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동생한테 너무 엄격하다, 뿅.”

3학년의 첫 인터 하이를 준비하던 어느 날, 신현철이 산왕의 군기 반장답게 평소와 같이 1학년들을 보고 있으면 옆에 사람 하나가 다가와 선다. 주장이었다. 신현철은 쫙 편 가슴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푸는 대신에 팔짱을 끼고 남들이 30바퀴를 돌 때 혼자 50바퀴를 돌고 있는 신현필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도 못 하면 합숙에서도 도망칠걸.”

연습량과 훈련 강도는 그냥 죽고 지옥에 가는 게 더 나을 거란 말이 절로 나오기로 유명한 산왕의 합숙은 1년에 두 번 있었다. 하계와 동계, 인터 하이와 선발 대회 전. 약 12일 동안 진행되는 훈련은 사실상 산왕의 농구부가 겪는 진짜 고난이었다. 신현철만큼이나 어깨에 힘을 주고 뒷짐 지고 서 있던 이명헌이 마찬가지로 이미 한계에 다 다른 것 같은 신현필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정우성도 도망친 합숙이야.”

너도, 나도 다 튀었었고, 뿅. 이명헌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국 대회 전승을 노리고 있는 3학년을 신과 같이 보는 후배들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흑역사였다. 신현철은 그제야 체육관의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존 프레스 훈련을 마치고 1학년을 확인하는 척, 어떻게든 쉬고 있는 이명헌과 달리 정우성은 김낙수와 원온원을 치르고 있었다.

신현철의 눈이 향하는 곳은 정우성이 아닌, 키 차이에도 굴하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붙어 밀접하게 가드하는 김낙수였다. 정우성이 그렇게 날고 기어도 산왕에 남을 전설은 약 3년간 합숙 훈련에서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은 김 낙자 수자일 것을 보면 더 말할 건 없었다.

“나 지금 친구로 말하는 거 아니라 주장으로 말하고 있는 건데.”

다시 신현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래에서 이명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신현필한테 과해, 뿅.”

새삼스럽게도 신현철은 아래에서 들리는 이명헌의 목소리는 졸업하고 나서도 익숙해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다음에는 팔짱을 풀고 뒷짐 지었다. 산왕에서 주장은 절대적이었기에. 친구 이명헌이라면 모를까 신현철은 주장 이명헌에게는 절대로 반항하거나 선을 넘지 않는다.

주장이라는 단순한 위치가 이토록 무거워진 것은 이명헌이라는 개인의 성품과 자질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한 번의 하극상도 없이 절대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건 신현철을 비롯한 3학년들의 맹목적인 충성 덕분이었다.

3학년들은 이명헌과 아무렇지 않게 떠들고 투닥이다가도 이명헌이 주장으로서 선수를 대할 때는 제일 먼저 뒷짐 지고 경우에 따라선 존댓말 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3학년이 그렇게 기강을 잡으니 2학년은 물론 1학년도 감히 주장의 말에 거스르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이명헌과 신현철, 정성구, 최동오, 김낙수가 만들고 싶었고, 끝내 만들어낸 산왕이었다.

“친동생인 만큼 더더욱 말 안 나오게 하고 싶은 건 충분히 이해해, 뿅.”

곁눈질하지 않아도 신현철의 자세가 달라진 것을 확인한 이명헌이 본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전국 어디를 뒤져도 한 형제가 같은 학교에서 뛰는 건 보기 드문 경우이긴 했다.

“그렇다고 너무 막 대하면 그것대로 또 역효과 날 수가 있다. 네가 떠난 다음도 생각해. 안 그래도 운동할 성격이 아닌 애인데 네가 나서서 신경 쓰는 만큼 나서서 조심해야, 너 울어?”

곁눈질로 신현철을 흘겨보던 이명헌이 아예 고개를 고정했다. 당황해서 말꼬리도 떼고 물어보면 울기는커녕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하기야 합숙 훈련을 제끼고 도망치는 건 봤어도 우는 건 못 봤다. 저보다 한참 작은 포인트 가드 시절 때부터 말이다. 김이 샌 이명헌이 다시 앞을 봤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뒷짐 지고 있던 어깨에 조금 힘을 뺀 신현철이 말했다. 이명헌은 아직 주장이었다.

“슛도 제대로 못 쏘는 놈이 산왕에 들어와 버렸는데.”

