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겨울이었다. 너는 네 목도리를 내게 칭칭 감아주었다. 네 목도리가 내 목을 따스하게 조르며 코 아래까지 전부 차올랐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죽을 줄 알았다. 너의 냄새로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Part I : 김석진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엥?”


하복을 단정하게 입은 김태형이 더 대꾸하지 않고 내 입에 물려있던 쭈쭈바를 빼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입에 쏙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얼을 탄다. 어… 내가 이미 질겅질겅 씹어 놨는데. 내 표정에 양 눈썹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인 네가 액체가 되어버린 쭈쭈바를 쪽쪽 빤다. 압축된 튜브를 타고 올라가는 녹은 아이스크림만큼 내 기가 빨린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루아침에?”

“그렇게 됐어. 왜. 부럽냐.”


김태형이 제 입에서 빼낸 쭈쭈바 튜브를 다시 내 입에 물린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쭈쭈바 튜브를 물었다. 유치원도 같이 나온 사이라 이 비위생적인 짓거리도 꺼림직하게 여기질 못한다. 네가 무심하게 손에 묻은 물기를 내 교복에 닦았다. 나는 그 손을 쳐내며 묻는다.


“부럽겠냐? 분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반이 뭐야 그보다 더 알고 지낸 네가, 사귀는 사람이 생기는 사건이 처음이라서. 분하다는 말에 김태형이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웃어 보였다. 어릴 때랑 웃는 얼굴이 하나 변한 게 없다. 교실로 올라가는 내내 김태형은 바지 주머니에서 양손을 빼지 않았다. 갑자기 어른인 척 하는 것 같아 꼴 보기가 싫어진다.


“야. 누군데?”

“알아서 뭐하게.”

“불알친구에 말 안 해도 되겠어? 뻥 아냐?”

“뻥은….”


김태형은 속눈썹이 길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 때마다 매번 느낀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야 네가 바지 주머니에서 한 손을 뺀다. 내 이마가 불현 따스해진다. 아주 미미하게.


“핀은 빼고 다녀. 꼴사나워.”


아, 앞머리. 너는 내 앞머리를 고정했던 핀을 말아쥐고 그대로 주먹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는다. 앞머리 자르는 데에 대차게 실패해서 학교에 있는 동안만 고정하고 있었던 건데…. “간다.” 별 말 안 하고 등을 보이며 너는 네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미시감을 느낀다. 매번 각자의 교실로 돌아가는 자리인데 오늘따라 김태형의 등이 낯설다.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지랄하네.


보충 수업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수업 시간이라 당연히 복도에 네 모습이 보일 일은 없었지만 혹여나 네가 지나갈까 가끔 복도를 노려보면서. 13년 지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이 왜 이렇게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것도 아니고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먼저 본 것도 아닌데.


분명 내게 가장 먼저 말한, 내게 가장 먼저 말했을 너인데도.




[나 먼저 감     17:38]


수거했던 핸드폰을 돌려받으면 가장 먼저 메시지 창을 켠다. 제일 위에 올라와 있는 김태형의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제야 너에게 언제 가냐고 메시지를 하기 위해 어플을 켠 나를 자각하고 한 번 더 얼굴을 크게 구긴다.


벽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다 되어간다. 이미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불편한 심기에 붙일 이름을 정했다. 배신감. 존나 배신감이 든다. 김태형아, 네가 나를 두고 이렇게 간 적이 있었냐. 네가 어떻게 이래.


진짜로 그랬다. 나는 위로 형이 있었고, 김태형은 혼자였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산다고 유치원 선생님은 우리를 유치원 버스에 나란히 태웠다. 그 나이에도 남자애들끼리 손 잡는 건 이상했지만 김태형이랑은 손을 잡고 다녔다. 특히 집에 가는 버스에 탈 때. 나는 소망반, 너는 사랑반. 반이 달랐어도 하원할 때면 버스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린 너는 내가 오면 내 손을 꼭 잡았다.


[18:02      여친 소개는 안시켜줌?]


나는 짧아진 앞머리를 내려 손으로 털었다. 스스로 못생겼다고 생각해본 적 단 한 번도 없는 얼굴인데, 앞머리 한 번 잘 못 잘랐다가 요즘 자존감 폭삭이다. 사물함을 열어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몇 번 더 만지다가 닫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가령 예를 들면…. ‘지금 교문으로 와.’ 같은 김태형의 메시지 같은 것.


[나중에 ㅂ2    18:12]


여자친구 생겼다고 바로 이렇게 변하는 너는 진짜 나쁜 놈 아니냐?







내 인생이 이렇게 지루했던가? 납득이 안 간다. 김태형이 애인이 생겼다고 통보한 지 겨우 6시간째다. 근데 지루해 뒤질 것 같은 거다. 그동안 내가 무얼했지? 이럴 리가 없다며 불과 어제까지 나의 행적을 복기해본다. 김태형이랑 저녁, 김태형이랑 과외, 김태형이랑 귀가, 김태형이랑 카톡, 김태형이랑 게임, 김태형이랑 겜톡…. 아니 내가 너랑 이렇게 붙어살았다고?


괴상한 하루 스케줄에 인상을 잔뜩 쓰며 또 생각했다.


너는 씨…발 이래놓고 여친이 생겼어?


불편한 이유가 확실해졌다. 나랑 이렇게 온종일 거의 평생을 붙어 놀아놓고, 여자친구를 사귈 시간이 있었다니. 그동안 나와 내내 붙어있었으면서 나는 모르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에 또다시 배신감이 든다. 여자친구? 그래, 생길 수도 있지. 근데 너는 그러면 안 되지. 김태형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욱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김태형에게 뭔가 말하려고 메시지 어플을 누르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이 타이밍에 과외 선생님. 수업은 내일인데, 밀리나 싶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에…?”


에? 는 무슨 에? 냐. 알아듣고 하는 반문도 아닌 내 얼뜨기 같은 소리에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무렇지 않은가보다.


-태형이가 과외 시간을 바꿔야겠다고 하네. 아니면 더 못할 것 같다고…. 어떻게, 석진이 어머님께 말 드려서 다른 친구 구해 볼래? 아니면 방학 동안 혼자서라도… 석진아?


고작 ‘뭐하냐 게임 하자!’라고 하려고 했던 내가 한심하다. 핸드폰 안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계속 나를 찾아대는데도 나는 눈만 깜박일 수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 일이 떠올랐다.


고학년이 되고 급식을 먹기 시작했다. 김태형이랑 먹는 게 늘 당연했다. 단둘이 밥을 먹는 건 아니었지만 김태형은 꼭 우리 반으로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상혁이, 준형이, 일우…. 초등학교 때 너와 친했던 애들의 이름을 나도 기억한다. 그렇게 잘 노는 아이들이 있었음에도 김태형은 밥은 꼭 나와 같이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교에서 김태형과 인사하지 않는 애가 더 드물었다.


‘오늘은 태형이 안 와?’


따로 먹겠다던 날엔 되레 우리 반 애들이 먼저 점심시간 김태형의 여부를 물었다. 그럼 그제야 나도 궁금해졌었다.


‘왜 오늘 밥 따로 먹었어?’


하굣길에 김태형의 신발주머니가 대롱대롱 흔들렸던 게 기억난다. 엄청 가볍게. 대답을 재촉하며 김태형을 앞질렀다. 그러자 앞에 있는 나를 바로 쳐다보며 네가 그랬었다.


‘실내화가 없어서.’


그 뒤로는 내가 김태형을 챙겼다. 깜박하고 실내화를 안 가지고 온 날이면 내 실내화를 한 짝씩 나눠 신고 외발로 콩콩 뛰며 급식 줄을 섰다. 종종 그런 적도 있었는데… 어떤 적이었냐면….



-야. 듣고 있어?

“어? 어어….”

-그래서 나는 더 못할 거 같아. 아님 시간 변경하던가.

“야 과탐 과외가 말이 돼?”

-……. 그럼 너도 하든가.


과외 하나를 더 늘리면서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는 김태형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아니이…. 국어 과외 한다는 소리 이후로 이렇게 황당한 말은 처음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 너는 나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고 있었는데.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 들어온 건지 묻고 싶어진다. 묻고는 싶은데… 듣기가 싫다.


-너 지금 하고 싶은 말 있지.

“아닌데.”

-아닌데.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거 보면 있는데.

“생각 중이거든?”


전화기 너머로 김태형의 광대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선명해서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아니 죽마고우 애인 생긴 게 이렇게… 불편할 일이야?


