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 고속도로 초입으로 진입하자 빨간 푸조는 거리낄 것 없이 내달렸다. 평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텅텅 비어있었다. 이따금 화물 트럭만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2차선으로 느리게 달리는 거대한 화물 트럭들을 피해 다시 1차선으로 질렀다. 작은 몸체의 푸조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처럼 씩씩대며 엔진을 풀가동 시켰다. 

지민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며 창문을 열자 더운 바람이 순식간에 몰아친다. 하지만 매연과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의 찌든 공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예 에어컨을 꺼버리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갑자기 뚜껑을 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뚜껑 열면 잘 안 닫히니까 웬만하면 열지 마.'

뚜껑 못 여는 컨버터블이라니. 씨 없는 수박이나 앙꼬 없는 찐빵이랑 뭐가 다르단 말야 사기꾼 새끼.

한 모금 길게 빨고 고개만 까딱 돌려 창 밖으로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를 쥔 손을 창 밖으로 걸치고 속도를 조금 줄였다. 이제야 잊어버렸던 운전 감각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때 정국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지민을 돌아봤다. 이제는 정국이 저를 바라보면 지민은 습관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뭐지? 담배연기가 거슬렸나? 창문 열어서 더워졌나? 아까부터 은근하게 호칭 빼고 부르는 걸 눈치챘나? 아님 걍 내가 마음에 안 드나? 


"혼자 피우면 맛있어?"

"왜? 너 담배 피워?"


당연히 담배를 안 피울 거라고 생각했던터라 지민은 정국의 물음에 덜컥 되물었다. 정국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내젓더니 지민이 컵홀더에 끼워 놓은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정국은 담뱃갑에 적힌 각종 경고문구를 줄줄 읽어대더니 쯧쯧 혀를 찼다.


"빨리 죽고 싶으면 그냥 농약을 먹으면 되겠네."

"한꺼번에 죽는 거 보단 서서히 죽는 게 더 스릴 있잖아."

"별."


정국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이리더리 돌려보더니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지민을 따라 제 쪽 창문을 활짝 열었다.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날린다. 정국은 입에 문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생각보다 역하다거나 숨넘어갈 듯한 기침이 터지지도 않았다. 콧구멍 깊숙이 스며든 알싸하고 매캐한 향을 흥미롭게 음미하다 코 끝을 슥슥 문질렀다. 

곁눈질로 정국의 반응을 살피던 지민은 웃음을 참았다. 자기 입으로 애기라고 선언하더니 뭐 저런 나이롱 애기가 다 있어.


"애기가 담배를 피우네?"

"지금은 애기 아니야."

"네가 필요할 때만 애기야?"

"어."


대답하기 무섭게 정국은 다시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썹을 씰룩였다. 지민은 필터까지 다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빨아들이고 창문 밖으로 담배를 튕겨내려다 정국을 불렀다.


"정국아. 그거 다 피우면 이렇게 버려."


지민이 다 피운 담배를 창문 끝에 붙이더니 그대로 손만 툭 놨다. 자연스럽게 창 밖으로 떨궈진 담배꽁초가 바람에 날려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사이드미러로 보였다. 정국은 코웃음을 쳤다.


"담배 버리는 거까지 기술이 필요해?"


정국은 손에 들린 담배를 그대로 창문 밖으로 휙 던졌다. 창 밖으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시 돌아온 꽁초가 차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것도 정국의 무릎위로 툭. 정국은 불에 데인 사람처럼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무릎위로 떨어진 담배를 얼른 주워들었다.


"앗 뜨거!"

"너 차에 불 내면 가만 안 둬."


으름장을 놓는 지민의 말투에 묘하게 의기양양함이 섞였다. 이런 하찮은 짓거리에도 생활의 팁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지민은 정국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어들고 대신 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다시 창문을 닫더니 에어컨을 켰다.


"이게 다 삶의 지혜라니까."


