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딩동-


“아, 아침부터 누구야.”


민현이형인가? 진영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초봄이었지만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는 배를 벅벅 긁으며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 옆집에 이사 와서 떡 좀 돌리려고...”


떡을 들고 생글거리던 눈 앞의 사람을 보자마자 진영은 얼어붙었다. 진영의 앞에 서 있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너, 너...


“니가 왜 여기 있어!?”

“야, 너야말로 니가 왜 여기를 와!!”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불꽃이 일 것만 같았다.


“진영아, 누구셔?”


옆집 사람의 뒤에서 들려오는 민현의 목소리에 진영이 고개를 빼고는 민현을 바라봤다. 혀, 형. 누구냐면.


“안녕하세요. 저 옆집에 이사온 사람인데 떡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아아, 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학생이세요?”


전부터 알던 사이라도 되는 것마냥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진영이 멍하니 바라봤다. 그럼 떡 잘 먹을게요. 민현이 대휘에게 떡을 받아 인사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옆집 사람 되게 귀엽네. 진영이 너랑 또래인 거 같던데?”

“아, 몰라. 신경꺼.”

“어떻게 그래, 옆집인데. 들어보니까 A대 다닌다던데 너 편입 준비하는 데 아냐?”


민현의 말에 진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짜증나. 이대휘 그 잘난 A대 다니는 거 누가 모르냐고. 짜증나 짜증나. 진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속으로 계속해서 꿍얼거렸다.


“니 와 그라는데?”


옆집에 떡을 돌리겠다며 생글거리며 나간 대휘가 씩씩대며 돌아오자 우진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아, 진짜.


“형은 왜 이 집을 계약해 가지고!”

“니도 좋다 캤잖아.”


갑작스런 대휘의 짜증에 우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몰라. 나 잘래. 더 할 말이 없었는지 대휘는 살짝 누그러진 표정으로 침대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뭘 벌써 자는데.”


대휘의 의중을 잘못 파악한 우진이 실실 웃으며 침대로 따라 들어갔다가 대휘의 짜증과 함께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다. 니는 우째 때려도 아프지도 않네. 밥 좀 많이 무라. 우진은 얻어맞은 등을 손바닥으로 두 어번 쓱쓱 훑더니 대휘의 옆에 마주보고 누워 대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푹 자라.”


우진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눈이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그 잘난 얼굴이 또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배진영 짜증나, 진짜.




진영은 민현이 돌아간 뒤 소파에 앉아 대휘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맘 쯤이었는데. 살짝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던 고2 때의 초봄이었다.

새 학기에 맞춰 전학을 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지역에서의 시작은 진영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교실 안에는 당연히 아는 얼굴 하나 없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눈만 도로록 굴려대고 있을 때였다.


“와, 너 진짜 잘생겼다.”


웬 꼬맹이 같은 애가 진영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너 막 아이돌 연습생이고 그래?


“아닌데.”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답하자 꼬맹이는 진영을 보며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진영의 손에 스르르 손가락을 끼웠다. 생각지도 못한 농밀한 스킨십에 진영이 흠칫 놀라자-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꼬맹이가 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대휘. 너 배진영이지?”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 모습에 진영은 홀린 듯 고개를 더욱 대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대휘는 만족한 듯이 활짝 웃었다. 그 후로 진영은 대휘와 징그럽게도 붙어다녔다. 학교의 그 누구라도 배진영 하면 이대휘, 이대휘 하면 배진영을 떠올릴 정도였다. 대휘는 기본적으로 스킨십을 좋아했고, 진영도 그런 대휘의 스킨십에 딱히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웃어주는 그 작은 얼굴을 보면 귀엽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빠른 연생이라는 이유로 형이라 부르는 점도 그 귀여움을 더했다. 대휘의 눈웃음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허헝, 하고 얼빠진 웃음이 나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거의 한 몸이 되어 1년을 붙어다니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뒤에서 수군대는 아이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휘에 대한 기억의 끝은 늘 그날이었다.


“니네 사귀냐?”


