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애매모호
 契. 여홍




 1. 인준은 경영기획팀원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사람 중 하나였음. 얼굴에 ‘나 예민해요’ 라고 써붙여놓고서는 은근히 마음이 여리고 약한데다가,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어서 놀리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임. 그날의 놀림은 점심을 먹은 직후의 회의실에서 이루어졌음. 한창 인사건으로 열을 올리고 있던 재민이 멍하니 앉아있는 인준을 봄. 인준씨, 팀장님 좋아하죠? 내가 보니까 눈빛이 심상치가 않더라고.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마냥. 멀뚱히 앉아있던 인준이 나대리님 무슨 허언증있으세요? 하면서 맞받아쳤음. 저 팀장님 안 좋아하거든요? 저는 그렇게 잘생기고 능력좋은 남자 싫어해요. 비교당하는 것 같아서 싫다구요. 나름 진지하게 사유를 밝혔지만 그걸 진지하게 들어줄 팀원들이 아니었음.

 - 에이~. 이팀장님은 다르잖아요! 다정해, 배려심 넘쳐, 남이랑 비교도 안 하지,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딨냐? 나같아도 좋아하겠다.
 - 아, 그러니까 나대리님이나 열심히 좋아하시라구요.
 - 내가 팀장님 좋아하는 마음은 팀원으로서 존경한다 뭐 그런 뜻이고, 인준씨는 사랑이고.
 - 아니라니까요! 안 좋아한다구요!
 -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 갑자기 끼어들지 마세요, 박주임.
 - 근데 어떻게해? 마음은 이해가지만 팀장님 인기 완전 많잖아요. 우리 회사 페북에 팀장님 사진 올라가구나서 좋아요 1만 찍은 거 알아요?

 별안간 저들끼리 떠들던 팀원들이 다시 인준을 몰아가기 시작했음. 아니라고 난리 부르스를 쳐도 귓등으로 안 들을 사람들이라 인준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인정해버리고 맘. 네! 팀장님 완전 좋아해요, 연애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고 그래요. 사랑해서 미치겠어요! 됐어요!? 평소같았으면 맞으면서~, 하고는 낄낄댈 사람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 왠지 쎄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는데 제노가 뒤에 서있음. 깜짝놀란 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재민이 팀장님 오후회의 준비하실 시간인가봐요, 다들 자리 비켜 드립시다, 하고는 우우 몰려나감. 혼자 남은 인준은 우왕좌왕 하다가 제노 눈치보면서 말함.

 - 그, 팀.. 팀장님... 혹시 들으... 셨어요?
 - 음, 뭘요? 좋아한다, 연애하고싶다... 결혼하고 싶다, 사랑해서 미치겠다.. 어느쪽이요?
 - .........

 씨발. 다 들었잖아!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들어와서!

 - 팀장님, 저 그거 장난이에요. 진짜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팀장님 안 좋아해요. 진짜에요.
 - 네. 알겠어요.

 알겠다는 말에 어영부영 회의실을 나오긴 했는데, 왠지 불안함. 말로만 알겠다고 해놓고 내가 자기 좋아하다고 착각해서 괜히 잘해주는 거 아냐? 그런거 질색인데... 회의실 너머를 바라보는 인준이 발을 동동 굴렀음. 사내 아이돌이라 일컫어질 정도로 인기가 많고 다정해 성격 좋은 걸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차가운데다 강단있고 단호한 구석이 있는게 이제노였음. 그런 곧고 똑부러진 사람이 한번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면 절대 그 생각을 안 바꿀 것 같애. 누가 나서서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될 것 같음. 결국 인준은 자기가 오해를 풀어서 광명(?)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함.


 2. 요 며칠간은 제노의 눈치를 살피는데 주력함. 쓸데없이 잘해주려고 하지는 않는지, 애틋하고 안쓰럽다는 눈으로 보지는 않는지.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기가 그 동안 너무 이제노식 다정함에 물들어서 눈치를 못 채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듦. 역시 입으로 말을 해서 알려줘야 돼. 팀장이 혼자 오해하지 않도록. 머릿 속으로 해야할 말을 정리한 인준은 홀로 팀장실에 앉아있는 제노를 찾아감.