-석진아.

“왜.”

-진짜 할 말 없어?


이 놈 새끼는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물어보는 거야. 할 말. 할 말이야 있지.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왜 듣고 싶지 않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화가 난다. 열 받아서. 네 입에서 ‘여자친구’랑 있었다는 말 나오면 진짜로 배신감에 졸도할 것 같아서!


“이쁘냐?”

-푸하하핫….


너는 방류한 근심이 터진 것마냥 웃음을 터쳤지만 정작 물어본 나는 근심으로 꽉꽉 들이찬다. 누군데. 누군지 알고 사귀어. 뭔데 만나는데, 너는…. 너는….


-어. 예뻐. 예쁘지….

“나도 아는 애야? 왜 소개 안 시켜줌?”

-삐졌냐? 넌 모르는 앤데 좀 나중에 소개해줄게.


아니 나도 모르는 애를 너는 대체 언제 알게 되어서 썸타고 사귀기까지 했는데? 분명 우리 종일, 한시도 빠짐 없이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는데…. 네가 이러면 안 되지, 너는 분명….


“야, 근데 너….”

-어, 나 전화 들어온다. 끊는다.

“아 오키.”

-잘 자.


잘 자. 전화가 바로 끊겼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너는 겨우 나와 십오분 통화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잘 자’라고 말하고….


진짜 잘 자기 위해 생각을 가렸다. 어떤 생각을 파고들어 심층적으로 해볼까 골랐다는 말이다.


그래, 아까 초등학교 때의 일을 기억해본다. 몇 번은 내가 실내화를 놓고 왔었는데, 내 친구들의 실내화를 빌리겠다는 걸 김태형이 만류하듯 나를 몰아붙였다. 우리는 둘 다 마른 편이었는데, 몸무게는 김태형이 더 나갔다.


당시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김태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업었고, 나는 급식실 의자에 먼저 앉은 채로 김태형이 가져다주는 급식을 먹었다. 뒤처리도 김태형이 해줬다. 밥을 다 먹고 반으로 돌아갈 때는 힘들었는지 김태형이 토하기 일보 직전의 목소리로 그랬다.


‘돼지 놈아….’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나는 김태형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게 나를 돼지라고 놀린 보복의 전부였다. 그러면서도 나와 그 녀석은 단 한 번을 싸운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나는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내일 아침에. 내일 아침에도 마음이 불편하면, 등교하면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어차피 너는 나의 매일에 있는 김태형이니까.






“…뭐?”

-어… 미안.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글자 그대로의 ‘김태형’을 노려본다. 이게 진짜…. 어이가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시간 될 때까지 굳이 기다렸다가 나왔건만, 뭐? 여자친구 보느냐고 먼저 갔다고? 못마땅함이 목울대를 찌른다. 더 듣지 않고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열받지만 안 그러던 네가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겠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귄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거의 인생을 함께 보내다시피 한 나를 이렇게 하루아침에 찬 밥 취급을 하냔 말이야? 이제 자존심이 상한다. 앞머리 싹둑 하고 나서 자존감은 낮아졌을지 몰라도 자존심에 관하여는 타격 입을 사건이 단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딱 김태형이 건든다.


김태형이… 여자친구를 사귀고 내게 소개 할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첫사랑 현재진행형. 뭐 주변에 누가 누구와 사귄다는 소리 초등학교 때부터 쉽게 들어온 일인데. 김태형의 진행은, 그게 첫사랑인지, 아니 사랑이 맞는지 그런 것부터 의심이 든다.


반으로 찾아가면 온종일 없다. 여자친구가 우리 학교인가 보다. 배신감이 서운함으로 바뀌려다가 화로 바뀐다. 목석같은 우리 김태형 시작부터 너무 열렬한 거 아니냐. 우리 김태형? 어쨌든. 그러는 사이에 과외에서 도망친 김태형의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가 정해졌다. 전부터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애가 있었다나보다. 엄마는 사교육비 부담을 덜었고 나는 모르는 사람과 일주일에 두 번 두시간을 한 방 안에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다, 김태형 때문이다.


그래, 너 때문이었다.


사물함을 열었던 나는 눈앞에 보이는 틴케이스를 보고 인상을 썼다. 내 손바닥보다도 큰 틴케이스. 지금도 엽서 같은 걸 사 모은다. 편지 쓰는 데 취미가 있었다기보단… 태형이 네가 사진 찍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틴케이스 안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있었다. 방학 때 가족 여행으로 어딘가 다녀오면서 산 엽서. 지극히 네 취향의. 너 없이 누군가를 따라 전시회 같은 곳에 다녀오면서 산 엽서. 이것도 지극히 네 취향의. 그리고 이전 내 핸드폰으로 네가 직접 찍은 사진들, 핸드폰을 바꾸기 전에 파일을 옮기면서 현상해뒀다. 그리고 이건…. 중간에 껴있는 똑같은 엽서 두 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사물함 문을 닫는다.


왜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김태형 때문이었다.


‘김석진, 자?’


수업 시간에 졸다가 떠오른 네 목소리에 눈을 부릅뜬다. 하필! 또 네가 지나갈 리 없는 수업 중 복도를 노려본다.




대한민국 고2의 시간은 참 빠르기도 하지. 내 인생에서 너의 존재를 안 뒤로 너와 이렇게 오래 못 본 적은 또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메시지는 주고받는다. 하루에 몇 통씩. 전화도 한다. 이틀에 한 번씩.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이번 주에 없었다. 당연한 듯 약속이 되어있던 시간마저도.


“저… 석진아.”


당연한 약속. 우리 사이에 당연한 그런 건 언제부터, 무엇부터였을까? 주말마저 너의 애인 다음으로 팽당해버린 나는 고작 이런 생각밖에 못한다. 김태형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내 최초의 기억은 유치원 때다. 유치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간식거리를 얻게 되면 나는 형 것과 김태형을 것을 함께 챙겼다. 그래서 우리 집 형제가 셋이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었다고….  너도 그랬던 것 같다. 너도 나를 만나면 젤리 같은 걸 늘 쥐여주고 그랬으니까, 너도 그랬던 거 아닐까?


“김석진?”


이제 만나면… 뭐 데이트는 뭘 하는지 일주일간 주야장천 만나 보니 어떤지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하나. 우리 둘 사이에 처음 있는 대화다. 어쩐지 오글거려 나는 물고 있었던 빨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일단 여자친구 이름부터 물어봐야지.


“김석진!”

“아, 아 으응! 미안해.”

“설명 듣고 있었어? 이해 돼?”


아 그래, 이 녀석에게 수학 문제를 물어봤었지. 사실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느냐고 설명을 하는 줄도 몰랐다. 대강 눈으로 풀이를 훑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의 이름은 태웅이다. 윤태웅. 김태형이랑 이름 한 글자 같다. 이 녀석이 과외를 앞으로 같이 하는 애였다는 걸 알고는 놀랐다.


“이해 안 가면 말해줘, 다시 설명해줄게.”

“아냐, 이해 했어. 진짜야.”

“정말?”


자상하게도 되물어오는 태웅이는 학생회장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절대 모를 리가 없는. 나조차 윤태웅을 뽑았다. 학생회장의 자상함이 부담스럽다. 왜냐면 너는 우리 학교 절대 킹카니까! 훤칠해, 머리 단정해도 잘생겼어, 공부 잘해, 성격 좋아. 만인의 남친, 엄친아, 담임들의 로망, 온갖 수식어가 달린… 뭐 김태형도 한 인기는 한다만.


주말에 카페에서 학생 회장을 만나 공부하게 될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이것도 다 김태형 때문이다. 주말에 꽉 잡혀서 공부라니. 이게 말이 되냐구요.


“너는 매주 이렇게 혼자 나와서 공부해?”

“아니? 이번엔 석진이 너랑 하잖아.”

“응? 그게 아니구….”


순간 뻘쭘해져 눈길을 피했다. 어이쒸, 자꾸 이름 부르면서 자상하기 있냐. 학생 회장도 다 영업이야, 영업! 존나 잘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다는 것 정도 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김태형]. 예쓰! 역시 넌 나의 구원자야. 빨리빨리 전화해서 형님 이 어색함의 구덩이에서 빼줬어야지!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이 반가움이 집중력으로 바로 이어지는 일은 어려운 거라는 걸 느끼고 만다.


“아, 어…. 어, 태형아. 내가 다시 전화할게….”


