했다. 낮게 깐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던 재현이 싱긋 눈을 맞췄다. 아홉 번째 얼음컵을 생성해 낸 제빙기가 입을 닫았다. 내내 전 남친의 손에 붙들려 있던 얼음 스쿱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정도는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요."

"……."

"도와주게 해줘요. 부탁할게."


재현이 부지런히 앞을 보았다. 도영은 한 박자 느리게 뒤를 돌았다. 개수대에 던져놓았던 머그컵이 다시 작업대 위로 올라와 있었다.


'이제 와서?'


도영은 잠잠한 눈으로 컵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다시 개수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95.

늦은 오후가 되자 비로소 여유가 찾아왔다. 성대한 포카 교환식은 가게의 얼음과 시럽을 모조리 동나게 했고 홀 바닥에는 회색 발자국들만이 줄줄이 남게 되었다. 김 사장은 결국 가게를 세 시간이나 일찍 마감해야만 했다. 바닥을 닦고 설거지를 하는 데에만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전 남친이 없었더라면 두 시간은 걸렸을 일이었다. 도영은 빼곡히 채워진 현금 통과 닫혀있는 자동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너머 어딘가에서는 세 번째 대걸레를 빨고 있는 정재현이 있을 것이다. 오면 알바비라도 쥐여 줘야 하나. 일단 모자란 니코틴을 충전하면서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여기 있었어요?"


드르륵. 흡연실 문이 열렸다. 매가리 없이 쭈그려앉은 김 사장 발치에는 이미 두 개의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다. 도영은 이제 막 한 마디 타들어간 장초를 들고 고민했다. 얘는 담배도 안 하는 게 여기는 뭐 하러 따라 들어와.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재현이 턱짓했다. 편하게 피워요. 괜찮아요. 도영은 대답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언제부터 피웠어요?"

"옛날부터요."

"끊었었다며. 왜 다시 피워요?"

"그냥요."


왜긴 왜겠냐. 씨댕 너 때문이지. 도영은 옆자리에 걸터앉은 재현을 곁눈질로 노려보았다. 재현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이상 대화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나에 대해 물어볼 게 뭐가 더 남아있겠니. 도영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쯤이면 니코틴은 차고도 넘치게 충족한 것 같은데, 어째서 또 한 개를 물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제도 카페 왔었어요."


라이터를 튕기자마자였다. 한참을 묵묵하던 재현이 입을 열었다.


"… 카페? 우리 카페요?"

"네. 소망 씨한테 배웠어요."

"뭘… 요?"

"포스 찍는 법이요."

"에???"


도영의 입에서 담배가 뚝 떨어졌다. 재현이 빠르게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허락도 없이 재떨이에 집어넣었다. 매우 아까웠지만 애써 티를 내진 않았다.


"포, 포스를 왜,"

"도와주고 싶어서요."

"누구 맘대로요? 아니, 걔는 그걸 그냥 또 가르쳐 줘요?"

"네."


재현이 뭐가 잘못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영은 소망이를 무려 '이해'했다. 하긴. 저 얼굴이면 포스가 아니고 그 안에 든 현금까지 쥐여줬을 것 같긴 했다.

담배가 절로 말리는 현실이었다. 도영은 네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뭐라 지랄이라도 하고 싶은데 오늘 그가 도움이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실은 없으면 안 될 뻔했다. 그 덕에 버텼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그 말 만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도영은 한숨 같은 연기를 훅훅 뱉었다. 열심히 간접흡연을 하던 재현이 추가로 말을 얹었다.


"사실 이런 거 처음 해봤어요. 알바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서."

"… 지금 자랑하는 거예요?"

"아뇨. 사실이요."

"네… 그러시겠,"

"미안해요."


갑자기? 도영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입술을 앙다문 재현이 발치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 같기도, 사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음울한 모습이었다.


"몰랐어요. 공휴일마다 이렇게 바빴을 줄은."