 - 팀장님, 저 드릴말씀이 있는데요.
 - 말씀하세요.
 - ... 제가 팀장님 좋아한다고 했던 거, 다 장난인 거 아시죠? 저 팀장님 안 좋아한다고 그랬잖아요.
 - 네, 알아요.
 - 전 또 혹시나하고. 오해하실까봐서요. 저는 팀장님 진짜 안 좋아하거든요? 제가 또 짝사랑에 알레르기가 있어가지구 누구 짝사랑하고 그러면 체해요.
 - .... 알았어요.

 말을 하고 나니 속은 시원한데, 또 한편으로는 한번 얘기한 걸로는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애. 참을 인도 삼 세번인데, 적어도 세번은 해줘야 알아듣지 않을까? 거기까지 결론이 나자 제노 얼굴을 볼 때 마다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면 인사하자마자 저 팀장님 안 좋아하니까요~, 하면서 사람 당황케 만들고, 업무 때문에 팀장실로 불러서 인준씨, 하면 저 팀장님 생각 안 했거든요. 팀장님 혼자 착각하시고 부르신걸까봐 미리 애기하는 거예요, 하며 황당하게 만들었음. 심지어 회식이 끝난 후, 가는 방향이 같아 같이 걸어가던 와중에 팀장님, 저요... 저는 팀장님하고 연애 할 생각이 없어요, 하고는 사귈 생각도 없는 이제노를 걷어 차기까지 함. 사실 제노는 그때 들은 말에 별 의미를 담아둔 적이 없는데, 인준이 매일 도장찍듯 ‘나는 댁 안 좋아해’ 같은 얘기를 하니 색다른 방식으로 자기 환심을 사려고 저러나 싶음. 워낙에 사람들이 혼자 내적친분감 쌓고, 좋아한다, 사귀고싶다 같은 말을 해대니 저도 모르게 누가 튀는 행동을 하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버린 것임. 인준은 제노가 자기보면서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른 채 제노 면전에 대고 낫관심! 낫애정! 을 외치기 바빴음.


 3. 한창 야근시즌을 맞아 돌아가며 당직을 서던 날이었음. 어쩌다 퇴근시간이 맞물려 제노랑 같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퇴근함. 인준은 또 습관적으로 팀장님, 제가 팀장님을 안 좋아하잖아요, 하는데 매번 알아요, 하던 제노가 빤히 보면서 왜요? 하고 물음.

 - 네?... 아니, 안 좋아하는 건 안 좋아하는건데요?
 - 그러니까 어디가 그렇게 싫은지 알려달라는 소리에요.
 - 그, 러니까...
 - 그럼 내가 뭘 어떻게해야 좋아해줄 거예요? 계속 안 좋아한다고 하니까 이제는 좋아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를.
 - ..아... 그, 어.. 음...

 그 순간 엘레베이터 문이 열린건 차라리 신의 기적이었음. 잡을새라 급하게 사원증을 찍고 로비를 뛰어나간 인준이 택시를 잡아탔음. 뭘 또 그런걸 물어보고 난리야? 거기다 대고 팀장님 너무 잘생기고 능력이 좋으니까 재수없어서 안 좋아해요 할 수도 없잖아? 하여튼 사람 곤란하게스리. 아이 씨. 막차타고 갈 수 있었는데. 투덜거리며 눈물의 택시값을 지불한 인준이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음. 이불을 끌어당겨 올리고, 막 잘 준비를 하는데 진동이 울림.

 이제노 팀장
 「대답해 줄 때 까지 계속 물어볼 거에요.」
 「잘자요.」

 이제노는 한번 그러겠다 다짐하면 무조건 그걸 밀고나가는 사람임. 그 성향으로 경영진에 눈도장 제대로 찍었으니 사소한 일이라고 유야무야 넘어갈 리가 없었음. 어떡하지? 아, 어떡해. 씨발 진짜 어떡해? 주말 내내 침대 위만 구르며 어떡해만 연발했지만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음. 죽으러 가는 사람마냥 출근길에 올라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제노랑 마주침.

 - 인준씨.
 - 악!

