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신데렐라 언니 ost - Minor waltz












개 여 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모던보이









“한가롭게 시나 읊고 있고. 오늘은 무슨 바람이냐?”


필교는 자켓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으며 민우의 손에 들려있던 낡은 시집을 뺏어들었다. 해가 중천인 경성의 명치정에 자리 잡은 많고 많은 카페들 중 하나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테라스에 앉아 시를 읽는다. 상상만 해도 이 얼마나 한가로운 풍경인가. 필교는 책을 촤르르 넘길 때마다 풍기는 낡은 종이 냄새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탁자 위에 시집을 올려놓았다. 민우의 앞에 놓인 찻잔에는 커피가 바닥을 보인 채 식어가고 있었다. 그의 옷 구김을 보니 꽤 오랫동안 앉아있었던 것 같아 필교는 웨이트리스에게 커피를 부탁하며 민우에게 물었다.


“너도 한 잔 더 마실 테냐?”

“나는 됐다.”


민우의 말에 필교는 고개를 돌려 웨이트리스에게 손짓을 해보이곤 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른한 눈으로 테라스 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않는 민우는 오늘따라 더 말이 없었다. 늘 함께 왁자지껄 떠들며 경성에 떠도는 온갖 찌라시들에 의미 없이 웃음을 흘리던 민우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필교는 웨이트리스가 갖다 준 커피에 각설탕을 넣고 살살 티스푼으로 저으며 그런 민우를 힐끔 살폈다. 살면서 걱정이라곤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민우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

“글쎄. 시계를 보질 않아서.”

“뭘 했는데. 그 동안.”

“…그냥. 사람 구경?”


그 말을 하며 민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필교를 쳐다봤다. 며칠 새에 푸석해진 것 같은 피부가 눈에 띄어 필교가 저도 모르게 민우의 볼로 손을 뻗으니 움찔 하며 민우의 몸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민우의 볼을 스치고 떨어진 필교의 긴 손가락이 찻잔의 손잡이로 향했다. 민우는 커피를 마시는 필교를 보며 그의 움직임이 참으로 우아하다 생각했다. 말간 얼굴, 그리고 몸에 배어있는 우아함. 필교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분위기는 그랬다. 그를 알기 전, 그에게서 느꼈던 우아함은 여성의 것과는 달랐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항상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를 알고 난 후 그에게서 느낀 것은 부드러운 선 안에 감춰진 남자다움이었지만. 또는 거침.


“그래. 그래서 구경해보니 어때.”

“…….”

“어떠냐니까?”

“어떻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다 똑같더라.”

“…….”

“깃이 빳빳이 선 양복을 입고, 나풀나풀 치마를 휘날리고, 또 구두를 또각거리면서 하하, 호호…. 그렇더라.”

“…우리와?”


필교의 말에 민우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씁쓸해 보이는 것이 제 착각일거라 생각하며 필교는 다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뜨거운 열기가 속을 덮쳐왔다. 날이 더워졌는가. 해가 뜨거워지긴 했지. 필교는 필시 여름이 와 제 속이 이리 끓는 거라 여기며 다시 멍하니 밖으로 시선을 돌린 민우를 쳐다봤다. 

아련하다. 사람에게 아련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민우가 처음이었다. 그의 밝은 얼굴을 볼 때와 달리 아무것도 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을 볼 때면, 필교는 아련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사람이 아련하게 보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민우는 그랬다. 활짝 웃는 얼굴이 부서질 것 같다고도 느껴보았다. 민우는 아주 희한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들어 민우는 이상해졌다. 적어도 필교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제가 알던 민우와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있었다. 일본인 상가가 밀집해있는 명치정과 본정통을 누비며 카페에서 세상살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밤거리를 누비며 술에 취해 비틀 거리고. 돈은 없으나 콧대는 높은 모던걸들로 가득한 백화점에서 서로에게 어울릴법한 모자들을 골라주기도 하고.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과 몰래 비밀 댄스홀에서 댄스를 즐기기도 하며 그리 지내던 민우가. 

그런 민우가 달라져있었다. 