이제 지민은 확실하게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썬더버드

Thunderbird







8. Sucker Plan



한참을 신나게 달리던 차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달릴만 하면 나타나는 구간단속 때문에 더 밟지도 못했다. 현실은 처절할 정도로 영화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미국 영화같은 거 보면 클래식 카 타고 멋들어지게 황야를 달리고 그러던데. 하긴 우리 나라는 황야 같은 것도 없구나. 지민은 그냥 입 닥치고 정속으로 달렸다. 게다가 이 차 더 밟으면 진짜 터질 것 같아. 팔짱을 낀 채 창 밖의 풍경을 응시하던 정국이 스쳐 지나가는 천안 표지판을 보고 문득 중얼거렸다.


"호두과자."

"호두과자? 배고파?"

"어."


1키로만 더 가면 천안휴게소였다. 그러고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긴장해서 배고픈 것도 몰랐던 지민은 그제야 허기를 느꼈다. 지민은 3차로로 차선을 변경하고 천천히 휴게소로 진입했다.

주차를 하고 정국에게 지폐를 건넸다.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와. 난 화장실 다녀올게. 차 키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화장실로 향하는 지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국은 휴게소 푸드 코너로 향했다. 점점 가까워 질수록 달콤한 호두과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국은 코를 킁킁 거리며 호두과자 가판대 앞에 서서 눈을 빛냈다.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화장실에서 나온 지민은 파라솔 아래 앉아있는 정국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가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테이블 위에 뭔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거 다 뭐야?"

"호두과자."

"얼마치 샀어?"

"오만원."

"오만원???"


살다가 호두과자 오만원치는 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관광버스 단체 손님들도 나눠 먹겠어. 지민은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호두과자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어?"

"먹고 싶은 거 사라며, 형이."

"다른 건 안 샀어?"


정국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호두과자로 꽉 찬 입 속에 호두과자 하나를 더 밀어넣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열심히 음식을 씹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민은 어쩔 수 없이 호두과자 하나를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연이어 호두과자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은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벌써?"

"우리 급해. 오늘 저녁까지 부산 도착해야 돼."


지민의 재촉에 정국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양 품에 호두과자 봉지를 끌어 안았다. 앞장서서 걷던 지민은 계단을 내려가려다 잡화 코너 앞에서 멈췄다. 하나에 만원짜리 선글라스. 골라골라 스타일로 가판대 위에 늘어놓아진 선글라스 하나를 집어들어 쓰고 정국을 돌아봤다.


"어때?"


품에 안긴 종이 봉투에서 호두과자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밀어넣던 정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민을 이래 저래 살폈다. 이내 종이 봉투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무심하게 말한다.


"멋부린 사이보그 같네."

"햐. 참 나 어이가 없네. 이거 알이 작아서 그런 거거든."

"진짜 안경 때문인 거 맞아?"

"야. 그럼 네가 한 번 써 봐."


지민은 안경을 벗어 냉큼 정국에 얼굴에 씌웠다. 아무 반항도 없이 정국은 제 얼굴을 내주며 호두과자 씹는 것에만 열중했다. 원래 정국은 먹을 때의 집중력이 대단했다.

선글라스를 씌우고 한 걸음 뒤로 물러 선 지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이거 봐. 너도 외계인 같고, 가 아니라 개 잘생겼네."


재수없어. 

지민은 정국에게 파리눈깔처럼 생긴 선글라스를 억지로 안겼다. 자기꺼는 최대한 멋있고 섹시한 디자인으로 고르겠다는 마음으로 눈에 불을 켜고 가판대를 훑었다. 그때 정국이 선글라스 하나를 집어 지민에게로 쑥 내밀었다. 핑크 틴트 신글라스. 지민은 선글라스를 받아들며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껴."

"핑크색 싫어."

"근데 형이 끼면 멋있을 것 같애."

"...그래?"