그리고 이명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형으로서의 신현철은 주장 이명헌의 권한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명헌은 달리기 세트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드리블 강습을 받으러 가는 신현필의 등을 바라보았다.

산왕에서도 아는 이가 극히 드문 사실이었으나, 신현필의 입학에 누구보다도 거세게 반대했던 건 그의 형이었던 신현철이었다. 신장과 체격이 아까워서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개인 연습 삼은 상대일 뿐이라며, 슛은커녕 드리블도 제대로 못 하는 초짜를 산왕에 데리고 올 수는 없다고 감독과 주장 상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게 신현필이 산왕 농구부에 들어올 수 있는 이유였다.

신장과 체격이 그 신현철보다도 훨씬 우월했고, 그것 하나만으로 일단은 신현철과 원온원이 가능하다는 것. 무엇보다도 그 신현철의 동생이니 분명 조금만 가르치면 잘할 거라는, 의도치 않은 신현철 본인의 후광은 덤이었다.

마침내 신현필의 입학이 정해진 날에 신현철을 기억한다. 남들 다 잠든 한밤중에 기숙사 계단에 앉아 1.5L 생수통을 500mL 물통처럼 들고 마셨다. 처음에 이명헌은 제 눈이 미친 줄 알았다. 그다음엔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쳐서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고. 그냥 못 본 척 지나칠까, 그래도 친구 된 도리로서 다가가서 달래야 할까 하고 있으면 신현철이 먼저 말했다.

내가 진짜 신현필 그놈 새끼 그거 뜯어말리려고 했거든.

돌이켜보면 술이 맞았던 것도 같다. 근데 그 자식이 그러더라. 형이 서는 곳에 같이 서고 싶다고. 신현철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말했다. 성인으로 가기까지 졸업이라는 문턱만 남긴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흙을 묻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순수한 의지였다.

못 하면 전학 권고받을 거다.

산왕이 100명이나 되는 농구부원을 거느리고 있는 건 그중에서 산왕이 직접 스카웃 해온 선수는 10명 채 안 되기 때문이다. 훈련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똑같았다. 주전 유니폼은 오로지 실력이 되는 자에게만 허락됐다. 추천 입학과 일반 입학의 차이점은 기대치, 딱 그거 하나였다. 산왕이 탐낸 인재인 만큼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농구부에서 쫓겨날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전학을 권유받았다. 농구 하나만을 보고 데려온 추천 입학생들은 해가 지나도록 공고의 기본이라 하는 납땜이나 사포질도 할 줄 몰랐다. 손이 다치면 안 돼서였다.

물론 산왕의 역사가 이어진 이래로 추천 입학생이 전학을 권유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 산왕이 눈독 들인 선수들인만큼 부진함을 겪어도 금방 성장하여 자신들이 받는 기대치를 돌려주고는 했다. 그런 중에 농구라고는 형이랑 같이 치대면서 골 밑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지키는 게 전부였던 신현필이 추천 입학생으로 산왕에 들어온 것이다.

개같은 똥군기 구타 다 없애놨는데도 왜 개같냐, 명헌아.

기어이 한 손으로 얼굴을 짚은 신현철이 말했다. 이명헌은 거기에 대고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형이나 동생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어라, 잠깐만.

형이나 동생?

“하나 있네, 뿅.”

저도 모르게 빠져 들었던 과거에서 순식간에 벗어난 이명헌이 말했다. 뭔소리야. 어느샌가 친구로 돌아온 이명헌에게 똑같이 친구로서 되물었다. 네 고민 해결해줄 사람, 뿅. 그렇게 말한 이명헌은 설명을 길게 잇는 대신에고 턱짓했다. 마지막 인터 하이를 앞두고 드디어 깊게 생각하길 포기한 건가 싶었던 신현철이 이명헌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그대로 표정을 구겼다.

농구 코트를 프로레슬링의 경기장으로 만드는 얼굴 때문이었다.

 

 

*


하, 진짜 저 새끼한테만큼은 묻기 싫다.

