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나 해

이나 동인 계간지

2018년 12월 제3호






차례


머리말

1부 동인작품


천체투영 외1|최능금

테러리스트 외2|이희

표시줄 외1|윤슬

미성년 외2|연이성


2부 특집


특집 「언어들」 – 매혹되고 매료된


3부 홍보


서브컬쳐 텍스트 매거진 「그라네이드」에 대하여


맺음말






머리말




격조했습니다. 창작동인 ‘이나’의 세 번째 동인지입니다.

저희의 단절들을 이곳에 담았습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오래 멈춰있었는지 모릅니다. 저희는 이전의 저희를 전부 잊어서 스스로 못 알아볼지도 모릅니다. 패기로웠던 과거의 글 앞에서 부끄러워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변화해야만 하는 생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2년 3개월 만의 동인지이고 그만한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어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당연하지만 이곳은 길이 시작하는 장소일 뿐이고.

그저 멀리 가보려는 생각으로 이제 출발하려고 합니다.



2018년 12월

최능금






1부 동인작품






   최능금


빌린 자리에 주저앉아서




천체투영

우리는 망루에 있었고



https://blog.naver.com/alsk456456

https://britg.kr/novel-author/4019/






천체투영




우리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괴물 같다며 장난을 쳤다. 눈이 침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너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고 땀을 흘리고 나면 씻고 싶어 했다.


이곳이 이곳을 배반하는 장소에


혼자 남아있었다. 구석의 조촐한 트리는 자꾸만 빛을 밀어냈다. 이어지던 물소리마저도 끊겼다. 눈을 깜박이면 여기는 세계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라면? 이 별은 지금도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네가 물에 잠겨있는 동안 차를 준비했다. 유자차였다. 이 차는 자기주장이 강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어울린다고, 언젠가의 너는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뚜껑을 조금 늦게 덮었다. 향이 이곳에 퍼지고 만약 네가 나온다면.

마주 웃고 머리를 말리고. 다과회가 시작되겠지. 영원은 가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위기를 믿는 동안만 살아있는 투명한 동석자였다. 겨울은 창밖에서 점잖게 하강하고 있었다. 나는 수건에 손을 닦았다.

너는 추위 같은 건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쓸모없는 일에 더 애착을 느꼈고 밤에는 몇 쪽이라도 책을 읽었다. 별 모양이고 구 모양인 조명 옆에서. 드문드문 반짝이는 일에 대한 건 아니었다. 그건 꿈이거나 동경이거나, 너무 어릴 적의 일이었다.

너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네가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중에도 눈은 오고. 눈은 왔다. 공중에 뜬 것들은 신기했다. 우리는 모여서 진공을 나아가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우주인이 되지 못했다. 당연한 일처럼.

편한 복장을 입고 너는 과자를 집어먹고. 걱정하겠지 앞으로 이어질 밤들을. 그건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들을 것이다. 추위는 어쩔 수 없었고 차는 천천히 줄었다. 우리는 별안간 창밖을 쳐다보고.

그러면 어느새 자리를 뜬 영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무관계한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건 이상했지만 매번 그랬으니까. 눈이 쌓인다면 눈사람을 만들어보고도 싶을 것이다. 발자국을 남기고 싶기도. 그건 정말이지 우리와는 무관계한 일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뭐가 남는지. 그런 걸 고민하다가 결국 다과회는 끝날 것이다. 이 실내는 마음 놓을 만큼 따뜻했고 우리는 아마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서. 그리고 나란히 앉아서 그런 분명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다가.

불을 끄고.

더 밝은 곳에 눈을 두거나.

손을 잡거나.

어깨를 기대고 입을 맞춰도.

눈이 빛처럼 내리고.

공간은, 창 안의.

이제 둘인 장소는.

편하고 조용하게 나아가는.

꾸준히 이곳인 방의.

아직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지속되는 우리가.


멸망하지 않아도 되는 행성에 살았더라면.


