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 & 쟌-클로드의 개선문 

L'Arc de triomphe, Wrapped, Paris (1961년-2021년)

파리 하루 들린 날 
Une petite escale à Paris
 

"우리 금요일에 파리 당일치기로 갈래?" 

9월 끝자락에 홈메 중 한 명이 갑작스런 제안을 했다. 도통 어디를 가자고 하는 적이 없는 애여서 의아했는데 그에겐 파리를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토&쟌-클로드라는 예술가 듀오가 파리 개선문을 천으로 두른 작품이 10월 중순까지 전시된대. 며칠 뒤면 전시도 끝인데 나 이 작품 꼭 보고싶어." 

현대미술에 무지한 나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심지어 금요일은 이틀 뒤. 이름난 짠순이인 나는 개선문 하나 달랑 보러가자고 비싼 발걸음을 한다니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까다로운 홈메의 선택이니 느낌이 좋아서 일도 미뤄두고 릴-파리 기차표를 끊었다.

금요일 아침, 기차시간을 착각한 나 때문에 다음 시간대 기차를 다시 타느라 예상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한 순간의 착각으로 (나름의) 거액을 날리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이럴 때는 시간과 상관없이 가격이 일정하고 예매 취소에도 돈이 크게 안 드는 한국 철도가 너무 그리워진다.

시월 첫 날의 파리는 엄청나게 흐렸고 부슬비가 내렸다. 홈메가 루브르 박물관을 들려도 되냐고 묻는다. 북역에서 루브르까지 걸어가는 것은 쉽다. 옛날에 논문 쓸 때 지겹게도 들낙거렸던 미술사학 국립 도서관이 근처이기 때문이다. 날은 흐리지만 산책삼아 걷자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못 온 동안 비빔밥 집이 여러 곳 생겼다는 것에 놀라며 라 파예뜨 대로를 걸었다.

프란츠 리스트 광장 쪽으로 걷다보면 낮은 언덕에 위치한 생-뱅성-드-뽈 성당 광장이 보인다. 생각해보니 이 길을 여러 번 갔으면서도 이 성당이 닫혀있거나 내 기차시간이 아슬아슬해서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 맞춰야 할 일도 없으니 들어가보기로 한다.

1824년 건축을 시작한 신 고전주의 성당이다.19세기에 건설된 큰 교회들은 죄다 내부가 뻑적지근하다. 도금과 장식들과 벽화들이 내부를 꽉꽉 채우고 있다.

홈메와 '와, 부내난다.' '여기에 쏟아부은 세금이 얼마나 될까?' 같은 시덥잖은 대화를 하며 내부의 화려함에 놀라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지 10 분도 되지 않아 관리자께서 문을 닫고 계셔서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다.

성당에서 나와서 십 오분 정도를 더 걷는다.

열심히 걸어 루브르 궁 앞까지 도착했다. 물론 시간이 없으니 박물관을 갈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때 이후로 한 번도 루브르를 다시 오지 못한 홈메는 내부 홀에 들어가는 것 만으로 즐거워했다. 사진은 우리가 보려 한 개선문은 아니지만 까루쎌 개선문. 나폴레옹 1세의 오스테를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08년에 지어졌다.

튈르리 정원의 분수. 많은 사람들이 저 초록 벤치에 앉아 쉬어 간다.

튈르리 정원을 나와 콩코드 광장에서 파리에 사는 내 절친이 합류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샤를-드-골-에뚜왈 정거장까지 가기로 했다.

개선문의 유일한 출입구인 지하통로를 나와보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만큼 이 설치 작품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반증일 것이다.

L'Arc de triomphe, Wrapped, Paris, (1961년-2021년)는 크리스토&쟌-클로드는 불가리아 출신 크리스토 블라디미로프 자바췌프 Christo Vladimiroff Javacheff 와 모로코 태생 프랑스인인 쟌-클로드 드나 드 기유봉 Jeanne-Claude Denat de Guillebon 예술가 듀오의 작품이다. 이 작업 파트너이자 부부는 천, 끈, 철제 등을 기반으로 구성된 엄청난 규모의 일시적인 설치 예술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크리스토와 쟌-클로드의 유작이다. 쟌-클로드를 몇년 전 먼저 떠나보낸 크리스토가 2020년 5월 31일 별세하고, 그의 바람대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해 2021년 9월 18일 부터 10월 3일까지 16일 간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다.

철거 후에도 이 거대한 천이 버려지지 않도록 크리스토와 쟌-클로드는 재사용이 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한다. 가까이서 보면 은색으로 반짝인다.

복잡한 형태의 건축물을 아기처럼 동여매면 결국엔 기초적인 형태만 남는다.

천에 둘러싸인 거대한 건물을 보고 있으면 일단 경외감이 든다. 내가 서 있는 공간의 비율이 일그러지는 기분.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든다. '저 천 밑에 원래 뭐가 있었더라?' 이렇듯 크리스토와 쟌-클로드의 작품들은 불가시성으로 가시성을 완성하고, 이미 집단 의식에 굳건히 뿌리내린 명소들이 개개인에겐 어떤 의미인지 되묻기도 한다. 나에게 이 기념물은 어떤 영감을 주었나? 개선문이 사라진 샤를-드-골-에뚜왈 광장은 어떻게 생겼지? 나는 개선문을 얼마나 알고 있더라?

비가 거세지고 날이 추워지며 결국 이십 분 만에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 핫초코를 시켰다. 곧 기차시간이 다가온다. 내 파리 친구를 보내고 나는 홈메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아주 짧은 파리여행이 바쁜 일상에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이렇게 계획없이,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을 주기적으로 해봐야지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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