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보쿠토였어?”

“네, 처음에는 몰라봤는데 선글라스 벗자마자 알겠더라고요. 사진으로만 봐도 다른 누구랑 헷갈릴 만한 외모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코노하는 그 대단한 우연에 혀를 내둘렀다. 핸드폰이 떨어지는 소리를 끝으로 전화연결이 끊긴 그는 퇴근을 미루고 휴게실에서 후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고장나버렸어, 액정이 완전히 나가 버린 구형 핸드폰을 든 채 말이다.

빠트린 이야기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아카아시는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코노하와 할 얘기가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은 해두었으나, 출근하자마자 10분 이상 떠나있는 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다. 아카아시가 움직이자 코노하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아무래도 점집 차려야 할까봐, 그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면서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비웠다.

휴게실을 나와서 왼쪽으로 가면 사무실, 오른쪽은 출구로 향한다. 하품을 연발하며 걸어 나온 코노하는 곧바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카아시는 그의 뒷모습에 꾸벅 인사를 했지만, 곧 다시 눈이 마주쳐 쓸 데 없는 일이 됐다.

“왜요?”

“순사장님께는 내일 말씀 드릴거야?”

그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사실 아카아시가 고민하던 문제였다. 순사장 오리오노 타케유키는 두 사람의 상사로, 아카아시가 이름을 빌린 이였다. 그는 코노하와 함께 주간 시간대로 근무하고 이미 퇴근한 지 오래였다.

“사실…… 아직 뭐 확실한 게 없어서요.”

보쿠토가 제게 작업을 걸었습니다, 라며 보고하기도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까지 알고 있으면서 체포를 못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고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말을 건넸다면 보고할 거리라도 있을 텐데, 현실은 고작 다음 데이트 날짜와 장소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증거가 될 만한 걸 잡은 뒤에 보고하려고요, 대답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던 코노하는 그게 낫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선배만 알고 계시면 좋겠어요.”

“그래~ 아카아시, 너 완전 특급 승진하는 거 아냐?”

“그러면 좋겠네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요.”

“전담팀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을게.”

“넵, 선배 자리 하나 빼둘게요.”

좋-아. 코노하는 씨익 웃어 보이고 다시 출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근무도 그것도. 말의 끄트머리는 거의 하품과 섞여 웅얼거렸지만 아카아시는 놓치지 않았다.

“네. 잘 들어가세요, 선배.”

코노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흔들었고, 아카아시는 꾸벅 허리를 한 번 숙인 뒤 서둘러 자기 자리로 복귀했다.

애초에 야간 조는 주간보다 사람 수가 적어 사무실은 휑했다. 함께 일하는 선배는 그새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컵라면 하나를 끓여 돌아왔다. 사루쿠이 야마토, 코노하와 동기인 그는 매사 웃는 것 같은 얼굴이 특징이다. 아카아시는 그에게 복귀를 알리고 곧장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의 전원이 켜지는 짧은 시간 동안 아카아시는 숨을 돌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러모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보쿠토에겐 얼마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라고 저를 소개해 두었다. 근무 시간대가 들쭉날쭉한 탓에 그를 만나는 데 생길 애로사항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보쿠토도 같은 생각인지, 그 또한 주간야간 할 것 없이 불규칙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만날 약속을 잡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증거를 잡을 것인가 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아카아시는 결국 고개를 내젓고 어제 처리하다 만 파일을 집었다. 보쿠토의 일은 퇴근한 뒤에 마저 생각해볼 일이다. 타닥타닥,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어라.” 그런데 돌연히 아카아시의 손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보쿠토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메시지 도착 시간은 어느덧 4시간 전이었다. 그는 고심하다 한 글자씩 적어가기 시작했다.



신주쿠 거리는 밤낮 할 것 없이 놀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손을 꼭 잡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 다음 디저트는 무얼 먹을까 고심하는 학생들,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든 관광객들까지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기 바쁜 이들로 하루 종일 소란스럽다.

그러나 조금 더 외곽으로 빠지면 그 활기찬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공간이 존재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던 거리는 고요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공장들은 모두 가동을 멈춘 상태였고, 그 주위에 살던 사람들도 하나 둘 이사를 떠나 동네 자체가 조용했다. 가끔 재자재자 울어대는 새소리만 들릴 뿐, 괴이할 정도로 적막한 분위기였다. 누군가 그 주변의 부지를 모두 사들였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그 얘기가 사실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보쿠토의 발걸음이 우연히 그 동네에 닿았던 날, 그는 폐건물 중 하나를 자신의 아지트로 정했다. 애초에 어디 한 군데에 진득하게 자리를 잡기는 힘든 입장이므로 여럿이서 얘기를 나눌 공간과 화장실만 있으면 충분했다. 아지트의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탁자와 서너 개의 의자가 자리하고, 탁자 위에는 이리저리 흩어진 수십 장의 트럼프 카드와 재떨이 하나가 놓여 있다. 어제도 역시 밤늦게까지 카드게임을 한 흔적이다.