'형이 끼면 멋있을 것 같애' 정국이 한 말이 에코처럼 귓바퀴를 울렸다. '멋있을 것 같애' '멋있을 걸' '멋있어' '형 멋있어' 그래 이거야.

계산을 하고 휴게소 계단을 내려오며 지민은 선글라스를 썼다. 차가 빨간색이어서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한 눈에 쏙 들어왔다.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자 금세 좁은 차 안은 호두과자 냄새로 가득 찼다. 


"아 진짜. 무식하게 많이도 샀네."


지민은 투덜대면서 휴게소 옆 주유소로 핸들을 돌렸다. 기름을 충분히 넣고, 티슈와 생수까지 알뜰하게 챙긴 후 고속도로로 합류했다. 이따금씩 정국이 호두과자를 집어 지민의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장난으로 손가락까지 깨물었다가 정국에게 열 손가락을 죄다 깨물릴 뻔 했다.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하고 나서야 정국은 지민의 손을 놓아주었다.

선글라스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구입한 선글라스가 자외선을 얼마나 차단해줄까 싶었지만 최소한 햇빛에 얼굴을 찡그릴 일은 없었다. 빨간색 푸조 앞으로 펼쳐진 기다란 고속도로를 따라 눈부신 햇살이 비쳤다. 눈 앞이 온통 핑크색이었다. 





🚗💨






조금만 더 가면 곧 대전이었다. 이대로 쭉 달리면 세시간 안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산에 도착하면 정국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내일 새벽엔 지민 혼자 배를 탈 작정이었다. 후쿠오카에 아는 형이 살고 있었다. 형 집에서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다가 출국 금지가 풀리자마자 미국이든 어디든 먼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갖고 싶었던 것을 손에 넣을 생각이다. 지민은 썬더버드를 떠올렸다. 삶의 이유라거나 목표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한 것 같다. 지민은 썬더버드에 그런 원대한 의미 같은 건 부여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민이 썬버더드를 알게 된 것도 예전에 우연히 봤던 영화 속 한 장면 때문이었다. 지민은 심지어 그 영화를 직접 본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영화 속 캡처본을 보고 그 차의 이름이 썬더버드 라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그때부터 지민은 그 차가 하늘을 나는 차라고 쭉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민이 봤던 영화속의 그 장면이 사실은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사진이라는 걸 알고 나선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썬더버드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는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이 생기니 사는 게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의미없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의 말미에 문득 정국이 다시 떠올랐다. 나랑 헤어지고 나서 얘는 어떻게 할 작정일까. 설마 진짜 죽겠다는 건 아니겠지. 


"형 비 떨어 지는데?"

"어?"


정국의 목소리에 지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 앞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지민은 재빨리 선글라스를 벗었다. 분명 십분 전 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창문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제법 굵고 거세졌다. 정국은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췄다. 마침 라디오에서 날씨예보를 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부터 폭풍을 동반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순간 정국과 지민의 눈이 마주쳤다. 장마에 고속도로라는 건 듣기만 해도 위험한 조합이었다. 까딱 하다가는 도로위에 그대로 갇히게 될 수도 있었다. 아침에 차를 인수받고 타이어 마모가 제법 심했던 걸 떠올렸다. 


"아냐, 걱정마. 조심하면 돼."


지민이 정국을 안심시키며 속도를 늦추고 와이퍼를 작동했다. 그런데 와이퍼가 꼼짝도 하질 않았다. 지민이 답답한 마음에 연거푸 작동키를 젖혔지만 모터소리만 들리던 와이퍼는 결국 그대로 멈췄다. 

시발 사기꾼 새끼. 나쁜 새끼. 지민은 자신에게 차를 팔아먹은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어느새 하늘에선 바가지로 퍼붓듯 빗물이 떨어졌다. 시야가 흐려져 차선이 제대로 식별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핸들을 꽉 부여잡았다.


"형. 일단 갓길에 잠깐 세워봐."