장난 섞인 친구놈의 말에 진영이 어버버하며 답하지 못하자 대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진영이형 좋아하는데, 형은 아닌 거 같애. 그러자 듣고 있던 친구놈들도 야, 배진영 대휘 좀 받아줘라, 라며 괜히 놀려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영은 웃을 수 없었다.


“너 진짜 나 좋아해?”


쉬는 시간 대휘를 옥상으로 끌고 가 묻자 대휘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아니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대휘의 동그란 눈에 뭐라 답해야 할 지 머리 속이 복잡했다. 나는, 나는...


“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뭔데?”

“남자끼리, 그런 거. 나 아니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래, 그럼 그런 거 안 하면 되겠네 이제.”


나쁜 새끼.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돌아선 대휘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후로 대휘는 진영을 투명인간 취급했고, 고3이 되어 다른 반이 되면서 진영도 그 관계를 회복할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어이없게 멀어졌고, 수능이 끝나고 나서야 대휘가 A대에 붙었다는 소식 정도를 들을 수 있었다.

어영부영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마치자마자 군대를 다녀왔다. 그리고 편입 준비를 하면서 진영은 드디어 첫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상대는 한 살 어린 편입학원 같은 반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진도가 안 나가던 차, 어느 날 밤 자기위안을 하며 절정을 맞이한 진영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 아, 대휘야!!”


뒤처리를 하는 진영의 마음은 더없이 심란했다. 아니, 지금 와서 어쩌라고. 그 후 진영은 어플이고 소개팅이고 가리지 않고 대휘와 닮은 사람을 줄곧 찾고 만나왔지만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되는 연애 실패로 절망하던 차에 만난 것이 바로 민현이었다.


“형, 저는 진짜 안 되나 봐요.”


민현은 진영이 어플을 통해 만난 마지막 남자였고, 게다가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소 진영이 찾던 취향과는 정반대의, 키도 크고 성숙한 타입이었다. 아무리 좋아하려 해도 좋은 형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저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나봐요,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는 진영을 밤새 토닥여준 것을 계기로 민현은 어쨌거나 진영의 애인이 될 수 있었다.


“사랑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으니까, 진영아.”


너무 상심하진 마.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민현을 보며 진영은 이 형이라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만나온 게 어느덧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진영도 무신경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지만, 민현 또한 대책없이 긍정적인 인간이라 둘의 관계는 먼 듯 가까운 듯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민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진영으로서는 어찌됐든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운 관계를 오래 유지해온 건 처음이었기에 그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그런 진영의 앞에 대휘가 나타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우진의 토닥임과 함께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대휘는 살짝 부어 통통해진 얼굴로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오늘은 오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미국 국적인 덕에 군대 갈 2년은 벌었지만, 1년 휴학까지 해가며 탱자탱자 놀았던 터라 이번 학기부터는 정신 차리고 학점 관리를 해야 했다. 요새는 1학년부터 취업 준비 한다던데. 대휘는 입을 앙 다물고 몸을 일으켰다.


“형, 나 갔다올게!”


오후 수업이라더니 우진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우진에게 인사를 하며 집을 나서자마자 대휘는 옆집에서 급하게 튀어나온 진영과 마주쳤다.


“아씨, 왜 아침부터 나오고 난리야.”

“그러는 너는 왜 아침부터 나오는데.”

“나올 일이 있으니까 나오지.”

“나도거든?”


문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그때, 대휘의 집 문이 열리며 잠옷 차림으로 우진이 나와 말했다.


“대휘야, 니 폰 놓고 갔다.”


아, 안녕하세요. 우진이 인사하자 진영도 말없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휘에게 폰을 건네준 우진이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진영이 허, 하고 기가 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야, 너 애인이랑 동거하냐?”

“뭔 상관.”


진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대휘가 지하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진영도 그 뒤를 쫓아가며 계속해서 쫑알댔다.


“너 취향 많이 변했다? 너 사투리 극혐했잖아.”

“얼굴 작은 거 좋아하지 않았나?”

“대놓고 둘이 붙어먹는다고 광고하는 거야 뭐야. 잠옷 입고 나와가지고.”


대휘의 무시에도 계속되는 진영의 말에 대휘는 점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저 인간 진짜 왜 저래.