 살면서 자기 이름 두자에 그렇게 놀란 적은 없었음. 꽥 소리를 지른 인준이 그날 밤처럼 도주함. 아침이야 운좋게 넘어갔지만 같은 팀인 이상 제노를 피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음. 어떻게 핑계라도 대봐? 저는... 더 이상 사람을 좋아하지 못 하는 병에... 아니, 씨발 그딴 병이 어디있어? 인터넷창 하나 켜놓고 무어라 말할 것인가에 대해 심도있는 고민을 하는데, 전체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제노가 팀장실에 들어가려다 되돌아 나옴.

 - 인준씨, 그래서 대답은 언제해줄 거예요? 계속 나 피할 거예요?
 - ...네?!
 - 이따가 또 물어볼 거예요, 나.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호기심에 두리번 거리는 팀원들을 뒤로한 제노가 문을 닫고 들어가기 무섭게 팀원들이 인준 옆으로 몰려들었음. 방금 팀장님이 하신 말 무슨 뜻이죠?, 인준씨 팀장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둘이 사귀기로 했어요?, 뭐야? 빨리 얘기해봐! 둘러쌓여 가운데 놓인 인준은 식은땀만 흘리며 대답을 회피했음. 인준이 대답을 피하니 확실하다 생각했는지 둘이 비밀연애를 한다는 결론이 남.


 4. 이제노 파워는 실로 대단했음. 사내 아이돌과 같은 존재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점심시간 이후부터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분에 열개씩 혹시 이제노 팀장님하고 사귀는게 사실이냐는 메신저가 쏟아져 옴. 그제서야 넋나간 정신이 돌아왔음. 자기가 누구를 건드렸는지, 그리고 이 사단을 낸게 누구인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나는 ‘이팀장님이랑 사귀는 걔’ 같은 음습한 호칭으로 사원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할 게 분명해... 안돼. 안되고 안돼! 나는 어느 누구의 무엇이 아니야. 이 사단의 막을 내리는 방법은 딱 하나. 이번엔 사원들을 상대로 오해풀기였음. 애당초 헛소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테니 긴가민가 의심하는 사람들의 오해만 풀면 되는 일이었음. 물론 그 전에 제노에게 말하는게 먼저였다. 제노가 혼자 남을때까지 기다리던 인준은 팀원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팀장실로 들어가 문까지 걸어잠궜음.

 - 팀장님.
 - ...방금 문 잠궜어요?
 - 제가 그때는 당황해서 미처 말을 못 드렸는데요, 저는 팀장님 진짜 이만큼도 관심없거든요? 그래서 뭘 어떻게해주셔야 좋아해드리고 그런게 없다구요.
 - .........
 - 솔직히 팀장님.. 좋아요, 완벽해요. 너무 잘생겼고, 능력도 좋고, 성격도 좋은데 돈도 잘 벌잖아요. 사람들이 두어개씩 달고 다니는 하자나 단점도 팀장님이 가지고 있으면 인간적으로 보이고, 멋있어보인단 말이예요.
 - .........
 - 저는 그래서 팀장님이 싫어요. 옆에 붙어있으면 비교 당하거든요. 열등감때문에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거든요?
 - 고작 그런 이유에요?
 - 고작이 아니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안되겠으니까 팀장님이 사람들한테 해명을 좀 해주세요. 팀장님이 아까 이상한 소리 해가지구 회사에 저랑 팀장님 사귄다는 헛소문 났잖아요.

 가볍게 턱을 괴고 있던 제노가 음, 하면서 살짝 눈을 치켜뜨고 인준을 쳐다봄. 글쎄, 나한테 쓸데없는 환상이 큰 거 아닌가. 나, 생각보다 결점도 많고 하자도 많아요. 몰라서 그렇지. 별로 들을 생각이 없는 듯, 인준이 아무튼요! 해명해주셔야 돼요, 아셨죠? 네? 하고는 팀원들이 돌아오기 전에 사무실을 나감. 이정도면 알아들었겠거니 생각하고 안심하고, 별 생각없이 다음날 출근하는데 데면데면한 다른 팀 동기가 엘레베이터에서 물음.