호기롭게 전화를 받은 게 몇 분 안 가서 먼저 전화를 끊자고 했다. 통화 중에 태웅이가 내 앞으로 내민 노트를 보느냐고. 정확히는 거기에 쓰인 그 애의 글씨를 보느냐고….


저녁 먹고 들어갈래?


글씨를 읽자마자 방금 김태형이 한 말을 놓쳐서 되물었다. 눈을 들어 다시 태웅이를 보자 평온한 표정으로 다른 메모를 내민다.


뭐 좋아해? 근처에 스파게티 맛집 있음


이번에도 김태형의 말을 놓쳤다. 아 나는 파스타보단…. 김태형의 말보단 앞에 앉은 상대의 말에 대한 대답을 입에 머금고 시선을 옮기자 윤태웅이 입을 뻥긋거렸다. ‘예 약 할 게.’ 자상한 얼굴이 눈에 훅 들어온다. 아니 나는 스파게티보단 짜장면이 더 좋다고….



너와는 스파게티를 사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까 전문점에 와서…. 매번 둘이 피자 한 판에 치즈오븐스파게티 하나, 크림 스파게티 하나 시켜서 전투적으로 먹었던 것 말고…. 그렇게 생각해보니 열여덟 동안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것 같다.


너는… 이미 여자친구와 이런 곳에 가봤으려나.








-그래서 전화를 끊었다고? 그리고 다시 전화한 게 이 시간이야?

“뭠마…. 오늘은 왜 전화 했어. 데이트 안감?”

-데이트… 했지.


뭐야 이 놈. 나도 모르게 또 핸드폰을 째려봤다. 염장 지르려고 전화 했었나보다. 근데 어쩌냐, 오늘은 나도 할 말 있는데.


“데이트 하는데 나한테 전화를 왜 해. 아 배불러.”

-저녁 먹고 들어옴?

“시간이 몇신데.”

-그래 몇신데 이제 들어와. 너 오면 치킨 먹자고 하려 했는데.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데 전화가 길어진다. 통화하는 게 당연했던 것 같으면서도 낯설다. 아마 통화 내용 때문일 것이다. 학생 회장이랑 스파게티 먹고 왔다니까 혼자 먹고 오니 맛있었냐고 뚱하게 묻는다.


“당연히 맛있지 졸라 비싸던뎅. 만 오천원. 아 물론 태웅이가 냈지. 쫌 그렇지? 그래서 담에 나도 한 번 사려고. 어, 어 맞아. 쌤한테 전화 오고 내가 다른 사람이랑 한다니까 바로 붙여주시던데.”


너는 한참을 말이 없다. 그래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너도 그런 곳 좋아해?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그런 곳 가본 적이 처음이라서. 여자친구가 있었어야 가보지. 굳이 온도를 말해야 한다면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했다. 너랑 스스럼없이 지냈던 거 같은데 지금 나 너를 어색하게 느끼는 거 레알이냐.


“안 좋아할 건 또 뭐임. 오늘 처음 가봤는데.”


너도 어색한지 말이 없다. 연애를 시작한 네 앞에서 나는 어쩐지 초라함을 느낀다. 주변에 너도 나도 다들 첫 연애를 시작하는데 나만 친구 놈 연애한다고 골나있는 머저리 같아서. 근데 누구를 어떻게 정해서 만나야 하는 거야? 김태형까지 하니까 나도 꼭 첫 연애를 시작 해야 할 것 같잖아.


-너 처음 가봤다고? 윤태웅이랑? 오늘?

“어, 왜. 놀리지 마라. 처음 가봤을 수도 있지.”

-거짓말 하지 마. 너 나랑도 갔었잖아.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나는 눈을 굴린다.


“언제?”



중학생 때였다. 눈 내리는 날이었는데, 피자집 창문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김태형은 중학생 때에도 사진 전시를 찾아다녔다. 혼자 다니는 건 아니었고 당연하게도 나를 끌고 다녔다. 그런 날들 중 하루의 일이었다. 근데 그건 피자집이었지 파스타 전문점이 아니었잖아. 그래도 파스타 전문점이었다고 김태형이 우겨댄다. 나는 다시 눈을 굴린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김태형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몇 해 전의 기억까지 되짚어 올라간다. 그 가게엔 분명 여러 번 갔었다. 생각해보니 김태형따라 사진 전시를 따라갔다가 내가 툴툴댄 날이면 꼭 김태형이 데려갔던 것 같다. 6900원짜리 가성비 좋은 파스타. 세 개 시켜서 하나는 반 나눠 먹었다. 나도 크림 파스타를 더 좋아하는데 너랑 있으면 항상 토마토소스를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위에 질긴 모짜렐라 치즈가 녹아 나오는….


-그랬더니 화를 내잖아. 너랑은 잘만 갔었는데. 야, 듣고 있어?


너랑 마지막으로 갔던 사진전이 언제더라? 여름마다 자주 했던 유명 사진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왜 가자고 안 해. 나한테.


-석진아.

“어? 어… 응. 뭐라고 했지?”

-불편해?

“뭐가?”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거 불편하냐고.


또 바로 대답을 못했다. 불편하다기 보다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네가 너무 낯설고 신경 쓰여서. 학교 사물함에 있는 엽서 틴케이스가 떠올랐다. 이 시간에 빛도 안 들어오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그 물건이.






불편하다고 대답도 안 했는데 너는 바로 네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감췄다. 연애를 하면 매 순간 상대를 신경 써야 한다는데 그럼 너의 하루는 온통 여자친구와의 일들 뿐이려나. 그래서 그런지 연락이 더 드물다. 할 말이 여자친구에 관한 거 뿐이라서 그런 걸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태형아.


윤태웅과 과외를 함께 한지도 벌써 횟수로 여덟차례다. 벌써 여름 방학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주말이 널널해진 탓에 주말마다 태웅이를 만나서 공부했다. 물론 엄마는 좋아했고, 형은 나한테도 친구가 생겼다며 놀렸다. 내일모레 군대 가는 주제에 누굴 놀려…. 시작은 이상한 부담감이 있었는데, 이제 이 불편함보다는 다른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무게로 존재감을 보인다.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설마 나, 태웅이가 아직 많이 불편한가?


비가 오려나 날이 많이 후덥지근했다. 내의 입는 걸 안 좋아하는데 하복 셔츠가 등에 달라붙는 것만큼 소름 돋는 일은 또 없어서 내의를 입기 시작했다. 귀갓길 이거 조금 걸었다고 등줄기를 따라 땀방울이 주르륵 흐른다. 나는 교복 앞섶을 털었다. 안으로 들이차는 공기조차 습하고 무거웠다.


결국에 이마를 따라서 땀 한 방울이 도르르 흘렀다. 구레나룻에 땀 차서 흐르는 거 나보다 네가 더 심한데. 까매서 그런가 유독 더위를 더 많이 타는 너였지만 크게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팔로 땀을 닦았던 네가 떠오른다.


나는, 나는… 추위를 더 타는데.


“여보세요?”

-어, 석진아. 나 태웅이.

“엉. 알어. 무슨 일이야?”

-석희쌤이 금요일 수업 한 번만 미루자고 하시는데, 다음 주에 보충 아무때나 잡아도 괜찮아?


작년 네 생일이었는데, 하필 내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태형이 네가 보러 가자던 전시회에 못 갔었지. 생각해보면 우리 둘, 진짜 이상했어. 생일 당일에 친구무리가 아닌 남학생 둘이서만 붙어 돌아다니고…. 그냥 어렸을 때부터 봐와서 그런가 보다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또 말하기엔 너무 예전 일이지만, 나 그때 진짜 아팠었어.


-그럼 금요일에 뭐해 석진아?


비가 쏟아지기 직전 날씨의 묵직한 공기가 끊임없이 몸에 쌓였다. 숨을 아무리 들이마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아 짜증이 났다. 앞섶을 펄럭이며 후덥지근함에 찡그린 얼굴로 태웅이에게 대꾸했다. 왜 이렇게 갑갑하지.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사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이렇게 갑갑한 거. 한 여름에 아팠던 작년 겨울, 김태형의 생일이 떠올랐다. 네 생일날에 뭐 하기로 약속 잡아 놓고 집에서 끙끙대며 앓았었지. 짜증 날 만 했을 텐데 너는, 뭘 했기에 하루 만에 감기에 걸려오냐며 장난스러운 면박만을 줬다. 안 아픈 거 아니야? 꾀병이지? 이 말들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앓느냐고 제대로 대꾸를 못했었다.