총독부의 수뇌와 관계가 깊은 민우의 할아버지는 경성에서도 소문난 자본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한 소문난 친일파 중 하나였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지낸 양반집이었으며 지방에 평야를 가진 지주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고 그 중 첫째 아들이 민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외아들인 민우에게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였는데, 더 이상한 것은 민우의 어머니마저 민우를 살갑게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엔 그것이 서럽고 부모님의 애정이 고파 더 잘하고 눈에 띄려 노력했지만 민우는 머리가 크면서 깨달았다. 아버지는 사업에 바빠 제게 신경 쓸 겨를이 없고 어머니는 일본 관리들의 사모들과 친분을 쌓느라 바쁜 거구나. 그래서 내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거구나. 물론 그것은 깨달음이라기 보단 포기였다. 이 이상 애정을 갈구해봤자 제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없을 거라는 포기.


그때부터 민우는 모던보이의 삶을 살았다. 전문학교를 나오고 잠시 동경 유학길에도 올랐던 소위 말해 지식인이었지만, 민우는 취직을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조선인은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는다 해도 취직이 힘든 때였다. 부르주아의 후예라 자청하며 문화를 즐기고 향락에 빠져 지내는 민우는 그야 말로 모던보이의 표본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경 유학길에서 만난 필교 또한 그런 모던보이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독립이니 투사니 하는 것들은 딴 나라 얘기였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러니 그 안에서 커온 민우와 필교를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독립은 밑그림조차 없는 백지 같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주 추상적인 것. 그것이 곧 독립이고 해방이었다.



“요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한참을 망설이던 필교가 티 내지 않고 무심하게 툭 말을 던지자 민우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바람 빠진 허무한 웃음이, 그의 얼굴을 더 아련하게 만들었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밝은 햇살이 오히려 그의 얼굴을 음영지게 만들어 어둡게 보였다. 필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 분명하건만. 민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필교는 더욱 그런 민우에게 서운했다. 가장 친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신에게까지 감추는 그 고민과 비밀이 무엇이기에. 그 같은 얼굴을 하고도 아니라 말하는지. 웃음으로 가려지는 얼굴이 아니란 말이다.


“오늘 공연이 있다는데. 황금좌에 같이 갈래?”

“…됐다. 사람 구경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 눈이 뻐근하네. 나 먼저 들어갈게.”


필교가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걸쳐놓은 자켓을 들고 모자를 쓰며 민우는 필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손길마저 기운이 없이 느껴져 필교는 저 멀리 사라지는 민우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민우는 요즘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웃는 얼굴은 날이 거듭될수록 거짓미소로 가득했고 함께 술잔을 부딪치거나 기생집에 드나드는 일도 줄어들었다. 공연을 보자, 댄스홀에 가자 꼬드겨도 민우는 나중으로 미루며 돌아가기에 바빴고 오늘처럼 이렇게 저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불법 마작이라도 하다 많이 잃었는가했지만 민우는 마작 같은 도박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 도대체 말 못할 고민이 무엇이기에 저리 기운 없어하는지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뒤늦은 사춘기도 아니고. 설마 사랑인가. 흠모하는 여인네라도 생긴 걸까. 필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간을 좁히며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민우의 주변엔 배경이 쟁쟁한 규수들이 얼마든지 있었고 그의 어머니가 쌓아놓은 친분 덕에 일본 관리들의 자제들 사이에서도 민우의 얼굴은 알게 모르게 알려져 있었다. 지난봄엔 창경원이나 남산 공원에서 밤 벚꽃놀이를 즐기며 모던걸들을 자청하는 여자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말재간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민우의 주위엔 그를 호시탐탐 노리는 여자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민우에게 그녀들은 그저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알고 지내는 내내 민우가 누군가와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것을, 필교는 본적이 없었다. 뒤에서 몰래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민우의 곁엔 늘 필교가 그림자처럼 함께 있었다. 그런 둘을 두고 동무들은 둘이 연애라도 하는가, 라며 우스갯소리로 농을 던지기도 했다. 그럴 만큼 필교와 민우 사이엔 틈이란 것이 없었다. 뭐든지 같이 하고 함께 나누는 사이였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단 말인가. 이민우에게.


필교는 때때로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지는 민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시선 끝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기에. 늘 함께하던 동무를 잃은 것 같은 서운함으로는 대신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필교의 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널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이고, 그런 널 보며 내가 느끼는 이것은 또 무엇이냐, 민우야.


필교는 유달리 쓰게 느껴지는 커피에 입맛을 다시며 돈을 내곤 카페를 나왔다. 민우가 걸어간 길을 따라 밟으며 필교는 고개를 들어 제 머리 위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을 보곤 눈을 찡그리며 모자를 썼다. 민우의 그늘진 얼굴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필교는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다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땐 그랬다. 우리가 태어난 이 시대가, 이곳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인줄로만 알았다. 