벤치에 앉은 신현철이 한쪽 다리를 달달 떨었다. 시선은 쉬라고 준 휴식 시간에도 마음껏 개인기를 선보이는 정우성의 뒤통수를 향해있었다. 저 새끼가 내 인생을 바꿀 로또 번호를 알고 있다고 해도 묻기가 싫다. 이명헌이 해결될 거라 말했으니 자신은 믿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투로 속을 벅벅 긁을 걸 생각하면 저 동그란 뒤통수에 주먹이나 내려 꽂고 싶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패버리고 싶게 생겼지? 정우성은 어떤 저주에 걸린 게 분명했다. 여성 팬에게 선물을 받을수록 인간에서 샌드백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저주 같은 거. 주먹 쥔 한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던 신현철이 마침내 결심을 세운다.

“정우성, 잠깐 이리 와봐!”

목소리를 높여 부르면 정우성이 바로 몸을 굳혔다. 1학년들에게 올바른 슛폼 좀 가르치라고 붙여놨더니 혼자 더블 클러치부터 백덩크를 시도하는 등 꼴값 떨고 있던 게 중죄에 해당한다는 걸 알긴 하는 것 같았다. 그 1학년 대열의 가장 뒤에 앉아서 손뼉 치고 있는 신현필을 보고도 가까스로 화를 참은 신현철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정우성을 불렀다.

“선배! 그래도 후배들 앞에서는 저도 위엄이라는 게,”

“네 위엄? 그건 어느 집 똥개 간식이냐? 네가 갖다 던진 3점 슛이 내 혈압에 꽂힌 건 알겠다.”

성큼성큼 다가오다가도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상대를 단번에 잡아채 망설임 없이 깔고 누운 뒤, 다리를 꺾으려다가 말았다. 하반신이 조금 틀린 정도로 이미 정우성은 벌써 탭을 치고 항복! 항복이요!! 같은 소리를 하며 난리 피웠지만, 그건 신현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라면 우는소리를 하느라 제대로 대화를 못 할 건 분명했다.

마침내 눈물로 범벅이 돼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정우성까지 떠올린 다음에서야 신현철은 몸을 비켰다. 자유를 찾자마자 금방 에이스의 위엄이니 어쩌니 하며 울먹이는 놈을 내버려 뒀다. 정우성이 지켜야 할 에이스의 위엄은 그가 코트로 돌아가면 알아서 회복되기 때문이다. 집중도의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였고.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인데요?”

근처에 있던 벤치로 다시 몸을 돌리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던 정우성이 물었다. 답지도 않게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그렇게 우는소리를 해도 1년간 신현철의 격투기에 착실하게 적응해온 정우성은 기술을 걸다가 중간에 그만둔 신현철의 이상을 금방 눈치챘다. 신현철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좋지 않다는 신호였다.

“냉정하게 말해봐, 정우성.”

“…뭘요?”

소리 나게 침을 삼킨 정우성이 긴장했다. 아무리 그래도 냉정하게 왜 내가 인기 없는지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자신은 여기서 죽을 게 분명했는데.

“신현필이 농구 할 놈이 맞아?”

신현철이 말한 건 한 번도 예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네?”

질문을, 정확히는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정우성이 반문했다.

“너 정도 되는 놈이면 웬만한 애들은 어느 정도인지 보일 거 아니냐.”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건 선배나 명헌이 형도 보이지 않아요?”

“나는 못 해. 이명헌은 안 할 거고.”

정우성이 뒷목을 긁적이면서 물으면 신현철이 단번에 대답했다.

“그러니까 네가 솔직하게 말해봐. 체격이랑 키 같은 거 다 빼고, 신현필이 농구 할 놈이 맞아?”

질문을 마친 신현철은 상체를 펴고 팔짱을 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정우성은 덩달아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제법 건방진 모습에도 화를 내거나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에 그의 결론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 이명헌이 굳이 제게 정우성을 짚어준 건 그가 신현필과 가장 친한 농구부 선배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는 은근히 헐렁하고 허술한 구석이 많다 못해 걱정될 정도의 정우성이었지만 농구에 관해서만큼은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패스하면 점수를 따올 거라는 확신을 넘어서, 그가 농구에 갖는 어떤 판단력에 대한 신뢰였다. 항상 모든 것을 본인의 계산 아래 두고 있어야 하는 이명헌조차도 정우성에게 패스를 줄 때는 구체적으로 전략을 정하지 않았다. 정우성이 알아서 할 것이다. 왜냐면 농구에서 정우성이라는 이름은 틀릴 리 없었으니까.