"……."

"내가 한 번이라도 보러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

"그동안 혼자 일하면서 나 많이 미웠죠."


아니 또 무슨 밉기까지야. 도영은 수그러든 재현의 옆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솔직히 밉진 않았다. 같이 일해주기를 바란 적도 없었고, 직장인이 공휴일에 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만 특히 그랬던 거지 보통 공휴일에는 엄청 한가하다 못해 지루한데. 

그런데 어째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까.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김도영이 그 정도로 속 좁은 인간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공휴일의 김도영이 했던 생각은 단지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 재현 씨는 오늘 뭐 할까. 카페 와 주면 내가 커피랑 빵이랑 공짜로 엄청 내어줄 텐데. 손님 없을 땐 잠깐 자리에 앉아서 수다도 떨고 싶다. 휴일의 재현 씨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하고… 그냥 보고 싶다. 재현 씨는 내가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건가.


"됐어요. 무슨 지난 일을 갖다가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알려줄 수 없는 생각들이다. 도영은 담뱃재 묻은 허벅지를 탁탁 털었다.


"앞으로도 내가 같이 있으면 안 돼요?"

"……."

"이제 알았으니까, 도영 씨 혼자 얼마나 힘든지 알았으니까 오늘처럼…"

"글쎄요. 앞으로 2주 동안은 공휴일이 없는데."

"……."

"이제 그만 가요. 오늘 고생했어요. 덕분에 잘 버텼네."


읏차. 손바닥을 두어 번 털어낸 도영은 기립했다. 마지막 연기 속에 가려져 있던 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을 보고 싶진 않았다. 도영은 부러 호방하게 뒤를 돌았다. 동시에 손목이 붙잡혔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그의 몸이 활처럼 당겨졌다.


"도영 씨."

"아 왜요. 빨리 나가,"

"잠깐만."


뒤쪽을 향해있던 얼굴이 정면을 향해 돌아갔다. 도영은 눈을 잘게 깜빡였다. 재현의 손바닥이 오른 볼을 오롯이 감싸 문지르고 있었다. 익숙한 온도에 익숙한 감촉이었다. 영원히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손길이기도 했다. 

재현이 집중한 입술을 내밀었다. 앞볼을 향해 뾰족이 세운 엄지에는 신중함마저 느껴졌다.


"커피 가루 묻었어요."

"……."

"강아지 눈물 자국 같다."


재현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쿡쿡 터지는 숨소리를 따라 콧등에 고양이 수염 같은 주름이 졌다. 카페 사장으로서는 볼 수 없는 그만의 사적인 표정이었다.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할 모습일 줄 알았다. 그와의 헤어짐 이후 도영을 가장 힘들게 했던 부분이었다.

아무리 사랑 없는 연인 관계였다고 해도, 더는 정재현의 사적인 부분에 침범할 수 없다는 것. 카페에 와서 검은 밤 샷 추가 주문을 하는 정 팀장은 몰라도 애인 정재현은 김도영의 안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 미지근한 애정이나마 느낄 수 없다는 것과 혼자만 아는 정재현의 귀여운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때로는 힘들었고 때로는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게끔 했다. 초연해질 수는 있어도 잊지는 못하리라.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오기야 하겠지만 아마 먼 훗날일 것이리라.

아직 그 마침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이었다. 김도영은 정재현을 잊겠다 다짐했을 뿐 전혀 잊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길 기다리는 단계였고 아직도 그의 체온을 떠올리면서 잠을 잤다. 그래야 꿈에라도 나올 테니까.

눈이 점점 가까워졌다. 앞볼을 문지르던 재현의 손가락이 느리게 멈추었다. 태엽이 다 된 인형 같았다. 커피 가루는 진작 닦이고도 남았다.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었다. 알고도 가만있었다. 김도영은 확실히 이 손길이 그리웠으니까. 아마 정재현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멋대로 손을 대지.


"도영 씨."

"……."