 

*






“야,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이 민우씨.”


재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자리에 앉던 민우는 잠시 멈칫하다 어설프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필교가 집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온 민우의 얼굴에는 이 자리가 몹시 피곤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찾아온 저를 내치지 않고 나온 게 다행이라 여기며 필교는 민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영랑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명월관은 경성에서 손꼽는 요정으로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곳이었으나, 민우와 필교를 비롯한 대자본가의 자제들은 가끔 집안을 등에 업고 한량처럼 이곳에 자리를 잡곤 했다. 그들의 밤엔 술과 고급 음식, 그리고 기생이 빠질 수 없는 것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민우가 저희들과 어울리지 않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며, 뭐 이리 비싸게 구냐 하는 동무들의 원성에 필교는 민우를 찾아갔다. 네가 오지 않으면 널 데리고 오겠다 큰소리를 치고 온 내 체면이 말이 아니라며 민우를 설득하고 나서야 필교는 민우와 함께 나설 수 있었다. 


“한 잔 받지.”

“차를 가져왔어. 술은 됐으니 주스라도….”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야? 요새 정말 이상하네.”


재필이 술을 따르려다 말고 얼굴을 굳히자 어색한 미소를 띠우고 있던 민우의 얼굴도 덩달아 굳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필교와 영준이 애써 웃으며 자기나 한 잔 주라며 잔을 내밀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눈치가 빠른 기생들이 재필의 손에 들려있던 병을 뺏으며 빈 잔을 채우고 살갑게 말을 붙여오자 민우를 빤히 쳐다보던 재필의 눈도 겨우 돌아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성의 떠도는 소문이며 새로 들어서는 카페와 술집에 대한 이야기, 지난밤에 있었던 댄스홀에서의 사건들을 안주거리 삼아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도 민우는 입을 다문 채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필교는 자꾸만 그리로 눈길이 가 말하는 중에도 몇 번씩 민우와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어찌 그리 음식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냐. 핀잔이라도 주고 싶었으나 민우의 얼굴이 갈수록 음울해지니 웃고 있던 필교의 마음도 편치 못했다. 


“이민우.”

“…아, 어어.”

“누구 상이라도 당했냐? 아까부터 낯빛이 영 아니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그럼 신경 쓰지 않게 좀 해주든가. 벙어리가 되었어? 거참 사람 갑갑하게 왜 이런데.”


그런 민우가 신경 쓰이는 건 필교뿐만이 아닌지 재필이 또 다시 민우의 태도를 걸고넘어지자 순식간에 분위기는 다시 날이 서 아슬아슬해졌다. 영준은 재필과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술만 마셨고 필교는 영랑에게 눈치를 주며 기생들을 내보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싸늘한 기류는 좀처럼 뒤바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짧지 않은 침묵 뒤에 먼저 재필의 눈을 피한 건 민우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깊은 한숨에 재필의 눈썹이 꿈틀하는 걸 본 필교는 괜히 민우를 데려왔다 싶었다.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 어느 날이 되었든 마찬가지였을 게다. 지금 민우의 상태라면 언제가 됐든 부딪칠 날이 올 게 뻔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맘에 안 드는데?”

“무슨 소리야.”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니 그러는 것이 아닌가? 뭐 말을 해봐, 어디. 우리랑 어울리는 게 지겨워졌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글쎄.”

“그럼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결국 재필의 목소리가 커지자 술잔에나 던져두었던 민우의 시선이 재필을 향했다. 재필이 내려친 탁자가 흔들거리며 술잔에 든 술이 출렁였다. 민우는 무언가 억누르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결심이 선 듯 눈에 힘을 주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자네들은 지겹지 않은가?”

“무엇이?”

“이 생활 말이야. 인생의 목적도 없고 근본도 없는 이 생활.”

“허, 도대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필교가 하고 싶은 말을 재필이 대신 해주고 있었다. 어이없어 하는 재필의 물음에도 민우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매일 희희낙락하는 동안 어떤 곳에서는, 아니 멀리가지 않고도 바로 옆 북촌에서는 피죽도 겨우 쒀먹으며 하루하루 힘들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네. 같은 조선인인데 이리 다르게 사는 게 신기하지 않아?”

“하하, 이민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신기하네. 계급이란 것은 우리가 이미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들인데, 그로 인한 차이는 당연한 게 아닌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계급차이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도 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어찌 이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거야.”

