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다. 잠든 연청은 갑작스러운 음악 소리에 눈을 떴다. 만물을 굽어 살필 수 있는 푸른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못 위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연청은 군복을 입은 남녀와 똑같이 연분홍 치마의 젊은 낭자들 그리고 각종 악기를 들고 있는 작은 무리를 살폈다.

대관절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연청은 제 큰 몸에 그들이 놀랄까,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물속에 잠긴 긴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움직였지만 어느 누구도 연청의 존재를 알아차리진 못했다.

못 주위는 금색 실로 수놓은 공단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놓인 제단 위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가득히 올려 있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봉헌을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화려한 제사는 처음이었던 지라 연청은 자신도 모르게 물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한 남자가 제단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금색 용이 수놓아진 검은 예복에 황금 허리띠를 메고 있는 남자는 귀한 신분임에 분명했다. 음악이 멈추고 모두가 숨죽이며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깊은 적막 속에서 제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을 감곤 말없이 기도를 올렸다. 범상치 않은 느낌에 연청의 심장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이해할 수 없는 설렘에 연청은 당황했다. 이대로 있다가 심장이 벅차다 못해 터질 것 같아 연청은 가슴께를 쓸었다.

그러다 문득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강렬한 충격이 연청의 온 몸 구석구석 빠르게 번져갔다.

“!”

물보라가 솟아올랐다. 난데없는 물기둥에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중 군복 입은 사내들은 다급히 남자를 에워쌌다.

“폐하!”

누군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폐하, 폐하! 뭣들 하느냐, 속히 폐하를 뫼셔라!”

그러나 남자는 손을 들어올렸다. 소란 피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 어린 시선으로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못을 응시했다.

어느 새 하늘 높이 치솟았던 물보라가 사라졌다. 수많은 물방울이 떨어져 남자의 얼굴을 적셨다. 하지만 남자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의 앞에 푸른빛이 도는 은발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매끄러운 은색 머리칼을 지닌 사람은 남자와 같은 젊고 매끈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노인의 머리칼과 청년의 얼굴을 한 사람, 연청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남자였다. 그는 뺨에 닿은 물기를 닦지도 않은 채 읊조렸다.

“당신은......”

물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듯한 얼굴에 연청은 제 푸른 옷깃을 세차게 쥐었다. 그는 화살 맞은 짐승처럼 비칠대며 가까이 걸어갔다. 놀랐으나 꼿꼿하게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연청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벅찬 감정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떠한 단어도 이 휘몰아치는 마음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결국 연청은 간신히, 한 마디 뱉어보았다.

“상현아.”

남자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청은 차갑게 식은 두 손으로 상현의 손을 움켜잡았다.

“상현아, 아, 상현아.”

가슴이 죄어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연청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구나. 정녕 네가 나를 찾아왔어. 네가 직접, 나를 만나러 와줬어.”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맑은 하늘에 순식간에 구름이 끼었다. 상서롭다 못해 두려운 기후 변화에 사람들은 웅성거리지도 못했다. 연청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었다. 손을 꽉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천 년을 기다렸어! 네가 찾아오겠다고 해서, 죽지도 못했어! 행여 나를 찾아오지 못할까, 떠돌아도 다녔어. 그렇게 천 년이 되었어. 으흑, 흑, 흐으윽......”

강렬한 충격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눈 앞이 희미해지는 걸 느끼며 연청은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상현이 떠날까봐 간신히 손을 다시 뻗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상현의 옷자락을 잡은 채 읊조렸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상현아.”

연청은 한참이고 흐느끼다가 눈을 감았다. 천 년동안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쇠보다도 무거운 한을 연청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연청은 눈물 젖은 얼굴을 한 채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제일 먼저 본 건 장밋빛 햇살이었다. 연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을 바라보았다. 천막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노을의 끝자락이었다. 그제야 연청은 자신이 그만 기절해버렸음을 깨달았다. 가슴이 쿵, 쿵 세차게 뛰었다.

여긴 어디지. 혹시 꿈인가. 간절함이 꿈으로 변해 찾아온 게 아닐까. 생각하는 연청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렇다면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또 눈을 떴을 때 아무도 없는 차가운 물속이라면, 이번에야말로 계속 살아갈 자신이 없을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인기척 소리가 귓등을 긁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들어 올린 연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이고, 폐하.”

쩔쩔매는 늙은 남자를 뒤로 한 채 상현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조용히 연청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현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떼었다.

“물러가거라. 저 이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저 이? 낯선 호칭에 연청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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