 - 너, 너희팀 팀장이랑 사귄다며.
 - ...어?!
 - 야.

 갑자기 불거진 목소리에 가볍게 인준을 찌른 동기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임. 너 블라인드 깔았냐? 거기에 글 올라왔어. 동기가 먼저 엘레베이터에서 내리고, 그보다 늦게 내려 사무실에 도달한 인준은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감. 블라인드! 깔아놓고 그 존재를 잊어버린 앱이었음. 떨리는 손으로 앱을 켠 인준은 타임라인에 HOT으로 떠오른 글을 눌렀음.

<< BLIND

 HOT
 경영기획팀 왕자 연애한대요
 7층쩌리
 1일

 아 처음 들었을 때 진짜 너무 충격먹어가지고.. 자기 팀원이랑 연애한대요. 아침에 둘이 무슨 은밀한 대화같은거 해가지고 들켰다고 하더라구요... 그거 들은 이후부터 밥맛이 없음.. 아니 도대체 이팀장을 어떻게 꼬신걸까요?

 시간순▽


 
장래희망은퇴사
 그 연애한다는 팀원이 ㅎㅇㅈ? 하... 이팀장... 보는 눈도 없지...
 2018.01.26 좋아요 3 대댓글

 방탕
 사귄 적도 없는데 차인기분 들어서 나 어제오늘 너무 우울함
 2018.01.26 좋아요 33 대댓글

 
이게회사야노예일터야
 팩트는 아니지 않나요?
 2018.01.26 좋아요 6 대댓글
 
노예
 아님. 이거 전무들 귀에까지 들어간 얘기라 다른 팀에서 이팀장한테 물어봤는데 이팀장이 아니란 말 안했대요. 그리고 아침에 먼저 얘기꺼낸 것도 이팀장이라잖아요. 딱히 비밀연애 할 생각이 없으신듯...
 2018.01.26 좋아요 11
 
시다바리
 그 얼굴에 로맨티스트이기까지 하면 어떡해요....
 2018.01.26 좋아요 4

 글은 글자 그대로 ‘HOT’ 그 자체였음.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려옴. 이게 무슨 소리야? 이팀장이 아니란 말을 안 했다고? 내가 어제 그렇게 말을 했는데?! 문을 박차고 나온 인준이 자리에 돌아가 책상을 통통 두드렸음.

 - 여러분들이 무슨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 이팀장님이랑 연애 안 하거든요?
 - 도둑이 훔쳤다고는 안 하지...
 - 진짜로 아니라구요! 이팀장 안 좋아한다구. 안 좋아해. 진짜 저 팀장님한테 관심없거든요? 그러니까 이상한 소문 좀 내지마세요!

 인준이 자리에 앉자마자 회의를 끝낸 제노가 들어옴. 팀장님 저랑 얘기 좀 해요. 다짜고짜 제노 팔을 잡고 팀장실로 들어온 인준이 문을 잠굼. 문은 왜 자꾸 잠궈요? 나랑 여기서 은밀하게 뭐라도 할 생각이예요? 능글대는 목소리에 질색하는 얼굴을 한 인준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음.

 - 팀장님. 제가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왜 팀장님을 안 좋아하는지. 그리고 이상한 소문이 났으니까 해명 해주셨으면 한다구요.
 - 네.
 - 근데 왜 해명 안 하셨어요? 누가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안 하셨다면서요?
 - 난 맞다고도 안 했고, 아니라고도 안 했습니다. 자기들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 그러니까, 왜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대답해서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하게 하시냐구요.
 - 인준씨도 그러잖아요.
 - 제가 언...
 - 보기에 그럴싸해보이니까 이럴 것 같다, 저럴 것 같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재단해서 이래서 난 이제노 팀장이 싫다, 안된다 생각하고 있잖아요.
 - .........
 - 내 눈엔 인준씨도 다른 사람들하고 다를 거 없어요.

 뭔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음. 제노 말이 틀린건 아니니까. 대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실망한다. 저라고 그 보편적인 인간군상에서 벗어나지는 않음. 그렇... 게 마음대로 생각한건 정말 죄송한데요... 그래도, 팀장님 말대로 겉보기엔 완벽해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잖아요... 스멀스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제노가 고개를 주억거렸음. 그럼 오늘부터 다시봐요. 내가 진짜 겉보기에 그럴싸해보이는지. 반박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인준이 작게 네, 하고 대꾸했음.