“…자네 무슨 계몽가라도 될 셈이야?”


민우는 그간 억눌러왔던 것들을 한 번에 터뜨리기라도 하듯 재필뿐만 아니라 필교와 영준까지 번갈아보며 몰아붙일 기세였다. 필교는 익숙지 않은 민우의 모습에 당황하다가도 점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디서 오는 분일까, 이것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 걸까. 민우의 말에? 아니면 그 말을 듣고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지는 나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모던보이 행세나 하며 살 건가?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됐어. 적당히 해. 자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하라고. 듣고 싶지 않아.”

“나는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아. 못 살 것 같네.”

“그래. 알았다고. 신경 끊어줄 테니 어디 그 잘난 인생 열심히 설계해보게.”


재필이 아예 대화를 차단해버리며 돌아앉자 민우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바르르 떨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가 나가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영준은 재필에게 마음을 풀라며 다가갔고 필교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가 그간 왜 자기들을 피하려 했는지는 이제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민우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이민우를 이렇게 만들어놓았다는 건가. 무엇이.


차를 타려던 민우를 겨우 붙잡은 필교가 숨을 몰아쉬자 다행이도 민우는 필교의 손을 내치지 않은 채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필교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말해놓고도 흥분이 가시질 않는지 민우의 상태도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필교 만큼은 저를 이해해주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필교 너는 이해….”

“뭐하는 짓이냐?”

“…….”

“네가 그러는 게 남들 눈에는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 알아?”

“말이 심하잖아.”


저를 위로해주려 붙잡았을 거란 예상과 달리 필교는 오히려 민우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 저와 뜻을 같이 했던 필교가 냉랭한 얼굴로 싸늘한 말을 내뱉는 것이, 민우에게는 나름 상처였다. 시무룩하게 굳어진 얼굴의 민우를 보는 필교의 마음도 편할 리는 없었지만 필교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누구보다도 모던보이이길 자청했던 건 민우가 아니었던가.


“네가 누구냐? 이민우 아니냐. 경성에서 잘 빌어먹고 사는 이가의 장손이 아니냐고. 그런 네가 다른 이들을 욕할 자격이 있어? 우리의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어?”

“…….”

“위선이다. 그거 다 위선이야. 여태껏 잘 먹고 잘 살아놓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면서 네가 손가락질하는 건 모두 위선이야.”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만하자고 친구.”


가장 쟁쟁한 집안의 자제이면서, 그리 호위호식하며 살아왔으면서. 갑자기 돌변해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건 제 자신을 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재필 앞에서 쏘아대던 힘은 어디로 갔는지 늘 필교가 아련하다 생각하던 민우의 얼굴이 서글프게 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금세 차를 타고 가버리는 민우를 보며 필교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큰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무엇이 꼬여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민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월관을 나온 재필을 따라 영준이 그를 달래려 쫓아 나왔지만 필교 역시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픈 마음이 없었다. 이미 버린 술맛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않고, 민우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재필이 먼저 가버리고 남은 영준은 어쩌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저도 갑갑한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얼굴을 찌푸렸다. 복잡한 표정의 필교를 슬쩍 보던 영준이 곁으로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네자 필교의 눈이 힘없이 영준을 향했다.


“민우 말이야.”

“응.”

“이러는 거…. 뭐 때문 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새 북촌 쪽으로 자주 가는 것 같던데.”

“…….”

“넌 뭐 아는 거 없어?”


영준의 말에 필교는 고개를 작게 좌우로 젓다 고개를 숙였다. 북촌 쪽으로 자주 넘어가다니. 왜? 무슨 연유로? 그쪽에 무슨 볼일이 있기에? 더욱 심각해진 필교의 얼굴에 괜히 말한 건가 싶어 머뭇거리던 영준마저 저도 이만 가보겠다며 자리를 뜨자 남은 건 필교뿐이었다. 필교의 머릿속엔 온통 민우의 생각으로 가득 차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이 두통을 사라지게 해줄 사람 또한 민우뿐이기에, 필교는 짧은 한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반드시 네가 이러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그래야겠어.