보쿠토는 꼰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딘가 들떠 보이는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시간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에이스.”

“왜?”

“솔직히 말해봐. 클라이밍 센터 가서 뭐했어?”

만면에 가득하던 웃음기가 사악 가셨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각을 굴리는지 보이는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런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던 쿠로오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재미있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보쿠토가 혼자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오래된 팀이 있었다. 초창기엔 아버지를 따라 단독으로 움직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래도 전문가들을 모아 활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쿠토는 그와 뜻이 맞는 이들을 하나둘 섭외하기 시작했다. 매번 필요한 멤버가 꼈다 빠졌다하지만, 정규 팀원은 보쿠토를 포함한 4명으로 대강 꾸려진 상태였다.

“오야~ 수상하다 했더니.”

쿠로오는 둘 사이에 놓인 탁자에 턱을 괴고 볼을 실룩댔다. 보쿠토는 제 나름대로 뛰어난 연기를 펼쳤지만 그래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였다. 활동 명 네코(ねこ), 능청스러운 연기와 발 빠른 현장 대응력이 주특기인 연기파 도둑 쿠로오 테츠로는 보쿠토의 팀 동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보쿠토의 대답을 재촉했다.

“다른 애들보다는 차라리 나한테 들키는 게 나을 걸?”

보쿠토는 어느 샌가 공손한 자세로 앉아 저를 빤히 바라보는 쿠로오의 시선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이 순간 보쿠토의 머리는 평소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굴러갔다. 째깍째깍, 허름한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소리가 건물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쿠로오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아.” 결국 보쿠토는 항복의 의미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지.”

쿠로오는 전문가다운 웃음을 드러냈지만, 사실 알아채기는 무척 쉬웠다. 클라이밍 센터를 다녀와서는 지금껏 신경도 안 쓰던 핸드폰을 하루 종일 끼고 살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다가 슬쩍, 밥을 먹다가도 또 한 번 핸드폰을 확인하는 꼴은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광고를 하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 해 주변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들더니 늦은 밤에는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그 뒤에는 어깨춤을 추며 핸드폰을 두드리기까지. 그걸 보고도 모르는 게 바보라고, 그러나 쿠로오는 말을 아꼈다.

“그래서 뭔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흐흐…….”

보쿠토는 답지 않게 수줍은 얼굴을 하더니 아카아시와의 첫 만남을 털어 놓았다. 그의 검은 옷은 전신에 착 달라붙어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무심한 얼굴로 손가락 끝에 초커를 묻히는 것마저 섹시했다. 홀린 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멋있으시네요, 라는 형편없는 작업멘트를 입 밖으로 꺼냈다는 걸 깨달은 때는 아카아시가 저를 돌아본 다음이었다. 자기를 무시하는 아카아시에 아주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그 끝은 좋았다며, 보쿠토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또 만나기로 했어?”

“응, 그러니까…….” 보쿠토는 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2시간 뒤에 신주쿠 역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래~?”

쿠로오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흘리며 뒤로 몸을 기댔다. 끼익 소리를 내며 휘는 의자는 위태로워 보였다. 팔짱을 낀 채 한참동안 아무 말을 않고 있자, 보쿠토는 불안한 낌새를 눈치 챘다. 그는 손으로 탁자 아래를 더듬었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툭, 손톱 크기의 도청기가 탁자 위로 던져졌다.

“온센이야?”

“둘 다 있지요~”

탁자 정중앙에 놓인 재떨이에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쿠토는 가자미눈을 하고 쿠로오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쿠로오는 그 어떤 변명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속인 건 미안.” 이내 모니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우리 앞에서는 솔직히 얘기 안 해줄 거 같아서.”

모니와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리자 보쿠토는 결국 사과했다. 그의 말이 정확했다. 아마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물어봤다면 이런 저런 얘기로 말을 돌리다 아카아시를 만나러 빠져 나갔을 터였다.

“그나저나 우리 둘 없다고 그렇게 바로 얘기하는 거 좀 충격이야.”

