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년 전에 트위터에 풀었던 썰 문장만 아주 대충 다듬었습니당.

※화한독과 빙속초가 있으면 어떤 막무가내 설정도 두렵지 않아!

※정말이지 처음 썰을 풀 때는 이렇게까지 정매 기반이고 이렇게까지 흑린신스러울 예정이 아니었습니다…….

 

 

1.

죽을힘을 다해 어떻게든 매장소를 살려놓은 린신은 매장소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서 돌보며 마음을 정리함.

때는 전쟁이 끝난 후, 장소는 랑야각.

두 번이나 그가 살린 목숨이지만 이 치가 사랑하는 사람은 린신이 아니고, 깨어나면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목숨 값 운운하며 곁에 붙들어놓을 수는 있겠으나, 린신은 새장에 갇힌 매장소를 원하지 않는다. 하여 제 연모의 마음은 고이 접고 그저 제 손으로 사랑하는 벗을 살려냈다는 충족감만을 안고 매장소를 보내주기로 작정함.

마침내 깨어난 종주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린신이 자신을 살렸음을 알고 한참 아무 말도 못하다가, 린신의 손을 힘주어 붙잡는다. 차마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사였고, 씁쓸함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린신.

“그럼 이제 금릉으로 갈 텐가?”

“갈 수 있겠나?”

“무리하면 가능하겠지. 가겠다면 안 의원님을 꼭 동행하고, 말 좀 잘 듣게.”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린신은 투덜투덜 핀잔을 준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아나? 나도 바쁜 사람이야. 안 따라가.”

매장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함.

“……보름 후에 출발하겠네. 이 은혜는 꼭 갚겠어, 린신.”

새삼스레 낯간지러운 소리라며 호들갑을 떨고는 곧 비류를 찾겠다는 핑계로 황급히 방을 나가는 린신.

 

2.

보름동안 린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종주님을 피한다. 계속 얼굴 보고 있으면 구차하게 매달리거나 붙잡고 말 것 같아서……. 매장소도 떠날 준비로 나름대로 바쁜 모양인지 린신의 행방을 묻기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찾지는 않음.

매장소의 생존은 아직 아무데도 알리지 않음.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포기하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제 입으로 연적에게 기쁜 소식을 순순히 알려주기엔 심술이 돋아서.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 때, 비류가 다급하게 린신을 찾음.

“소형 아파요! 린형 와!”

혹 뭔가가 잘못되었나 하여 사색이 되어 매장소에게 달려간 린신은 사람들이 종주의 방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근처를 서성이며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사이를 지나 방으로 쳐들어가자 매장소가 멍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기함할 광경을 마주하고……. 과거 화한독 해독 중에도 거의 본 적 없는 매장소의 눈물에 순간 굳어서 멈춰서는 린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무슨 일이냐 물어보자, 매장소는 한참 만에 입을 엶.

“린신, 내 어머니 성함이…… 뭐였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

 

3.

황급히 이것저것 진단한 결과 린신은 매장소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음. 그러나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아직 그로서도 파악할 수 없었음.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네. 자네는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났지 않나.”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어.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생각이 나질 않아. 그제는 견평이랑 이야기를 하는데, 대체 그를 어디서 처음 봤었는지 기억나질 않았어. 오래된 일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그가 적염군에 속했었다는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지? 뭔가 이상해, 린신 뭔가 잘못되었어.”

혼란스러워하는 매장소를 애써 안정시켰지만 역시 머리가 복잡한 린신…….

그러나 다음날 매장소가 전날 제가 울었던 기억을 완전히 잊고는 태연하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에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는다.

결국 린신 매장소를 곁에 두고 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림. 내심 제 미련이 그를 붙잡으려는 건지 의심스러웠으나, 환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금릉출행준비를 전부 취소시키는 린신.

며칠간 지켜본 결과 매장소는 하루에 하나씩, 무작위로 기억을 잊고 있는 것 같았음. 기억이라는 것이 하나, 둘 단위로 셀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랬음. 바로 전날 일을 잊어버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일들. 이때쯤엔 매장소도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매일 아침마다 제 기억을 복기해보느라 정신이 없다. 임수의 기억만으로 버텨온 생애이기에, 기억을 잊는다는 것은 매장소에게 죽기보다 끔찍한 일……. 때론 뭘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는데 뭔가 잊었을 거라는 생각에 공포에 질리기도 한다.

“이 상태로 경염을 볼 수는 없어, 린신, 도와주게 제발 날 좀 도와줘…….”

애원하는 매장소라니……. 그가 저를 의지함은 기쁘지만, 그게 소경염을 위한 것임에 린신은 마음이 착잡하다. 그러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죄라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하고 마는 린신.

 

4.

