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보쿠토 배포전에서 발간된 보쿠아카 회지입니다.

A5 / 89p / 무선제본 / 약 50,8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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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 : 오밀조밀(@omiljomil__)님


목차


Part1 


Part2
  • Once upon a time
  • Time to grow up
  • Honeymoon





Part1 - 上


배경음악이나 다름없던 TV속 앵커의 목소리가 오늘만큼은 아카아시의 귓가를 건드렸다.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던 아카아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뉴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근 새롭게 발탁된 배구 국가대표에 관한 소식이었다. 앵커의 브리핑 이후 기자의 목소리와 함께 최근 호주와의 경기장면이 방영되었다. 빠르게 날아온 배구공과 약속이나 한 듯 정확히 내려치는 스파이크. 단 한 번의 바운드만으로 공은 2층 관중석까지 날아갔고, 팀과 응원단의 사기를 북돋는 강렬한 감탄사가 한 선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헤이헤이헤이~!”

“……최근 배구 국가대표로 발탁된 보쿠토 코타로 선수는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표 팀의 에이스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아카아시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두드려‘보쿠토 코타로’를 검색했다. 나이는 22살, 9월 20일 생, 키는 188cm, 그리고 흑발과 은발이 뒤섞인 독특한 헤어스타일까지.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냥 어리기 만한 그 아이가 맞을까 잠깐이라도 고민한 게 우스웠다.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넓은 코트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저 사람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카아시를 좋아한다며 수차례 고백해왔던 그 보쿠토가 맞았다.


“188cm라니…, 이제 나보다 크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16살의 보쿠토는 마냥 어리고 작았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부를 때마다 고개를 올려야 했다.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 봐도 보쿠토가 있었다. 아카아시에게는 그 올곧음을 피할 길이 없었다.

보쿠토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를 향한 애정이 당시의 최선이었다. 어린 보쿠토에게는 아직 아카아시의‘사랑’을 불러 일으킬만한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그저 귀엽다는 얼굴로 “알고 있어, 보쿠토.”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6년 전,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만큼은 알고 있다는 답만으로 보쿠토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아카아시, 나 이번이 마지막 고백이야! 이번에 아카아시가 받아주지 않으면 다시는 고백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신중히 생각해줘…….”


흐린 날씨 탓에 평소보다 이르게 땅거미가 내려앉았던 어느 겨울날의 저녁, 아카아시의 집 앞에는 긴장한 얼굴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내뱉는 보쿠토가 있었다. 꽁꽁 얼어붙어 붉어진 얼굴과 손은 그가 아카아시를 불러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단번에 보여주었다.

Now or Never. 단순하지만 어려운 선택지였다. 보쿠토는 내일 오전에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이제는 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아카아시를 만날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은 보쿠토를 평소보다 조급하게 만들었다.

아카아시도 나를 좋아한다고 대답해줘. 눈에 직접 써넣기라도 한 양 선명히 읽히는 그의 속마음 앞에서 아카아시는 미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보쿠토에게 연인으로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미안하다는 이유로 그를 속이는 것은 나중의 저희를 더욱 힘들게 만들 거라고, 21살의 아카아시는 긴긴 고민 끝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미안해, 보쿠토.”


결국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선 그는 아카아시의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돌지 않고 걸어 나갔다. 다음날 아침, 보쿠토가 떠나는 순간에 아카아시가 할 수 있던 건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아카아시가 기억하는 보쿠토와의 마지막 순간은 그러했다. 긴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웬만큼 잊혀 진 기억이었다.

그런데 6년 뒤인 오늘, 어리기만 하던 그 아이는‘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을 단 어엿한 성인이 되어 아카아시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추억의 인물을 오랜만에 마주했기 때문일까. 비록 일방적인 감정이지만 설레는 마음에 아카아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좋아해, 아카아시! 수십 번 귓가를 울렸던 그 외침이 다시 한 번 집 안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을 찾았다는 기쁨에 아카아시는 다음 날부터 매일 보쿠토를 검색했다. 배구 강호고교에 스카우트 돼서 이사를 갔던 거구나. 학생일 때부터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파이커였다니.

