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 갔어, 이제 와도 돼]

카톡 하나가 도착함.

장해경은 문자를 받고 의문스러운 눈을 함. 내일 일정을 소화하려면 미리 지방으로 내려가 있어야 해서 방금 한겸우와 작별하고 나온 상황. 방금 집에서 나온 사람은 자신. 지금 마기연은 회사에 떨어진 불 때문에 야근할 예정이라 집에 없었음. 그러니까 한겸우가 남친이라 지칭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깨닫자 이상하게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낌.

기쁨과 별개로 이상함을 감지함.

한겸우가 마기연한테 반말을 썼나. 화가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존댓말을 쓰기 때문.

도무지 이 카톡이 닿아야 했을 수신인이 누군지 감이 오지 않음. 그러다 순간 팟 하고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감. 늘 석고상 같던 장해경의 얼굴에 실금이 생기더니 빠르게 핸들을 돌려 다시 집으로 감.

차를 아무렇게나 주차하고 단숨에 현관 앞까지 감. 도어록을 해제하려고 하기 전에 빠르게 문이 열리면서 검은 머리통이 현관문 밖으로 나옴. 그 머리 위로 하얀 솜같은 토끼 귀가 달려 있는 게 보임. 장해경과 눈이 마주치자 한겸우의 눈이 커지더니 빠르게 현관문을 닫으려 함.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문틈으로 팔을 밀어 넣은 장해경은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감.

“서, 선배 왜 오셨어요?”

일이 한참 잘못된 사람처럼 한겸우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스러운 기색을 읽은 장해경은 이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 감. 마기연, 장해경 말고 새로운 상대가 생긴 거임. 장해경은 증거를 수집하 듯 집안 곳곳으로 눈을 돌림.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 나란히 놓인 잔 두 개. 그리고 허둥대며 가운을 여미는 한겸우.  

어쩌면 상대가 이 집에 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장해경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감. 유리정원, 화장실, 여러 방들을 긴 다리로 걸어 다님. 그런 장해경의 뒤를 한겸우가 엉거주춤 따라다니며, 장해경의 재킷을 잡아당김.

“저, 선배 내일 일 때문에 미리 가봐야 한다면서요. 왜 왔는데요? 왜 말도 없이 집을 뒤져요? 안 가봐도 되는 거예요?”

어떻게든 내보내려는 한겸우. 순간 장해경의 발이 멈칫함.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한겸우의 가운을 펼치려하자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듯 꽉 잡고 버팀. 이를 악문 장해경이 힘주어 당기자 손이 떨어져나가면서 가운이 열리며 나체가 드러남. 양 허벅지를 조이는 하늘거리는 끈과 목에 달린 리본을 보임. 장해경의 눈이 깨끗한 몸을 휙휙 살펴봄. 이런 상태로 바람 난 상대를 기다렸다는 사실에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려하고 있지만 꼭 붙잡음.

“선배, 사실, 사실 말이에요.”

뭔가 말하려고 손가락을 꿈지럭대는 한겸우의 손 위로 장해경이 손을 겹침.

“겸우야.”

차분하게 부르자 한겸우가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시선을 휙 피함.

“권태기예요? 우리로는 만족이 안 돼요? 아님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장해경은 뚫어지게 얼빠진 얼굴의 한겸우를 응시함. 이 모습을 하고도 어떻게든 모르는 척하려는 한겸우를 보자 조바심이 나려 함.

“기연이까지 알게 해서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지금 말해요. 내 선에서 처리하게요.”

괜히 마기연 귀에 들어가서 도망가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한겸우의 몸을 만졌을 그 상대는 차분하게 처리할 생각임. 야산에 묻든, 바다에 던지든.

“그리고 그 정도는 너도 감당해요.”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것 정도는.

“네? 무슨 말이에요?”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너한테 무르게 구니까 알고도 넘어갈 줄 알았어?”

“무슨 말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똑바로 말해요.”

“남친 갔어, 이제 와도 돼. 네가 나한테 보낸 문자.”

“아…. 그거 기연 선배 놀래키려고 한건데. 그게 와도 돼 챌린지라고 요즘 유행한다고 해서.”

“그럼 그 옷은요?”

“…이벤트요.”

한겸우가 작게 중얼거리며 뺨을 붉힘.

그러니까 장해경이 나가자마자 마기연한테 문자를 보냈다는 거고 이벤트 해주려고 저런 옷을 손수 골라 입고 기다렸다는 소리. 바람 핀 게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는 동시에 기운이 빠짐.

“그래요…….”

“선배, 미안해요. 제가 잘못 보내서.”

딱히 미안할 일은 아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니까. 한겸우가 바람 피운 게 아니니 오히려 다행임. 고개를 젓고 나가려던 장해경. 문득 이벤트용 의상을 입고 서 있는 한겸우를 놓고 가자니 기분이 묘함.

자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색다른 모습을 마기연은 본다는 사실이 가슴에 스치면서 서늘한 통증이 느껴짐. 곧 기연이가 올 테고…… 평범한 연인처럼 침대에서 뒹굴며 까르르 웃다 헐떡일 둘의 모습이 머릿속을 관통함. 언제쯤 한겸우가 저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올까 궁금해짐. 어쩌면 평생 오지 않을지도. 

그것이 자신의 위치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도 한번도 이의제기 하지 못하는 건,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의 무게 때문임. 가슴 한쪽을 짓누르는 불편한 감정이 질투라는 걸 알면서도 장해경은 모른 척 방관함. 아니 방관하려 했음. 그런데 방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감정이 커지고 커져 장해경의 이성을 삼켜버림.

장해경은 순간 몸이 휙 돌려 한겸우에게 달려감. 마르고 더운 양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 넣은 장해경은 곧바로 한겸우를 안아듦. 제 몸에 꼭 맞는 한겸우를 안자 온몸이 전율함. 내 거라고,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러버라고.

“선배, 곧 기연 선배 와요. 기연 선배 올 거라고요!”

“기연이랑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앞에서 붙어먹으면서 나랑 하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어요? 그러면 겸우야 영원히 가르쳐주지 말았어야죠.”

이런 감정. 너로부터 기인한 감정.

“기연이 오면 반납할게요. 그러니까 그 전까지 이 이벤트 내가 받을래요.”

화가 난 말투에 살쩍 겁먹은 한겸우에게 장해경의 손이 다정하게 움직임. 아무리 화가 나고 아파도 함부로 할 수 없음. 몸부림치는 한겸우를 엉덩이에 손을 받침. 순간 한겸우의 입에서 읏 하는 신음이 흘러나옴. 장해경은 손바닥을 찌르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림. 뭔가 싶어 더듬어 보니 토끼 꼬리임. 한겸우가 내내 엉거주춤 걸었던 이유를 알 수 있게 됨. 이런 걸 안에 담고 다닌 것임. 보송하고 꼬리 한쪽에 달린  동그란 고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뽁 뽑아내자 한겸우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물들어가는 걸 보고 입가에 웃음이 걸림. 죽을 듯이 가슴 아픈 이 순간에도 한겸우가 예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듦. 장해경은 자신이 지독한 병에 걸렸다는 걸 깨달음. 한겸우 병. 뭘 해도 화가 나지 않는 병.

"사랑해요."

사색이 된 한겸우의 뺨에 입을 묻으며 중얼거리는 장해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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