문을 열고 네가 나온다. 몸에서 따뜻한 김을 피워 올리고 있다. 콧노래를 부르다가 너는 향기를 눈치 챘는지 이쪽을 바라본다. 자기주장이 강한 차네. 화사하게 웃고 머리를 말리려 드라이기를 켠다.






우리는 망루에 있었고




야수는 죽어가고 있었다.


유령들은 숲에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것이다.


손을 잡아끈 건 모르는 사람이었다.


곧 인류가 이곳에 모여들 거야.


우리는 망루*에서 마지막 신비를 뒤로 했다.


천 년 동안 그들의 시대였고


천 년 동안 둘이서 도망쳐야 했다 그건


시시한 얘기였다.


이윽고 한 명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시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예언자의 말이 맞았어.


단 하나의 슬픔을 남기기 위해


이곳은 공터가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망루에 있었다.


행렬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불이 불을 잡아먹으며 크고 있었다.




* 신이 최초의 인간과 같이 살았다고 여겨지는 도시. 현재는 이라크 지역에 옛터만 남아있다. 정중앙의 묘비에 새겨진 글자는 아직 해독 중에 있다.






   이희



조용히 불을 놓았다




테러리스트

재구성

보모



https://herfie-firean-otld.tumblr.com/






테러리스트




모든 동굴에는 사막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직 자고 있는 시절이다 풀어진 이명은