*






민우는 꽤 이른 시각 집에서 나와 주위를 살핀 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인력거를 잡아 탄 민우의 얼굴이 갈수록 굳어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못한 듯했다. 종로 일대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오르며 난잡하게 얽힌 집들을 둘러보는 민우는 이번이 초행길이 아닌 모양이었다. 익숙하게 길을 찾아들어가는 민우의 뒤를 밟으며, 필교는 민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들키지 않기 위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쫓아가면서도 도대체 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예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설마 남들 몰래 너도 독립운동이라도 하고 있는 게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낮게 웃은 필교는 민우를 따라 걷다 말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여긴 참 높구나. 경성이 이리 생겼구나. 우리의 생각보다 참 좁은 곳이었어.



낮은 담을 가진 조그만 한옥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민우는 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담장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제 몸을 감출만한 곳을 찾았다. 담 너머로 뻗은 나무 그늘 아래 서서, 민우는 한 군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멈춰있었다. 필교는 민우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구석에서 민우와 마찬가지로 담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낡고 조그만 한옥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해보였지만 어느 정도 살림살이 구색을 갖춘 것을 보니 꽤 오랫동안 살아온 곳인 듯했다. 졸졸졸, 약하게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가진 수돗가 근처에는 웬 여인네가 쭈그리고 앉아 양동이에 물을 받고 있었다. 허름하고 낡은 집만큼이나 볼품없어 뵈는 여자의 옷차림은 깡마른 몸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품이 남아도는 한복은 물이 빠져 제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물이 차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어찌 살아왔는지, 그 세월이 흔적이 묻어나듯 고단해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필교는 무언가를 보았다. 민우에게서나 보았던 그 아련함을.


민우는 넋을 놓고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눈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하게까지 느껴져 필교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여자 때문이냐. 그런 거였어? 민우는 그녀가 집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겨우 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며칠 째 반복된다는 것을, 그 전에도 반복되었다는 것을 안 필교는 민우를 따라 세 번째 그 집 앞에 갔을 때 비로소 제 마음을 깨달았다. 민우의 변화에 왜 제가 그리 화가 났는지, 서운함으로 대신할 수 없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필교는 끊임없이 아니라 부정했음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단순히 너를 내 동무로만 생각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달리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필교는 민우의 앞에 나섰다. 제가 이러는 민우를 이해하기 힘들듯, 민우 역시 이러는 저를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처럼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못한다. 이렇게 숨어서 훔쳐보는 것 따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필교야?”

“따라와.”

“어찌…잠깐, 이 손 좀 놓고….”

“잔말 말고 따라와.”     


여전히 집 앞을 서성이던 민우의 앞에 나타나 다짜고짜 손목을 잡고 이끄는 필교에게 당황한 듯 민우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얼떨떨해 했다. 가파른 길을 빠르게 내려가는 필교를 따라가기 벅찬지 민우는 제 손목을 쥔 필교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쥐며 앞만 보고 걷던 필교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필교 역시 숨이 찼는지 고르지 못한 숨을 진정시키며 민우를 돌아봤다. 복잡한 얼굴의 민우는 필교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필교와 눈을 마주하다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아련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물에 젖을까 필교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얼굴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을 손가락으로 훑어주며 필교는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그리곤 민우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어서 다 말해봐.





“한 잔 들어.”

“됐다. 네가 제대로 말을 하기 전까진 멀쩡한 정신으로 있을란다.”

“내가 뭐 엄청난 선언이라도 할 것 같아서 그래? 그러지 말고 같이 한 잔 하지.”


안국동 근처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민우와 필교는 마주앉았다. 찌그러진 막걸릿잔을 내미는 민우의 손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잔을 받아든 필교는 묵직한 놋쇠주전자에 담긴 뿌연 막걸리가 한가득 채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무 말 없이 민우와 그곳을 내려와 한 발자국 거리를 두고 뒤에서 걸으면서 필교는 그의 뒷모습을 눈에 새겨 넣었다. 넓고 끝이 동그란 어깨가 힘없이 처져 오늘따라 유난히도 더 작아 보이는지라 필교는 따져 물으려던 것도 잊고 민우를 따라 이 술집까지 온 터였다. 잔도 부딪치지 않고 묵묵히 막걸리를 들이켠 후 민우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지 점점 복잡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필교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너를 이렇게 망설이게 하고 고민스럽게 하는 것이, 정녕 그 여인이냐? 그렇다면 난 정말 억울한데 말이야.


“입을 열 생각을 안 하니 내가 먼저 묻지.”

“무얼.”

“그 여인 때문이냐?”

“…….”

