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되묻기 전에 짧게 숨을 골랐다.


“죽음을 건넌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죠?”


“미안하다. 내게 허락된 말은 여기까지구나.”


대현자가 그 푸른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건, 이번에는 확실히 동정심일지도.


“그래도 계속 가겠다면, 예정된 미래를 바꿀 수는 없고요.”


“내 능력으로 볼 수 있는 미래는 그렇다.”


“그렇다면야.”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네요.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 주인께서는 안목이 뛰어나시군. 이런 영혼을 어디에서 찾아오셨을까.”


대현자가 아직 손대지 않은 과자 접시를 내 앞으로 밀었다.


“먹어라. 이상한 것 넣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나는 그제야 간식으로 주의를 돌렸다. 접시에 담긴 건 버터 쿠키처럼 보였는데, 똬리를 튼 뱀 모양인 게 특이했다.


‘고르곤이 뱀 모양 쿠키를…. 아니다, 인간도 인간 모양 쿠키 먹지.’


묘한 감상을 떨쳐내고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으니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나는 소모된 정신력을 보충하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더 물어볼 건 없고?”


“또 대답 못 한다고 하시게요?”


고용주에 대한 불만은 여전했기 때문에, 나는 드물게도 예의가 없었다. 날 이런 상황에 빠트린 게 저 사람은 아니지만.


“가능한 분야도 있단다. 특히 네 남은 수명과 무관한 화제라면야.”


하지만 제일 궁금한 건 그거였는데. 나는 과자를 하나 더 먹으며 고민한 끝에 물었다.


“제가 떠나고 나면 동료들은 어떻게 지낼까요?”


“이미 알고 있지 않니? 네 행동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수야 있겠지만. 그리고,”


대현자가 위로하듯 내 손등을 두드렸다.


“그것 역시도 그 사람들의 선택이란다. 특히나 네 손을 떠난 다음이라면, 네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남은 과자를 마저 먹었다. 그러다 보니 목이 메었으므로 이제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차도 더 마셨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진 않으니 뭔가 더 물어보긴 해야 할 텐데. 시간제한이라면 몰라도 질문의 횟수에는 제한이 없는 게 이 퀘스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남들은 점 보러 가서 뭘 묻지?’


사람들이 왜 저런 데 돈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흘겨본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건강운, 이대로 살면 넌 죽는다. 사업운, 사업이 성공해도 넌 죽는다. 출세운, 너는 인류를 구원할 예정인 시한부 용사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게 내 문제일까. 그 와중에 연애운 같은 단어가 생각나는 바람에 괜히 자괴감만 들었다.


좌절하며 상태창을 열어보는데 퀘스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


〈서브 퀘스트〉 신학 논쟁


마신이 불러온다는 ‘종말’이 무엇이고, 고대인이 받은 ‘심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당신은 아십니까? 모른다면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 퀘스트 보상 : 새로운 고유 스킬)


- 고대 유적 탐사하기(2/3)

- 사제, 또는 ‘현자’ 칭호를 가진 사람에게 고대인에 관해 묻기(2/3)


☆☆☆



‘아, 이 사람도 현자지. 동시에 사제고.’


원래 이 질문은 스테노에게 하려 했다. 스테노 역시도 ‘현자’ 칭호를 갖고 있고, 1회차에서는 대현자를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쪽이 더 아는 게 많겠지?


“고대인은 대체 어떻게 생긴 종족이었나요?”


뭘 물어보든 횟수만 채우면 그만이니, 이건 어찌 보면 사리사욕에 해당하는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궁금하니까.


나는 공룡이라는 답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대현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뒤이은 답변에 실망하기도 잠시.


“모른다. 정확히는 우리가 그걸 알아서는 안 된다.”


“…어째서죠?”


“우리는 고대인보다 더 약하고, 어리석고, 그래. ‘불완전’하다고 하지. 그렇기에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반대로, 홀로 완전한 것은 어떤 모습이냐?”


“….”


“뭘 상상했느냐? 더 지혜롭고 오래 살 수 있는 인간? 더 융통성 있고 많은 자손을 남기는 엘프? 더 모험심이 강한 엘칸? 더 높이, 저 바다 너머까지도 날아갈 수 있는 가루다? 룬폭스처럼 영리하고, 놀처럼 강인하며 카라칼처럼 날쌘 무언가? 아니면 추위에도 꺾이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날개 달린 고르곤?”


나는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현자가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보통은 자기 종족이 더 ‘완전해진’ 모습을 상상하더구나. 너는 좀 희한하긴 하다만.”


공룡을 상상한 것까지 들켰다는 말이어서,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인간보다는 그쪽이 더 멋있지 않은가요?”


“요점은 알아들었겠지? 어떤 종족도―”


“‘완전했던’ 고대인과 더 가까운 존재여서는 안 된다. 예, 이해했습니다.”


아무에게나 묻지 말고 사제나 현자에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퀘스트 조건을 달성하기에 충분한 문답이었음을 시스템 역시도 확인해주었다.



- 고대 유적 탐사하기(2/3)

- 사제, 또는 ‘현자’ 칭호를 가진 사람에게 고대인에 관해 묻기(3/3)



이 질문에 관한 답변은 드물게 만족스러웠고, 그러면 또 뭘 묻지?


‘아, 재물운.’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실용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제가 다음 목적지를 아직 못 정했거든요. 지금 쓰는 것보다 더 좋은 무기도 구해야 하고, 돈도 좀 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대현자가 이번에는 별 고민도 없이 답했다.


“남쪽으로 가거라. 거기서 좋은 인연을 만날 테니.”


“남쪽이요? 여기서 더 남하하면….”


