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이별이 고플 때가 있다. 이별이 슬픈 줄은 알아도 세상 사람 누구도 자기가 이별을 고파하는 줄은 모른다. 그렇지만 이별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대개는 권태에서 비롯된 어긋난 관계의 종말을 위해. 가까운 거리만큼 숨이 조여오는 사람들을 위해. 이별을 선택하지 않은 순간들을 원망하게 될 자신이 겁나서.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손가락 사이로 넘실대는 해가 거짓말인 양 뉴스에서는 폭우 예보가 시작됐다. 한 철 장마의 입구에서 이민혁은 또 우산만 쥔 채로 갈 곳을 잃었다. 우산은 없고 목적지는 있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빗속에 뛰어든다. 저마다 하나같이 달려가는 그 곳에서. 뛰어드는 그 자리에서. 이민혁은 그 앞에서 우뚝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언제나 목적지가 채형원이었어서 할 게 없다. 이민혁은 그 날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어디 드라마나 영화처럼 감기라도 걸렸으면 했는데 몸이 튼튼하기 그지 없어서 꿈까지 잘 꿨다. 채형원이 틈만 나면 사방에서 등장하는 꿈이었다. 예의 표정을 하고선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하는 모습들이 등장했다. 독서실 앞에서 한참 기다렸으면서 골목길에서 마주친 나한테는 방금 나온 척. 장마가 시작되고 일주일동안 못 잔 얼굴로 종일 시답잖은 asmr 영상이나 카톡으로 보낼 때. 그런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나서 새벽에 눈 뜬 이민혁은 생각하게 됐다. 방금 꿈이야? 그냥 채형원.zip 아닌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차인 날까지 꿈에 채형원을 보내시나. 산책하려고 나온 편의점 바닥에 굴러다니는 삼각김밥 포장지 보며 할 생각은 아니었다. 뭐 이제 굳이 이런 생각할 상황 저런 생각할 상황 나누는 것도 웃기다. 내가 언제는 채형원 생각을 안했다고. 무념무상이 서글프다. 얕게 비가 온 땅이 젖어 있어 흙냄새가 올라왔다. 파라솔에 고인 물방울이 슬리퍼 신은 맨 발 위로 떨어지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민혁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채형원은 좀 컸나. 

앞서 말한대로, 언제는 채형원 생각을 안했다고. 이민혁에게 무념무상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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