“그것보다 이번에도 계획이 성공한 걸 기뻐하자고, 행어 씨.”

“뭐, 그거야 말 할 것도 없지.” 오이카와는 너머에서 씨익 웃었다.

활동 명 행어(ハンガー), 오이카와 토오루는 보쿠토 팀의 모든 작전을 계획하고 각 멤버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작전 설계자이다. 빈틈없는 계획과 뛰어난 통찰력, 정확한 지시까지 모든 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활동 명은 고등학교 시절에 생긴 별명으로, 덕분에 혼혈로 오해받았던 게 마음에 든다며 그걸로 정했다.

마지막으로 활동 명 온센(溫泉), 모니와 카나메는 네 명 중에 가장 신참 도둑으로, 작전에 필요한 온갖 장비들을 다루는 팀원이다. 지금 보쿠토를 잡는 데 쓰인 도청기 역시 모니와가 직접 공수해온 것이다. 그는 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가장 좋은 장비들을 발 빠르게 들여오며, 그 과정에서 여러 도움 되는 정보들을 얻어오기도 한다. 활동 명은, 고향에 있는 제 이름과 같은 온천을 좋아한다며 온센으로 정했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보쿠토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 끝내 꾸욱 다물었다. 맞은편의 쿠로오의 시선이 따가웠다.

“흐음, 수상한 사람은 아니지?”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오이카와였다.

“아냐! 그리고 내가 먼저 다가간 거라 만약 그렇더라도 아카아시는,”

“잘못 없다고?”

쿠로오가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오자, 보쿠토는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태평한 거 아닙니까, 에이스 씨.”

“음, 이름이 뭐였지?”

“아카아시 타케유키, 27살이래.”

보쿠토가 대답하자 스피커 너머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 없음, 모니와의 대답에 보쿠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가진 리스트에 아카아시의 이름을 검색해본 것이었다. 해당 리스트는 3년 전에 경찰청DB를 해킹해 얻어낸 것으로, 그 해를 기준으로 현직 경찰들의 이름과 얼굴 정보를 대조할 수 있다. 3년 전에 크게 해킹당한 뒤로 경찰청의 보안벽이 더욱 철저해져 갱신은 아직 미루는 중이었다.

경찰 목록 외에도 대조할 리스트는 몇 가지가 더 있었지만 역시 문제가 없는지 스피커 너머는 조용했다. 그 사실에 안심한 보쿠토는 슬쩍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쿠당탕, 그가 앉아있던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나, 나 가야할 거 같아!”

어느새 약속시간 20분 전이었다. 보쿠토는 누군가 대답하기도 전에 급히 겉옷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그는 아카아시의 연락이 아니면 잘 확인하지도 않을 핸드폰을 흔들며 멀어졌다.

남은 세 사람은 또다시 정적이었다. 흐음, 스피커 너머에서 탐탁지 않아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쿠로오는 입을 열었다.

“행어의 생각은?”

“나는…… 조심할 필요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27살이면 3년 전 리스트로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같은 생각이야, 본명이 아닐 수도 있고.”

쿠로오는 보쿠토가 앉아있던 자리로 다가가 쓰러져 있는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문제의 재떨이를 손에 쥐었다. 재떨이의 테두리 안쪽에는 육안으로 알아채기 힘든 크기의 스피커가 붙어 있었다.

“그럼 이제 여기로 오지 그래. 네코 씨 심심합니다.”

“오케이~”

오이카와의 명랑한 목소리를 끝으로 스피커는 지직 소리를 내며 꺼졌다. 쿠로오는 용도를 다 한 재떨이를 탁자 끝으로 밀어내고, 건물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먼지가 크게 일었으나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경찰이 가장 벼르고 있는 게 자긴 걸 알면서도 꼭 그런단 말이지.”

그는 포기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일반인과 연애를 못 할 건 없지만, 보쿠토는 작업을 할 때 빼놓고는 네 사람 중 가장 주의성이 떨어지는 편이라 걱정이 되었다. 그는 주변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까지 오랜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은 그대로였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다. 보쿠토가 먼저 다가갔다 하더라도 상대를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바깥은 모니와와 오이카와가 도착했는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무사히 지나갈 수 있기를, 어둠 속에서 쿠로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보쿠아카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모두 논커플링입니다. 앞으로도 톡톡 튀는 멤버들일 거 같아요! :)

(오이카와와 모니와의 활동명으로 더 좋은 게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히히 >,<)

마음과 감상은 언제나 큰 힘이 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


하이큐 / 트위터 @jw81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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