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과 다르게 재료를 모으는 데 시간이 꽤 들었다. 비에도 씻겨 내려가지 않은 피비린내와 토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요정들을 겁에 질리게 했기 때문이다.


요정이란 이름에 걸맞게 밝고 깨끗하며 순수한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수백의 죽음을 부른 이가 접근하자 소스라치게 놀라 사라져 버린 것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면 피 냄새보다도 진한, 그의 타들어가는 우울의 냄새를 맡은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요정들이 무슨 이유로 저를 피하든, 그건 토르가 고려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필요한 것을 취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다.


토르는 숨을 죽이고 같은 자리에서 며칠이나 잠복하며 버텼다. 눈도 깜작 않고 바닥에 엎드려 기다리기를 이틀, 요정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사라졌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푹 젖었던 옷이 바람에 말라 버석거리기를 나흘, 요정들이 안도하며 토르가 숨은 덤불 앞까지 다가와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만 하루를 더 보낸 뒤에야 토르는 요정의 날개에서 떨어진 가루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요정들에 맞서느라 겪어야 했던 인내와 고난의 시간에 비하면 여름의 날개를 구하는 건 스톰 브레이커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이제 화염 드래곤의 뼈만 남았고 그것은 바나헤임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습득해야 했다.


목적을 이루고 초췌해져 궁으로 돌아온 토르를 프레이야가 환대했다. 그러나 토르는 그들이 건네는 축하를 받을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간단한 목욕만 받은 뒤 바나헤임을 뒤로 했다. 잠시 책과 재료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토르는 곧장 아스가르드로 가지 않았다. 자신의 등장이 불러올 어두운 하늘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없는 지금, 아스가르드에는 태양이 떠올라 있을 것이다. 그는 이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아직 백성을 마주할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최소한 아홉 세계의 점검이라는 목적을 이루고 나서야 그들을 대할 면이 설 것만 같았다.


그래서 토르는 그대로 아홉 세계를 돌았다. 바이프로스트의 에너지가 익숙하게 토르를 감쌌고, 그는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그러나 바나헤임과는 다르게 남은 세계는 그를 반기지 않았다.


알프헤임. 빛의 엘프들은 바나헤임의 숲 요정이 그랬던 것처럼 토르에게서 느껴지는 음울한 에너지를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토르가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어도 알았으니 어서 떠나달라며 그를 내몰았다. 토르는 쓸쓸히 알프헤임에서 사라져야 했다.


무스펠헤임. 수르트가 사라진 무스펠헤임은 한층 난폭해진 불의 거인들이 날뛰고 있었다. 토르는 저를 향해 날아드는 불덩이와 공격을 피해가며 화염 드래곤의 뼈를 구했다. 머리 없는 드래곤의 뼈가 덩그러니 황량한 지면에 놓여 있었는데, 토르는 이것이 수르트의 왕관을 구하러 왔을 때 저를 추적하다 머리만 아스가르드로 날아간 드래곤의 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상태가 괜찮은 뼈를 고르자 무스펠헤임에서도 할 일이 없었다.


다음으로 스바르트알프헤임. 이 세계는 이미 몰락해 있기에 발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흙먼지가 나뒹구는 그 땅을 보면, 언젠가의 과거가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기에.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알아, 알아.

-곁에 있거라, 제발. 응?

-미안해.


그리고 마지막 말.


-그를 위해서 한 게 아니야.



그때의 꺼져가는 숨으로 뱉은 마지막 말. 토르의 호흡이 가빠졌다. 고문처럼 펼쳐지는 기억을 억지로 무시하기란 힘들었다. 토르의 힘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눈이 내면에서부터 솟구치는 번개로 퍼렇게 빛났다. 


스바르트알프헤임이 아니면 그가 갈 곳은 딱 한 군데 남아 있었다. 니플헤임과 헬은 토르를 거부했으며, 그의 의지로 문을 열 수도 없었다. 죽은 자의 땅에 산 자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그곳들은 산 자의 땅에서 일어난 일로 흔들리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토르가 갈 곳은 단 한 곳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최후로 돌렸던 장소. 요툰헤임. 


토르는 얼음과 눈의 땅으로 향했다. 뿌옇던 사위가 또렷해지자 희고 푸른 광경이 담겼다. 고요히 내리는 눈이 머리와 어깨에 닿아 녹아내린다.


하지만……



“아무도 없어.”



토르가 중얼거렸다.


요툰헤임은 그가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황량했다. 단단히 얼어붙은 눈과 얼음만이 눈에 들어올 뿐,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없다. 서리거인도, 짐승들도 보이지 않았다. 토르가 몇 걸음 나아갔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유독 컸다. 그가 만든 소리만이 귀를 때린다. 얼음의 궁전마저 확인되지 않자 토르는 혼란스러워졌다.