“고작 그 여인 때문에 이러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여인 때문에 네가 요즘 그렇게 이상해진 거냐고. 나와는 어울리지도 않고 매일 사라지는 이유가 고작 계집 때문이었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좀 더 묵직해진 민우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필교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우가 그리 말할수록 필교의 참을성은 점점 더 바닥을 드러냈다. 필교는 잔을 깨끗이 비우고 다시 또 가득 채워 벌컥벌컥 마신 뒤 나무로 된 탁자에 딱,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입가에 흐른 막걸리를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자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술에 속이 타는가, 아니면 너 때문에 속이 타는가.


“어디 그럼 얘기나 좀 들어보자. 게까지 가서 그리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이유가 그럼 뭐냔 말이야.”

“…….”

“말해보라니까?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필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번엔 민우가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주전자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홀로 잔을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던 민우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동안 필교는 그런 민우를 말릴 생각도 않고 그저 부동자세로 민우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민우의 입이 술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마음이 생겼는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열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매우 간단하나 뜻을 종잡기 어려웠지만.


“…어미다.”

“뭐?”

“내…. 어미라고.”


필교는 제 귀를 의심했다. 민우가 지금 무어라 했던가. 어미? 어머니를 말하는 건가? 누굴 어머니라고 말하는 건가. 민우의 어머니 얼굴을 경성에서 모르는 이가 있던가? 기모노를 차려입고 일본 관리 사모들의 모임에 나가 아양과 아부를 일삼는 민우의 어머니를 필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누굴 보고 어머니라 하는 거야, 도대체. 농도 적당히 하라 하려던 필교는 민우의 울 것 같은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을 농으로 던질 만큼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필교가 아는 이민우는. 이윽고 이어지는 말들에, 필교는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삶이 고단하여 그렇지 가만히 지켜보면 네가 보기에도 그 여인이 내 어미라기엔 너무 동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허나 동안이 아니라 실제로 그 여인은 고작 열다섯에 나를 낳았다. 고작 열다섯 말이야. 우리는 그때 무얼 했지? 무얼 하고 있었지? 그 나이에 말이다. 열다섯의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네 눈앞에 있어. 이렇게 말이다.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어린 소녀는 농락당하고 배가 불러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배를 동여매고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단 말이다. 뒤늦게 이를 눈치 챈 사람들이 내가 태어나자마자 그 소녀를 밖으로 내쫓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봇짐 한보따리와 돈 몇 푼이었지. 그렇게 밖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며 그 소녀는 여인이 되었고 제 아들의 얼굴 한번 본 적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그 아들은 그때의 소녀보다 나이를 한참 더 먹고 나서야 여인의 존재를 알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는데. 내가 사는 세상도, 내 존재도 모두 거짓인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응?”

“…….”

“나는 부모님이 내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게 단지 바빠서라고 생각했다. 근데 알고 보니 당연한 거였어. 신경을 쓰지 못한 게 아니라 않았던 거지. 억지로 떠맡은 아들을 누가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싶었겠어. 안 그래?”

“…아버지의 핏줄이 아니란 거야?”

“아니, 핏줄은 섞여있지. 그런데 우습게도 말이다. 난 지금까지 형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왔던 거야.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냐.”


필교는 할 말을 잃었다. 형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니. 그렇다는 건 민우의 아버지가….


“그 여인을 통해 널 낳은 사람이…. 할아버님이란 말이야?”


민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남아있던 모든 것을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할아버지로 알고 산 사람이 사실은 제 어린 어미를 농락하여 추잡한 행동을 일삼은 아버지였고, 아버지라 부르던 이는 사실 큰 형님이었다니. 말만 들어도 머리가 어질한데 당사자인 민우 본인은 이 비밀을 알았을 때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싶어 필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원망하고 서운해 하기만 했다. 변해버린 모습이, 꼭 금방이라도 저를 떠날 것 같아 못된 말로 상처를 주었다. 괜한 오해로 민우를 몰아붙이려 했다. 아픔도 모르고 너를 지나칠 뻔 했구나.


민우가 생모의 존재와 그에 엮인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필교와 무리들과 어울리다 술에 취해 들어온 날, 민우는 인사를 드리려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안방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부모님의 대화에 민우는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제 방으로 돌아와 민우는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사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흐느끼며 눈물을 쏟아냈다. 


