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구경할 생각에 한껏 들뜬 나는 현관문을 빠르게 열어젖힌 후 집안으로 입성했다. 스케일이 남달라서 그런지 현관 크기가 내 원룸보다 더 컸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후 은은한 간접등이 달린 고급스러운 대리석 복도를 통과하여 거실로 향했다. 그러나 거실로 입성하자마자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거실 한쪽 구석에서 늑대가 날 경계하며 잔뜩 웅크린 채 달달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이 대저택에 지하가 있다길래 늑대는 거기 마련된 철창에서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을 거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장 이 미친 씹새끼가 날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늑대를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풀어둘 순 없었다. 혹시 내가 직접 늑대를 철창으로 유인해야 하나 싶어서 지하로 내려가 봤지만, 그곳엔 늑대를 위한 철창은커녕 그냥 각종 잡동사니가 있는, 창고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려서 1층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아무리 공격성이 없다고는 하나 그건 학대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즉, 어느 정도 트라우마가 치유되면 인간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저 늑대가 언제 돌변해서 날 공격할지 모른다는 소리다.


지금 당장 연구소로 돌아가서 좆 같은 사장에게 개지랄을 떨고 싶었으나 이미 계약서에 내 도장을 쾅! 찍은 상태라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계약서 맨 뒷페이지엔 특별 조항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계약을 중간에 파기한다면 집, 월급, 혜택 비용을 합산한 금액의 두 배를 배상해야만 했다. 즉 한순간에 수백억 대 빚쟁이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늑대를 잘 훈련시키고 가르쳐서 인간에게 대들지 않는 온순한 성품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생명 수당이 포함된 탓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 월급도 세고, 이런 대저택도 사줬던 거구나. 갑자기 소주로 병나발을 불고 싶어졌다. 그래, 내가 갱생시킨 수인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 다 합쳐도 모자랐다. 내 짬밥 어디 안 간다 이거야. 씨발 근데 맹수, 그것도 학대당한 수인은 처음 맡아보는데. 갑자기 목덜미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짐도 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달달 떨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1층으로 올라왔다. 늑대는 여전히 거실 구석에서 날 집요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거실에서 제일 가까운 방을 열자 다행히도 서재로 사용되는 공간인 듯 책상과 책장, 각종 물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문을 닫은 뒤 딸각 소리와 함께 문을 잠갔다. 늑대가 몸통 박치기를 시전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이것 말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큼지막한 수첩 하나를 꺼내 맨 뒷장 윗부분에 '유언장' 이라고 존나 큰 글씨를 사각사각 적었다. 유언장이지만 내용은 그다지 심오하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내 명의로 된 이 집과 통장에 꽂힌 돈들을 전부 엄마에게 상속하겠다는 내용을 구구절절 적었다. 혹시라도 악덕 사장 새끼가 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거나 아니면 다시 회수한다거나 그런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유언장이 작성된 다이어리를 다시금 책장에 꽂아둔 뒤 마음의 준비를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 말이 나에게 해당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늑대가 사나운 공격성을 드러내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드디어 미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눈을 질끈 감고 나름 안전한 공간이라고 생각한 서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짐을 풀기 위해 현관에 내팽개친 캐리어들을 챙겼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니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증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어떤 일이 발생해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1층에 부엌이 있기에 돼지런한 나는 더 잴 것도 없이 부엌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쓰기로 했다. 여전히 내 행동을 주시하는 늑대를 무시하고서 방으로 들어간 나는 캐리어를 풀기 시작했다. 


옷 정리, 침구 정리, 물건 정리를 대강 마치니 어느덧 주황빛 노을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배꼽시계가 미친 듯이 울렸다. 방을 빠져나오자 여전히 같은 자세 그대로 웅크린 채 내 방문을 빤히 주시하고 있던 늑대와 시선이 마주쳤다. 쟤도 배고프겠지.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마트에 가야 하나. 기대감 1도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텅텅 비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무 요리나 만들어 먹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식재료들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 밑에 냉동고 칸을 열어보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오늘 저녁은 고기가 먹고 싶었다. 마블링이 예술인 투쁠 안심 스테이크용 고기를 꺼내 버터 바른 팬에 노릇노릇하게 굽기 시작했다. 가니쉬로 곁들일 양파와 아스파라거스, 방울 토마토도 준비하여 옆에 올려둔 또 다른 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밥통이 있었지만, 오늘은 간편하게 햇반을 데워 먹기로 했다. 


어느새 스테이크 6인분이 완성되었다. 5인분은 저 녀석 몫이기에 커다란 접시에 덜어서 아직도 덜덜 떨고 있는 늑대 앞에 말없이 갖다 주었다. 식탁에 앉은 나는 거의 흡입하듯 스테이크를 와구와구 먹어 치웠다. 평소엔 비싸서 잘 사 먹지 못하는 소고기로 배에 기름칠을 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전환되는 것 같았다.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녀석은 내가 구워준 스테이크를 단 한 조각도 먹지 않았다. 불법 번식장에서 연구소, 그리고 대저택까지. 환경이 수시로 바뀐 탓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면 먹지 않을까 싶어서 설거지를 빠르게 마친 뒤 후다닥 모습을 감췄다. 


방에서 뒹굴 거리며 대략 두 시간을 보낸 후 거실로 슬그머니 나왔다. 그러나 내 배려에도 스테이크 양은 처음 그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또다시 단식 투쟁을 시작한 녀석 때문에 두통이 밀려왔으나 시간이 해결해주는 방법밖엔 없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자 금세 오후 10시가 되었다. 평소엔 드라마를 볼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따뜻한 봄이 다가왔지만, 그래도 저녁엔 일교차 때문에 조금 쌀쌀해서 담요를 챙겨 들고 방에서 나와 거실에 있는 늑대에게 다가갔다. 


거실에 불을 켜지 않아서 의지할 빛이라곤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전부였다. 그런데 늑대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네 다리로 서 있는데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것처럼 몸이 좌우로 요동쳤다. 서 있는 게 불편하면 그냥 아까처럼 앉거나 엎드리면 되는데 굳이 저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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