중첩된 혼란이 서리거인을 절멸케 한 것일까? 혹은 생존자가 에시르의 기척에 숨은 것일까?



“…….”



눈밭을 거닐어도 마른 바람 냄새만 맡아졌으며, 오감을 세워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순간 돌풍이 불어 잔잔하던 바람이 날카롭게 변했다. 토르의 옷자락과 소매를 펄럭이게 한 바람이 어딘가의 얼음 동굴을 통과하며 짐승의 우짖음 소리를 냈다. 토르가 더 진한 입김을 내보냈다.


사납고 흉흉한 소리는 꼭 그의 마음속에 갇힌 비명 같았다. 추위를 무릅쓰고 탐색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토르는 요툰헤임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했다. 어쩌면, 이들은 혼란보다도 제 개입을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토르가 생각했다.


그렇게 토르는 지구와 아스가르드를 제외한 아홉 세계를 돌고 확인하며 미묘한 균열을 조절했다. 마지막으로 균형을 잃어 흔들리는 이드그라실에 힘을 보태 쓰러지는 것을 늦추고 나자 지구의 시간으로 두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토르는 그제야 니다벨리르와 바나헤임에 다시 들러 모아둔 것을 챙겼다.


세계수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은 몹시 고되었다. 두 달 사이 그의 내면은 돌이킬 수 없게 늙어 버린 것만 같았다. 토르의 눈빛은 피로에 젖었고, 표정은 굳어 있었으며, 목소리는 꺼질 것처럼 희미했다. 다만 세계수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쳐 쉬어버린 그의 음성을 들은 것은 왕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온 브룬힐데와 에이트리였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많은 것을 지나온 듯 보이는 토르를 미묘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리하면 그의 눈에 새겨진 시간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처럼. 그의 방랑의 원인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처럼.


하지만 토르는 그들에게 무엇 하나 건네고 싶지 않았다. 추측할 수 있는 작은 단서도 주고 싶지 않았다. 


토르가 먼저 시선을 끊었다. 자연스럽게 하려던 행동은 몹시 티가 났고, 에이트리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아스가르드를 둘러보며 토르가 물었다. 건조하다 못해 갈라지는 낮은 음성이 그의 성대를 흔든다.



“무탈하였나?”

“너무나도요.” 브룬힐데가 대답했다.



다행이로군. 토르는 터진 입술을 혀로 쓸어 축였다. 짧은 관찰이지만 토르는 그의 백성들이 브룬힐데의 지도에 따라 새 터전에 잘 적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달 전보다는 제법 기틀이 갖추어져 있다.



“왕께서 자리를 비웠다는 것만 빼면 말이죠.”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에 브룬힐데의 눈이 세모꼴이 되는 동안, 조심스럽게 토르의 옆으로 다가온 에이트리가 쌓인 물건들을 살폈다. 토르는 기꺼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대장장이가 재료를 자세히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한층 건강해진 혈색의 에이트리가 턱을 쓰다듬었다.



“충분해. 금방이라도 시작할 수 있겠어.”

“그래, 부탁하네.”



토르가 덤덤한 투로 말했다. 매서운 눈초리에도 토르가 반응이 없자 브룬힐데는 노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말을 말자. 그녀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에이트리가 집어 드는 강철 옆, 그보다 수십 배는 많게 쌓인 책들을 바라보았다. 옛 궁전의 도서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어디 작은 마을의 공동 서재 정도는 될 양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다. 발키리가 되는 법 같은 책도 있으면 좋을 텐데. 시간은 많으니 한번 써볼까. 브룬힐데는 괜히 우스운 생각을 하며 긴장을 풀어냈다.



“이 책들은 다 어쩌시려고요?”

“보관하고 읽게 해야지. 꼭 필요한 것이네. 자라나는 아이들과 후세대를 위해.”

“그건 알겠지만, 당장에 놓을 곳이 없지 않습니까.”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창고 같은 거라도 만들어 두었을 텐데요. 브룬힐데가 어깨를 으쓱했다. 검을 쥐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쥐고 안을 탐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발키리들이 교육을 받으며 거듭 듣는 말이었다. 학문적인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나겠군. 그녀가 책의 산을 만족스럽게 흘겼다. 그러나 왕이 해결안이랍시고 내놓은 답이 그녀의 미소를 부쉈다.



“내 집을 사용하게.”


브룬힐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 폐하는요?”

“……나는 이대로 갈 곳이 있네.”

“아, 진짜.”



브룬힐데가 성대하게 욕설을 지껄였다. 망할, 젠장!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턱을 치켜들고 토르를 노려보는 것이다. 검지를 들어 토르의 가슴팍을 사납게 가리키기까지 한다. 토르가 눈을 깜빡였다.



