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편은 아동학대, 가정폭력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문을 열고 응접실에 들어갔다. 어김 없이 상석에 앉아 있는 쿠흐 백작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보지 못했던 시간이 이리도 긴데, 어찌 달라진 게 하나 없는지. 어차피 길게 대화할 생각은 없었기에 자리에 앉지 않고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잘 지내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 임신에 실패한 것 같구나."

"예?"

"내가 하루라도 합방일을 앞당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 썼건만."


합방을 하라 매일 상소를 올리고, 결국에는 억제제를 사용하자는 안건을 낸 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니.. 고작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내 시간을 쓴다는 게 아까웠다. 더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실 거면 돌아가 주세요. 드릴 말씀 없습니다."

"못난 놈."

"... 제가 언제 백작님께 잘난 아들이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할 말은 이것뿐인 듯하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백작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머리락이 뜯어질 것처럼 잡아당겨진 것은, 몸을 돌려 응접실에서 나가려던 때였다.


"네 놈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구나."


어느 틈에 내 뒤까지 온 건지 쿠흐 백작이 내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쥐어 당겼다.


"이거 놓으십쇼. 당장 놓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네 놈이 정녕."


-짝


잔뜩 열이 오른 쿠흐 백작의 얼굴이 시선에 순간적으로 잡혔고, 그다음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일정한 패턴으로 채워진 응접실 바닥의 카펫이었다. 방금 맞은 오른쪽 볼이 홧홧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사태 파악을 하지도 못한 채, 나는 멱살이 잡혀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제자리로 돌아오지도 못한 고개가 이어지는 뺨 세례에 머리가 울렸다.


"최근에 황태자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더니, 네가 아주 미친 게로구나. 오늘 내가 네 위치를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줄 테니 똑똑히 기억하거라."


일정하게 들려오는 손바닥과 뺨이 부딪히는 소리에 쿠흐 백작이 하는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툭


"독한 것. 신음 한번 내뱉질 않는구나. 그런 너기에 이런 일이 적합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반쯤 정신이 혼미한 나를 바닥에 내팽개친 쿠흐 백작이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말했다.


"기억 나느냐. 네가 쿠흐 백작가에 처음 왔을 때 말이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 행운인 줄 알았던 선택이, 더 없는 불행으로 바뀌었던 순간을.


"너는 무척이나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였지. 해서 웬만한 일들은 내 뜻대로 따랐지만, 또 어떨 때는 당돌한 면이 있어서 네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 그럴 때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달래 왔는지, 기억이 좀 나느냐."


백작가에서 배워야 했던 예절 교육들. 어디에 쓰이는지도 몰랐던 궁중 예법들. 백작은 그러다가 가끔씩 어린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시키곤 했다. 여성 파트의 춤을 배우는 것이 그랬다. 그래서 어린 나는 댄스 수업을 거부했다.


"그래, 다음은 네가 아니라 란, 그 아이의 차례가 될 것이다."


그날 저녁, 란은 얼굴에 피멍이 들어 돌아왔다.


나중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였지만, 그전까지 쿠흐 백작은 나를 폭력으로 다독였다.


-툭


눈앞에 작은 통이 하나 떨어졌다.


"상처에 좋은 연고다. 챙겨 발라라. 그래야 얼굴에 흉이 안 지지."


처음부터 얼굴을 피했으면 되었을 것을. 예전부터 백작은 그랬다.


"먼저 가보지. 다음에 만날 때에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으마."


-끼익, 탁


백작이 나가자 그제야 입안의 피 맛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안쪽이 찢어진 것 같았다. 나는 연고를 주워 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이런 걸 챙겨온 걸 보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왔던 거다.


"..."


갑자기 두려움이 음습했다. 다음이라는 건 언제가 될까. 그전까지 내가 황태자의 아이를 갖지 못한다면... 사실 갖게 된다고 해도 문제였다.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일 테니. 말 그대로 이건,


"진퇴양난이네..."


-똑똑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벨리에 경의 정갈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닙니다. 혼자서 조금 생각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이런 걸 생각하고 있어 봐야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당면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얼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벨리에 경, 잠시만 들어오시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등지고 앉아 있어 벨리에 경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굉장히 조심스럽게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기까지 걸린 시간이 긴 탓이었다.


"경, 혹시 제 얼굴을 보고 놀라더라도 큰 소리는 내지 마세요."

"... 예."


어차피 벨리에 경과 란에게는 비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내 쪽에서 먼저 말을 하는 게 나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일어서 뒤를 돌았다.


"전하.. 얼굴이..."

"뭐,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흉측하겠죠."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상냥한 벨리에 경. 지금부터 그에게 해야 하는 부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쿠흐 백작이 그런 거군요."

"... 그렇죠."

"언제부터.."

"제가 맞는 건 처음이려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보기보다 아프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힘이 많이 빠지신 거겠죠."

"..."


벨리에 경의 얼굴에 죄책감이 스쳤다. 아마 자신이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평소 같았으면 당신의 탓이 아니라며 위로해 주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는다. 그 감정을 이용해야 하니까.


"벨리에 경.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쇼."


역시, 죄책감 탓인지 1초의 망설임도 없다.


"오늘 일 있었던 일은 황태자 전하께 보고하지 말아 주세요."


순간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바로 지웠다. 벨리에 경에게는 의외의 부탁이었나 보다.


"평생일 필요는 없어요. 그냥 딱 이 얼굴이 나을 정도면 됩니다."

"...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벨리에 경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는 란과 이야기를 했다. 란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차라리 자신을 때리라며 쿠흐 백작을 원망했다. 내게는 그게 더 힘들었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도움을 빌려 얼굴이 낫기까지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황태자도 내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운 건지, 황제 폐하의 일로 바쁜 건지, 나를 찾지 않았기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고민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두고, 내가 찾은 행복을 더 즐기기로 했다. 어차피 걱정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었으니까.





월요일과 화요일은 저번에 공지에서 짧게 말한 것처럼 가족 휴가로 인한 휴재입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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