구름이라는 착각을 믿어 누워있다

다시 진동이 생겼을 때

벽에 붙은 잎들이 마르지 않았길


병실의 경치는

눈을 감으면 비난받았던 광경이었고

고라니는 갈변한 울음을 뱉는다

도시 넘어 사막이 꿈틀거릴 때마다

황사가 불어온다

이 행성은 푸른 별이다


주름진 표정들을 안내했었다

모래 절벽 아래로 순례를 간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골짜기의 이웃들이

내게만 다른 인사법을 가르쳐 주었다

옛날 선주민들과 비슷하게 말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사막을 밟으면

언젠가 태양이 지구를 삼킬 거라는 말들

죄책감은 주인이 사라져 내 것이 되었는데

어쩌면 털갈이일 수 있었다

내가 자란 뒤에 다시 자라서 둥근 몸을 가질 증거라면

풀이 자라나다 말라버렸다


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떨어지는 새들을 목격하러 다닌다

발자국의 테두리를 따라 싹이 튼다

묻는 것에 지쳐 미래를 미리 묻고 왔는데

입은 왜 혼자 있을 때 더 소중해지는지

그런 입을 가려도 왜 피가 나지 않는지


창문에서 환자복이 떨어진다

풀이 자랐다가 죽고 자랐다가 죽었다

아직은 비가 온다

마찰이 전부 기록돼서

모양을 갖추고 있다






재구성




탄산음료에 흐려지는 시야가 당신을 지울까봐

묘비의 익숙한 두께를 탓한지 모른다


덜 짜인 옥상에서 재현된 실족을 조망한다

당신의 좌표가 교차점에 붙어있었는지에 대해

목격을 제외한 소문은 소리가 사라진다는데

시야를 뒤집으며 바닥을 본다


먼지 쌓인 유리 묶음이 녹고 있다

키 작은 사람들의 동공 속엔 안개가 퇴적된 마을

만들어질 굴절은 거주민들의 생업이 된다

블록만 가지게 될 아이들이 태어난다

블록이 흐트러진 모습을 나는 뿌옇다고 말할 수 있다

자라나다 멈추고 자라나다 늙어버리는

그런 자생지에서


사막이 재생되고

어떤 질문도 들려오지 않는 당신의 마지막에

팔이 날개 같았다는 소문을 믿어봤다


첨탑 위의 빛나는 묘비들은

추락은 천사의 몫이라며

당신의 무덤을 나눈 것 같다

캔이 비었고 연습이 끝났다


축축한 눈알을 가지고

여러 곳에 상을 맺는 난쟁이들에게

기대도 스러지지 않는 묘비를 부탁하고

크레인 앞에 서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보모




모닥불을 등지고 나무를 하러 간다고 했다

눈이 내리는 창밖은 도피처가 되었다

입김을 빨아먹는 손이 너무 두꺼워졌다


덜 마른 나무를 땔감으로 줘볼래

젖은 불은 연기를 게워내겠지만 괜찮을 거란다

말을 건 여자는 모닥불에 장갑을 말리고 있다

손끝에 잔불이 묻어있는

어제 유령이 될 수 없었던 여자였다


누구나 입을 막는 경험이 있었겠지

안개는 너무 편리한 것 같아

할 말이 없으면 암전을 찾게 되었다

불은 소리를 빼고 모든 걸 태운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창문을 닫고 열었다


눈이 오는 날에 발자국보다

하늘을 보며 걸어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지

창문을 열자 달이 다시 자라나고

눈이 다시 내리고

건물이 너무 많아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얇은 얼굴들을 찾아 어깨에 쌓으며


몸을 웅크린 채

겨울에 만들어졌음에도 가진 열기에 대해 고민했다

흰 종이를 주워 미간에 갖다 댄다

흰 공간이 시야에 꽉 찼다

녹지 않았다


여자는 이제 손을 말리고

창문을 열었다 닫아도 타들어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당신은 유언을 미리 말한 사람인가요

당신의 심장은 손끝에서 시작되는군요

저는 눈과 재와 연기와 입김을 당신에게서 배웠는데


그렇다면

젖은 장작을 가지고 왔으니

제게 깨끗한 손가락을 주세요

절단면이 울리면 잃어버릴테니까






   윤슬



불꽃도 수면안대를 원한다면, 양보할 수 있을까




표시줄

명함






표시줄




나비와 벌 대신 꽃이 날아다니고, 유독 덥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꿈이었다. 며칠간 불규칙한 수면의 덕을 본 모양이다. 좀 더 기억을 더듬으려는 몸의 바람을 저버린 채 컴퓨터를 켰다. 집에서 직장으로 바뀌는 이 순간은 흐릿한 무언가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볕이 들지 않는 곳이란 썩 마음에 내켰다. 겨드랑이에선 축축한 이끼와도 같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할 엄두를 내진 못 했다. 저번 주에 구매한 습기제거제 통엔 물이 찰박하게 고여 가고 있었고, 제품설명을 다시 읽는 게 작업을 마쳐갈 때의 느낌과 닮아 있었다. 눈을 가리는 머리털을 치우며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기한만 맞추면 되는 게 지역구 기자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단순히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는 일이니 되려 앞마당 기자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날씨나 유행 따위의 기삿거리를 제공하는 게 할당받은 일이였다. 말단의 말단 일을 하는 셈이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 명 중 두 명이 동시에 나가버려서 한동안은 혼자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말도 같이 전달받았다. 세 명이 올린 자료를 한데 모아 수정해서 나오던 지면을 혼자서 맡는다는 게 마치 대단한 출세처럼 느껴졌다. 혼자 올린 자료가 그대로 실린 적은 없었다. 새로운 동료가 다시 오고, 고생했다는 격려에 답을 하지 못했다.

이튿날까지 컴퓨터는 켜져 있었다. 밤새 격무에 시달리거나 한건 아니다. 그저 며칠 동안 전원을 내리지 않을 때가 있을 뿐이다. 작업과 휴식의 간격이 짧거나 잠깐 다른 일을 할 때 그랬다. 오늘은 고집을 부리느라 그랬다. 방을 돌아다니는 파리와의 사투를 끝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머리 위에서 지칠 기색도 보이지 않는 파리에게 오늘도 패배했지만, 잔잔한 소음이 멎으면 이곳의 주인이 바뀔 것만 같은 기분에 쫓기고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어둔 창에서의 한기는 나만 괴롭나보다.