“그게 누구일지는 천천히 잘 생각해보고, 속 시원하게 답변해주지 못한 대신 선물을 하나 주마. 마침 잘 챙겨왔구나.”


말하며 대현자가 가리킨 건 내 방패, 아이기스였다. 내 고향 땅의 신화에서, 이 방패는 아테나의 손에서 페르세우스에게로 넘어갔다가 메두사의 잘린 목과 함께 다시 돌아온다. 아테나는 그 전리품으로 방패를 장식하고, 결과적으로 아이기스는 본래보다 더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한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내 손에 들어온 아이기스에는, 날개 달린 뱀 한 마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구불구불한 긴 몸통을 동그란 방패 위로 맵시 있게 접어 넣고, 머리를 들어 적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래. 이리 줘 봐라.”


그리고는 잠시 꿈결 같은 음성이 들렸다. 대현자가 긴 손가락을 뱀의 몸통 위로 미끄러트리며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노래했다. 아니. 노래가 맞는지, 언어이기는 한지, 저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밖에.


“자, 됐다. 지금부터 네 여정이 끝날 때까지, 내 마법이 너와 함께한다.”


나는 홀린 듯 방패를 받아 들어 아이템 창을 확인했다.



☆☆☆


[★ 아이기스 고르고네이아]

고르곤 대현자 키르케가 축복한 방패. 고대철의 견고함에 고르곤의 마법을 더해 더욱 강력해졌다.


방어력 +250(×4)

치명타 저항 +15

모든 종류의 원소 저항 +99

방어에 성공했을 경우, 50% 확률로 [마법 반사] 스킬 발동

마주 본 적에게 일정 확률로 [마비] 스킬 발동

내구도 ∞


☆☆☆



“어떠냐,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쯤은 줄었지?”


대현자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옆구리 찔러 절 받는 식이라고 해도, 이쯤 되면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네요. 잘 쓰겠습니다.”





☆☆☆


〈서브 퀘스트〉 운명 직조자


마을에 일어난 갈등을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한 당신에게 어둠숲의 대현자가 관심을 보입니다. 혼란스러운 여러 일들에 관해서 대현자에게 조언을 구하십시오.


- 대현자 키르케와 대화하기 [✓]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 유니크 아이템, [★ 아이기스 고르고네이아]


☆☆☆



대현자와 면담을 끝내고 집 밖으로 나와 보니, 사냥하라며 쫓겨난 검치호가 어쩐지 스테노 앞에서 배를 까뒤집고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지금 보니 스테노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녀석에게 줄 간식까지 챙겨온 모양이다.


“아까는 일부러 그랬지?”


“글쎄, 내가 뭘?”


스테노가 검치호의 북슬북슬한 목덜미를 쓸어주며 킥킥 웃었다.


‘저렇게 커도 고양이는 고양이구나.’


저 안에서 진땀을 흘려서일까, 아니면 그새 익숙해진 것일까. 처음에는 겁먹었지만 나도 이제는 용기 내 볼 마음이 생겼다.


“만져봐도 돼?”


“그럼. 얼마나 순한데.”


스테노가 가르쳐주는 대로 이마를 긁어주자 검치호가 만족스럽게 그르렁거렸다. 맥락 없이 들었다면 등골이 서늘해질 법도 한 소리였으나 안전하다고 확신해서일까, 그저 신기했다.


“몸집이 커서 그런가 골골거리는 소리도 되게 크네. 오토바이 소리 같다.”


“무슨 소리 같다고?”


“…아니, 소리가 참 크다고.”


평소에 나름 잘 단속해오던 입까지 줄줄 새는 걸 보니, 판타지 점집 체험이 나한테 너무 자극적이었나 보다. 뭔가가 근본적으로 개선된 건 아니지만, 동료들 앞에서는 내색 못 하던 고민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조금 후련해지기는 했다.


우리는 거대 고양이와 잠시 더 놀다가 숲길을 따라서 되돌아갔다. 그러다 나무 그늘에서 서로 뒤엉켜 있던 한 쌍을 발견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딱히 성적인 의미는 아니고, 아닌 게 맞나? 어쨌거나 고르곤 특유의 뱀 머리카락이 정말로 뒤엉켜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하고나 막 하는 수준의 신체접촉은 아닌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테노가 맑은 소리로 웃었다.


“왜 내 눈치를 보니? 좋은 시간 보내렴.”


두 사람의 면면을 보니 놀란 이유가 순전히 연인 간의 다정한 신체접촉을 남에게 보여서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은 나도 잘 아는 메두사였고, 다른 한 사람도 이름을 모를 뿐 낯이 익었으니까. 챠리와 함께 술 마시던 무리 중에 끼어있던, 비늘이 윤기 나는 검은색이어서 유독 기억에 남은 어린 고르곤이다.


외동이라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데이트하다 큰언니와 마주쳤다면 나라도 민망할 것 같기는 했다.


“더 할 말 없으면 빨리 비켜주자.”


스테노의 귓가에 대고 내가 속삭였으나, 메두사의 여자친구 쪽이 먼저 다가와서 알은체했다.


“지난번에는 인사를 못 드렸는데, 안드로메다예요. 메두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메두사에게 돌아가서 도로 손깍지를 끼었다. 메두사도 미소 지으며 내게 묵례했다.


‘이러니까, 어떻게 도망치냐고.’


어린 연인들이 눈부신 만큼 저 사람들에게 곧 닥칠 운명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콧등이 시큰해진 것을 애써 숨기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용과 마법, 모험과 환상, 그리고 여자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출간작 🐉드라고의 기사🐉, ⚡회색 탑의 마법사⚡, 외전집 🌨어느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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