"나는… 나는 사실,"

"아. 또 왜 이래."


도영이 그의 손을 붙들어 떼어놓았다. 어렵게 달싹이던 재현의 입이 일 자로 다물어졌다.


"우리가 맘대로 얼굴 씩이나 만질 사이는 아니잖아요."

"……."

"말로 해요. 나도 손 있으니까."


얼굴에 뜨끈한 온기가 한가득이었다. 도영은 손등을 들어 그의 체온을 닦아내듯 문질렀다. 일 자를 그리고 있던 재현의 입술이 아프도록 깨물렸다. 심술 난 어린애 같았다.


"왜요?"

"……."

"왜 만지면 안 되는데."

"아까 말한 거 못 들었어요?"

"얼굴 만지는 게 무슨 큰일이에요? 닦아줄 수도 있는,"

"야."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도영이 재현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그의 윽박에 재현이 벽 쪽으로 몸을 물렀다. 이쯤에서 도영은 진정한 피로감을 느꼈다. 온종일 꾹꾹 외면해왔던 불쾌감이 머리끝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내가 싫다잖아."

"… 싫다고?"

"그래. 싫다고. 내가 싫다는데 네가 뭐라고 말을 얹어."


도영이 날 선 눈으로 재현의 얼굴을 응시했다. 재현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기싸움 같은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누구도 패배자를 자처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도영은 잘난 옛 연인의 얼굴을 향해 비웃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게 진정 매달리는 놈의 태도일까. 멀리 갈 필요 없이 박승준만 봐도, 아니. 두 달 전의 김도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김도영은 멋대로 정재현의 얼굴을 만진 적이 없었다. 허락도 없이 곁을 꿰차고 있던 적도, 거절에 대해 항의를 한 적도 없었다. 이건 매달리는 놈이 아니다. 지난 제 과오를 지우기 위해, 오직 저 편하자고 한풀이나 하는 놈이지.

도영은 눈으로 말했다. 넌 왜 멋대로 당당하냐. 일 년이나 과거까지 숨긴 주제에 감히 어디서 마음 알아주는 척을 해. 왜 자꾸 사람을 흔들어. 진심도 아니면서.


"재현 씨. 넌 이게 매달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

"어디 매달리는 사람이 허락도 없이 얼굴을 만져. 누가 멋대로 차에 태우고 가게 계산대까지… 아."

"……."

"이럴 거면 때려치우세요. 아직도 이용해먹는 건 그쪽 같은데."


도영은 진심으로 뒤를 돌았다. 행여 팔이 붙잡힐까 팔짱까지 낀 채였다. 그랬더니 이번엔 어깨가 붙들렸다. 그것도 꽤 강하게.

도영의 상체가 뒤쪽을 향해 돌아갔다. 팔짱이 강제로 풀렸다. 꼭꼭 숨기고 있던 손목이 전 남친의 손아귀로 보기 좋게 들어갔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놔."

"알려줘요. 어떻게 해야 도영 씨가 날 안 싫어하는데?"

"놓으라고 했다."

"그런 것도 못 알려줘? 넌 왜 매번 아무것도 알려주지도 않아 놓고,"

"이 새끼가 진짜."


도영은 팔을 크게 휘둘러 그의 손을 뿌리쳤다. 예고 없이 휘둘러진 무력에 재현이 다리를 휘청였다. 곧이어 매끈한 전 남친의 얼굴이 김도영 양손에 사로잡혔다. 오냐 너 잘 걸렸다 하는 심보로 도영은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무지 약이 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진짜 궁금해서,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것일까. 왜 알려주지 않았겠어. 넌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놈이니까. 아무 노력을 요구할 필요도 없이 김도영은 정재현을 사랑했기 때문이겠지.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네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놈 같았기 때문이었어. 차라리 아예 끝까지 모르는 놈으로 남지 그랬어. 그랬으면 좋아해요, 그깟 네 글자를 입에 담으면 뒤지는 병에라도 걸렸구나. 하고 말았을 텐데. 