아빠도, 엄마도 출근한 평범한 겨울 방학 평일에. 너만 내 곁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나 아직도 기억 나.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그날은 목요일이었어. 금요일 전날. 진짜 독한 몸살감기였어. 코가 막혀서 숨도 안 쉬어지고 한기가 도는데 체온이 너무 높아 데워진 베개가 얼굴로 되레 더 뜨겁게 느껴지고. 몸 웅크리고 벌벌 떤 적은 처음이었는데 내가 추워할 때마다 태형이 네가 방 온도를 체크해주고 내 턱 밑에 서늘한 네 손을 넣어 내 체온을 내려주고 손을 잡아줬던 거 나 다 기억해.


해열제가 들지 않아서 내 열이 39도가 넘어갔을 때 대신 우리 엄마에게 연락해주고, 여전히 떨며 앓는 나에게 계속 말 시켰던 것도 나 다 기억해. 나중에 네가 그랬었지, 그때 나 정말 헤까닥 가버리는 줄 알았다고. 근데 나 그때 진짜 아팠었어. 온 몸이 다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아파서 울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우리 영화 보러 갈래?


네 목소리와 서늘한 손은 나 다 기억해. 네가 뭐라고 했었는지까지도.


그때부터 속이 너무 갑갑해. 그때 심하게 아파서 폐가 망가졌나 봐.


‘내가… 생일인데 아파서 미안해….’


-석진아? 

“그래. 영화 보러 가자.”






“야, 근데 여자친구 이름 왜 말 안 해줘?”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 집이야?

“죽마고우 체면 안 서서 물어봤다. 매번 ‘네 여친’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부를 일이 뭐가 있다고.

“헐 소개도 안 시켜 줄 거임? 졸라 너무 하네….”

-봐서 뭐해.

“야, 태형아.”

-왜.

“왜 사귀었어?”

-뭐?

“뭐가 좋아서 사귀기로 한 거야?”


“그냥 궁금해서. 대답 안 해줘도 됨.”

-내가 좋대. 첨에 나는 관심 없어서 못되게 굴었는데 그냥… 그 모습도 좋았대. 그 소리 들으니까 뭐. 어쩌냐 나 좋다는데. 그래서 그냥 받아주게 됐지.


-이름은, ‘서진’이야.








상대만 너를 좋아하면 되는 거야? 너는? 너는 어떤데?


간밤의 전화 통화 후에 나는 더욱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아직 비를 쏟지 못한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 했고, 공기는 엄청난 습도를 자랑했다. 걸을 때마다 팔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내가 솜처럼 물을 먹는 걸까 결국 내 짧은 앞머리가 땀에 절어 뭉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더욱 우스꽝스러워 보이는데 아, 김석진이 와꾸 올해 최악이다.


“푸핫, 뭐야 너 이런 핀도 해?”

“아! 아! 아, 이거, 아 못 본 걸로 해라.”


교문 앞에서 만난 태웅이가 앞머리를 고정한 내 핀을 보고 웃었다. 수업 시간에만 한다는 걸, 또 깜박했다. 서둘러 앞머리를 흔들어 정리했지만 마구잡이로 뻗친 머리가 볼썽사나울 뿐이었다. 괜히 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나를 보고 계속 웃고 있는 학생 회장 놈의 얼굴이… 내가 다 낯부끄러워서.


“귀 빨개졌어, 더워?”

“아, 아냐. 너 근데 오늘 집에 늦게 들어가도 돼?”

“응. 우리 집 너희 집에서 가까워.”


나는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내리눌렀다.

너.

태형이 너랑 영화관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지? 너 오늘도 데이트 하냐….


생각해보니 너랑은 영화를 보기로 약속만 하고 무작정 영화관에 갔었던 것 같다. 나는 감성적인 너와는 달리 이런 거 하나 몰라서, 먼저 보러 가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영화 보러 갈래?’ ‘언제?’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 당연하게 우리 대화가 떠오른다. 어, 김태형 우리 진짜 많이 친했네.


“자리 여기 괜찮아?”

“아, 응. 괜찮아. 내가 보여줄게.”

“응? 아냐, 내가 영화 보자고 했잖아.”

“아니야, 전에 밥 얻어먹은 것도 있고. 내가 냄.”


영화 값까지 계산하려는 태웅이와 키오스크 앞에서 작게 티격거리다 내 체크 카드를 집어넣었다. 김태형 없으니까 용돈이 남아돈다.


윤태웅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냥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고. 적당히 보고 들어갈 수 있는 시간대의 영화가 딱 하나였다. 자리는 어디라도 좋았다. 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지만 밥을 먹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뭐라도 먹기를 권유하는 자상한 학생 회장에게 나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팝콘 사줄까?”

“아, 팝콘 좋지. 적당히 이것저것 섞…어?”


금요일 저녁이라 더욱 부산한 영화관의 소리가 귀로 섞여 들어왔다. 그러니까, 떠드는 사람들, 차임벨이 울리는 소리, 매점에서 메뉴를 소리치는 점원들의 소리, 쉴 새 없이 반복되는 영화 예고편의 소리 같은 것들이… 섞였는데…. 내 귀로 들어오는 길이 좁아 그런지 모두 꺼졌다. 그리고 그 많은 소리 중 하나의 소리만 들어왔다.


“김석진?”


야… 네가 여기 왜 있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김태형. 김태형 네 소리만 내 고막에 닿았다. 그 많은 소리와 움직임 사이에서. 사진 같이 너만 프레임이 멈춘 것처럼 멈춰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그 애가, 서진이구나. 나는 왜 움직일 수가 없을까. 나도 왜 너처럼….


“가자, 석진아.”


손목을 잡아 끄는 힘에 내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어, 왜지. 나 왜 숨이… 벅차지. 내 오랜 친구를 영화관에서 마주쳤을 뿐인데, 왜 반가워하질 못 하고… 숨고 싶지. 가슴이 또 답답하다. 잡힌 손목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올해 초였지. 네 생일에 가기로 했었지만 못 갔던 전시회에 간 거. 거의 보름 만에야 잔기침만 할 정도가 되었어. 올해 초엔 볼 전시가 상당히 많았었는데 나는 너랑 갔었던 그 사진전만 기억한다. 사진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특히 흑백 사진.


‘이걸 이 사람이 다 찍은 거야?’

‘아니라고. 이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야. 이건 델피르 헌정 전시야.’

‘어쒸, 헷갈려.’


진짜로 사진이 굉장히 많았다. 우리 나이에도 사색을 즐긴다면 즐기는 편이었던 너는 묵묵하게 전시된 사진들을 네 눈으로 다시 사진 찍었다. 나도 몇몇 사진을 기억한다, 모를 수가 없는 인물들.


‘와 이거 체 게바라 아니야?’

‘어 맞네.’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아?’

‘사진은 곧 역사가 되니까….’


제법 멋진 말을 해서 나는 입을 삐죽였다. 뭐야, 어른 같잖아. 나보다 생일도 느린 게. 김태형은 전시된 작품들을 계속해서 눈으로 찍었다. 나는 네 곁에서 그걸 보는 너를 담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때 탄 운동화, 까만 면바지, 너의 그 카멜색의 커다란 더플코트와, 실내에서도 두르고 있던 목도리, 콧대와 그 바로 위에 까맣고 결 좋은 너의 머리카락…. 그리고… 나를 보는 네 눈.


‘뭘 봐?’

‘아무 것도 안 봤는데.’

‘이리 와서 이거나 좀 봐.’


사진 작품 속의 네가 내게 고갯짓했다. 너의 눈빛까지 너무 완벽한 작품이어서 나는 그때 잠깐 숨을 멈췄던 것 같다. 까만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액자 앞에 섰다. 너와 나란히. 그리고 그 작품이 너무도 의외라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청 앞에서의 키스, 파리, 1950

Kiss By the Hotel de Ville, Paris, 1950

          로베르 두아노 Robert Doisneau



어쩐지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너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 사진을 보고 싶어서 오자고 한 거라고. 내가 너를 쳐다봤다. 너의 큰 눈이 나를 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내린 평원 같은 깨끗한 네 눈의 흰자까지 나에게 찍혔다. 계속 흑백 사진을 보고 있어서 그런가, 흑백 대비가 확실한 너도 흑백 작품의 일부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것도 잠시. 잔기침이 나오는 바람에 입을 가리며 내가 얼굴을 먼저 돌렸다.


‘콜록. 와 사진 대박이네.’

‘그치. 나 이 사진 좋아해.’


