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스프링이 자신에게 배정된 기숙사 방에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 닉 넬슨은 침대에 앉아 수업 자료를 뒤적여보고 있었다. 그 둘은 이제 1년간 룸메이트로서 함께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닉은 자료의 가혹한 분량에 괴로워하다가, 막 기숙사 방에 들어선 신입생을 보고는 인사를 했다.


"안녕."

"아, 안녕."


검은 머리의 신입생은 종이 박스를 품에 안은 채로 어색하게 서서 인사를 받았다. 닉은 신입생의 가녀린 팔뚝이 종이 박스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버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거 이리 줘. 네가 찰리 스프링이야?"

"응. 우리는...오늘부터 룸메이트인 것 같네."

"맞아. 반갑다."


닉이 찰리의 박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그를 향해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찰리는 조금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반가워."


그리고 찰리는 박스 안의 내용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닉은 자신의 새 룸메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조용하고 상냥해 보였고,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닉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그의 자료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동안 찰리 스프링은 책상 위에 책과 공책, 필기구들을 나란히 늘어 놓고, 아마도 그의 고향 친구들과 함께 찍은 것 같은 사진 액자를 세워 놓고, 몇 벌의 옷을 침대 아래의 수납장에 잘 개어 넣었다. 찰리는 매우 조용하게 움직였는데, 때때로 물건들이 어딘가에 닿으면서 달각거리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닉은 자료들에 시선을 두면서도 어쩐지 종이 너머로 새 룸메이트의 움직임에 신경이 쏠렸다. 찰리는 박스 안의 물건을 모두 정리한 후, 핸드폰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누구와 연락하는 것처럼 한동안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닉은 그가 누구와 연락하는 것일지 추리해 보았다. 그의 부모님, 아니면 액자 속에 있는 고향 친구들, 어쩌면 그의 애인?


"저...."


갑작스럽게 찰리가 입을 열었다. 닉은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응?"

"그런데, 형은 이름이 뭐야? 형 맞지?"

"아, 응. 나는 니컬라스 넬슨이고, 2학년이야. 닉이라고 부르면 돼."


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은 것 같았다. 닉은 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 친구들하고 연락하는데, 생각해보니 룸메이트 이름도 모르는 거야."

"그렇구나. 친구들과 아직도 연락하나 보네?"

"응. 몇 명은 이 대학에 같이 왔고, 다른 몇 명은 다른 지역으로 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친해."


닉은 생각지 못하게 의문의 답을 얻었다. 그리고 닉은 또 하나의 생각지 못한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조용한 줄만 알았던 그의 새 룸메이트는 매우 대화하기 편한 상대였다. 말과 말이 어색하지 않게 잘 이어졌다. 닉이 평소 사귀어왔던 다른 친구들은 빈말로라도 대화가 잘 통한다곤 할 수 없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바보같은 농담이나 몇 개 던지고는 낄낄거리거나,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퍼마실 뿐이었다. 


찰리는 닉과 한동안 대화하다가, 곧 신입생 모임이 있다며 재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닉은 조금 아쉬웠지만, 그게 찰리 스프링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찰리가 나가는 순간 꼼짝없이 다시 그의 수업 자료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찰리는 나가면서 닉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찰리가 나가고, 침묵 속에 혼자 남겨져서, 닉은 찰리의 인사를 계속 생각했다. 희미하게 지어진 미소와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도.


안녕.


닉 넬슨도 그 인사를 돌려주고 싶었다.




첫만남 이후로, 닉과 찰리가 길게 대화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듣는 수업도 겹치는 것이 없고, 찰리는 찰리대로 신입생 생활을 하느라 바쁘고, 닉도 공부와 이런저런 사교 모임들로 항상 바빴다. 그러나 바쁜 것의 정도를 따지자면 닉이 찰리보다 압도적으로 바빴다. 닉은 열두 시 이전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가면, 찰리가 침대에 담요를 두르고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닉은 최대한 숨죽여 찰리의 옆을 지나가면서, 때때로 그의 곱슬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본가에 두고 온 그의 개 넬리를 쓰다듬듯이. 