재력이 있는 집안의 모던보이들은 부모들의 체면상 없는 자리에 책상이라도 하나 놓고 비빌 곳을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집안에선 일본 관리들에게 제 자식이 자리 하나라도 꿰찰 수 있도록 청탁을 넣기도 했다. 아무리 제게 관심이 없는 부모라 한들, 체면을 중시여기는 이 세계에서 여태껏 한 번도 민우에게 억지로라도 자리에 앉을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여기긴 했었다. 흥청망청 쓰며 모던보이 행세를 하는 아들에게 어찌 저리 눈길 한번 주지 않을까.


‘아버님이 민우한테 회사에 자리 하나 내주라고 했다면서요.’

‘그랬지. 그런 놈이 뭘 할 줄 안다고. 쯧.’

‘그냥 적당히 데리고 있다 일본으로 다시 보내버려요. 어차피 당신한텐 도움이 될 아이가 아니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도움이 되질 못했지. 아버지는 도대체 어쩌자고 그놈을 받아들이신 건지 모르겠어. 핏줄이라 이건가. 아들 둘로는 성에 안 찼는 모양이야. 근데 태어난 셋째 아들이란 녀석이 저렇게 멍청하게 시간이나 때우고 있으니….’


그 후 자세한 이야기는 민우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에서 일하던 할아범으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 알고 있으니 감추지 말고 모두 말해보라는 눈빛을 넌지시 보내니, 할아범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비밀을 안다하여 망나니같이 굴며 날 뛸 위인도 되지 못하니 말해줘요. 민우의 말에 할아범은 그제야 과거의 이야기에 대해 읊었다. 그 이야기가 민우가 지금 필교에게 들려준 모든 것이었다. 지금껏 민우의 아버지로 불려왔던 큰 형님 내외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집안의 골칫거리였는데, 이에 할아버지이자 아버지인 이종현이 민우를 큰형님의 호적에 입적시켜버렸다. 그것이 벌써 이십년도 더 전의 이야기였다.


그 뒤로 어머니에 대한 소식이라곤 북촌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남의 집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며 어렵사리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은 게 전부라는 할아범의 말에 따라, 민우는 사람을 시켜 어머니를 수소문했다.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북촌을 뒤지며 민우는 마침내 여인을 만났다. 담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민우는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란 것을. 그것이 핏줄인가 봅니다.   




“필교야. 나는 정말….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정신 차려. 그러게 많이 마시지도 못하는 놈이….”

“내 어머니는 저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난 그동안 도대체 뭘 하면서 살았을까. 난 아무 것도 몰랐어. 내가 아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야…. 이리 무능력한 사람이라니….”

“정신 좀 차리라니까, 글쎄.”


필교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민우를 부축하여 어떻게든 일으키려 했지만 바닥에 주저앉은 민우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책하듯 울먹이는 민우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잡아 제 어깨 위로 끌어당기며 업은 필교는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걸음을 내딛었다. 땅거미가 진 길에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발끝에서부터 열이 오르고 구레나룻을 타고 땀이 흘렀지만 필교는 중간 중간 자세를 고쳐 업으며 민우를 놓지 않았다. 등에 닿은 온기가 온몸을 타고 퍼졌고, 목덜미에 닿는 민우의 숨결이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필교야.”

“왜.”

“…너는 끝까지 함께해줄 수 있어?”

“무엇을?”

“내가…. 길을 찾을 때까지.”


필교는 대답대신 제 어깨를 타고 늘어진 민우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 역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답답할 뿐이다.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것이 나또한 이렇게 서글프게 느껴지다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인가보다. 





우리가 알던 것이, 알고 있다 생각한 것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길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다행이지. 길을 잃은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다시 길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니냐.

안 그렇냐, 민우야.





나는 너에게 그 길을 같이 찾아보자 말하고 싶었는데.

너는 내게 그럴 기회조차 주질 않는구나.








*







필교는 거친 돌 계단을 오르며 혹여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발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눈이 내린 경성은 고요했다. 흰 눈이 물들인 경성은 모든 이들을, 모든 것들을 다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 필교는 가만히 그런 경성을 내려다보다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 나는 소리가 혼자 걷는 길의 동행이 되어주었다. 담장 높이 쌓인 눈을 보며 하얀 입김을 불던 필교가 한참을 망설이다 곳곳의 나무가 떨어져나간 대문을 두드렸다. 찾아오는 이 없는 이 누추한 곳에 어인일로 손님이 왔는가 싶어 문을 열고 나온 여인의 차림새는 전에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추운 날, 옷 몇 겹을 겹쳐 입고 추위를 버티는 것이 전부인 듯했다. 필교는 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여인에게 살짝 목례를 하며 인사했다. 여인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필교의 말을 기다렸다.