 5. 집에 돌아온 인준은 침대에 정좌를 틀고 앉음. 진짜 겉보기에 그럴싸해보이는지 보라고? 볼 필요도 없는거 아닌가? 사실 인준도 제노를 좋아했었음. 종종 이제노랑 사귄다면~, 하는 식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치는 일이었음. 상상 속의 제노는 때로 못되고, 소름끼칠정도로 나쁜 사람이 되었지만 현실 속의 이제노는 알면 알수록 더 좋은 사람이었고, 다정했으니까. 나는 그냥 주제파악을 잘하는 것 뿐인데... 그 동안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었나. 다시 보라는 부탁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제노 말에 따라주기로 결심을 하며 면밀히 살피기로 함.

 - 팀장님 안녕하세요~.
 - 네, 지성씨. 날이 많이 춥죠.
 - 날씨가 미친 것 같아요.
 -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 좋은 아침이에요.

 출근길부터 인사세례를 받는 제노가 일일히 대꾸해주며 맞인사를 해줬음. 인준이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하자 제노가 인준과 똑같이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받음. 엘레베이터 구석지에 박혀 제노 뒷통수를 보는 인준은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듦. 남들한텐 좋은 아침이네요, 날씨가 춥네요 하면서 왜 나한테는 아무말도 안해? 심지어 뭐야, 그 표정? 공연히 상한 기분으로 사무실에 돌아와 앉은 인준이 입술을 삐죽거림. 다같이 회의테이블에 앉아 팀회의를 진행하는데, 인준은 가운데 앉은 제노만 힐끔대며 쳐다봄. 손을 들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시계와 셔츠자락이 자꾸 눈에 밟혔음. 이제노가 브레게 찬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브레게병에 걸렸었는지. 제노의 손가락에 끼워진 만년필을 슬쩍 훔쳐본 인준이 어깨를 들썩임. 만년필 쓴다고 따라 샀다가 부러뜨린 펜촉만 몇개야.

 - 인준씨, 너무 티내는 거 아니에요?
 - 네... 네? 뭘요?
 - 아까부터 팀장님만 뚫어지게 보잖아요~. 좋은 건 알겠는데, 일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자고요. 팀장님 얼굴 구멍나겠어.
 - 무, 무슨 제가 언제...!
 - 아니라 그러더니 아니기는 무슨.

 갑작스런 재민의 말에 당황한 인준이 빨개진 얼굴로 언제요, 안 그랬어요, 를 연발했음. 저는 그냥 팀장님이 제가 알던 팀장님하고 얼마나 다른지 보려고! 제 딴엔 진심이라고 꺼내 놓은 말이었지만, 팀원들 눈에는 염장이나 다름없는 말로 들려왔음. 그래요, 그냥 팀장님하고 애인인 팀장님은 다르겠지. 우리 회의중이잖아요? 그 얘기는 팀장님하고 따로 하시던가하세요? 동혁의 배배꼬인 목소리에 인준이 마지못해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음. 금세 회의가 끝나고, 업무에 들어갔지만 인준의 시선은 제노에게서 떠나지 않았음. 말이 좋아 팀장실이지, 유리창 너머로 뭐 하는지 다 보였기 때문에 제노가 무얼 하는지 전부 관찰 할 수가 있었다.

 - 나대리님.
 - 네.
 - 솔직히요... 이팀장님 처음 봤을 때 어떠셨어요?
 - 뭐 어떻고 저떻고가 있나요? 누구든 팀장님 처음 뵀을 때 감상은 거기서 거기지.
 - ...그럼 알고난 후에는요?
 - 첫인상이랑 별반 다를 거 없지 않나? 성격이 이상하길하나... 왜, 사귀어보니까 좀 달라요? 막 취향이 이상하다던가?
 - 팀장님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 아무튼 사귀는 건 아니지만!