매일 아침 두 사람의 일과는 지난밤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 두런두런 옛날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그 시간은 일견 평화로웠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음. ‘매장소’의 기억 대부분은 린신과 강좌맹원들이 기억하고 있으므로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임수’의 기억은 오로지 매장소의 기억에만 의존해야했으므로 ‘임수’의 무언가를 잊었을 때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요원할 따름. 오래된 일일수록 더더욱…….

매장소는 기억을 잃고 있음은 분명한데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도 알 수 없어 깊은 상실감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음. 린신으로서도 그런 매장소를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 매장소와 함께 옛 일을 떠들 때가 아니면 그는 랑야각의 온갖 기록들을 뒤지며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조사했음. 그러나 성과는 없었음.

매장소는 이제 임수의 기억을 되새기는 일에 매달리기 시작함. 입만 열면 과거 금릉의 일들과 적염군의 기억과 경염, 소경염에 대한 이야기만……. 차마 수하들에겐 못할 얘기도 벗인 린신에게는 숨기지 않게 되었으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린신은 참담해지기만 함.

자네는 경염으로 이루어진 존재 같아.

 

5.

한 번은 각오를 다진 린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해봄

“금릉의 그 자에게 돌아가면…… 그 자는 자네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 순간 매장소의 얼굴에 떠오른 기대와 절망에 린신의 마음도 무너져내림.

“……아니, 안 돼. 경염은 아직 내가 산 줄도 모르잖아. 그에게 온전한 임수를 보여주지도 못할망정…….”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 눈빛은 절절한 그리움에 젖어있어서, 린신은 차마 제 욕심껏 여기 남으라 말하지도, 그 자에게 가라고 떠밀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자네 의견이 중요하지’라고만 중얼거림. 속으로 저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욕하면서.

 

6.

매장소는 점점 더 많은 기억을 잃어버림.

사소하게는 얼마 전에 나눴던 대화부터, 크게는 누군가의 존재까지……. 종주가 려강에게 누구냐 물었을 때, 려강이 대성통곡을 해버린 일은 린신의 마음까지도 서늘하게 했음.

그러는 와중에도 바깥세상은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음. 황제 소선이 끝내 죽었고, 태자 소경염이 즉위하게 됨.

그 소식은 랑야각까지 날아왔는데, 우울한 종주에게 기분전환이 될까 하여 각원들과 강좌맹원은 종주에게도 그 소식을 전함.

그러나 반응은 뜻밖이었음.

종주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기뻐하거나 차라리 슬퍼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라는 듯한 반응…….

“혹시나 싶어 묻는데, 자네 태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나?”

“소경선……. 2황자 소경선 아닌가? 그가 즉위한다면 나라꼴이 말이 아니겠군.”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아연해지자, 종주는 곧 자신이 아주 중요한 기억을 잊었음을 깨닫고 사색이 됨. 황급히 린신을 돌아보니, 황망하기는 린신도 마찬가지였으나, 의원의 자각으로 그는 일단 매장소를 안심시켜야한다고 생각.

“장소, 자네가 금릉에서 한 일들 기억나나?”

“……금릉에서? 나는, 적염군 신원을 위해…….”

“그래, 그 과정에서 소경선은 폐위되고 다른 사람이 태자가 되었네. 자네가 선택한 사람이 말이야.”

“……내가, 경염을 태자로 만들었군.”

총명한 종주는 사람들의 반응과 부분부분 사라진 기억들을 얼기설기 끌어 모아 금방 정답을 도출해냄. 그러나 잊었던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그는 충격을 받은 채 사람들을 물림.

충격 받은 것은 린신도 마찬가지.

마치 소경염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던 매장소가 일부지만 소경염에 대해 잊었다는 것.

복잡한 감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음. 매장소의 병세가 심각함에 대한 걱정과, 소경염조차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과, 누구보다 충격을 받았을 매장소에 대한 슬픔과, 저열하고 비겁한 기쁨이 뒤섞임.

그날 밤, 매장소는 린신과 단둘이 마주한 채 입을 엶.

“린신, 경염을 만나고 싶네. 떠나겠어.”

순간 린신은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그 치를 만나겠다고? 이제 와서? 이제 그 자는 황제야, 장소.”

“더 늦기 전에 만나야겠네. 더 늦으면…….”

매장소는 말을 삼켰으나, 린신은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음. 더 늦어서 소경염에 대한 걸 전부 잊어버리면, 그때가 되어 그를 만나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매장소가 소경염에 대한 걸 전부 잊어버리면…….

린신은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입 안으로 곱씹음. 그 자에 대한 걸 다 잊을 때쯤이면 린신에 대한 기억도 다 잊어버리겠지만, 임수를, 매장소를 단단히 사로잡고 있던 그 자의 그림자가 사라진다면…….

충동이 마음을 들쑤시는 가운데, 린신은 제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음을 깨달음.

