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트리스가 아주 얕게 출렁이고 미지근한 체온이 제 곁을 빠져나간다. 시트와 이불이 스치며 작게 바스락거리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피트.” 우악스럽게 손목을 낚아챘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브래들리.”

가물가물한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고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몸이 보인다. 별빛도 드문 으슥한 새벽, 초록빛 눈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나 때문에 깼니? 쉬, 다시 자…. 서늘한 손이 차분하게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잠은 이미 깨끗이 달아난 뒤였다.

“왜 일어났어요?”

“화장실 가는 것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해? 아직도 혼자 자는 게 무서워?”

“거짓말하지 말고요.”

간격을 두고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매번 이런 식이다. 이십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연인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피트 미첼은 브래들리 브래드쇼에게 솔직하지 않다. 애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줄도 알아야지, 끈질긴 남자는 인기 없어…. 여자에게 인기를 얻는 법을 알려주는 삼촌이라도 되는 양 얄미운 말만 늘어놓는 입꼬리에 입술을 맞추자 비로소 헛소리가 끊긴다.

“같이 가요.”

“…다시 자라니까.”

“같이 가요.”

“루스터.”

화장실에 혼자 가기 무섭다고 울던 아기 브래들리는 졸업했잖아? 장난스럽게 속삭인 작은 몸이 익숙하게 품을 파고들더니 도로 침대에 눕힌다. 아직 새벽 세 시야, 조금 더 자. 아직도 이런 게 먹힌다고 생각하는 걸까. 느릿하게 목과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목을 붙잡았다.

“전 여전히 흡혈귀가 무서워요.”

“…왜, 어둠 속에 숨어있다가 널 잡아먹을까 봐?”

“다시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매버릭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것 봐. 그때 얘기만 꺼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면서. 두려움을 모르는 듯 하늘을 남자는 브래들리 브래드쇼 앞에선 종종 비겁해지곤 한다.

“그때도 전부 나를 위한 행동이라고 할 거예요?”

“…….”

“혼자 두지 말라고 했잖아요.”

안 그래…. 힘 빠진 목소리와 함께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손이 뺨을 감쌌다. 파일럿다운 굳은살이 박인 작은 손. 어리광 부리듯 그 손에 뺨을 기대자 엄지가 느릿하게 눈가를 문지른다.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렇다. 약속했다. 루스터가 간절해질 때마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무는 남자는 여전히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지만 한 가지는 약속했다. 두 번 다시 그렇게 떠나지 않겠다고, 항상 곁에 있겠다고. 문제라면 브래들리 루스터 브래드쇼가 그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 해봐요.”

매버릭이 순순히 입을 벌렸다. 얇은 입술 아래 인간이라기엔 비정상적으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인다. 희미한 달빛이 맺혀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검지를 가져갔다. 송곳니를 살살 훑자 흠칫 빠지려는 어깨를 움켜쥐고 집요하게 이를 쓸었다. 따뜻한 혀가 부드럽게 손가락을 입 밖으로 밀어냈다.

“잘못하면 다쳐.”

혀는 매버릭의 몸에서 얼마 되지 않는 따뜻한 부위다. 약한 온기가 남은 손가락 끝을 매만지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서늘한 입술과 대비되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입안을 헤집고 혀를 얽었다. 움찔 굳었던 어깨의 힘이 서서히 풀리더니 단단한 팔이 목을 감아온다. 파일럿의 숨이 가빠지도록 허벅지를 바짝 붙이고 더 깊게 입을 맞췄다. 매버릭이 루스터를 밀어낸 것은 혀가 다시 한번 집요하게 송곳니를 훑었을 때였다.

“다친다고 했잖아.”

그러나 그게 루스터가 바라는 일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살갗이 찢기고 그의 입 속으로 제 피를 흘려 넣는 것. 나 자신으로 그를 온전하게 채우는 것.

“…당신이 다른 사람 피를 마시는 게 싫어요.”

속내를 숨기고 매버릭이 좋아하는 어린 브래들리의 말투를 빌렸다. 나는 당신 하나면 충분한데, 당신은 나로는 부족해요? 심통 부리듯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자 매버릭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품에 안긴 몸이 잘게 떨렸다. 웃을 때마다 동그랗게 올라가는 귀에 입술을 문지르며 빈틈 하나 없이 몸을 맞붙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아랫배가 묵직해진다. 하나의 생물처럼 손발을 얽고 서늘한 몸에 제 체온을 옮기는 게 좋았다. 온몸으로 매버릭의 웃음을 듣는 것이 좋았다. 그의 웃음이 한 톨도 남김없이 제 안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피를 마시는 것도 이런 느낌일까. 루스터는 때때로 궁금해한다.