너는 웃었을까? 사진을 보고 했던 말에 네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건 보질 못했어. 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계속해서 뱉어내야 폐 안쪽까지 시원할 것 같은데, 기침을 해대고 숨을 들이마셔도 공기를 폐 끝까지 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때부터였다고. 이때 알았어야 했는데.


‘괜찮아?’


괜찮냐고 물으며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살피는 너 때문에, 가슴이 이상했다. 아니 이건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가슴이 아픈 걸 거라고 일부러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보고 싶다던 그 사진을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빌어먹게도 한 번 시작된 기침은 멈출지를 몰라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네가 좋아한다는 그 사진 앞에서 너와 계속 서 있고 싶었어. 사실 네가 원하는 만큼 계속 서 있어주고 싶었어.


‘아, 기침 자꾸 해서 미안해….’


나는 결국 코까지 훌쩍였다. 계속해서 기침해대는 나 때문에 남은 전시작을 서둘러 보고 나왔다. 너는 괜찮다고, 볼 건 다 봤다며 건조하게 말 했지만 나는 내내 미안해했다. 그래서 네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코를 훌쩍이며 기프트 샵에서 네 선물을 골랐다.


[포토 포슈Photo Poche]


‘주머니 속 사진’이라는 의미로 로베르 델피르가 최초로 기획한 작은 사진집이었다. 가격은 있어도 이걸 사주기로 했다. 비록 김태형이 좋아하는 사진은 없었지만. 그래서 <시청 앞에서의 키스> 엽서도 두 장 샀다. 얇은 종이 백을 다시 반쯤 접어 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따가 꼭 줘야지.


기프트 샵을 나와 너에게로 가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포토월이 있어서. 거기에는 네가 좋다고 했던 그 사진이 엄청나게 큰 크기로 인화 되어있었다. 내 머리 한참 위로 키스하는 연인의 모습이 드리웠다. 사진엔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발에 못이 박힌 것처럼 커다랗게 인쇄된 그 사진을 마주 보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앞으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러 모여들었다. 그래도 나는 가만히 서서 사진 속의 커플을 올려다보았다.


코를 훌쩍였다.


‘야 이 코찔찔이야.’


그래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영화 재미있었어?”

“그럭저럭. 너는?”

“나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어. 다음엔 SF 보자.”


다음에?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윤태웅은 나와 함께 걸었다. 우리 집이랑 가깝다지만 너는 너의 집에 가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나의 거절은 온화하게 다시 거절된다. 자상한 윤태웅은 굳이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갈 생각인가보다. 미안한데 나 너 우리 동네 안 사는 거 다 아는데….


여름밤은 낮보다 기온이 낮았지만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윤태웅은 덥지도 않은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수증기에 절여져 아까부터 생각이 많다. 사실 영화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계속 멍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뿐. 말 없이 걷다가 윤태웅이 내 얼굴을 살피며 웃었다.


“태형이랑 많이 친해?”

“김태형? 뭐, 제일 오래된 친구니까.”

“제일 오래된 거랑은 다른 얘긴데. 김태형 어디가 좋아?”


그 말에 인상을 썼다. 어디가 좋냐니 뭘 그런 걸 물어봐. 그래놓고 곰곰이 김태형을 떠올린다. 김태형, 좋은 녀석이지. 그 애의 어디가 좋냐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을 애써 떠올리려고 한다. 그냥 김태형을 떠올리니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걷던 모습부터 떠올랐다. 뭔가 한참 형 같은… 얼마 전에 꼴 보기 싫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글쎄. 좀 어른스러운 면?”

“그래? 그래서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은가?”

“걔가 인기가 많아?”


금시초문인데. 내가 모르는 김태형이 있는 거 아니야? 걔가 인기 많을 새가 어디 있어. 나랑만 붙어 다녔는데.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며 윤태웅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자식은 타고난 회장님인가 왜 모든 행동에 ‘온화함’이라고 쓰여 있는 거 같지.


“석진아,”

“왜.”

“앞머리는 누가 잘라줬어?”

“아씨….”


내 인생 최대 수치인 짧은 앞머리를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앞머리 공격이야. 늘 별 말 않던 김태형도 웃긴다고 존나 놀렸었는데. 순간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확 느껴진다. 윤태웅은 웃는다. 실컷 보고 있었으면서 손 좀 치워보라고 얼굴을 들이댄다. 아니 나는 쪽팔려 죽겠다고….


“석진아 앞머리 귀엽다.”

“귀엽다고? 쪽팔린데 지금.”

“아냐 진짜 귀여워.”


윤태웅이 또 다시 웃음을 터쳤다. 진심이 하나도 없잖아! 이 자식 빨리 집에 돌려보내고 싶다. 앞머리를 꾹 누르고 녀석을 피하자 윤태웅이 강제로라도 내 손을 떼어내려고 하는 건지 내 손목을 꽉 쥐었다. 놓으라며 의미 없이 힘 싸움을 하다 결국 내가 먼저 힘을 풀었다. 그대로 가려졌던 내 이마가 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윤태웅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석진아.”

“왜 자꾸 불러. 이것 좀 놔라.”

“우리 사귈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순간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내 표정에 생각이 고스란히 적혀있는지 윤태웅은 웃었다. 손목을 잡은 윤태웅의 손이 뜨겁다. 그 날 내 손을 잡아줬던 태형이 네 손은 서늘했었는데. 윤태웅이 다시 한번 묻는다.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사귀자. 응?”





‘내가… 생일인데 아파서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다 괜찮아. 얼른 낫기나 해.’

‘응…. 으응….’


눈꼬리에 찌걱찌걱 눈물이 고였던 느낌이 난다. 고열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을 웅크렸다. 목 안쪽으로 너의 서늘한 손이 들어왔다. 그 체온이 시원해 기분이 좋았다. 네가 내 앞머리를 쓸어주면 안심이 됐다. 네가 내 이마를 쓸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앞머리가 식은땀으로 젖은 줄도 몰랐을 텐데.


‘미안해…. 미안….’

‘괜찮다니까. 야, 야? 석진아. 석진아. 조금만 정신 차려봐, 응?’

‘흑… 힘들어…. 아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를 보고 당황한 네가 느껴졌다. 너는 내 손을 더 꽉 쥐고 내게 밀착했다. 내가 정말 죽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말을 계속 걸며 정신을 놓으려는 날 붙잡았다. 네가, 네가 그랬다. 온 몸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어서 그랬나. 네 목소리가 젖어 있었던 거 같다.


석진아, 진아. 내 얘기 들어 봐. 응?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줌마 오셔. 병원 가자. 야, 많이 아파? 석진아, 아 어떡해…. 아니야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나는 너랑만 있으면 돼. 나는 너만 안 아프면 돼. 너 이렇게 아프니까 나도 미칠 거 같아…. 흑 야, 눈 떠 봐.




“처음엔 그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갈수록 더 좋아져서.”

“어…?”

“나 너 좋아해, 석진아.”


그때 울면서 말했던 네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래, 김태형.


갑자기 목이 막히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도 나는 좋은데.”


이 모습도 좋대. 이런 게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거지? 내가 좋다는데 어떡해. 응? 태형이 네가 그랬잖아…. 






집에 와서도 한동안 멍했다. 의자에 앉아서 물끄러미 핸드폰을 내려보다가 네 이름을 눌렀다. 수화음을 따라 생각이 흐른다.


잠깐 의식이 있었을 때를 확실히 기억한다. 너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땐 네 손이 뜨거웠던 것 같다. 아니, 내 손에 닿는 네 숨결이 뜨거웠다. 눈을 뜨지 못했지만 나는 네가 쉬는 숨으로 네 표정을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손 끝에서 내 뺨으로 옮겨온 너의 숨만으로도.


‘석진아, 좋아해…. 나 너 진짜 많이 좋아해…. 그러니까 아프지 마라.’



“근데 태형아.”


나는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나 안 보고 싶냐….”


너는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얼마 안 남았을 무렵, 드디어 너를 봤다. 먼저 얼굴 좀 보자는 네 말에 이렇게 바로 볼 걸, 그동안 뭐 한다고 못 본 건지 아리송할 정도였다. 우리의 약속장은 우스웠다. 영화관? 음식점? 그런 곳일 리는 당연히 없었고 누구의 방도 동네 놀이터도 아니었으며 단지 내 편의점도 아닌, 계단이었다. 비상계단. 센서 등이 켜진다. 비상계단에 서로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워? 연애 사업 잘 돼 감?”