고민의 시간이 길어진다. 다른 부원들도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았는지 굳이 말을 붙여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 팔 안쪽으로 숨긴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더워서는 아니었다. 신현철은 이명헌만큼은 아니어도 긴장을 감추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정우성이 신현필을 안될 놈이라고 한다면.

“근데 선배, 체격이랑 키를 빼면 마이클 조던도 농구는, 아악!!!”

대답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머리에 주먹을 내려 꽂았다. 선배는 진짜!! 이게 딱밤이에요?! 이게 그냥 딱밤이냐고요!! 정수리 근처 어딘가를 짚은 정우성이 금방 우는소리를 해온다. 그 모가지에다가 팔을 걸고 죄였다. 그런데도 성에 차지 않아서 여러가지 관절기와 서브미션을 떠올리다가 마침내 한 가지를 고른 그때였다.

“못 해도 그냥 하게 해주면 안 돼요?”

스스로의 죽음을 용케 예견이라도 한 건지, 정우성이 다급하게 말했다.

“가족이랑 하는 농구잖아요. 그거 되게 재밌거든요.”

헤드락을 걸고 있던 팔에 힘이 풀리는 건 그다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으로 같이 하는 제대로 된 농구였다. 트래블링이고 더블 드리블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벽처럼 세워놓고 하던 원온원이 아니라, 팀으로서 믿고, 도와주며 함께 농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 감상에 빠지는 것도 잠깐이었다.

그러다가 끝까지 덩치만 큰 얼뜨기 취급받으면.

순해 빠져서 앞에다 대놓고 넌 재능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허허실실 웃다가 뒤에 가서나 몰래 훌쩍이는 그 모자란 놈이 어디 가서 다쳐오기라도 하면. 그때쯤엔 내가 달려와서 상대를 쥐어 패줄 수도 없는데.

“뭘 고민하는지는 알겠는데, 현필이는 권고 안 받을걸요.”

상념을 깬 건 정우성의 목소리였다. 그때까지도 신현철의 헤드락 속에서 얌전히 있던 그가 슬쩍 눈동자만 위로해 시선을 맞춰왔다. 험악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미간을 구기던 신현철이 얼마 가지 않아 구속을 풀었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걸.”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질문이었다. 대답에 따라서는 헤드락이 아닌 암바까지 갈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이리저리 티격대며 자연스럽게 팔뚝 아래로 밀린 아대를 재정비하던 정우성이 눈을 깜빡였다. 5분 뒤 펼쳐질 수도 있는 어떤 미래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진짜 딱 한 대만 더 때리고 싶다. 신현철이 그러거나 말거나 정우성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선배 진짜 몰라서 그래요?

“현필이 걔 1학년 성적 탑이에요.”



*


슬슬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하늘 어딘가에 애매하게 걸렸다. 훈련이 모두 끝난 밤이었다. 6월과 함께 시작된 열대야에서 신현철은 산왕공고의 로고가 박힌 티셔츠 차림으로 학교 근처 둘레길에 서 있었다. 빛이라고는 곳곳에 설치된 허름한 가로등과 아직 불을 끄지 않은 근처 건물 틈에서 새어 나온 게 전부였다. 더운 바람이 불다가 금방 그친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신현철의 의식은 금방 낮으로 끌려간다.

근데 선배들 진짜 입시랑 스카웃 그런 걸로 바쁘긴 한가봐요. 현필이는 선배가 어느 학교에서 스카웃 받았고, 어딜 갈지 고민하는지도 다 알던데. 아니 근데 아무리 바빠도 선배는 어떻게 전교 1등을 걱정할 수가, 아 잠깐만요, 아 진짜 잘못했어요, 선배!! 기어코 입방정을 떨다 생을 마감하기로 작정한 정우성의 다리를 쥐어짰다. 익숙한 비명을 듣다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만 좀 더 있다가 가지,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1학년 마지막을 미국과의 원정 경기로 마무리한 정우성은 2학년이 되며 번호가 바뀐 유니폼을 받기도 전에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성장할 경험과 기회가 필요해서 산왕에 왔으면 주장까지는 맡고 가든가 할 것이지, 이명헌이 그거가 주장 맡으면서 사람 된 건데. 그 변천사를 봤어야 했다. 하필이면 이명헌이 주장 잡고 개고생한 것만 봐가지고. 하여튼 아까운 새끼. 아까우니까 빨리 미국으로 꺼지든가 했으면 좋겠다.