“의료용 팩에 담긴 피야!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다른 사람 피잖아요.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 마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야? 이런 걸 질투한다고?”

“네.”

“이렇게 어리광쟁인 줄 미처 몰랐네.”

“그전엔 솔직하게 티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단어 하나하나가 눅눅하게 귓가에 달라붙는다. 눈을 깜박이던 매버릭이 다시 소리 내 웃었다. 얼굴을 마구 주무르더니 머리를 끌어안는다. 나이가 들수록 어리광이 느네,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마구잡이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에 얼굴을 맡긴 채 느긋하게 매버릭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손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손가락을 단단히 엮고 어깨에 코를 문질렀다.

나라면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귀여워하진 않을 텐데. 이마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입술을 느끼며 루스터는 새삼 사랑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정정하진 않는다. 작고 어리고 순진한 브래들리는 아주 유용한 패였으므로.

‘내게 당신 외의 선택지는 없어요. 당신과 함께하는 게 천국이니까.’ 처음으로 한 침대에서 잔 다음 날이었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매버릭에게 열띤 모닝 키스를 퍼붓다가 아침을 대령했다. 침대까지 배달되어 온 쟁반 위의 치즈 오믈렛과 토스트, 커피를 멀뚱히 바라보는 매버릭의 부은 눈이 미친 듯이 사랑스러웠다.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마음이 마구 벅차올랐다. 드디어, 이제야…. 참지 못하고 넘치는 마음을 고백했을 때.

마주한 매버릭의 표정을 기억한다. 말문을 잃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건지 한참을 우물거리다 하는 말이 ‘꼭 그렇지는 않아.’였다. 흡혈귀가 아닌 인간과 함께하는 삶, 캐롤처럼 사랑스러운 아내를 맞이하고 어렸을 적 자신 같은 귀여운 아이를 가져 구스처럼 완벽한 가족을 꾸리는 선택지도 있지 않겠냐고….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루스터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매버릭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걸 억누르며 입을 빠끔히 열었다가 다시 악무는 동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말을 늘어놓은 매버릭은 불안하면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언제든 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연인. 바란 적 없는 이상향을 멋대로 안겨주려는 매버릭은, 브래드쇼에게 한해 지나치게 이타적인 연인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망할 브래드쇼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니.

“…내가 얼마나 유치한데요. 당신도… 그만큼 유치하게 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나를 욕심 냈으면 좋겠어. 어떤 이유로도 나를 포기할 수 없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또다시 나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게 당신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존재한다 해도,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를 보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전까지는.

루스터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숨기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쳤지만, 매버릭에게 더 이상의 핑계를 만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바닥에 가라앉은 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어린 브래들리의 가면을 쓰고 몰아치는 단어를 단순하고 보드랍게 포장한다.

“아주 못난 애인이네. 남자친구가 이렇게 사랑에 목마른 것도 몰라주고….”

맘껏 질투했으면 어서 다시 자. 매버릭이 가볍게 뺨에 입을 맞췄다. 맘껏? 내가 맘껏 질투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맵은? 못마땅한 신음을 길게 흘리며 엎어졌다. 허리가 붙잡힌 매버릭이 그대로 딸려 와 침대로 넘어진다.

“다시 아, 해봐요.”

매버릭이 허락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비집고 들어간 입술 안의 이는 꽉 다물려 있었지만 맵, 맵, 어린 시절처럼 속삭이며 뺨과 턱에 정신없는 입맞춤을 떨어뜨리자 끝내 열렸다. 힘없이 드러난 송곳니를 살살 훑다가 끝을 지그시 눌렀다. 따가운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매버릭이 진짜로 힘을 주어 밀어내는 것보다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빨랐다.

“브래들리!”

목소리에 날이 섰지만 루스터는 태연하게 손끝에 맺힌 피를 핥았다.

“아깝네요. 맵이 마셔주면 좋을 텐데.”