그러나 보쿠토의 소식을 하나 둘 알게 되면서 어쩐지 반가움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커져갔다. 예전에는 누구보다 친한 사이였다지만, 지금은 완전히 남일 뿐이었다. 국가대표와 회사원, 살아가는 방식부터 행동반경까지 모든 점들이 다르기에 보쿠토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아카아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보쿠토와 재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소식을 접하고 약 2주 정도가 지난 때였다. 떨어진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집 앞 마트에 들른 아카아시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아카아시, 요즘 얼굴에 살 좀 붙었네?’


그의 머릿속에는 친한 동료가 점심시간에 장난으로 건넸던 말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도 그래, 저녁을 그렇게 먹었는데 벌써 입이 심심하다니. 정말 운동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할까. 탐탁지 않은 표정의 아카아시는 전시된 거울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런데 한순간, 제 뒤로 함께 비치는 어떤 이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설마.”


보쿠토였다. 환영이 보이는 게 아니라면, 그 남자는 보쿠토가 맞았다. 깊게 눌러쓴 모자와 하얀 색 마스크로 얼굴을 대부분 가린 상태였지만, 아카아시는 일순간 보인 형형함만으로도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해?

보쿠토가 저를 기억할 거란 보장도 없으며, 만약 기억하더라도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할까? 그의 마지막 고백을 거절한 당사자가 바로 나인데.

일방적인 반가움만큼 실수하기 좋은 이유도 없는 법이다. 아카아시는 결국 고개를 내젓고 다시 장보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쿠토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쓰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사기로 계획한 것들을 모두 카트에 담고 나자,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아카아시의 발걸음은 쉽사리 계산대로 향하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는 마트 안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결국 아카아시는 잠시나마 품었던 기대를 접기로 했다. 날 못 봤을 수도 있고, 까맣게 잊었을 지도 모르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내심 아쉬워 가만한 한숨을 내쉴 때였다. 누군가 다가와 계산대로 향하는 아카아시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반짝하고 빛나는 두 눈이 있었다. 이 눈을 올려다 볼 거라, 나는 예상했을까.


“저기 혹시, 아카아시 케이지?”

“……보쿠토.”

“역시 맞구나!”


보쿠토가 반갑게 웃어 보이자 어색하게 굳어있던 아카아시의 표정마저 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앞으로 마주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가 눈앞에 있는 걸 실감하자, 아카아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보다 조금 더 동그래진 청록색의 눈동자가 보쿠토의 전신을 천천히 훑었다.

당연하겠지만 보쿠토는 미디어속의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아카아시가 흐릿하게나마 기억하는 어린 보쿠토의 모습과 달랐다. 친구들과의 다툼에 움츠러들었던 어깨는 탄탄히 벌어져 있었고, 통통했던 얼굴은 손을 갖다 대면 베이기라도 할 듯 날카로운 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쿠토가 달라진 점은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가슴 한 편이 뻐근해오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보쿠토는 저를 반가워하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아카아시를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던 눈빛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황금빛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마주해 느끼는 반가움, 오직 그것뿐이었다.


“다행이야. 아카아시가 혹시 날 잊었을 까봐!”


그나마 덜 서운한 건 보쿠토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일까. 그의 꾸밈없는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잊을 리가 있겠어.”


여전한 그의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 보쿠토의 입꼬리가 크게 호선을 그렸다.

아카아시가 계산하는 동안 보쿠토는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아카아시가 나오자, 보쿠토는 비어있는 두 손을 내밀었다. 양손에 가득 들린 그의 짐을 같이 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보쿠토에게 제 짐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장을 보는 내내 온 신경이 보쿠토를 향해 있었다. 아는 체도 못할 테지만 혹시 시야에서 사라질까봐 꾸준히 눈으로 좇았다. 그러는 동안 카트에 무얼 담았는지는 자각하지도 못했다. 덕분에 계산대를 선 다음에야 제가 어떤 것들을 집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카트 안에는 전혀 제 취향이 아닌 음식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채 손만 움직인 결과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다 빼기에는 저의 속사정을 모두 들켜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계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건 보쿠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의 손에 맡겼다가는 모든 사실이 들통 날 것 같았다. 지난 2주 간, 그리고 그를 만난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요동친 저의 심란한 마음까지. 이후에도 보쿠토는 손을 내밀어 돕기를 청했지만, 아카아시는 철저했다. 그는 결국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아카아시의 뒤를 따랐다.