끝까지 정재현은 김도영을 비참하도록 만든다. 일 년을 좋아해요의 지읒 자도 안 꺼내던 놈이 이제 와서 김도영을 좋아한다고? 이제 와서 김도영이 궁금하다고? 그냥 영원히 그래주지 말지. 이렇게 쉽게 튀어나오는 게 그땐 왜 그렇게 어려웠는데. 

할 수 있었으면서 안 했던 거잖아. 거짓말을 할 가치도 없었던 거잖아. 얼마나 김도영이 별게 아니었으면.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너무 좋아하다 지쳐버려서 쉬고 싶다는 것도 존중해 주지 않고 있잖아.


"도영 씨. 잠깐,"


입술이 빠르게 맞닿았다. 단단히 오므라든 입술 새 때문에 침입은 쉽지 않았다. 재현이 고개를 좌우로 비틀어댔다. 이 새끼가 감히 김도영의 키스를 거부했다. 도영은 진심으로 뺨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뭐해? 입 열어."

"갑, 갑자기 왜,"

"갑자기 아니잖아. 네가 먼저 꼬셔놓고 왜 이래."


재현이 양팔을 허우적댔다. 그가 온몸을 비틀 때마다 화난 등짝이 꾸물럭거렸다. 존나게 그리웠던 등짝이었다. 멋대로 만지고 핥고 빨고 씹고 싶었던 전 남친의 섹시한 등짝. 도영은 재현의 등허리를 품안 가득 끌어안았다. 어디도 못 빠져나가도록 깍지를 끼워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또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가슴팍이 맞닿는 순간 재현의 입술 새가 갈라졌다.

파닥거리던 재현의 사족에 힘이 빠진 것도 그때였다. 돌처럼 굳어있던 그의 손바닥이 도영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뭐가 절절하고 애가 닳아 죽겠다는 듯 제 전 애인의 얼굴이며 목선을 쓰다듬었다. 도영은 오로지 불끈대는 등만 만지작댔다. 감정을 교환하기보단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였다. 

혓바닥이 끈덕지게도 오고 갔다. 심각한 욕구불만에 처한 두 마리 동물을 한데 붙여놓은 듯했다. 도영의 뒤통수를 휘감은 재현이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소리가 났다. 반투명한 흡연실 벽면이 앞뒤로 진동했다. 재현의 손이 도영의 얼굴을 뭉개듯 문질렀다. 뒤통수를 헤집던 손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종국엔 상의 안을 헤집으려 들었다. 도영은 간단한 손놀림으로 재현의 손목을 밀쳐냈다.

이거 진짜 미친놈인가. 도영은 코앞에 놓인 재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재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버릇대로 마무리 입맞춤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만."


도영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돌진하려던 재현의 얼굴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도영은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재현이 뒤쪽을 향해 엉거주춤 물러났다.


"이제 가요."

"……."

"오늘 고마웠어요. 일도, 키스도."


도영은 가벼이 시선을 돌렸다. 앞에 선 재현의 어깨를 밀쳐내고 문을 향해 걸었다. 재현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도영에게 유린당한 등짝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게 왜 고마운…"

"고맙죠. 덕분에 간만에 남자랑 키스했는데."

"……."

"아. 간만은 아니구나."


굳건히 닫혀있던 흡연실 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영은 그 사이로 가벼운 발을 내려놓았다. 넓은 보폭으로 앞서 걸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속으로는 혼자 염불을 외웠다. 됐어. 이번엔 내가 정재현을 이용한 거야. 걔랑 키스가 하고 싶었어. 그래서 이용했어. 손해를 본 건 정재현이지 김도영이 아니야. 복수한 거야. 정재현이 김도영한테 그랬던 것처럼 김도영도 걔한테 멋대로 손을 댄 것뿐이야. 걔도 이제 알았겠지. 김도영도 그럴 줄 아는 놈이라는 걸.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널 좋아하니까.'


