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웨<->페아나로 뉘앙스 주의 / 코멘트는 댓글에 



놀로핀웨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두 번째로 결혼한 부인이다. 부친의 사별과 재혼에 얽힌 정황은 아무도 제대로 얘기해준 바 없는 이 집 금기의 화제지만 네 남매는 어머니와 이모들의 전화 통화, 얼근히 취한 아버지 친구들의 주정섞인 잡담을 뒤섞어 나름의 역사를 추측한다.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은 그의 대학 후배로 예대에 적을 뒀고 아버지와는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다고 한다. 첫눈에 반한 아버지가 몇 년이고 끈질기게 구애해 성사된 사이였다는데, 좋아하는 여자가 발목을 다쳤다고 시험 기간 내내 그녀를 안아들고 도서관 계단을 오르내리는 열정적인 젊은이는 남매들이 익히 아는, 침착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부친과는 어쩐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당시 기준으로도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가졌는데, 첫 딸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자살했다. 최초 발견자는 남편이었다. 약을 먹었다던가 목을 멨다던가, 원체 예민했다던가 원래도 오래 우울증을 앓았다던가. 핀웨 놀도란의 오랜 친구들은 홀아비로 홀로 남아 갓난 딸을 키우는 그가 눈 뜨고 못 봐줄 가여운 꼴이었다고 증언했다. 

수절과부마냥 죽은 사람 유품 끌어안고 어린 딸 하나를 낙 삼아 살며 갖은 선자리를 다 거절하던 그가 오랜 선배의 여동생을 소개받은 후 재혼을 결심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짝 없이 지낸 십 년이 너무 외로워서였을까? 짝 없이 지낼 남은 평생이 두려웠던 걸까? 남매들의 어머니가 모든 면에서 죽은 첫 부인과 달라서였을 수도 있다. 그는 두 번째 결혼을 준비하며 첫 부인의 유품을 전부 태웠다. 

물론 보다 현실적인 이유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의 정계 경력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건 재혼하면서부터였다. 남매들의 외가는 보수 정당의 당수를 대대로 역임한 유서깊은 정치인 집안이었고, 아버지는 결혼식 전후로 당적을 바꿨다. 

첫 부인과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 대해선 남매들도 좀더 알고 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손윗이복누이 쿠루핀웨 페아나로는 부친의 재혼 전후로 이 집을 떠나 남매들과는 거의 안면이 없다. 집을 떠날 당시 그녀는 열 살을 좀 넘은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부친을 유난히 따르는 그녀가 예비 새어머니에게 당장은 경끼를 일으켜도, 아직 어린데다 친어머니 기억도 없으니 한 집에서 부대끼고 살다 보면 언젠가 가족이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름이 성격과 같아 어린 나이에도 싫은 걸 억지로 받아들이느니 혀를 깨물고 피를 보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좀 가라앉을 때까지만' 외가에서 지내기로 했던 어린 소녀는 부친의 새 가족들이 차지한 집에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이복누이의 이름을 들은 이모의, 너희들 엄마가 저 애 어머니 되겠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냐는 한 섞인 중얼거림.)

독선적이고 고압적이고 무뚝뚝하고 남 말은 죽어도 안 듣고, 한 번 눈 밖에 난 사람에겐 곁을 주지 않는 그녀의 그 '대단한' 성격을 사람들은 특출난 두뇌의 이면이라며 합리화했다. 아버지와 첫 부인 사이의 딸은 동시대에 견줄 이가 없는 축복받은 천재였다. 또래가 나눗셈을 겨우 배울 나이에 그녀는 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고 십대 중반쯤에는 수학, 물리학, 언어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도 모자랄 학문적 업적을 스물다섯도 넘기 전에 일궈낸 그녀의 눈부신 명성은 이제 남매들 아버지의 정치적 자산이기도 하다. 그녀는 기자들 앞에서, 시상대에서, 저서의 첫 페이지에서 자기 업적의 공을 다 사랑하는 부친에게 돌렸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새 가족들과는 길에서 마주쳐도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복누이의 이름은 남매들 집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 놀로핀웨는 응접실에서 전화기 너머 외숙모에게 한탄하는 어머니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어떻게 그 페아나로와 불화를 보여? 집에 기자들 부를까? 드라마감 던져주고, 나는 악녀가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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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아나로가 와 있다며?'

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여동생이었다. 조그맣게 숨죽인 목소리가 어머니 몰래 건 전화인 모양이었다.  

'그 여자 뭐 하고 지내?'

'별 거 없어.'

'뭐 하고 지내는데.'

'잘 몰라. 나도 학교 가 있잖아.' 