정국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라디오에선 기다렸다는 듯 오늘부터 시작 된 호우주의보가 이틀 간 계속 되리라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이거 진짜 좆됐다. 지민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 일단 조금이라도 비가 좀 그칠때까지 기다려볼까?"


지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차선을 변경했다.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천재지변으로 계획이 틀어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차가 통제를 벗어나 제 멋대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지민이 부서져라 핸들을 부여잡으며 중심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정국이 보조석 손잡이를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직선으로만 달려야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대각선으로 차가 달리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지민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 위의 수막을 뚫고 타이어가 찢어질 듯 울어댔다. 

한참을 통제를 잃고 폭주하던 푸조가 갓길의 가드벽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폭풍처럼 아찔한 순간이 지나고 이내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핸들에 고개를 쳐박고 있던 지민과 눈을 질끈 감았던 정국이 서서히 눈을 뜨고 서로를 바라봤다.


"설마 우리 지금 죽었냐?"


지민의 물음에 정국이 팔을 뻗어 지민의 볼을 부여잡고 꽉 꼬집었다.


"아야!"

"안 죽었어."


정국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밖으로 나온지 1초만에 온 몸이 빗물에 젖었지만 가드벽 바로 앞에서 멈춘 차의 앞대가리를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순식간에 힘이 쭉 빠졌다.


"괜찮아?"


다시 차에 올라 탄 정국을 보며 지민이 물었다. 정국은 대답 대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갓길에 다시 차를 세우고 비상 깜빡이에 전조등까지 켠 지민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운전을 더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어떡하지?"


지민의 물음에 정국은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켜기 무섭게 도착하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모두 무시한 채 인터넷 창을 켰다. 한참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정국이 지민에게 말했다.


"형 여기서 팔백미터만 더 갈 수 있겠어?"

"팔백미터? 거기에 뭐가 있는데?"

"무인모텔."

"...어?"

"주변에 그거 말곤 아무것도 없어."


안 되는데. 오늘 꼭 부산 도착해야 되는데.

지민이 작은 목소리로 주절거리자 정국이 젖은 옷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다시 출발 하든지."

"뭐?"

"그렇게 꼭 오늘 안으로 부산 가야되는 거면 다시 출발하자고."


가능할까? 이 폭풍을 뚫고 세 시간을 더 달려서 부산에 도착하는 게? 내가 할 수 있을까?


"빨리 결정해."


정국이 뭐든 상관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민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오늘 안으로 부산에 도착하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계획이 어그러지는 걸 떠나서 이대로라면 정말 까딱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의 말대로 비를 피하고 안전할 때 다시 떠나는게 맞았지만 지민은 자꾸 결정을 망설였다. 뭐가 그렇게 겁나기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쉽사리 마음을 먹지 못하는 건지 그런 제 모습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팔백미터라고?"

"어."

"알겠어. 가 보자."

"속도 높이지 말고."

"나도 알아."


뭐든 죽는 것보단 낫겠지. 지민은 다시 시동을 켜고 조심스럽게 엑셀을 밟았다. 간간이 지나다니던 화물차조차 자취를 감춰버린 고속도로 위에서 빨간색 푸조 한대만이 느리게 달리기 시작했다.





🚗💨





갑수는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애송이에게 보기좋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걸 알게 됐다. 지민의 행선지를 파악하면서 비슷한 구간이 몇 번 반복되는 걸 느낀 것이다. 묘하게 눈에 익은 이동 패턴을 훑어보던 갑수는 그게 서울의 시내버스 행선지와 같다는 걸 알아냈다.


"박지민 아주 맹랑하네."


분명 핸드폰으로 위치추적이 된다는 걸 눈치채고 시내버스 어딘가에 핸드폰을 일부러 버려둔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은 아예 핸드폰을 버렸으면 버렸지 자신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되레 역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뭣보다 대부업체의 의뢰대상이 되는 경우는 바로 오늘 하루 도망치는 것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똑똑하게 굴지 못했다. 