습기제거제 절반은 교체했고, 나머지는 언제 할지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관리보다는 정리가 더 수월하게 느껴졌다. 기억한 곳에 손톱깎이가 놓여 있었고, 손톱을 다듬는 자리는 그저 편하기만 하면 됐다. 으레 식탁에서 하는 이유를 물어올 때면 그렇게 대답했다. 파리의 식사를 치우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더 손톱을 길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판 끝에 닿는 손의 감촉이 사뭇 낯설어졌다. 날이 따뜻해질 때까지도 모니터에 적히고 지워지는 것들은 커서만이 알 일이었다.






명함




엊그제 새로 사귄 친구는 자신을 예언가라고 소개했다. 우리 모두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어제 먹은 저녁 메뉴들을 맞춰나갈 땐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책에서나 볼 수 있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도 하나둘씩 부모님이 데리러 올 거라며 순서를 말할 때에도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다른 아이의 입이 열렸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이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질문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언가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질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곧 약속이라도 한 듯 부모님이 몰려와 아이들을 데려갔다. 대답을 꼭 다음에 해달라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면서 아쉬운 얼굴을 감추지 못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마지막까지 예언가는 남아있었다.

있잖아, 우리 아빠가 그랬는데 예언가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래. 우리 아빠도 만나본 적이 없대! 평소보다도 더 높은 톤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쉬는 시간은 저마다 하나씩 가져온 정보를 나누기 바빴다. 우리 엄마는 예언 같은 건 전부 사기랬어. 어쩌다 한 번 맞았거나 무슨 속임수가 있는 거라고 했어. 반장은 어떻게 생각해? 아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혓바닥이 입천장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에서 혼자 숙제를 했어. 얼빠진 대답이었다.

예언가를 다시 만난 건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으레 모이는 장소에 제일 먼저 와 있었다. 동네 정가운데 어정쩡하게 자리 잡은 작은 정자였고, 오고가기 편해 암묵적으로 굳어진 곳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었고, 예언가는 조금씩 고개를 움직여 지나가는 것들을 보고는 했다. 오늘은 아이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편했던 모임을 파하려 일어나자마자 팔을 붙잡혔다. 예언가의 얼굴은 상당히 경직되어 보였고, 쉬는 시간에 보았던 아이들의 표정과도 겹쳐보였다. 너는 누구야? 예언가의 물음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것과 대답 중 무엇이 빨랐는지 모르겠다. 잡혀있던 손목엔 줄팔찌 하나만이 둘러져 있었다. 이름을 잃어버렸다.






   연이성



“그래도 친구들이랑 천천히 글을 쓰는 일은 즐거워요.”




미성년

디즈니

지중해






미성년




온 나라에 눈이 내리고

너희 집은 하얘지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살았고

사실 한집에 사는 기분이었고

죽은 화분에 숨겨둔 열쇠는 사라지고 없다

물을 자주 주면 안됐는데


너는 죽은 물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며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진다


그런데 유서를 쓴다면

죽기 며칠 전의 글이 가장 아플까

어제처럼 지옥이 잠겨있어서


약하게 묶은 매듭은 손끝에 좋고

그것이 숨의 리본이라면 목을 매달기엔 불편한데


당신이 안 보일 정도의 높은 곳이면

난간이 허들처럼 보였고

언덕과 절벽의 차이가

고작 우리의 경사뿐이었고 피는 기울수록

마음이 저려온다고


절대 놓지 않겠다던 너의 옥상을 생각하면

첫눈이 쌓이지 않았다

차가운 손에는 입김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가 손을 하나씩 모으면

제목이 겹치는 기도가 될 텐데


어느 동네에서는 모든 눈사람이 간밤에 사라졌다 하고


어디는, 눈물이 얼어서

천천히 슬퍼지기 좋은 바닥이다






디즈니




그러나 보물을 찾은 뒤에도

마술과 마법을 구분하지 못했다


열두 시가 되면 문이 닫히고

아직 술래가 한 아이를 찾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두 손 뒤에 숨긴 얼굴이 사라진다