“둘이 어제도 했냐? 했냐고.”

“야!!!!!”


참다참다 소리를 빽 지르자 진영이 순간 멈칫했으나 다시 그 작은 입을 열어 쫑알대기 시작했다.


“와, 나 꼬실 때는 그렇게 형형 거리더니 이젠 야라 그러네.”


진영의 말에 대휘도 이성을 잃고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서 니가 넘어왔냐고. 안 넘어왔잖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소리를 지르는 대휘에게 진지한 표정을 한 진영이 말했다.


“나도 이제 남자 사귀거든?”

“하, 참나.”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휘가 말을 이었다.


“남자 좋아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취향이 감기야? 옆에 있으면 옮게?”

“맞다고.”


하, 허, 거리며 열과 성을 다해 진영을 비웃던 대휘가 진영의 형형한 눈빛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진짜로?”




그 후로 둘은 마주칠 때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꾸준히 말을 섞었다. 하지만 그 둘이 모르는 사이 민현과 우진은 동갑의 남자 애인을 두었다는 공통점 아래 불필요한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진영아, 대휘 애인이랑 같이 산대. 박우진인가? 성격 좋아 보이던데.”


덕분에 알고 싶지 않은 대휘의 애인 이름까지 알아버렸다. 진영은 민현이 하는 말들을 몰라, 알 게 뭐야, 와 같은 말로 대충 넘겨버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진영아, 대휘네랑 더블데이트 어때?”

“커흐흡, 뭐!!??”


진영은 마시던 물을 뱉어낼 정도로 당황했다. 저 형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저러는 거야?


“너 대휘랑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며? 왜 얘기 안 했어.”


진영은 순간 대휘가 어디까지 민현에게 이야기했는지를 걱정했으나, 민현의 태도로 볼 때 그냥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정도만 들은 게 분명했다. 자신이 대휘와 고등학생 때 얼마나 붙어먹었는지를 알았다면 저런 평온한 표정으로 더블데이트 따위의 제안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냥 얼굴만 알던 사이였어.”

“그래도. 이런 인연이 흔한 것도 아닌데. 같이 만나서 A대 얘기도 듣고 그러자. 너도 겸사겸사 바람도 쐬고.”

“아니, 나는...”


허둥대며 민현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진영은 순간 오기가 생겼다. 잠깐, 내가 왜 피해야 돼? 내가 뭐 죄 졌어? 그리고는 잠옷을 입고 대휘야, 하고 부르던 대휘의 새까만 애인을 떠올렸다. 아니, 이대휘는 그 새끼 뭐가 좋아서 그러고 같이 사는 거야? 동거는 나도 아직 못 해봤는데? 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영아?”

“가! 가자, 가! 더블데이트 가자고!”


유례없이 전의에 불타오르는 진영의 모습에 민현은 이번에는 진영이 편입에 성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는 흐뭇한 아빠미소를 지어보였다.




“와, 정말 좋다. 그쵸?”


한강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민현이 말했다.


“좋긴 뭐가 좋아. 오늘 미세먼지 나쁨이래. 초미세먼지도 대박이고.”


진영이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민현이 그런 진영이 귀엽다는 듯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우리 진영이, 초미세먼지도 알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휘는 진영에게만 보이도록 우웩, 하고 구역질 하는 시늉을 했다. 저게 진짜. 진영이 뒤통수를 쓰다듬당하면서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대휘를 노려봤다.


“맞나. 대휘 니 마스크 챙겼나.”

“웅. 근데 형아, 나 배고파요.”


대휘가 평소 쓰는 말투에 20% 정도 애교를 더해 말하자 우진의 광대가 씰룩였다. 진영 또한 우웩, 하며 대휘를 약올리려 했으나, 대휘가 의식적으로 진영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은 탓에 혼자만의 외로운 시위에 그쳤다.


“그럼 가위바위보 해서 먹을 거 사오기 할까요?”


설마 이렇게 걸릴 줄이야. 대휘는 진영과 매점으로 걸어가는 내내 머리를 쓸어넘기며 짜증을 부렸다. 두꺼운 허벅지 탓에 어기적대며 뒤따라오는 진영의 모습이 더없이 꼴보기 싫었다.