기분이 더럽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자꾸 들끓기만 해서. 입술이 더럽게 느껴져야 하는데 더럽지가 않아서 더러워. 쿨한 척 걸으면서도 계속 등 뒤를 의식하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나.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안 들려서 울고 싶어. 정재현이 미워. 정재현이 달려와서 안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아직도. 씨발 아직까지도 좋아하니까.


도영은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끝내 문 열리는 종소리는 나지 않았다. 멍청하게도 기다렸다. E클래스 뒤꽁무니가 사라지는 걸 뻔히 보면서도 그랬다.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똑땅이 아빠 새끼. 진짜 짜증 나. 도영은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렁그렁 참고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오전에 그쳐버린 눈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비도 안 왔다. 쏟아지는 달빛은 짜증 나게 밝기만 했다.







96.

그 순간. 종이 울렸다.


짤랑.


이 아니고 쿠당탕쿵쾅우르르쾅쾅쾅.


"김도영!"


휘잉. 축축한 얼굴 위로 새해의 바람이 불었다. 도영은 어둑한 홀 한가운데서 고개를 추켜올렸다. 문 앞에 백팔십짜리 졸라맨 모양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어깨를 위아래로 씩씩거리다가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좆됐다. 괴한이 쳐들어 온 것이 분명하다. 뭐. 뭐야. 누구세요. 왜 이러세요. 공포감에 질식당한 도영은 몸을 작게 웅크렸다. 제발 살려만 달라고 하려고 했더니만 볼이 콱 붙잡혔다.


"김도영."


자세히 보니 정재현이었다. 이러다 볼 안쪽에 잇자국이 날 것 같았다.

털썩. 재현이 도영의 앞으로 왼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턱을 마구 추켜세워가며 물었다. 묻는 것보단 시비를 트는 말투에 표정이었다.


"왜 울어."

"……."

"왜 우냐고."

"… 네?"


도영은 까무룩 고개를 숙여뜨렸다. 존심 상하게 쫄고 말았다.


"왜 울어. 왜 그러고 앉아있는데."

"다리가… 아파서요."

"그래?"


끄덕끄덕. 도영은 울망한 시야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출렁이는 볼따구 위로 구슬 같은 눈물이 도륵도륵 흘러내렸다. 으이구 진짜. 진짜 똑땅해. 진짜 짜증 나. 재현이 도영의 볼을 쥐어 짜내듯 문질렀다. 소맷단을 길게 늘여 코까지 흥 풀어줬다. 아이씨. 맘대로 얼굴 만지지 말라니까. 도영의 미간이 정확히 반으로 구겨졌다. 찌푸린 게 아니라 얘가 너무 문질러서 그랬다.


"으븝븝. 저리, 저리 가."


도영은 허공에 대고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이미 재현의 손은 떠나간 후였다. 민망하게스리 추가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행히 재현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뒤로 내민 손을 팔락거리더니 어깨너머로 고개를 힐긋거렸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도영은 막간을 이용하여 코를 먹었다.


"… 지금 뭐 하는,"

"업혀요."

"… 에?"

"다리 아프다며. 업혀."

"뭐? 그게 무슨,"

"업히, 라고, 좀."


뭐야. 뭐야 이 새끼 왜 또 이래. 퍽퍽. 양팔이 강제로 내질러졌다. 김도영의 얼굴을 넘어 등짝에 엉덩이까지 좆대로 움켜쥔 정재현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크록스 신긴 발바닥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온몸을 비틀어대던 도영은 저도 모르게 재현의 목덜미를 얼싸안았다. 당연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거늘, 미친 복숭아가 이런 말을 지껄였다.


"그러게 왜 고집을 부리고 그래. 어차피 업힐 거면서."


빡. 복숭아의 대가리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빡. 한 번 더. 빡빡. 아 두 번 더…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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