“저는 정 필교라고 합니다.”

“예. 근데 뉘신지….”

“혹 이 민우를 아십니까?”

“글쎄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그럼 이 종현 어르신을 아십니까.”


필교의 입에서 민우의 할아버지, 아니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여인의 얼굴이 굳더니 곧 두려움과 놀람으로 낯빛이 하얀 눈만큼 질려버렸다. 필교가 민우의 집안사람인줄로 안 여인은 허리를 굽혀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인사를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은 추위 때문이 아닌듯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떨게 만들고 두렵게 만드는 것일까. 씁쓸한 미소를 짓던 필교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내밀며 얼굴을 활짝 펴보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종이가방을 받아들자 필교는 열어보라 손짓했고 가방 안의 누빔 옷을 확인하더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에 겹쳐지는 누군가의 얼굴이. 필교를 웃고 싶게도 하고, 울고 싶게도 했다.


참으로.

아드님과 많이 닮았습니다.



“이민우는.”

“…….”

“이 종현 어르신의 막내아들입니다.”

“…….”

“아시겠는지요?”


여인의 눈꼬리가 점점 처지는가 싶더니 금세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여 필교는 울컥 목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곤 코트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종이봉투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가 떠나거든 꼭 네가 전해줘. 부탁해.


“저는 오늘 이것을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

“민우를 대신하여…. 꼭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었습니다.”

“어찌….”

“민우의……. 마지막 부탁이었습니다.”


필교는 그 말을 하며 자꾸만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또 참았다. 울음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눈 밑이 시리고 봉투를 든 손이 떨려왔다. 마지막 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든 여인은 쉽사리 안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열지도 못했다. 필교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겠지만, 필교 역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봉투 안에 든 것들이 저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제 할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교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여인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민우와 그 아련함마저 닮은 그녀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필교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대문 밖을 나와 몇 걸음이나 갔을까, 필교는 다시 몸을 돌려 담 쪽으로 다가섰다. 담 너머의 여인은 여전히 좁은 마당에 서 발이 빨갛게 얼어붙도록 봉투를 든 채 서있었다. 마침내 결심이 선 듯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던 여인은 생전 만져본 적 없는 큰돈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 다시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돈과 함께 들어있는 편지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편지를 꺼내든 그녀는 짧게 쉼 호흡을 한 뒤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어릴 적 종살이를 하며 얻어 배운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그녀는 한 자, 한 자, 소중하게 눈에 담으며 편지를 읽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다 결국 눈물 앞에 무너져 내렸을 때, 필교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필교의 얼굴 역시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등 뒤에서 터지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필교는 잠시 눈을 꼭 감았다 뜨며 걸음을 재촉했다. 발밑의 눈 덮인 경성은 이리도 고요하고 평화로운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너는 아마 그걸 나보다 더 먼저 깨달았던 거겠지. 그래서 홀로 그리 괴로워하다 떠나기로 한 거냐. 나한테 말도 않고. 무심한 놈.



“이럴 거면 그때 말해줄 걸 그랬잖아.”



같이 가자고. 

잡은 손을 놓아주지 말 것을.




필교는 나지막이 읊조리며 그렇게 다시 눈 아래 감춰진 경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녕하신지요. 저는 이 민우라 합니다. 

이렇게 편지로나마 인사를 드리는 저를 용서 하십시오.

당신의 그림자만 밟으며 지켜보다 이제야 나타나는 저를 또한 용서 하십시오.

돈은 결코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 그간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 드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정도인 모양입니다. 


꼭 한번쯤은 그리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어머니. 

아아,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애잔한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한 번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불러본 적 없던 나의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나를 기억하십니까?


당신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어떤 이가 밟고 지나간 자국입니까.

그것이 혹 저 때문이라면 몹시 죄송스럽고, 또 슬픕니다.

저는 당신 생각만으로도 이리 가슴이 아릿하고 눈가가 파르르 떨립니다.


드릴 수 있는 것이, 나를 이곳에 태어나게 한 대가가 고작 이 정도라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부디, 제가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 기억해주십시오.

제 가슴에 품고 간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늘 어디에서나 저는 당신을 지켜볼 것입니다.


너무 슬퍼하진 마십시오.

저는 이제야 제가 있을 곳을 찾은 것뿐이니.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다시 모자의 연으로 만나길 바랍니다. 


우지마세요. 저는 지금 당신 곁에 있습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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