매장소가 원하는 대로 그가 금릉으로 돌아가 소경염을 만나고 마음 편히 남은 기억을 정리하도록 할 것인지(어쩌면 그 자를 만나면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르지,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그게 아니라면…….

린신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평소와 같은 어조로 이야기함.

“그래, 알겠네. 떠날 채비는 내가 할 테니까 자넨 신경 쓰지 말고 좀 쉬어.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졌어. 가뜩이나 약한 몸인데, 없던 병도 생기겠네.”

“……고마워, 린신.”

“자네 나한테 빚진 게 얼마나 되는지 알아? 평생 고마워해야하는 것도 알지?”

매장소는 대답 없이 조용히 미소 지었고, 린신은 먹먹하게 그 미소를 바라보다가 방을 나섬.

 

7.

매장소를 놓아주겠다고 생각했었지.

그가 원하는 대로, 그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이제야말로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의 날개를 꺾어 새장에 가두고 싶지 않아서. 그의 장소는 화병에서 시들어가는 가지가 아니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향기로운 꽃가지를 드리운 당당한 매화나무였으므로.

하지만…….

 

8.

그날 린신은 강좌맹원들에게 이야기함. 종주의 불안정한 상태는 결코 오랜 여정을 견딜 수 없으므로 금릉행은 불가하다. 그러나 그가 상심하지 않도록 모든 준비가 잘 되고 있는 것처럼 잘 얼버무려라. 그게 진짜 종주를 위한 일이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린신은 매장소를 속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고, 말투와 행동거지 어디에도 거리낌이나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음. 린신은 제가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함.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황궁에 있는 그 자도 매장소의 지금 상태를 알게 되면 저만큼이나 망가질 것이 분명하지.

매장소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고 주동자가 린신이라는 것을 앎. 그러나 린신은 매장소가 눈치 챘음을 안 순간부터 교묘하게 그를 피하기 시작했고, 랑야각은 그의 수중에 있으므로, 매장소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음. 강좌맹원들마저도 종주의 건강을 염려하여 린 공자 곁에 계시라 간청하기도…….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매장소가 약을 거부하기 시작하자 끝내 린신이 대령됨.

“내 사람들까지도 다 자네 편으로 만들어놨더군.”

“자네를 위해서였어.”

“나를 위해서? 내 의사는 완전히 무시한 채 날 위해서 그랬다고?”

“장소, 진정하고 내말을 들어봐. 자네의 금릉행을 내가 재미로 막았겠나? 알다시피 정왕은 이제 황제고, 죽었다고 알려진지 1년이 훌쩍 넘은 자네가 나타난다면 누가 믿고 황제를 만나게 해주겠나. 황제에게 자네의 상태를 이해시키는데 시간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야.”

“배려는 고맙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자네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그래, 하지만 난 의원이야! 이런 상태의 자네를 금릉까지 먼 길을 보내라고 하면, 의원의 양심으로 허락할 수 없네!”

“내 상태는 내가 알아. 안의원님을 동행하면 위험할 정도는 아니야. 말했잖아, 린신 더 늦을 수는 없다고.”

매장소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는 린신……. 언제 한 번이라도 그를 설득했던 적이 있었나. 린신의 일생 한 번도 매장소를 이기지 못한 채 휘둘리기만 해왔다.

결국 린신 ‘자네 마음대로 하게!’ 하고 소리치고 뒤돌아 나오고 만다.

“린신, 자네한테는 항상 미안해. 하지만…… 내겐 이제 시간이 없어.”

등 뒤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린신.

 

9.

그러나 시간은,

종주에게 등을 돌린 시간은,

 

린신의 편이라.

 

10.

다음날. 금릉으로 종주를 모시고 가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 사실을 알리러 매장소에게 향한 린신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그를 맞이하는 종주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만다.

매장소는 소경염을 만나러 가야한다는 사실을 잊음.

 

그 다음날은 매령을,

그 다음날은 물소라는 별명을,

그 다음날은 임수라는 이름을.

 

11.

새장에 갇힌 매장소는 원하지 않았기에, 끝끝내 그를 놓아주기로 했었지…….

 

12.

아침이면 그는 어둑하고 촘촘한 안개에 둘러싸인 기분 가운데 잠에서 깨어남.

낯선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면 문이 열리고, 신선처럼 헌헌한 미공자가 웃는 낯으로 성큼성큼 들어섬.

“장소, 일어났나? 아침이라 정신없지? 일단 진찰부터 하고 얘기하세.”

“……당신은 누구지?”

남자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담담하게 입을 열고,

“자네 이름은 매장소고, 나는 린신일세. 덧붙이자면 난 자네의 주치의이면서,”

한없이 깊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속삭이지.

“연인일세.”

 

13.

ー하지만, 애초에 날개가 꺾인 새라면, 새장에 두고 돌보는 게 뭐가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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