“폐하, 돌아오신지 얼마나 되었죠? 일주일? 하루? 한 시간도 안 됐거든요.”

“…….”

“백성들은 왕을 필요로 해요. 아시잖아요!”



토르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할 말을 정리하려 했다. 세운 계획을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까지 말하지 않아야 할까. 하지만 브룬힐데의 힐난이 그의 사고보다 빨랐다.



“좀. 머무르시라고요. 예?”

“…….”

“폐하.”



브룬힐데의 부름은 숫제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거기다 에이트리까지 브룬힐데를 거들었다. 요정이 두 번 날갯짓해 떨어드린 별가루를 집다 재채기를 할 뻔한 에이트리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토르. 자네의 백성들이 자네를 필요로 해. 음, 자네에게 휴식도 필요해 보이고.”

“……나는.”



나는 쉴 수 없어. 쉬어서는 안 되네. 토르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단호히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그가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을 벌리려 할 때, 건너편에 위치한 누군가의 집에서 어린아이가 뛰어나왔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걸까. 투명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앳되고 순수했다.


토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아이의 눈이, 녹색이었다.


희게 질려가는 아랫입술처럼 토르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사라졌다. 또 비를 불러 백성들을 적시는 건 피해야 한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고, 눈에 힘을 주어 감정의 둑을 쌓았다. 브룬힐데와 에이트리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토르는 목 끝까지 차오른 수많은 것을 참느라 땅을 오래 노려보아야 했다.


하늘이 흐려지기에 또 비가 내리려나 했는데, 그건 아닌 듯하다. 브룬힐데는 스톰 브레이커를 구명줄처럼 움켜쥔 토르와,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불안정한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깟 하늘이 좀 흐리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에게는 왕이 필요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토르가 없는 두 달간 그녀에게 왕의 소재를 물었던 이가 몇이나 되었던지.


나도 몰라.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도 하늘을 바라보고 그녀를 힐끔거리는 백성의 수는 줄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브룬힐데는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토르는 좀 알아야 했다. 그가 그의 백성들에게 진실로 왕이라는 것을.


브룬힐데는 토르가 긍정적인 답을 하길 바라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알겠네. 며칠 머무르도록 하지.”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나온 토르의 목소리는 너무나 젖어 있었다. 부르지 않은 비가 온통 토르에게 쏟아져 그의 모든 것을 적신 것 같았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의 건조함은 온 데 간 데 없다. 오, 이런. 전혀 나아지질 않았잖아. 그녀는 토르가 말을 무르기 전에 냉큼 등을 떠밀었다.



“집을 손봐두었으니 지내기 편하실 겁니다. 침대도 있고요.”



얼른 들어가세요. 브룬힐데는 책을 어떻게 어디로 옮길 거냐는 토르의 말을 모조리 못 들은 체했다.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가세요. 일부러 쌀쌀맞게 대꾸하자 무어라 항변하려던 토르가 그녀의 말대로 오두막을 향한다. 멀어지는 발걸음에도 물기가 줄줄 흘러내린다. 그녀가 책을 쌓아 들며 크게 혀를 찼다.


비는 내리지 않는데, 어째 토르의 상태는 더 심해진 것만 같다. 차도 없는 왕의 모습에 근심이 커졌다. 저나 다른 에시르가 옆에 붙는다 해도 진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해야겠군. 마땅한 사람은 이곳에 없으니. 브룬힐데는 토르의 옆에 딱 달라붙어 걸어 다니던 왕제를 생각했다. 명백했다. 토르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



저까지 그 짜증나는 얼굴이 그리워지려 한다. 코를 문지른 브룬힐데가 혀를 찼다. ……코르그와 미에크를 써야겠어. 은근하게 오두막에 눌러앉으라고 말해야겠군. 그녀는 늘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외계인 하나와 그의 친구를 감시책으로 쓰자 결심했다.


같은 방향을 응시하던 에이트리가 고개를 흔든다.



“완전히 텅 비어버렸군. 저러다가는 큰 일이 날 텐데.”

“그러게나 말이지.”



우리는 그 큰 일이 나지 않도록 어떻게든 막아야 해. 그녀가 세차게 문을 닫고 오두막 안으로 사라지는 토르를 보며 작게 되뇌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는 브룬힐데 또한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르는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내부에 이것저것 가구가 놓여 있었다. 긴 테이블과 소파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가 등을 대고 앉아 우울해했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우연처럼, 혹은 그 때의 그 감정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좁은 거실을 지나면 문이 세 개가 있었다. 토르는 하나씩 문을 밀어젖혀 보았다. 욕실이 하나, 작은 방이 두 개. 한 방에는 브룬힐데의 말처럼 침대가, 옆의 다른 방에는 여전히 벽과 창문만이 있었다.