 

 

6년 만에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대화했던 아까와 달리,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은 조용했다. 어떤 대화 주제를 꺼내야 할지 보쿠토는 고민했고, 아카아시는 망설였다.

잘 지냈냐는 간단한 안부인사 하나 묻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사이, 둘은 어느새 아카아시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보쿠토는 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에게도 낯익은 장소, 아카아시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다.


“아카아시, 아직 여기 사는 거야?”

“응, 보쿠토 넌…… 오랜만이겠네.”


대답을 하는 동시에 보쿠토의 시선은 자연스레 어딘가에 다다랐다. 수년 전, 그곳에 살았던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마지막 고백을 건넸었다. 그 기억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두 사람은 자연히 그때를 떠올렸다.

둘 사이의 정적이 길어졌다. 그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 핸드폰 번호 좀 알려주라. 나 사실 이 근처로 이사 왔거든. 우리 자주 보자!”

“이 근처로?”

“응, 결국에는 이 동네가 끌리더라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가 번호를 입력하는 동안 보쿠토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아카아시가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자, 그는 싱그레 웃었다.


“예전에 아카아시한테 했던 약속, 아직 유효해.”

“…….”

“그러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알았지?”

“…그래, 고마워.”

“아! 나 가봐야겠다. 그럼 아카아시, 연락할게~!”


떨떠름한 표정의 아카아시 앞에서 그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보쿠토는 안녕이라 말하는 대신 팔을 크게 흔들며 걸었고, 아카아시는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다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쯤에는 오늘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당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게 얻어맞은 듯 온 얼굴이 얼얼했다. 한참동안 아카아시는 핸드폰에 저장된 보쿠토의 번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아카아시는 잠시 소파에 앉아 쉬는 대신 장봐온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텅 비어있던 냉장고가 어느덧 꽉 차갈 때쯤,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울렸다.

「아카아시! 나 보쿠토야!」

간단한, 그러나 덧붙일 필요는 없는 그 메시지를 바라보며 아카아시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Now or Never, 두 개의 선택지 중 제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보쿠토는 제가 했던 약속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가 자신의 옛 감정에 부담스러워 할까봐 되짚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아쉬워하면 안 되는 거지.

입이 심심했다. 지친 탓에 곧바로 누우려 했지만 결국 방금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를 꺼냈다. 그리 시원하진 않았지만 가볍게 마시기에는 괜찮았다. 물론, 한두 모금 가볍게 넘겨도 입은 여전히 심심했다.

아카아시는 들고 있는 맥주 캔을 가볍게 흔들었다. 너를 다 마시면 괜찮아질까. 심심한 건 입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갈증이 쉽게 해소될만한 것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아카아시는 계속해서 목을 축였다. 오늘은 어쩐지 평소보다 밤이 길어질 것만 같았다.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약 6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이래로 2년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식당을 찾아 함께 향했고, 서로의 취향에 걸맞은 연극과 영화를 알아오기 바빴다. 시간이 날 때면 만났고, 같이 있을 수 없다면 긴 시간의 통화로 아쉬움을 달랬다. 다른 누구보다 서로를 우선시한 순간들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과는 미묘하게 다른 설렘이 그 크기를 키워나갈수록 아카아시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8년 전과는 다른 시작점 위에 서있는 너와 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이인걸까.

단순히 친한 형․동생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인 사이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관계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저를 좋아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다시는 너를 좋아하지 않겠노라고 못 박았던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릴 때의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을 떠올릴 때면 아카아시는 금세 답답함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보쿠토로 채워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관계를 고민할 때마다 반복되는 기대의 끝은 매번 아카아시의 허탈한 웃음이었다.