 얼결에 제노 쉴드까지 쳐준 인준이 혼자 당황해서 어버버거렸음. 뭘 자꾸 아니래. 자랑하려고 일부러 저러는거 아냐? 궁시렁 거리는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른 척 넘기고 앉은 인준은 재민이 했던 말을 되새겨봄. 취향이 이상하다던가. 진짜 그런 거 아냐? 눈에 안 보이는 결점이면 그런 것 밖에 없지 않겠어? 알고보면 막 엄청 변태라던지... 이상한 성적취향이있다던지... 원래 얌전하게 생긴 사람들이 더 그런다고 하던데.

 - 세상에... 이제노가 변태라니...
 - 내가 언제부터.
 - 아, 놀래라!
 - 저질스러워보여요, 내가?

 언제 점심시간이 됐는지 자리를 비운 사무실에 제노만이 남아있었음. 아니, 아뇨, 그냥 팀장님이 자기 다르게 보라 그래서 혹시 설마 변태일까하고... 우물쭈물, 웅얼웅얼 대는 인준을 보는 제노가 맞은편 의자에 앉음. 변태같아 보이는게 아니면 샌님같아 보이는 거예요? 그 말에 더욱 크게 부정한 인준이 절대! 하고는 쉴틈도 없이 말을 이어붙였음.

 - 그냥, 좀... 팀장님 되게 연애의 정석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교과서같은 연애할 것 같아 보여서요.
 -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랑 연애해봤어요?
 - 그야 상상 속에서... 가 아니라, 상상만 해도 그럴거 같아서 하는 소리에요. 그래서 결점있고 하자있고 이러면 연애를 좀 변태같이 하나 싶어서 그렇게 생각해본거구.
 - 상상 속에서 나랑 해본 연애는 어땠는데요.
 - 엄청 다정하고, 나밖에 모르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눈에 다 보여서 되게 기분 좋은 연애... 라고 상상 할 걸요 사람들이?

 어쩌다보니 제노한테 말려들어 술술 내뱉던 인준이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음. 저는 아니구요. 저는 아니에요. 제가 팀장님 제 스타일 아니라 그랬잖아요? 전 안 그랬어요. 수습이랍시고 둘러대봤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음. 인준씨 나 좋아하죠. 사근한 목소리에 인준이 하, 진짜,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숨을 쉬고는 제노를 봄.

 - 제가 만약에 팀장님 좋아하는거면 뭐 어떻게 하시려구요.
 - 어떻게 해주길 바래요?
 - 참나. 뭘 어떻게 해요? 좋아해줘야죠. 똑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고, 연애하고 그래줘야지 뭘 어떻게 해요?!
 - 그럴까요 그럼?
 - 네! ... 네? 네.. 네?!
 - 좋아해주면 되는 거라면서요. 그렇게하면 되잖아요. 일일히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복잡하고... 그럴 바엔 연애하는게 낫지.
 - 제가, 제가 왜요? 저 팀장님 안 좋아한다니까요? 만약에라니까요!
 - 만약에 내가 좋아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다시금 제노한테 말려든 인준이 턱을 굄. 근데 그게 쉽.. 나요? 좋아해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좋아지는게 아니잖아요? 진지하게 고민하는 인준을 본 제노가 자리에서 일어섬. 그래요? 그럼 말고. 저 대신 오해라고 얘기 좀 해줘요. 나는 사람들이 안 물어보길래. 말려올라간 셔츠자락을 끄집어 내린 제노가 점심 맛있게 먹어요, 하고는 뒤를 돌았음.

 - 잠깐만요! 두번은 물어봐야죠!
 - 내가 왜요. 나 안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두번 묻는 거,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는데.
 - 두번 물어볼 수도 있죠. 뭐 이런걸로 자존심을 세우고 그래요?
 - 보는 거랑 다르다 그랬잖아요, 내가.
 - 쪼잔하시네, 정말.
 - 속도 좁을걸요?
 - 멋있다고 하는 말인 줄 아세요?
 - 또 뭐가 다르게요. 보는 거랑 달리.

 물어본다고 또 열심히 혼자 고민해봄. 쪼잔하고, 속좁고, 자존심 강하고... 그럼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이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겉보기하고는 정말 다르긴 한데...