“아, 빨리 오라고!”


대휘의 독촉에 진영이 대휘를 한번 노려보더니 거의 달려오다시피 빨리 걸어와 대휘에게 어깨빵을 하고 앞서나갔다. 믿을 수 없는 유치함에 대휘가 허, 하고 헛웃음을 짓고는 진영을 뒤쫓았다.

진영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대휘는 치킨을 들고 애매한 정도로 떨어져서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까까진 서로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유치한 짓만 해댔건만, 갑자기 둘을 둘러싼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대휘는 라면에 집중한 진영의 옆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나이드니까 더 잘생겨졌네. 짜증나게. 대휘는 괜히 바닥에 박힌 돌부리를 신발로 톡톡 건드렸다. 진영 또한 라면에 집중하는 척 하면서 대휘를 흘끔대고 있었다. 지금은 약간 섹시한 느낌도 나네. 진영은 우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조심해.”


휴지를 덧대 라면 용기의 양 끝을 잡은 진영의 모습이 영 불안한지 대휘가 말했다. 물을 과하게 부었는지 라면 국물이 아슬아슬하게 찰랑대고 있었다. 진영은 대답 없이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그런 진영을 한번 흘끔대고는 대휘도 말없이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형, 근데...”


갑작스런 호칭 변경에 놀란 진영이 고개를 번쩍 들어 대휘를 바라봤다.


“그때 진짜 나 안 좋아했어?”


나는 형도 나를. 대휘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앗 뜨거뜨거!!”


라면국물이 넘치면서 진영의 손가락을 침범했다. 무의식적으로 뜨거운 손가락에 입을 가져다대자 이번에는 코가 라면국물에 닿으면서 2차 피해를 야기했다. 앗 뜨거뜨거뜨거!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대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그리고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는 앞서 걸어갔다.

진영과 대휘가 음식을 가지고 돌아오자 슬슬 돗자리엔 빈 맥주캔이 쌓이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자 분위기도 풀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근데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어요?”


민현의 질문에 우진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대학 입학해서 제가 대휘 쫓아다녔죠.”

“오, 그렇구나.”

“대휘가 아직 엄청 잘생긴 첫사랑을 못 잊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더 잘하면 싹 잊겠죠. 우진이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대휘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럼, 대휘는 우진씨가 왜 좋았는데?”

“우진이형이요?”


대휘가 우진을 바라보며 답했다.


“안 그래 보이는데 자상하고 섬세해요. 그리고 저한테 먼저 고백한 것도 진짜 용기있고 멋있어 보였어요.”


제가 첫사랑한테 좀 데여서. 그렇게 말하는 대휘의 눈에 갑자기 독기가 올랐다.


“완전 사람 헷갈리게 해놓고, 나중에 지는 홀랑 도망가 버렸거든요. 진짜 비겁한 새끼...”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한 진영이었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그래도 그 첫사랑 분도 자기 감정을 잘 몰라서, 그니까 당황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지, 진심은 안 그랬을 수도 있죠.”


남의 일이라곤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던 진영이 웬일로 적극적인 답변을 내놓자 민현이 기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진영을 바라봤다. 그 말에 대휘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빈 캔을 내려놓았다.


“배진영씨.”


대휘의 한 마디에 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왜, 왜 저렇게 무게를 잡고.


“만약 그랬대도, 나중에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받은 상처를 생각한다면! 빈 맥주캔을 짜부라뜨리며 주먹으로 돗자리 위를 쿵 내려치는 대휘의 모습에 진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야가 첫사랑 얘기만 나오면 이래요.”


받은 상처가 커가. 눈을 부라리며 진영을 노려보는 대휘의 어깨를 우진이 감싸안았다. 나쁜 새끼, 망할 놈. 대휘가 속사포처럼 욕을 해대자 진영이 민현을 쿡쿡 찔렀다. 우리, 가자.


“아, 우리 노래방 갈까요?”