일주일 전, 보쿠토는 훈련 차 폴란드로 떠났다. 6개월 뒤에나 돌아올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울상을 짓던 걸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당연히 장난이었지만,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샤워를 끝낸 아카아시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만약 보쿠토가 일본에 있었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그와 통화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타국에 있는 그는 자고 있을 무렵, 아카아시는 울릴 리 없는 핸드폰을 슬쩍 쳐다보고는 침대 위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역시 보고 싶어.”


그랬다. 이제 와서 인정하는 것도 새삼 우습다고 생각하지만, 29살의 아카아시는 24살의 보쿠토를 좋아하고 있었다.

8년 전 제게 고백했던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될 줄을 그때의 누가 알았으랴. 함께 있을 때면 황금빛 두 눈에 저만을 담아 주었으면 좋겠고, 떨어져 있을 때면 제 머릿속을 보쿠토가 가득 채우고 있는 만큼 그도 자신만을 떠올리길 바랐다.

그 어린 나이의 보쿠토도 이랬을까? 아카아시는 종종 시간을 되돌려 그때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금세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곤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혹여 보쿠토가 저를 다시 좋아하더라도 먼저 고백할 리는 없다. 다시 만나던 그날에 그때의 약속은 유효하다고 직접 말했으니까. 연인 사이로 나아가고 싶다면 아카아시가 먼저 한 발자국을 내딛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방해하듯 타이밍 좋게 핸드폰알림이 울렸다. 중간에 자다 깼는지, 폴란드 시각으로는 새벽 3시에 보내온 「굿나잇!」이라는 메시지에 아카아시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두드리는 그는 어느새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쿠토가 돌아오기까지는 약 한 달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마침내 아카아시는 그가 귀국하는 날에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될 지도 모르지만, 아카아시는 무모한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인’이라는 한 단어로 명확하게 정의를 못 내릴 뿐이지, 우리 둘 사이는 그것과 다름없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이토록 오랜 시간과 깊은 관심을 쏟겠느냐고. 아카아시는 형형하게 반짝이던 금안(金眼)을 떠올리며 더욱 확신을 가졌었다.

그래, 그랬었다. 오늘 아침, 아카아시의 젓가락질을 다시 한 번 멈춘 그 뉴스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젯밤 한 매체를 통해 배구 국가대표 보쿠토 코타로 선수가 열애중이라는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보쿠토 선수의 담당 에이전시 직원으로 알려진 상대방과는…….”


TV에서는 열애 상대로 지목되는 여성을 다정히 바라보는 보쿠토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오래 전 제가 피하기 바빴던 그것과 같았으니까.

아카아시는 손가락 끝에 걸려있던 젓가락을 간신히 내려놓았다. 도통 진정이 되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도 점심시간에 맞춰 걸려온 전화에 설레며 통화를 했었다. 이제 금방 볼 수 있겠다고 말하는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던 것도, 온종일 그 생각을 하느라 직속상사에게 혼났던 것도 막 어제였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아카아시는 긴 숨을 내쉰 뒤에 옆에 놓인 물 한 컵을 들이켰다. 시원하다 못해 싸늘한 기운이 전신에 돌고서야 응어리졌던 답답함이 점차 가라앉았다.

그제야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 하다니, 그럴 필요는 없는 거잖아. 가장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마음대로 단정 지어 놓고, 이제 와서 생각도 못했다는 듯 놀라면 안 되는 거지.

아카아시는 목을 가다듬고 보쿠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곧바로 들려오는 기계음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단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바빠서 전화를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언제 다시 걸려올지 모르는 그의 전화를 계속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러나 TV로 보았던 보쿠토의 눈빛이 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래 전에 저를 향했던 그의 마음은 이미 떠난 지 오래일거라 결론짓는 게 마음이 편했다.

아카아시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굴고 있었지만 사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사진 속 보쿠토의 모습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는 지금, 아직 열애설에 관한 보쿠토 측의 공식입장은 나오지 않았다는 앵커의 목소리가 그에게 전해질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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