“연애 사업은 무슨. 야 안 되겠다. 너무 더운데 편의점 다녀오자.”


너희 집도, 우리 집도 아닌 중간 층에서 만나 모호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그동안 봐온 세월이 얼만데 고작 한 달여를 자주 못 봤다고 어색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너의 뒷모습을 본다. 한 달 새에 키가 큰 거야? 등이 이렇게 넓었나 싶은데.


지금 습도를 수치화 시키자면 98% 정도 될까. 대체 비는 언제 오려고 이렇게 무거운 공기만 쥐고 있는 걸까.


“요즘 윤태웅이랑 자주 만나?”

“어? 어….”

“많이 친해졌나 보네. 영화도 같이 보러 가고.”


그러는 너는. 아, 아닌가 너는 여자친구랑 온 거니까. 야 근데 나는 아직도 안 믿긴다. 네가 어떻게 여자친구를 사귈 수가 있냐. 생각하니 억울하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가는 판에도 네 목소리 잡고 버텼는데, 그렇게 애절하게 나 좋아한다고 해놓고 고작 몇 개월 만에….




“나 퓰리처 전시 다녀왔어. 서진이랑.”

“……그거!”


매년 나랑 가던 거. 왜 올해 가자고 안 하나 기다렸는데. 내가 소리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너를 보고 그냥 아랫입술만 꾹 물었다. 서운함보단 묘하게 분해서. 아니 서운한 건가. 갑자기 감정선이 튄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 안다고.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나만 계속 좋아해달라는 건 이기적인 거라는 거, 나도 알아.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 나….”

“나 태웅이랑 사귀기로 했어.”

“뭐?”


그래,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너도 이제 그냥 네 연애를 하는데. 나도 첫 연애를 해도 괜찮은 거잖아.


“방금 무슨 소릴 한 거야?”

“뭐가? 나 태웅이랑 사귀기로 했다고.”


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너무 많은 감정이 덮어씌워진 얼굴이라, 눈빛이 혼란스러운데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챌 수가 없다. 나는 그냥 아무 말이나 하기로 한다.


“야 너 안경 쓰지 마라. 서진이가 안경 쓴 거 못 봤지? 너 되게 못생겼어.”

“거짓말이지?”

“뭐가? 태웅이랑 사귀는 거? 진짠데. 저번 주 금요일부터 사귀기로 했어.”


곧 네 눈빛이 돌변할 것 같아서 일부러 너를 앞질러 걸으며 대답했다. 최대한 무성의하게. 그래야 우리가 계속 친구 사이임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런 내 생각을 모르는지, 아니 아는지, 너는 역시나 나를 붙잡는다. 너는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너의 숨소리가 그렇다.


“갑자기 왜 걔랑 사귀어. 너 걔 좋아해?”

“내가 좋다잖아.”

“너 좀 좋아할 수 있지. 그런다고 사귀어? 그게 말이 돼?”

“야.”


너 이건 억지 부리는 게 맞다.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자 네가 내 손목을 옭아매 듯 다시 꽉 쥐었다.


“너도 그렇잖아. 서진인가 그 애가 너 좋대서 만나는 거라며. 이것 좀 놔.”


손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힘을 주는 이유가 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다. 나도 네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본다. 어차피 내쳐도 내 손목 놓지 않을 거, 놓을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너 왜 그래? 뭐가 불만이라서 이래.”

“너야 말로 뭔데.”

“너도 연애하잖아.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나도 연애 해봐야지. 안 그래도 늦었는데.”

“내가…. 뭘 또 불편하게 했어?”


이해 못할 소리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전까지 분노하는 것 같은 네 눈이 어쩐지 슬퍼 보인다. 이러면 내가 당황스럽잖아. 내가 꼭 잘못한 거 같잖아.


“어. 지금 되게 불편해. 이 손 놔.”


상처 받은 눈 안 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게 나를 제일 불편하게 하니까. 바로 풀리는 손목에 나는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런 눈 하지 마. 배신감은 너보다 내가 먼저 느꼈어.


“나 그냥 들어간다.”

“야 김석진.”


그냥 너의 얼굴을 안 보기로 한다. 차라리 화난 얼굴의 너를 상상하는 게 더 낫다.


“간다. 곧 태웅이한테 전화 와.”

“…….”

“너도 여자친구한테 전화하든가.”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김태형.








예보가 길어진다. 저번 주부터 계속 비가 온다고 했는데 하늘은 가지고 있는 물이 없는 것처럼 찔끔찔끔 눈물을 쥐어짜냈다. 그래서 무거운 공기가 계속됐다. 그게 나를 지치게 한다. 몸이 무거워서 옮기는 걸음마다 발을 끈다. 가기 싫은데 끌려가는 것처럼.


“석진아, 어디 아파?”


왜 기분이 안 좋아?


보통 너는 그렇게 물어봤었지. 친구인 너는 그렇게 물어봤었어.


내가 고개를 젓자 조금 앞서 걷던 태웅이가 내 곁으로 왔다. 습한 손바닥이 내 목덜미에 닿자 짜증부터 났다. 눈치도 없는 뜨거운 손바닥이 끈적하게 내 목덜미를 감싸온다. 달라붙는다는 쪽의 느낌이었다. 무거운 공기는 천천히 다가온다. 이다음에 일어난 일에 나는 인상을 썼다.


“너 담배 피워?”

“아, 응. 근데 많이는 안 펴. 싫어?”

“싫다기보단….”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 불호를 말하기보다 훅 끼쳐오는 의외의 정보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네가 흡연을 하든 하지 않든 딱히 관심이 없다. 김태형이라면? 그건 얘기가 다르다. 윤태웅은 내 목덜미를 몇 번 주무르다 손을 거둔다. 은근슬쩍 제 손 끝의 담배 냄새를 맡는다.


“태형이는 안 펴?”

“뭘?”

“담배. 필 것 같은데.”

“걔가 그런 걸 왜 펴.”


어림도 없는 소릴. 걔가 담배 피면 아줌마한테 혼나고 우리 엄마한테 혼나고 나한테까지 혼날 텐데. 김태형은 그런 귀찮은 일을 사서 만드는 애가 아니야. 먼저 걸음을 옮기자 윤태웅이 서둘러 따라붙는 게 곁 바람으로 느껴졌다.


“김태형이 어른스러워서 좋다길래. 담배라도 피는 줄 알았지.”

“얘기가 왜 그렇게 돼. 걔 그런 애 아니야.”

“석진아.”


또 손목이 붙잡힌다. 끈적이고 더운데. 태생이 남에게 불편한 표정, 불편한 소리 못하는 나는 말없이 녀석을 올려다본다. 나는 둔해 빠져서 어떠한 것들을 제때 각찰하는 데엔 소질이 없다. 그런데도 점잖은 학생 회장, 너의 눈빛이 지금 상당히 날카롭다는 건 알겠다.


“너 나랑 사귀는 거야, 지금.”


그래. 누가 뭐래.







연애라는 것이 이렇게 지루하고 불편한 걸까? 다들 보면 얼굴에 홍조가 가실새 없이 좋아하던데. 매일매일을 연락하고 만나고 잠깐이라도 만나면 서로가 뭐가 그리 재미있고 편한지 헤어지기 아쉬워 하고. 꼭 지금 헤어지면 안 될 거 같고…. 그런 거 아닐까? 진짜 그래? 태형아 너는 그런 연애를 하고 있어?


그래도 지금 그 애가 좋진 않은 거지?








이제 슬슬 눈썹과 같은 줄이 되어가는 나의 앞머리에 관하여.


지난 봄이었다. 나는 머리가 이렇게 안 자란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실 한 번도 머리 문제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머리가 이상하게 잘렸으면 또 기르면 된다고 하는 생각에. 


‘야 너 앞머리 뭐냐…. 풉.’


아니 그러니까아…. 네가 불편하지 않냐며. 태형이 네가 댕강 자른 내 앞머리를 지적했을 때 나는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순간 나는 다시 깨닫는다. 잔뜩 긴 내 앞머리를 보고 불편하겠다며 스치듯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나는 네가 날 볼 때 불편할까 봐 아무 생각도 없이 앞머리를 싹둑 잘랐었다는 걸.


삽시간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내게 히죽거리며 얼굴을 들이밀던 너. 너.


너 때문이잖아.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어, 언제부터 그렇게 웃었어.