 - 이래도 열등감 생겨요? 나한테?
 - ...조금?
 - 안됐네. 그럼 식사 맛있게해요.

 무어라 말 붙일 새도 없이 제노가 나감.


 6. 홀로 사무실에 앉은 인준이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았음. 그래, 사실 정말 진심으로 싫었던 적은 없다 이거야. 근데 내가 이제노에 비하면 한참이나 못 한데 어쩌라고? 내가 이상한건지, 거절한게 잘못된건지, 애초에 싫다고 말하면서 유난떤게 그렇게 잘못이었는지 고민하느라 바쁜데 제노는 한번 뒤돌아 간 후부터 찬바람이 불어. 늘 적정선을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자신한테 유독 사무적이고 차가워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예전엔 종종 눈이 마주치면 웃어줬는데 이제는 보고도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고, 인사하면 맞인사가 ‘네’ 한마디 뿐임. 결재받는다고 찾아가서 서류 내밀면 눈도 안 마주침. 속 좁다더니 진짜. 겉으로는 쪼잔하니 어쩌니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섭섭함.

 - 인준씨 팀장님이랑 쫑났어요?
 - 아니요..
 - 팀장님 완전 찬바람 쌩쌩 부는데? 뭐 잘못했죠?
 - 아니라구요... 그리고 팀장님한테 신경 좀 끄세요.
 - 그와중에 자기꺼라고 단속은.

 평소같았으면 씩씩댈 인준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음. 남의 눈에 보일 정도면 대체 얼마나 나한테 차게 구는거야. 섭섭해져서 입술이 댓발 나오는데, 외근 나갔다 돌아온 제노가 업무지시를 내리는게 보임. 귀를 쫑긋대며 훔쳐듣는데 원래는 인준이 하던 일임. 이젠 나랑 마주대기도 싫다 이거야? 꾹꾹 눌러담은 섭섭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음. 탕! 책상을 퉁 치고 일어난 인준이 제노의 뒤를 따라 팀장실로 들어감.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제노가 무슨 일이냐 물으며 자리에 앉았음.

 - 팀장님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 뭐가요.
 - 제가 팀장님을 차기를 했어요, 뭘 했어요. 저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구시냐구요.
 - ... 나 차인거 아니였어요?
 - 저는 팀장님 때문에 신경쓰여서 일도 잘 안돼요. 팀장님이 진짜 싫어서 싫다 그런게 아니라, 나한테 안 어울리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 뿐인데, 그래서 안되겠다고, 열등감 운운 하면서 피한건데... 그런 것도 모르면서 사람한테 차갑게 굴기나 하고.
 - 나 보기랑은 다르다고, 혹시 모르니까 해보자고 했을 때 거절한 건 인준씨에요.
 - 그래서 두번은 물어보라 그랬잖아요.. 두번 물어봤으면 그러자고 했어요.

 무슨 말이야, 그게. 한번 더 물어봐달라.. 뭐 그런 뜻이야? 손등으로 눈가를 쓸어내린 인준이 그걸 꼭 말을 해야 알아요? 팀장님 진짜 성격 이상해요, 하고는 코를 훌쩍임.

 - 좋아해줄게요. 연애할래요?
 - 해줄게요를 해요로 바꾸면 안돼요?
 - ...좋아해요.
 - 뒤에가 빠졌어요.
 - 연애할래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인준이 다시금 코를 훌쩍였음. 팀장님이 저를 더 많이 좋아해야돼요. 그래야 열등감이 안 생길 것 같아요. 버티칼을 내린 제노가 가볍게 인준의 목을 당겨 안았음. 근데 저 아직 팀장님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요. 노력하셔야돼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은 제노가 나 되게 게을러서 노력 할 일에도 노력 안 할 때 많아요. 내가 노력할 수 있게 도와줘야 될텐데, 하자 인준이 그거야 쉽죠, 하며 목덜미 사이에 고개를 묻었음. 저가 이제노의 뜻대로 끌려다닌다는 건 영영 모를 일이었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알듯말듯 애매모호한 이팀장과 거기에 말려든 황주임의 얼렁뚱땅 어쩌고.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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