진영의 쿡쿡을 잘못 해석한 민현이 환하게 웃으며 괜한 제안을 했다. 사색이 된 진영과는 달리 우진과 대휘는 각자 다른 이유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고를 외쳤다.


“이 노래를 사랑하는 우리 대휘에게 바칩니다.”


답지않게 로맨티스트인 우진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멜로망스의 <선물>을 열창했다. 나에게만 준비된 선물 같아. 진영이 알던 대휘는 느끼한 건 죽어도 못 참는 위인이었건만 놀랍게도 노래하는 우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둘을 보고있자 배알이 꼴린 진영이 노래를 예약하는 척 하며 노래 취소를 눌러버렸다.


“아이코, 죄송합니다. 예약을 누른다는 게 그만.”


우진은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누가 봐도 어색한 진영의 제스처에 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고의성을 의심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는 옆에 앉은 대휘의 어깨를 꼭 감싸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영의 눈이 불타듯이 이글거렸다. 그와 함께 진영이 예약한 곡이 시작되었다.


[좋니]

노래. 윤종신


이제 괜찮니 너무 힘들었잖아. 첫 소절이 시작되자마자 술에 취한 대휘가 지랄하네, 라고 중얼거렸다. 진영은 그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하며 노래를 계속했다. 분명 대휘에게 불러주려고 시작한 노래였건만 어느새 자신에게 도취되어 열창하는 진영의 모습에 대휘가 진저리를 쳤다. 저 새끼는 변한 게 없어. 오직 민현만이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번엔 나! 나!”


취한 데다 열까지 받은 대휘를 말릴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진영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치자 그래그래, 니 해라, 하며 우진이 순순히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대휘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번호를 찾고, 바로 노래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와 함께 요란스런 테크노 사운드가 방안을 점령하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대휘가 흐느적대며 좌우로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무정]

노래. 채정안


화면에 떠오른 제목에 민현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거 엄청 옛날 노래 아니야? 대휘 어떻게 아는 거야? 웃음 섞인 민현의 말에도 대휘는 아랑곳않고 목을 가다듬더니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사.랑.이 나를 눈뜨게 했고! 이.별.이 나를 변하게 했어!”


가차없는 발성이었다. 와, 우리 대휘 목소리가 이래 컸나. 우진이 환하게 덧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점점 노래가 진행될 수록 풀린 눈의 대휘는 대놓고 진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일어나 손가락질을 하며 노래를 불러댔다.


“제발! 돌아오길 바랬어. 매일 기다렸었어! 내게 가르쳐준 사.랑.이. 너무 깊어 잊을 수 없어!”


너무 취해 몸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 대휘가 자신에게 엉기자 진영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맞은편에 앉은 우진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얼큰하게 취한 대휘는 악에 바쳐 울라 울라레요를 외치며 노래를 끝내고는 진영의 무릎 위로 장렬히 전사했다. 남은 것은 싸한 분위기와 추가된 서비스 시간뿐이었다.




그 날 이후 민현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민현이 눈치가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라, 뭔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진영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영은 옆집 쪽 벽에 귀를 딱 붙이고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대휘와 우진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휘에게 집요하게 카톡을 보냈으나 모두 읽씹당했고, 집에는 우진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접근이 이것뿐이라는 게 매우 아쉬웠으나,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헤어져라, 헤어져라.’


벽에 붙어 남의 커플 이별 염불을 외는 모습이 더없이 추접스러웠다. 하지만 진영에겐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 이번을 놓치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몇 십 분을 벽에 붙어 있던 차,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쾅쾅쾅--!!!


“배진영!!!! 문열어!!!!!!!”


화들짝 놀라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자 눈물 범벅이 된 대휘가 서 있었다. 배진영, 이 나쁜 새끼야.


“우진이형이 헤어지재! 어떡해, 흐어엉.”


대뜸 안겨온 대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진영이 대휘의 말에 흠칫 놀라고는 자연스레 몸을 감싸안았다.


“진짜? 진짜로?”


진영은 대휘의 날씬한 등을 진득하게 문지르며 계속해서 물었다. 대휘에겐 미안하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도무지 참을 길이 없었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진정한 봄날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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