'밤이랑 주말엔 집에 있을 거 아냐. 그 여자 뭐 하는데? 보나마나지. 또 아빠한테 착 붙어서 아양 떨겠지.'

'그분도 아버지 딸이야. 평소엔 같이 살지도 않는데 좀 냅둬. 그리고 그 여자가 아니라 누님이야.'

'그 여자한테 우리 엄만 엄마고? 웃겨. 난 그 여자가 아빠랑 같이 있는 거 싫어. 

'질투 좀 그만 해.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고 중학생인데...'

'어린애 질투는 그 여자가 하지, 우리랑 엄마한테! 우리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아. 그 나이 먹고서 남의 아빠 뺏어가고 싶어서 안달이라고.' 

잔뜩 골이 난 여동생의 목소리는 송곳처럼 뾰족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페아나로'와 그 애들을 한 달씩이나 집에 데려온 일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남매들 중 가장 아버지를 따르는 그녀라 부친 본인에게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으니 그 여자랑 남겨진 불쌍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동조해 주기는 커녕 미적지근하게 나오니 더 속이 상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좀 어떠셔.'

'엄마도 속상하지 뭐. 나한테 말은 안 해도 보면 몰라? 이모들도 다 아빠 욕해.' 

'누나는.'

'우리가 아빠를 이해해야 된대. 맨날 하는 말 있잖아, 그분은 너무 어릴 때 집을 떠나셨고, 이혼도 하셨고 어쩌고... 아주 니엔나 님이 따로 없어. 그치만 누가 집 나가라고 했어? 이혼도 지가 성격이 지랄맞아서 당해 놓고.' 

'이리메!'

'사실이잖아. 양육권 받은 게 변호사의 기적이라며. 위자료 엄청 줬다던대? ...그러고 쪼르르 아빠한테 달려오다니 염치도 없어. 이제 자기 편이 없으니까 우리 아빠 뺏어가려는 거라고.' 

어휴... 여동생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자 이리메는 잔뜩 약이 오른  고양이 같은 소리를 냈다. 여긴 정말 별 일 없다고, 그 사람도 자기 일 바쁜데 뭘 걱정하냐고 적당히 여동생을 달래 통화를 마무리하고 휴대전화를 책상에 내려놓은 놀로핀웨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이번에는 아무도 들을 사람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매들 중 가장 솔직한 이리메는 비록 표현이 좀 거칠어도 '진실의 입'이기는 했고, 어쩌면 통찰력도 좀 있는지 몰랐다. 그애의 추궁에 모르는 척 발뺌했지만 실제로 그들의 손윗이복누이는 이곳에 오자마자 그들의 부친을 빼앗아 버렸으니 말이다. 


'그 여자'가 여기 오고 나흘이 지났지. 놀로핀웨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올 때면 항상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밝은 웃음소리들이 들린다. 내가 나고 자란 집을 화기애애하게 채우는 낯선 목소리들과 모르는 음악. 

책가방을 멘 채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 문턱을 넘으면 은은한 노란 조명 아래 둘러앉은 한 행복한 가족이 보인다. 어린 조카들과 이복누이, 그리고 아버지다. 세 명의 조카들은 보통 남매들이 앉곤 하는 거실 오른편의 녹색 소파를 차지했는데, 장남인 넬랴핀웨는 얌전한 차림으로 의젓하게 앉아 있고 차남 카나핀웨는 제 집에서 가져온 조그만 오르골을 가지고 놀고, 그 둘 사이에 낀 어린 막내 투르카핀웨는 손발과 백금발에 다 짓붉은 즙을 묻힌 채 두 볼이 미어져라 과일을 우물거린다. 그런 조카들을 아버지와 누이 두 사람이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그들은 '부모님 자리'인 거실 중앙의 레몬색 소파에 앉았는데, 아버지는 늘 앉던 자리에, 누이는 그 바로 곁에 나란히 붙어앉았다. 

놀로핀웨가 거실에 들어서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가족의 일원에 대한 자연스러운 환대가 아닌, 늦은 시각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침입한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공간을 채운다. 마치 행복한 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은 홈 비디오가 일시정지되듯이 맏조카와 작은조카는 젊은 '숙부'에게 예의를 차리듯 자세를 똑바르게 고쳐 앉고 손수건으로 막내동생의 입가를 닦아준다. 아버지 어깨에 기대 앉은 누이는 그래 왔냐는 인사를 건네긴 커녕 이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지만, 예쁜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진 채다. 

아버지만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아들의 귀가를 반긴다.

"왔니?"

"다녀왔습니다."

"그래. 와서 앉을래?"