그 얼굴이 부끄러워 너와 마주칠 일이 있을 때는 앞머리를 위로 올려 고정했다. 그 얼굴을 다시 보기가 겁났다. 그렇게 웃는 네 얼굴에 나는 밤새 심장이 뛰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에도 떠오르는 게 너라서 나는 내 냄새까지도 네 냄새로 착각했다. 그냥 웃던 너의 얼굴 모든 것이 그 밤엔 오감으로 다 느껴졌다.







점점 더 네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어. 언제나처럼 네 웃는 얼굴은 변함이 없는데 나만 변했다. 괜히 너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보고 있던 책이나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었어. 근데 그때 머리로는 주말에 너와 뭘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그게 너무 당연해서, 태형아 그러니까 나는 너와의 시간이 너무도 당연해서…


‘나 여자친구 생겼어.’


몰랐었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모습이 어른스럽게 느껴진 건, 네가 나보다 더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분야가 남달랐던 것도. 또 거기에 매달리는 것도. 아픈 누군가를 간호하고, 기다리며, 좋아하는 것도. 네가 나보다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그땐 그냥 분했는데. 치기였어. 지금의 나는 그저 슬프…다는 말만 할 수 있는 것 같아. 태형아, 지금 내 감정이 슬퍼. 야, 이제 와서 내가 너를 많이….


“너 지금 들어와?” 

“아씨, 깜짝이야. 남의 집 계단 앞에서 뭐하냐?”

“연락도 안 받고 집에도 없다길래.”

“얼른 들어가. 괜히 놀랐네.”

“걔랑 …있다가 온 거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 김태형은 서 있는 계단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도 너를 건조하게 쳐다본다. 나는 말랐다. 속이 바짝바짝. 다 가문 땅처럼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나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쭉 인정해왔듯 그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하지만 나는 현관문 앞에 있었고 너는 비상계단에 있었다. 우리는 현재 서로 다른 공간에 분리 되어있다.


“석진아.”

“어.”

“나 불편해?”


너무 정곡이라서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본다. 미안하게도 정말 네 얼굴을 못 보겠다.


“다음에 얘기하자. 빨리 가. 아줌마 걱정 하시겠다.” 

“너 왜 그래. 얘기 좀 하자.”


“야…!”


뒷말엔 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었다. 익숙한 집 냄새. 뭔가로부터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제야 계단에서 다급하게 걸어 내려오는 네가 느껴진다. 나는 뒤로 닫히는 현관문을 잡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분리 된다.


슬프다거나 울음이 올라오는 건 아니었다. 방으로 들어와서는 짜증이 났다. 그냥 이래야만 할 것 같은 그 모든 상황들이 짜증이 났다. 김태형과 이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정말로 불편해져 버린 관계에 제일 짜증이 났다. 이 상황에 얽힌 인물들이 많다. 나만 모르면… 나만 영원히 모르면 언젠간 다 괜찮아질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짜증이 난다.


그래서 김태형의 연락을 전부 차단했다.







사귀는 사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나는 윤태웅과 거리를 둬서 걸었다. 함께 있는 것이 싫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 애 마음의 온도가 전해지려고 하면 그건 불편했다. 윤태웅은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에 의미를 많이 두긴 했으나 나에게 사귀는 사이의 의무를 요구하진 않았다. 가끔은 그게 미안해서 윤태웅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근데 너는 이게 되니, 태형아. 좋아하지 않고서.


“집에 데려다줄게.”

“아냐, 매번 안 그래도 돼.”

“이거라도 안 하면 너랑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어쩐지 서늘한 태웅이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공기가 너무 무겁다.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걷는 데에도 팔에 땀이 맺혔다. 순수한 내 땀인지, 공기 중 수분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 속은 이렇게 건조한데.


“손 잡아도 돼?”

“응?”


내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 분명 들켰을 테다. 사늘하게 웃는 모습조차 온화해 보여서 이젠 두려웠다. 아, 그냥 나 너를 좋아해 버릴까. 먼저 시작된 관계의 의무가 나를 감정의 시작으로 데려다줄 거야. 감정을 시작하는 편이 지금 내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면 그 대상이, 윤태웅인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찰나에 들었다.


손이 내 주먹을 감쌌다. 크고 뜨거운 손이. 나는 주먹을 펴 손바닥을 맞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윤태웅의 손이 너무 뜨거워서. 그리고 겨우 이 온도만으로 태형이 너를 떠올려서. 내가 원한 건 서늘했던 너의 손이야. 그때 그 체온이야. 매번 나와 상반되던 온도를 가지고 있던 너를 떠올리니 이번엔 목이 꽉 막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는 건, 그러니까… 올해 초에 네가 내게 목도리를 둘러줬을 때와 같았다는 거다.


“김석진.”


들리는 목소리에 윤태웅이 내 손을 말아쥐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살벌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김태형을 발견했을 때는 드디어 한두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김태형은 그 빗방울의 속도보다 빠르게 걸어왔다. 잡고 있는 손을 채가자 이번엔 태웅이가 사나운 목소리를 냈다.


“뭐야, 너!”

“김석진. 왜 전화 안 받아. 뭐야 너 지금.”

“너야말로 뭐야. 전화가 안 왔으니까 안 받지.”


네게 옮겨갔던 내 손을 다시 빼내며 말했다. 또다시 유치한 마음이 든다. 이런 상황 다 누구 때문인데. 살면서 김태형의 이런 표정을 또 다 보네. 이 와중에도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진다. 누구보다도 피하고 싶은 건 나다.


“나 차단했어?”

“미안해, 태웅아. 얘가 이렇게 막 되먹은 애는 아닌데….”

“야!”


너에게 위팔이 거칠게 잡힌다. 마치 멱살을 잡힌 것 같았다. 내가 힘없이 밀쳐지자 그 사이를 막아선 건 윤태웅이다.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숨을 자주 내쉬게 된다. 폐가 담을 수 있는 용량이 한없이 작아진 것처럼. 그 사이에서 가장 비겁한 내가 주섬주섬 공기들을 모아 말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김태형의 손목을 틀어쥐고 이 상황을 피하는 것 뿐이었다.


“태형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내가 이따가 연락할게. 오늘은 이만 가줄래?”


날 쳐다보는 윤태웅의 눈빛이 얼마나 살벌한지 알고 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것부터 견뎌보고자 한다.


우습게도 김태형은 그 자리에서 자신을 빼내는 내 손을 쳐내지 않는다.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서 김태형은 순순히 나를 따라 자리를 피했다.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에 속도가 붙었다.


“어디까지 가. 여기서 얘기해.”

“할 얘기가 뭐 있어. 그냥 너는 너희 집 가고 나는 우리 집 가는 거지.”

“나는 할 얘기 있어. 너 왜 그렇게 날 피하는데.”


이건 늘 알고 지낸 김태형의 태도가 아니다. 다소 반항적으로 대꾸하는 지금의 너는…. 그런 너를 보고 나도 냉정을 찾는다. 조금 전까지 폭발할 것 같았던 감정이 이제 가라앉은 듯하다. 피부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온도가 나를 식혔다.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서 묻잖아. 내가 뭘 잘못했어? 너 왜 그래?”

“너야말로 왜 그래. 넌 대체 뭐가 문젠데!”


나는 폭발했고 너는 침착하려고 했다. 너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그대로 네 하관을 쥐고 나를 노려봤다. 짜증이 났다. 그래도 나를 기다려주는 너의 그런 모습에. 솔직해지자면 나도 내 심정을 알 수 없어서. 그대로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버럭 짜증을 냈다. 김태형 너만 조용히 제 갈 길가면 나도 이대로 가라앉을 텐데. 왜 네가. 꼭 네가 나를 지나치지 못해서 착각도 못하게 만들어. 이를 꽉 깨물었다. 먼저 감정을 흘리고 싶지 않다. 대답을 못하는 김태형을 그대로 두고 뒤돌아 걸어가려고 했을 때, 다시 양팔이 붙들린다.


“너 안 불편하게 하려고. 너와 불편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너 충분히 불편해. 태형아.”


김태형은 속눈썹이 길다. 눈이 커지며 더 많은 흰자가 드러나고, 그게 촉촉하게 젖으면 어김없이 아랫속눈썹이 더 진해진다. 이 순간은 네가 운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냥 너도 내리는 비에 젖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빗방울이 빗줄기로 변해 내렸다. 삽시간에 코가 빨개진 김태형은 그래도 내 팔을 쥔 손에서 힘을 풀 줄 몰랐다.


“너… 쟤 진짜 좋아해?”

“야. 너야말로 진짜 왜 그래.”