품 안에 안긴 몸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다. 경직된 허리와 도드라진 날개뼈에서 매버릭이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에 솔직하게 만드는 게 루스터의 목표 중 하나였다.

“내가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송곳니가 또 날카로워졌네요.”

“한 번만 더 이랬다간 정말 내쫓아버릴 줄 알아.”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에요, 나를 너무 사랑하는 거짓말쟁이 대령님.”

“브래들리 브래드쇼,”

“송곳니 다시 갈아야겠어요.”

내가 해줄 테니까 피트는 가만히 있기만 해요. 매버릭의 무릎 아래 팔을 끼워 넣고 단숨에 안아 들었다. 매버릭은 깊은 한숨을 쉬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는 내내 발을 달랑거려 루스터를 귀찮게 만들었을 뿐이다. 욕조에 앉혀질 즈음엔 발목이 단단히 붙잡혀 그것도 못 하게 됐지만.

 

2.

일주일에 두 번, 매버릭의 입에서는 옅은 피 냄새가 났다. 처음 매버릭은 그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브래들리 브래드쇼를 상대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맵.’

‘응.’

‘화장실에서 피 마시지 말아요. 어쨌거나 그것도 음식인데 비위생적이잖아요.’

허공에 멈춘 포크를 보며 루스터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송곳니를 부여잡고 아버지에게 달려가던 어린 매버릭이 생생했다. 부릅뜬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악문 이는 덜덜 떨렸다. 구스는 놀란 기색 없이 매버릭을 달래 화장실로 데려갔다. 울지마, 이놈아. 우리 브래들리도 치과 가서 이렇게 서럽게 안 운다고. 이게 내 윙맨이야, 우리 큰아들이야? 장난스럽게 놀리며 손가락에 은 골무를 끼웠던 아버지.

 

3.

브래들리가 그 모습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무시무시한 악몽 때문에 한밤중 잠에서 깬 어느 밤. 꼭 닫힌 벽장을 바라보며 부모님에게 달려갈지 고민하던 어린 브래들리는 세찬 바람이 창가를 때리는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달 동안 아빠에게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은 혼자 자지 못할 것 같았다. 베개를 꼭 끌어안고 조심조심 부모님 침실로 향하는데 타다닥, 복도를 달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숨은 브래들리를 뒤로 하고 까만 인영은 침실 문 앞까지 달려 나갔다. 희미한 조명등 아래 그늘진 얼굴이 드러났다.

매버릭이었다.

‘구스.’

똑똑 침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비몽사몽한 얼굴로 나왔던 구스의 눈에서 잠이 확 달아났다. 흠뻑 젖은 목소리와 입가를 움켜쥔 손을 보자마자 모든 걸 짐작한 구스는 매버릭의 뺨을 닦아주며 화장실로 향했다.

브래들리는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두 사람을 따라갔다. 호기심이 공포를 이겼다. 캄캄한 창밖도, 무시무시하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도 지금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비스듬히 열린 화장실 문과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환한 빛 아래 두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아빠가 매버릭을 욕조 위에 앉혀놓고 입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왜인지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보면 안 될 것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아빠도, 매버릭도 보지 못할 어둠 한편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아 해. 입 더 벌리고, 그만 울고. 아무래도 다음엔 널 브래들리랑 같이 치과에 보내야겠어. 브래들리가 울면서 치료받기 싫다고 생떼 쓰는 걸 봐야 네가 내 맘을 이해하지.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은색 골무를 손에 낀 아빠가 뾰족한 송곳니를 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똑똑하게 기억났다. 눈물로 붉게 부푼 매버릭의 눈가와 내리깔린 시선, 순종적으로 벌어진 입과 그 안의 분홍빛 혀. 입 안을 들락거리는 아빠의 손가락.

홀린 듯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참 후 아버지가 따뜻한 물로 골무를 헹궈내며 ‘다 됐다.’라고 했을 때야 퍼뜩 정신이 든 브래들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벽장 속 괴물 따위는 이제 생각나지도 않았다. 심장 소리가 쿵쿵대며 온몸으로 휘몰아쳤다. 이 심장 소리가 바깥에 들릴까 무서워 이불 속에 숨은 브래들리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본 장면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게 정확히 뭐였는지, 왜 한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발가락을 꼼질대며 몸을 웅크리고는 눈을 꼭 감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까무룩 잠든 브래들리의 꿈에는 매버릭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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