실눈을 뜨자 사람들은 없었다

이 놀이는 해가 저물고

어린 손끝의 술래가 되어

귀신의 긴 머리를 세어주다가


당신이 잠들어 놓친 양들은 악몽 속에서 털이 깎인다


때문에 열두 시가 지나자

새로운 오늘을 사는 사람과

어제를 이어서 사는 사람이 있고

그날 새벽이

우리에게는 하루치의 고백이기만 한 것

당신과의 차이가 고작 하룻밤인 것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도


우리는 잠들기 전에 온갖 것이 무서웠다

특히 구석에 걸려있는 옷들이

꼭 귀신 같아서 저건 머리고 저건 몸이고

저건 정말 귀신이고

사랑이 안 보이는 밤이면

그들이 우리의 옷을

한 번씩 입어본다고 느껴졌다


나는 눈이 나빠서

저 세상에 심장을 두고 나오는 사람을

찾을 수 없기에


너의 시간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나의 밤이고

이곳에 우리 말고 다른 영혼이 있다면






지중해




오랜 기억을 지워서 잠이 늘었다

시간이 느린 도시로 이사를 다녔고

빛은 휘어서 사랑에 늦었다


시계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을 때

우리는 만난다 매일 그때의 모양이 되면

종은 울리고


우리는 말을 배우기 전에

어떤 생각으로 마음을 읽었을까


분수 꼭대기에 동전을 던지며 기다렸다고

그러다 더 값진 소원을 위해

열쇠를 던져서 돌아갈 곳이 사라졌다고

사람에겐 따로

눈물을 참는 근육이 없어서


분수대의 물은

지구 반대편의 슬픔 같다


세상과 세계의 크기가 달라지고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갔는데

바다의 끝에 서있게 되고

사랑에 빠져서

시간이 멈췄던 땅은

이제 발이 닿지 않는다


이제서야 각 도시마다 냄새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해변은 발자국을 남기기에 좋고

슬픈 아이의 문명은 모래성에 그친다

문을 만들기 위해 벽을 허물거나

파도가 오면 문을 잠근 채 사라지는


우리가 파란 지붕 위에서 운 일을

우리의 이유가 우리이기만 한 것을






2부 특집






   특집 「언어들」

- 매혹되고 매료된



* 이곳에서는 각 동인 멤버들이 요사이 가장 심도 있고 애정 있게 탐구하던 언어들에 대해서 다룹니다.

* 어쩌면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는데도 매달려있을지 모릅니다.

*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특집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어쩔 수 없는〕


최능금




것들에게 전도되어서 어떤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모든 것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데, 모든 것은 모든 것이다. 사소한 것의 멸망이 더 큰 범주의 멸망에 소속되는 것을 볼 때 나는 어쩔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멸망 앞에서 개인의 감정 같은 건, 그 감정의 결말 같은 건 너무나도 하잘 것 없었다. 그런 것들을 좇아 계속 글을 썼다. 사라지고 잊혀진 이후엔 이야기마저도 없으니까. 의미도 가치도 없는 어떤 직전을 붙잡아두고 싶었다. 나는 개인이 아닌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겨울에는 많은 것이 자꾸만 반복되고 쉽게 끝나지 않았다. 죽은 것들마저도 그랬다. 나는 단순한 이기심 때문에 천체투영의 인물들을 겨울 속으로 집어넣어버렸는지 모른다. 어차피 끝날 테고 어쩔 수 없이 멸망하겠지만, 그 일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 같아서.

결국 영원이나 불멸 따위를 관측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을 거면서 계속 사용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이 겨울엔 줄곧 그 생각이었다. 가끔 친근했지만 끝내 우리와 무관할 어떤 것을 글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아마 안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원이나 불멸은 이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없을 거라서.






    〔돌연변이〕


이희




눈을 떴다. 뜨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을 떠야했다. 결국 시간이었다. 나와 다르게 흐르는 시간에 내가 사랑했었던 것들이 풍화되고 있었다. 옆에는 다른 얼굴의 내가 잠들어 있다. 웃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명을 하고 있다. 그 변명으로 자신을 유배시키고 있다.