“너는, 씨발, 너는 진짜 아무 것도 몰라. 대답해봐. 좋아하냐고 묻잖아. 쟤 진짜 좋아해? 좋아하냐고!!”


비에 젖어 식어가는 내 팔에 네 손이 닿은 자리만 데일 것 같이 뜨거웠다. 그래서 무섭다. 나를 대체 어디까지 태워 말리려고 그래. 네가 나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 좋아해. 씨발, 내가 좋아서 사귄다는데 갑자기 왜 선비질이야.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냐?”

“거짓말 하지 마. 언제부터. 언제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것 좀 놔! 미친놈아!”


뜨거운 김태형의 손을 뿌리친다. 이제 진짜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보에서 그렇게 염원하던. 앞으로 더 거세질 빗줄기였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뜨거운 손이 떨어져 나간 팔이 이제 되레 서늘해 소름이 돋았다. 남아있는 것도 지독하게 김태형 같아서. 나를 노려보는 저 눈이 낯설다. 낯선데, 이상하게도 슬프다.


“넌… 하…. 김석진 너는…. 너는 존나 멍청해서 평생을 가도 모를 거야. 죽을 때까지 모를 거야….”


네가 이렇게 진심으로 화내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아 그때. 초등학교 때 나 괴롭혔던 놈 대신 패러 왔을 때. 사람의 마음을 참 알 수가 없지. 나는 이 상황에도 어린 네가 떠올라서….


“웃겨?”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것에 김태형은 이를 갈았다. 네가 내 멱살을 끌어당겨 잡았다. 더 심한 말이 오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나도 주먹을 꽉 쥔다. 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견디려고. 그러면 해결될 것 같았다. 굳이 내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여러 말을 하지 않고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이 씨발 진짜. 내가 이따위 말을 들으려고…. 너는 진짜….”

“뭐. 내 탓 하지 마. 다시 말해줘? 나 쟤 좋아해. 윤태웅 좋아해서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숨을 쉬다 뭐에 걸린 듯 네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너와 다시 예전 같을 수 없다면 이대로 남남이 되어도 나쁠 것 같지 않다. 차라리 서로의 곁에서 위로해줄 사람들이 있는 채로. 네가 나를 포기한다면 나는 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린 속 없는 네가 눈빛과는 달리 차갑게 말한다.


“그래. 가. 나도 더 할 말 없다. 꺼져.”

“뭐?”

“꺼져버리라고. 너 진짜 꼴도 보기 싫어.”

“야 무슨 말을…!”

“석진아, 나 너 진짜 싫다.”


잡힌 멱살이 풀린다. 애초에 대화하지 못했다. 제대로 시작도 못 한 대화의 끝맺음에 나는 심장이 내려앉음을 느꼈다. 이런 결말. 아, 이대로 정말 끝이구나. 내가 원했던 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유치하다. 헤어지는 연인 따위가 아닌데, 은연중 네가 다시 나를 붙잡아주길 바라는 내가 제일 유치하다.


“꺼져. 두 번 다시 불편하게 볼 일 없을 테니까.”


너는 운 게 맞았을까. 뒤돌아서며 눈가를 훔치는 것 같았는데, 네 교복이 이미 젖어있어서 그게 확실하지 않다. 나도 꾸준히 젖고 있다. 울지 않았다. 어딘가 꽉 막혀서 눈물은 안 나왔다. 그저 속이 갑갑했다.


멀어지는 네 등을 가리며 우산을 쓴 태웅이가 내게 뛰어왔다. 내 남자친구. 비가 내리는데 나를 젖지 않게 하려고 머리 위에 비닐 천장을 드리운다.


“괜찮아? 김태형이 심하게 다루길래…. 내가 너무 늦게 왔나? 괜찮은 거야?”


나는 우산대를 쥐고 있는 윤태웅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거라도 잡고 버텨야 했다. 어떤 결말을 상상했어도 그 무엇도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결국 오고야 마는 우리 사이의 끝. 우리 사이의… 아…….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다시 김태형의 등을 쫓았다. 어디로. 어디로 갔지. 태형아, 나는….


내리는 비에 숨이 계속 막혔다. 안과 밖 그 어디라도 쏟아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나는 입만 뻐끔거렸다. 태웅이. 윤태웅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뺨을 쓰다듬다 감싸는 것조차 다정했다. 사랑받는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그럼 사랑한다는 건, 태형아, 나를 좋아했던 너도 줄곧 이랬던 걸까.


“석진아.”

“……응.”

“너 진짜 김태형을… 좋아하는 거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올해 초. 키스하는 연인들의 사진 앞에서. 너는 네 목도리를 내게 칭칭 감아주었다. 네 목도리가 내 목을 따스하게 조르며 코 아래까지 전부 차올랐다. 나는 그때 내가 죽을 줄 알았다. 너의 냄새로 질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목도리 섬유 사이사이에 가라앉아있었던 네가 들이찼다. 단 한 톨의 먼지만큼도 빼놓질 않고. 들이마신 산소는 피를 타고 온 몸에 퍼진다. 그 숨부터 나는 태형이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몸 구석구석에 새겼다. 


태형아, 나는 너를 좋아해.


비 맞을 리 없는 우산 아래에서 비로소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서야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비가 세차게 내렸다. 턱이 덜덜 떨렸다. 아직 김태형이랑 멀어진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아서, 그 거리가 너무도 아득해서 무서웠다. 이미 가고 보이지 않는 네 모습을 벌써 그리며 뒤쫓았다. 그 시야에 다시 가득 차는 건 윤태웅이다. 윤태웅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계속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윤태웅의 품이 뜨거워서 나는 눈물은 결코 아니었다. 벗어나려는 나를 다시 잡아 끌어안은 윤태웅에게서 미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토할 것 같았다. 김태형이 생각나서.


나를 따스하게 감싸는 너의 마음을 밀어내고도 나는, 벌써부터 내 손을 잡았던 그 손의 서늘함이 그립다. 근데 이대로 가버리면 어떡해. 다 너 때문이야. 김태형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멋대로 나를 좋아하고, 곁에서 아껴주어서. 네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우리는…. 다, 다 너 때문이야. 그래서 미안해 태형아.


“미, 미안해… 어흑, 태웅아. 미안해. 나, 나 가야 할 것 같아….”

“어딜. 어딜 가.”

“나, 흑…. 나 아직 김태형한테 말 못한 게 있어서…! 나, 나 지금 가야 할 것 같아.”


오늘 아니면 영영 말 못할 것 같아. 쟤가 진짜 가버릴 것 같아.


손을 쳐내도 끈덕지게 다시 나를 잡아 오는 윤태웅의 손에 정신이 없었다. 눈물을 훔치지 않았는데 벌써 눈이 쓰렸다. 앞이 하얘질 정도로 비가 내렸다. 너와 나. 우리 사이에 비가 내린다. 계속해서 멀어진다. 빗줄기에 우산이 버거운 게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태웅이의 손을 쳐낸다.


“너 지금 가면 나 못 봐.”


어투는 단호했지만 나를 올곧게 바라보는 윤태웅의 눈은 정직할 정도로 애절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감정과 범람하는 눈물에 시선을 한 군데에 둘 수가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빗줄기를 타고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를 다시 끌어안으려는 윤태웅에게서 뒷걸음질 친다. 이제야 내 모든 게 젖는다.


“미안해.”

“석진아.”

“미안해. 미안해. 나 쟤 좋아하나 봐. 나 흑… 나 아직 그걸 말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태웅아.”


나는 온 몸으로 울고 있었다. 여러 감정으로 몸이 젖어 무거웠다. 이 와중에도 너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어서 초조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머리 위에서 쏟아붓듯 내리는 물을 닦았다. 눈가가 계속 홧홧했다. 자꾸만 빗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태웅아!”


윤태웅은 그런 내 손목을 잡아채 우산 안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왔다. 잡힌 손목이 또다시 뜨거웠다. 태형이 너랑은 다르다. 뜨거운 윤태웅의 손이 내 손에 우산 손잡이를 억지로 쥐여준다.


“비 맞지 말고, 이거 쓰고 가.”


그 말에 눈이 금세 더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우산을 내게 떠맡기고 서서히 뒷걸음질 치는 윤태웅의 손목을 잡았다. 처음으로 그 애를 끌어당기고 그 애의 가까이에서 말한다. 손에 다시 우산을 쥐여주며.


“고마워….”



그리고 나는 뛰었다. 비를 전부 다 맞으면서.


우리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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