정우성을 떠올릴 때면 반사적으로 구겨지는 미간을 억지로 펴고 있으면 저쪽에서부터 한 인영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부터 제법 커 보이는 그림자는 신현철에게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신현필이었다. 신현철은 제 앞에 도착해서 가쁜 숨을 들이쉬는 신현필을 보다가, 익숙하게 팔짱을 꼈다.

“인터 하이가 곧 시작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으응…….”

“그때까지 너를 확실히 단련시켜 놓을 거다.”

“응, 알았어, 형…….”

“대답도 굼뜨게 하지 말고 한 번에 똑바로 해!”

“미, 미안!! 다음부턴 조심할게!”

기합이 들어가는 것도 잠깐이다. 신현필은 금방 입을 다물고 쭈뼛거렸다. 신현철은 2m가 넘는 덩치를 조금도 위협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얼굴을 더 쳐다보는 대신에 앞으로 몸을 돌렸다.

“스트레칭은 제대로 했지.”

“응, 뛰어오면서 했어…. 뛰, 뛰어오기 전에도 제대로 했고…….”

“인터 하이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어. 감독님은 이번 대회에서 반드시 한 번은 널 쓸 거다. 지금 너한텐 스킬보다도 골 밑을 제대로 지킬 체력과 피지컬을 확실하게 해놓는 게 중요해. 지금부터 합숙 들어가기 전까지 매일 나랑 죽기 직전까지 뛴다, 알았어?”

“응, 알았어…!”

전보다는 조금 빠릿해진 대답을 들은 신현철이 몸을 앞으로 돌렸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신경 쓰면서 달리기 시작하면 두세 걸음 정도 떨어진 뒤에서 비슷한 소리들이 들렸다. 흙길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 그 왼발 오른발에 맞춘 숨소리들. 미묘하게 엇박자를 타던 두 사람의 뜀박질 소리가 얼마 가지 않아 일정한 규칙을 찾아간다. 그때까지도 신현필은 두세 걸음 뒤에서 뛰고 있었다.

문득 신현철은 신현필에게 뭔갈 시켰을 때, 하기 싫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라면 그게 제가 강해서인 줄 알았을 것이다. 머리만 조금 컸을 때는 싫은 일에도 싫다고 바로 말하지 못하는 어벙한 동생이 답답하다고 짜증을 냈을 것이다. 침착해야 이기는 승부라면 모를까, 평소에 그렇게 인내와 가깝게 살지 않았던 신현철은 어벙하고 순진하기만 한 신현필이 평생 그러고만 살 줄 알았다. 형이랑 같은 코트에서 농구하고 싶다는 신현필의 앞에서 말문이 턱 막혔던 언젠가를 떠올리던 신현철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시험 잘 봤다며.”

“아…! 엄마한테 들었어? 낙제 받으면 전국대회도 못 나간다길래… 헤헤.”

“정우성한테 들었다. 그놈이 은근히 잘 챙겨 주는 것 같더라.”

“우성 선배가 나 엄청 부러워해.”

신현철이 잠깐 입안을 깨물었다. 결국 정우성이라는 이름 뒤에 선배가 붙는 날이 오는구나. 진짜 개패버리고 싶다.

“현철 선배 같은 친형 있다고…….”

“입 다물고 뛰어. 너 아직 러닝할 때 페이스 조절할 줄 모르잖아.”

“응.”

직전에 말했던 것처럼 짧고 간결하게 대답한 신현필이 곧바로 입을 다물고 뛰었다. 흙길을 긁는 운동화 밑창 소리만이 한밤의 적막을 채웠다. 뛰다 보면 슬슬 들이쉬는 열대야의 밤공기가 한겨울의 것처럼 차갑게 느껴져 온다.

“형.”

신현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이랑 같이 운동하니까 좋다.”

“…….”

헤헤 웃은 신현필은 이번엔 형의 주의 없이도 금방 입을 다물었다. 신현철은 여전히 앞만 보고 뛰었다. 어느샌가 건물들이 하나둘씩 불을 끄기 시작함에도 허름한 가로등 빛이 길을 밝혔다. 신현철은 살짝 입을 벌려, 폐를 긁다가 입 밖으로 끌려 나가는 찬 공기에 대답을 섞었다. 나도.




경멸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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