박지민이라는 25살 짜리 꼬맹이가 궁금해졌다. 이 애는 명석한 걸까, 교활한 걸까.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갑수의 숨겨뒀던 탐정의 피가 들끓었다.

어떻게든 박지민을 붙잡겠다는 일념으로 갑수는 비장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오늘 오후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보를 듣고 분명 멀리까진 못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오늘 호우주의보가 내려질 것을 알았다면 고속도로를 탄다거나 멀리 이동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약점을 이용할 줄 알 정도로 똑똑한 남자라면, 분명 아직 서울 안에서 머무르고 있을 확률이 크다.

갑수는 비옷을 들고 사무실을 내려왔다.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제일 처음 지민의 위치를 파악한 장소, 허름한 동네로 향했다.





🚗💨





"와씨. 지릴 뻔 했어."


지민이 핸들에서 손을 떼며 눈을 감았다. 정국 역시 시트에 온 몸을 늘어트린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극악의 속도로 거북이처럼 달려 도착한 무인모텔 주차장에 차를 끼워넣고 나서야 둘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힘없이 차에서 내려 가방과 짐을 챙기고 주차장과 방이 연결 된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굳게 닫힌 모텔 방문 앞의 기계에 돈을 넣자 덜컥 소리를 내며 방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보자 정국에 품 안에 나머지 짐을 양손에 든 채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지민이 손에 들고 있던 짐들을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내고 침대위로 몸을 던졌다. 20분 정도 바짝 긴장한 채 운전을 했더니 온 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쳤다. 닫힌 창문 밖으로 빗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정말 저 빗속에서 살아 돌아온 게 용했다.

어지럽게 자수가 놓아진 이불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만 내쉬었다. 따라 들어온 정국이 테이블 위에 짐을 내려놓고 수건을 들었다. 젖은 몸을 씻으려는 듯 욕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지민은 눈을 감았다. 

출발한지 몇 시간만에 처참할 정도로 계획이 틀어졌다. 이래서 지민은 섣불리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당장 몇 시간 앞의 일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니까, 그건 오늘의 저와 정국만 봐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져버린 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지민의 탓도 아니고, 정국의 탓도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될 일이었다면 어떻게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며칠전만 해도 지민은 사장의 돈을 들고 튈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고, 그 길에 전정국이라는 묘한 남자애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애와 동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고 출발하자마자 폭풍우가 쏟아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계획이 틀어져버린 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형 욕실 써."

"지금 꼭 씻어야 돼?"

"나 땀냄새 나는 거 싫어."


욕실에서 나온 정국이 몸을 닦으며 지민에게 말했다. 내 몸에서 땀냄새가 나는데 네가 왜 싫어? 지민은 물으려다 말았다. 아무 의미없는 질문이 될 것이 뻔했다. 침대에서 게으르게 몸을 일으키는 지민을 보더니 정국이 덧붙였다.


"근데 생각해보면 형은 땀냄새 나는 것도 괜찮아."


부산에 도착해서도 지민과 헤어지지 않으려했던 정국의 계획과, 땀냄새를 극도로 싫어했던 성향이 손바닥 뒤집 듯 순식간에 바뀌었다.

인생은 무계획과 미발견, 취향 착오의 연속이다. 






____


전편에서 지민이에게 꼭 재테크 해야 한다며 진지하게 충고해주신 한 독자님의 냉철한 댓글..잊지 않겠읍니다...네 재테크 해서 우리 지민이 건물 하나 올려야죠. 몰입해주셔서 감사해여...(주먹눈물

해외 여행중에도 데이터 써가며 읽어주신 독자님도 감사해여...ㅠ 3ㅠ 피같은 데이터가 아깝지 않을 글이었어야 할텐데 말이에여..

그 외 읽어주신 모든 분들...진짜 감사합니당. 덕분에 힘내서 얼른 다음편 얼른 갖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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