"아니요, 일이 많습니다.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이다."

그가 목례하고 거실을 나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가면 그제야 재생 버튼이 눌려 일시정지되었던 영상이 돌아가듯 등 뒤에선 화기애애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조카들은 편안하게 자세를 고쳐앉고 누이의 입술도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겠지. 이제야 침입자, 이방인이 사라져 우리 세상이 돌아왔다는 듯이. 


바로 오늘도 그런 식이었다. 놀로핀웨가 제 방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여동생과 통화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이 순간에도 일층 거실에서는 한 달간 이 집을 차지하기로 되어 있는 행복한 가족의 자기들끼리의 한때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어린 여동생에게 말했다면 그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당장 집에 돌아오겠다고 설쳤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를 쫓아내고 우리 집을 되찾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어린 여동생만큼 아버지를 좋아하지도, 어머니나 누나만큼 이 집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는 내년이면 가능한 먼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날 생각이다. 

원한이나 비감 대신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몇 년째 꺼질 줄 모르는 불길처럼 소년의 가슴을 태우는 짝사랑 상대의 모습이다. 매일 그들에게 목례하고 제 방에 올라온 후 그는 방금 전 본 누이의 모습을 기억하고 곱씹었다. 그녀는 여러 벌의 실내복을 매일 바꿔 입었는데 오늘은 발목을 덮는 길이의 자줏빛 실크 가운 차림이었다. 발은 맨발이고, 손에는 반지가 없고, 얼굴엔 화장기가 없는데도 어쩐지 입술이 붉고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버지와 너무 가까이 붙어 앉는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뱃속이 울렁거린다, 저녁을 먹은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위통을 느끼듯이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평소 남매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좌우로 나란히 자리하는 소파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다. 그야 긴 녹색 소파는 조카들이 차지했으니 뭐. 아버지와 딸이 나란히 앉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다. 어느 날엔 누이의 팔뚝이 부친의 것과 딱 붙었고, 어느 날엔 팔짱을 꼈고, 오늘 그녀는 부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들의 점잖은 부모님은 절대 저 정도로 가까이 앉지 않으셨다. 이제 중학생이 된 여동생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며 온종일 그분에게 매달려 지내며 누가 떼낼라치면 원숭이처럼 빼액 소리를 질러 자기 영역을 주장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 그애는 고작 열 살에 불과했다. '그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뺏으면 울고 무엇에든 침을 묻히는 꼬마 숙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한 번 결혼했다 이혼한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완전히 성숙한 여성이었다. 자줏빛 실크 가운은 품이 넉넉했지만 너무 얇아서 육체의 굴곡진 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삼십 분 전 소년은 저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가운 앞섶을 엿보려는 시선을 내리까느라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너무 꽉 붙어 앉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놀로핀웨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옷장에서 여름용 운동복과 러닝용 운동화를 꺼냈다. 2층 테라스와 연결된 외부 계단을 내려가 뒷문을 통과하니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는 러닝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도로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뺨을 감싸는 공기는 시원하기는 커녕 후끈하고 습습하다. 한여름의 열대야. 달려도 달려도 개운하기는커녕 옷을 푹 적시는 땀에 점점 더 불쾌해지기만 하지만 방법이 없다. 그 여자는 아버지와 대화할 때면 목소리가 어찌 그렇게 사근사근한지 모르겠다. 차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다. 물리학 법칙을 강의하는 동영상 속 목소리와도, 전 매형을 부르는 목소리, 아이들을 다그치는 목소리와도 다르다. 자신을 향하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물론, 그런 목소리도 예쁘다. 

몸 안에 묵직하게 고여 있는 열기는 도무지 증발하질 않고 오히려 뛸수록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살갗이 끈적끈적하고 입안이 진득진득하다. 등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호흡이 훅훅 퍼진다.

왜 그 사람은 항상 나의 시선을 홀딱 빼앗아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래오래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모를 수가 없다. 놀로핀웨는 누이 같은 세기의 천재는 아니지만 나름 이름처럼 지혜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욕망을 직시할 줄 안다. 아버지와 누이와 그녀의 아이들이 둘러앉은 거실. 매일 저녁 그들의 행복을 볼 때마다 마음에 지릿한 전류가 흐르는 이유도 알고 있다. 내가 사는 집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남편을 빼앗긴다는 두려움 따위일 리가 없다. 반대로 소년은 빼앗기는 두려움 대신 빼앗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래 그는 부친 대신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아, 얇은 실크 가운에 감싸인 허리를 끌어안고 나의 어깨에 그 사람을 뉘여 보고 싶었다. 

오늘 밤엔 이제 정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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