환상은 달콤했다. 깊고 깊은 세상이었지만 괜찮았다. 왕이 되어 결핍을 잊을 수 있었다. 사람일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사랑하게 된 것들과 마주했을 때 나는 매정하지 못했다. 그들이 무의미한 해석 없이 세계를 관통하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상상을 덧씌우는 과정에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지은 환상을 무너트린 절대다수의 왕이 되었다.

환상은 환상이기에 어떤 관계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미 정해져 있던 수순이었다. 어떤 변화도 없이 그 순간에 멈춰있을 곳이었고 결국 변화는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도망쳐 깊은 굴을 파고 그 환상이 주는 행복에 안주를 한다. 하지만 그 행복이 불편한 소수가 있을 것이다.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깨어날 때 단 한 번 볼 눈부신 순간을 위해 깊고 깊은 굴을 판 것이다. 그 커다란 낙차는 잊었던 출생의 경험과 닮아 결핍의 고통을 넘어 다시 발버둥 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판별〕


윤슬




언제부터 그랬을지 추측만 할 뿐이다. 다만, 더욱 세세하게 나눠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마법진〕


연이성




그런데 저는 색칠만 하면 망쳐요. 과학의 날에 글라이더를 만들면 출발선 앞에 서야 하니까, 작년에 경필대회에서는 우수상을 탔어요. 아마도 글자를 쓴다기보다 그리는 친구들이 많아서 빨리 제출한 사람 순으로 준 것 같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말이 느렸고 발음도 안 좋았고 다들 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걸. 그래서 이번에는 상상그리기를 했는데, 저는 밑그림을 누구보다 잘 그렸는데 자꾸 종이가 울어요. 색연필은 안 된대요. 언제 불어펜을 가지고 싶었을 때가 있었고 불어펜은 친구에게 빌려주기 힘들었겠지. 혈액형이 다르니까. 그래도 팔레트에 굳은 물감을 붓으로 쓸면 꼭 화석을 발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전부 물려받았어. 물통에 끼어있는 물때까지. 붓을 몇 번이고 빨아도 흰 구름을 칠할 수 없지만. 누구는 그림에 물이 튀고 물통을 엎지르고 9반 선생님은 말이 없구나. 부럽다. 옛날에는 물감이 귀했대. 아주 먼 옛날에는 연필까지 귀했고. 흙길에 나뭇가지로 한글을 쓰면서 이름을 외웠을 거야. 짚신으로 글씨를 지우고 다시 짧은 문장을 적다가, 밭을 갈러 나가지. 그러다 지우지 못한 글자는? 겨울에 땅이 얼면 이름은? 흰 눈으로 덮어야지. 그러면 눈밭에 쓰면 되겠다. 아침이면 사라질 테니까. 마법 같아. 맞다, 마법 연습하는 건 잘 돼? 마술이야. 옛날에는 마술이나 마법이나 같았을 거야. 흙으로 금을 만들고, 주문을 외우고, 저주를 걸지. 악마를 봉인했을지도 몰라. 몇 평으로 봉인했을까. 좁아서 불편하지 않을까. 저는 마술의 비밀을 궁금해 하지 않고 도리어 마법을 믿어버려요. 고대의 문양을 그리면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아직은 약한 용이 소환되고 다음 층의 열쇠를 거머쥐는. 악당의 사연을 듣고 직접 악당이 되는. 교수님, 그런데 마법진의 구성을 다르게 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언 강 위에서 송곳으로 마법진을 깎으면, 갯벌 위에서 삽으로 마법진을 그리는데 밀물이 차면, 누군가를 묻고서 뼈가 드러날 때까지 마법진을 파내면, 그런데 잘 그리지 못하는 저는요. 어른들 말대로 주문서나 만들어야 할까요. 마법진 실습장의 모래판만 갈다가 졸업하면 어떡해요. 요즘 조교는 경력으로 안 쳐주는걸. 논문을 쓰고 있기는 한데, 마법진 발동체와 발동장 구성에 따른 효율 실험 같은 걸 누가 좋아할까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천천히 글을 쓰는 일이 즐거워요. 곧장 후회할 글이고 전부 작년에 썼던 것뿐이지만 다음 호에는 그만큼 더 새로운 것을 실을 수 있겠지라고. 저번에는 본인 지문을 본떠서 제작한 마법진을 잠든 교수님 이마에 찍어서 정학당한 학생도 있고. 그게 발동했다면 저는 영영 졸업하지 못 할 뻔했어요. 다행이에요. 다행인가.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하고 이렇게 쓰다가 말고. 왜냐하면 친구의 손가락이 잘렸다가, 다시 붙었을 때 이건 비밀이라고 약속했으니까.






