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벌써 몇 번째를 맞이하는 ‘아무것도 아닌 날의 파티’인지. 나는 물론 하츠라뷸의 기숙사생들은 분주하게 파티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장미나무를 보며 나는 정원을 스윽 돌아봤다. 학기 초에는 아직 준비가 서툰 후배들 몫까지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제는 다들 익숙해졌는지 전보다 훨씬 나아진 형편이었다. 뭐, 이쯤 되면 당연하려나? 덕분에 담당 구역의 장미 색칠을 모두 마친 나는 자연스레 공용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트레이 군 수고~”

“아, 케이터 왔어?”

 

보통 파티 전날까지 대부분의 디저트 작업을 끝내놓지만 언젠가부터 트레이 군은 파티 당일에 새로운 디저트를 추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달지 않은 걸로. 정확한 시점을 따진다면 나에게 돌직구로 그 말을 날린 날 이후부터였다.

 

그렇다. 지금 오븐에서 노릇노릇 구워져가는 저 파이는 내 전용 디저트였다. 그는 부탁한 적도 없는데 열심히 내 몫의 달지 않은 디저트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나를 놀려주려는 심산인가 싶었지만 굳이 일을 사서 할 정도로 트레이 군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워커홀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하는 리들 군과 함께, 그는 사감 업무는 물론 각종 학교 행사 위원까지도 돕고 있었다. 차라리 달지 않은 디저트를 따로 만들 거라면 전날 다른 기숙사생들과 함께 만들면 될 것을, 꼭 파티 당일 혼자 주방에 남아 만들고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이전 티파티 때였다.

 

“뭐야, 오늘도 케이군 전용 디저트? 완전 감동~”

“오늘은 호두파이로 해봤는데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

“트레이 군이 만드는 디저트라면 안 먹어봐도 합격이겠지~”

“지금까지 내가 만든 케이크 제대로 먹어본 적 몇 번 없으면서?”

“음, 트레이 군 그 이야기 1절만 하자!”

 

더불어 트레이 군의 농담도 늘어난 건 기분 탓일까. 이런 화제가 나올 때마다 일부러 나를 놀리려는 듯이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하여튼 저런 신뢰감 가는 얼굴을 한 주제에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괜히 짜증이 일어난 나의 시야에 마침 쓰고 남은 밀가루가 보였다. 순간 머릿속에 번뜩인 나이스 아이디어에 나는 아직 뒷정리에 한창인 트레이 군의 눈을 피해 양 손바닥에 밀가루를 묻혔다. 그대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긴 나는 조심스럽게 트레이 군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이게 다 평소에 사람을 마구 놀려먹은 죗값이라고. 쿡쿡 새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최대한 참으며 나는 그대로 트레이 군에게 돌진했다. 받아라! 케이터 다이아몬드 비기, 업보청산!

 

“아, 그러고 보니까……”

 

아니, 지금 거기서 뒤를 돌면――

 

1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먹힐 수 있었던 기술은 트레이 군의 행동으로 인해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의 등 뒤를 아름답게 수놓을 예정이었던 손바닥은 갑작스레 등을 돌린 트레이 군 때문에 갈 곳을 잃었고, 그대로 무게 중심이 쏠린 나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그렇게 자랑하던 균형 감각도 뽐내지 못한 채 그에게 돌진하게 되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난 곳은 얼굴, 정확히 말해서 하관부였다. 순간적으로 받은 강한 충격에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트레이 선배~ 사감이 오늘 디저트는 뭐냐고……아.”

 

타이밍 나쁘게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에이스쨩이었다. 용건 때문에 트레이 군을 찾아왔는지, 뭐라 말을 꺼내던 그는 금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 그 뭐냐……. 한창 분위기 좋은데 죄송함다~”

 

뭐라고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에이스쨩의 발소리는 그대로 공용 주방에서 멀어져갔다. 그제야 얼어붙었던 몸이 풀리듯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에이스쨩이 충분히 오해할만한 우리의 뒷모습은, 앞의 상황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간 나는 트레이 군과 입술 박치기를 하고만 것이다. 키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입술 ‘박치기’였다. 아니 보통 이런 만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난다고? 언젠가 보았던 소년만화 속 주인공에게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건 봤지만 어디까지나 만화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민망함보다 큰 물리적 고통에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나는 그제야 트레이 군 쪽을 살펴보았다. 있는 힘껏 얼굴을 들이박은 탓에 트레이 군은 인중부터 입술 주변까지 빨갛게 부어올라있었다. 이거 잘못하면 치아까지 털리는 거 아니야……? 평소 치아 건강에 집요한 정성을 쏟던 트레이 군이 떠올라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 트레이 군 괜찮……”

“케이터!”

 

하지만 순간 이는 현기증에 나는 다시금 발을 헛디뎠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트레이 군이 손을 뻗어 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해주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다 제 손을 뻗어 내 코를 꾹 쥐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트레이 군의 행동에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내 눈빛의 의미를 읽어냈는지 트레이 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코피 난다, 너.”

 

도대체 얼마나 세게 박았길래 유혈 사태까지 일어난 걸까. 몸을 일으키자마자 어지러웠던 건 아무래도 코피 때문이었나 보다. 휴지를 돌돌 말아 코를 막고 나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트레이 군은 금세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근데 트레이 군은 거울 안 봐도 괜찮아? 그쪽이야말로 입가가 빨갛게 부어올랐는데. 나중에 치과 진료비 청구해도 모른 척할 거니까……. 속으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트레이 군이 만들어준 얼음주머니로 콧등 위를 찜질했다.

 

“심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아하하……. 미안, 미안~”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괜히 우쭐해선 업보청산이니 뭐니 남한테 장난이나 치려고 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다. 그치만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했다. 트레이 군도 나 놀렸는데 왜 나만……이 아니구나. 저쪽도 상해 사건이네. 응, 그럼 이걸로 퉁치자. 막상 피해자인 트레이 군 몰래 속으로 재판 판결까지 끝마친 나는 조심스레 트레이 군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팔짱을 낀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아, 저거 나쁜 생각할 때 짓는 표정인데. 괜히 불길한 마음에 나는 애써 모른 척 얼음 찜질에 열중했다.

 

“그건 그렇고 케이터 네가 그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네.”

“응?”

“돌진 키스라니, 제법 놀랐어.”

“……뭐?”

 

아니, 저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불길한 마음이 적중했는지 트레이는 눈 똑바로 뜨고 엉뚱한 농담을 시전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에 있는 얼음주머니를 트레이 클로버라는 표적을 향해 던지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아까 전처럼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디저트로 점수 따둔 보람이 있었나.”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먹이로 길들였다는 듯한 발언을 들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그것보다 뭐야, 트레이 군 사실 나 노리고 디저트로 점수 따뒀다는 소리야? 아니면 이것도 나 놀리는 거야?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표정에 트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하핫, 농담이야.”

“……어느 부분이?”

 

아무리 표정 관리를 하고 싶어도 아까 전에 얼굴을 부딪힌 탓인지 얼굴 근육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지은 표정 중에 제일 얼빠진 얼굴일 나를 보며, 트레이는 입꼬리를 씨익 당겨 웃었다.

 

“글쎄?”

 

시원스러울 정도인 트레이의 웃음에 나는 괜히 짜증이 일어났다. 아니, 지금 솟구치는 이 감정을 짜증이라는 단적인 말로 표현하는 게 올바른 것일까.

 

‘역시 트레이 클로버는 최악이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훨씬 싱숭생숭해질 것만 같은 마음에 나는 그 한 문장을 끝으로 생각하는 걸 관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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