“방이 두 개? ……쓸데없는 짓을 했군.”



토르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방을 두 개나 붙여둔 것인지. 제게 손님이라도 찾아올 거라 본 것일까? 그럴 리가 없는데. 토르는 침대가 있는 방에 스톰 브레이커를 대충 놓아두고, 간단히 손을 씻었다. 찬물이 가져온 냉기가 손을 얼얼하게 했는데, 더운 물보다 이 편이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손과 물을 바라보던 토르가 옷을 벗었다. 그리고 몸을 씻었다. 손을 씻을 때와 마찬가지로 찬물을 사용해서. 그에게는 몸을 훈훈하게 할 샤워보다 긴장케 할 샤워가 필요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으려니 바나헤임에서 불러냈던 폭우가 떠올랐다. 차갑고, 서늘하게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그 비. 땅 깊은 곳으로 피를 몰고 간 그 비. 토르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손도, 발도, 모든 곳이 멀쩡했다. 변한 곳은 없었다.


토르는 고개를 젖혀 얼굴로 물이 떨어지게 했다. 피부를 두드리는 물줄기가 마음속까지 두드렸다. 물을 맞으며 토르가 눈을 떴다. 눈앞으로 물이 들어찼다가, 얼굴을 타고 그대로 흐른다. 눈물을 흘리는 기분이었다. 온기마저 허락되지 않는 눈물을.


샤워를 마치고 대충 물기를 닦아낸 토르는 브룬힐데가 말한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에이트리가 말한 것처럼 휴식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불가능했다. 혼자만 있어 고요한 오두막의 공기는 그를 밀어내는 것처럼 너무나 답답했고, 푹신한 매트리스는 도리어 가시가 잔뜩 박힌 것처럼 온 몸을 찔러댔다.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또….


태양이 우리를 다시 비출 거야.


환청이 또다시 토르를 스쳐지나갔다. 



“…….”


토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신음하며 눈을 비볐고,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이 벌벌 떨린다. 푸석해진 피부가 서로 닿아 까칠했다. 토르가 천장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목소리는 꿈결처럼 아득하고 갈대에 이는 바람처럼 잔잔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감옥처럼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이 작은 오두막에서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휴식은 불가했다. 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두막 안에 머무르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업이었으므로, 일단 머물러야 했다. 그가 없는 동안 백성들을 돌보았을 발키리의 부탁을 냉정히 떨쳐서는 안 됐다. 


토르는 침실에서 나와 너무나 작아 열 걸음도 안 되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거실을 정확하게 일흔아홉 바퀴나 돌았다. 가능한 한 느리고 천천히. 하지만 여전히 밖이 밝았고,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뚝 멈추어 선 토르가 창을 보았다. 거실의 창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한 커튼이었지만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바람이 새어들어 오고 있을까. 커튼을 응시하고 있으면 그를 부르는 것처럼 살랑거렸다. 토르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빛이 들어온다. 회색의 하늘이어도 밝음은 존재했다. 아, 토르는 그조차 너무나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두텁게 쌓인, 자신이 부른 짙은 구름 너머 존재할 태양을 가늠했다. 그리고 꽉 잠겨 억눌린 말을 속삭였다. 조금 전 들었던 환청에 대한 답이었다.



“이를 의미한 것이었느냐?”



토르가 물었다. 그의 환청에게, 보고픈 이에게, 헛된 약속을 건넨 연인에게. 이제는 없는 이에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자신은 정말 미쳐가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무렵 또 다른 환청이 들렸다. 기억이 만들어낸 로키의 웃음소리가 날아든다. 그 웃음소리는 무척 밝았고, 가벼웠으며, 즐겁게 들렸다. 토르는 로키가 이렇게 웃을 때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았다. 장난이 성공할 때마다 로키는 이렇게 웃었다.


그러나 로키. 이건 진정한 빛이 아니지.


토르는 도로 커튼을 쳤다. 그리고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에서 몸을 돌려, 어둠을 마주 보았다. 희미한 빛은 토르의 등으로만 미끄러졌고 토르의 얼굴과 심장에는 닿지 못했다. 구름을 간신히 빠져나와 땅에 다다른 이 빛은 오롯이 빛이지 않았다. 깊고 깊은 어둠을 비추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반투명하고, 흐리고, 탁한 밝음으로는 토르의 굳은 영혼과 마음을 녹일 수 없었다. 


그늘에 잠겨 토르가 생각했다. 그는 진정으로 태양을 잃었노라고. 로키는 늘 자신을 눈부신 것 바라보듯 보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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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은 마감에 성공하면... 7월 마블 통합 온리전에서 발간됩니다 

여기까지가 72페이지 정도 되는데... 대체 5년후는 언제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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