3부 홍보






   서브 컬쳐 텍스트 매거진 「그라네이드」에 대하여




https://www.tumblbug.com/granade


결국 이 하이퍼─메카니컬 자본주의 시대에서의 홍보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밤낮 없는 치열한 고민 끝에 저는 구매 욕구 고취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위 주소는 서브컬쳐─텍스트 매거진 「그라네이드」의 텀블벅 프로젝트 주소입니다. 최저금액 15,000원부터 시작해 스티커, 엽서, 투명 부적, 손거울, 핸드메이드 키링까지 받을 수 있는 초호화 셋트 라인업까지. 이 글이 올라갈 12월 31일에는 프로젝트 마감까지 단 3일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결정하시려면 과감해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대체 서로 연고도 없는데 「이나」의 동인지에서 1월 출간 예정인 끝내주는 텍스트 매거진 「그라네이드」의 홍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하시면 절대 후회라는 것을 할 수가 없는 압도적 퀄리티의 텍스트 매거진 「그라네이드」의 텀블벅 프로젝트를 굳이 이곳에서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서브 컬쳐의 팬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는 것에 눈길을 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이번 텍스트 매거진 「그라네이드」의 창간호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글이 실렸기 때문입니다. 원래 작품 해설이 되어야 했을 3부는 그렇기 때문에 홍보로 대체합니다. 똑같은 비평이니까 묻어가려는 심산이냐고 물으신다면 그 말대로입니다. 저 외에도 유수의 저자분들께서 글들을 실었기 때문에 읽으시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동시에 제 얕은 밑천도 만천하에 공개되겠죠.


혹시 오해를 살까봐 덧붙이자면 「그라네이드」가 많이 팔린다고 제게 돌아오는 수익금 같은 것은 한 푼도 없습니다. 이 홍보는 오직 제 명성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쉽지 않은 길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그라네이드」를 응원하기 위해 작성됐습니다.


라고는 적었지만 사실 「그라네이드」는 수익금 측면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저희 「이나」에 있습니다. 저희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까요? 다음 정기 합평 때 이 부분을 의제로 내걸어야겠습니다.


정답을 얻지는 못하겠지요. 저희의 글이 그렇듯 말입니다…….


이 약은 잡숴보셔도 됩니다. 암요.






맺음말




정말 오랜만에 만들어진 동인지입니다. 1호 2호를 만들던 게 엊그제…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너무나도 오래 기다린 기분입니다.

동인 멤버 임지이는 계속된 컨디션 난조로 결국 글을 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빛나는 글들이 많았을 터인데 공개하지 못해 아쉬운 기분이 큽니다. 하루빨리 나아서 전처럼 불멸하는 문학을 토로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동인지에는 저번 합평글에서도 언급했던 '유료 결제선'이 도입되어 있습니다. 그 밑에는 정말이지 무용하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저희의 후기들이 들어있습니다. 뭔가 그럴 듯한 읽을 거리가 더 있지 않을까 생각하시면 분명 배반당하실 겁니다. 그러니 저희를 사랑하고 아끼고 먼 길까지 보살펴주고 싶으신 분들께 결제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지만 돈만 쓰고 싶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래는 감사의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네요. 이번에는 로고도 재탕이고 별다른 비평도 실려있지 않기 때문에.

저희의 감사는 독자 여러분이 독차지하시면 됩니다.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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