그 생각을 하면, 닉은 어쩐지 심장이 조이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왜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닉이 자신의 남모를 소망을 마침내 이룬 것은 그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온 캠퍼스가 시험 기간에 돌입하는 시기였다. 닉은 시험 기간에도 도서관에서 밤을 새거나 친구들과 모여서 스터디를 하느라고 방에 잘 붙어있지 않았지만, 찰리는 시험 기간이 되면 도서관에도 가지 않고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레포트도 쓰고 시험 공부도 했다. 닉은 그런 찰리가 신기해서, 언젠가 닉이 기숙사 방을 나서기 전에 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걸기도 했다.


"방에서 공부하면 집중이 돼?"


그러자 찰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평범하게 대꾸했다.


"혼자 하는 게 편해서."

"나는 혼자 하면 모르는 게 너무 많던데. 너는 진짜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아냐. 그냥...붙임성이 없어서 그래."


찰리가 변명했다. 닉은 찰리가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


닉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찰리는 킥킥 웃으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일 거야."


그리고 곧 닉이 나가야 했기 때문에 대화는 금방 중단되었다. 그러나 찰리가 그의 본모습에 비해 너무 자신감이 없다는 생각만은 닉의 내면에 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날도 닉은 도서관에 가기 위해 방을 나서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찰리가 그날따라 아침나절이 될 때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닉은 항상 나갈 때마다 찰리와 인사를 주고받곤 했는데, 그날은 닉이 찰리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못했다.


"찰리?"


닉이 이상한 마음에 찰리의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찰리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앓고 있었다. 닉이 깜짝 놀라서 찰리의 이마에 손등을 대 보았다. 닉은 체온이 높은 편인데도 거기서 분명한 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찰리, 너 아파."

"아니야...."


찰리가 설득력 없는 변명을 했다. 닉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체온계를 찾아 가지고 와서 찰리의 열을 쟀다. 38.5도. 분명히 열이 나고 있었다.


"이것 봐."

"무슨, 그런 걸 갖고 있어?"

"엄마가 준 거야. 찰리, 너 병원에 가야겠다."

"그냥 좀 쉬면 나을 거야."


찰리가 쓸 데 없는 고집을 부렸다. 닉은 환자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닉은 책이 가득 담긴 가방을 내려놓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겼다. 그리고 찰리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 줄게."

"아냐, 신경 쓰지 마."

"너야말로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난 시험도 거의 끝났으니까."


찰리는 더 저항하려고 해 봤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별로 성과는 없었다. 결국 찰리는 꼼짝없이 겉옷을 챙겨입고 병원으로 부축당해야만 했다. 진찰을 받고, 약을 타고, 죽과 이온 음료와 이런 저런 것들을 사서 둘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찰리는 억지로 죽 몇 숟가락을 떠 먹고는 약을 먹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색색거리는 그의 숨결에 열기가 배어 있었다. 닉은 그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닉은 찰리의 옆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때때로 그가 열이 떨어졌는지를 확인했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 겨우 찰리의 열이 내렸다. 잠든 표정도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 


기특한 마음에 찰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닉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기분에 휩싸였다. 이 공간에 오로지 닉과 그의 사랑스러운 룸메이트만이 함께 있었다.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그의 열도, 병도, 고통도, 돌봄도 도움도 모두 닉의 것이었다. 닉만이 그것을 보고 닉만이 그것을 알았다. 찰리가 소중히 간직하는 액자 속의 친구들조차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닉은 찰리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최근에 잘라서 부쩍 짧아진 머리카락이 낯선 감촉으로 닉의 손가락에 안착했다. 그건 넬리를 쓰다듬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남모를 욕망을 이루면서, 닉은 찰리가 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예쁜 빛깔의 눈동자로 닉을 보고, 닉에게 인사를 건네주면 좋겠다고.


안녕.


그러면 닉도 마주 대답할 것이다. 안녕, 찰리 스프링.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속내는 입 안으로 삼킬 것이다. 안녕, 찰리. 보고 싶었어. 네가 눈을 뜨기를 계속 기다렸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후에야, 닉은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는 찰리 스프링을 좋아한다. 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닉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닉의 눈가가 아무도 모르게 조금 젖어들었다. 답변받지 못할 마음이 닉의 내면을 강하게 장악했다. 


찰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닉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눈을 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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