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느새 벗은 등이 늘어난다. 겨울이 아닌 계절의 오후 세시는 자주 그렇게 뜨거운 햇살을 뿌렸다. 시간 때우기로 시작한 놀이는 순식간에 학년 대결로 번졌고, 게임의 스코어가 아슬아슬한 숫자로 뒤엉키며 십여 분이 흘러가자 누가 먼저라 따지기 어렵게 땀에 젖은 셔츠가 던져졌다. 보기 나쁘거나 드문 상황은 아니다. 생도의 대부분은 키가 컸고 체격이 좋았다. 아카데미의 신체검사는 형식상의 절차였지만 일학년의 전술수업은 타고난 게 적다면 힘들 시련이었다. 기숙사생이 아니거나 학년이 달라 서로의 벗은 몸이 낯선 사이가 있더라도 그들은 모두 공을 쳐다보느라 바빴고 짐 커크도 그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장소는 수업을 하는 실내체육관이나 연습에 사용되는 운동장이 아니다. 테두리를 따라 사방으로 오고가는 길이 이어져있는 캠퍼스의 한구석은 잔디밭이나 공터라는 말이 적당하고, 관객이 있는 여러 방향에서 웅성거림이 새나온다. 어쩌면 지금에서야 걸음을 멈추고 쳐다볼 지도 모른다. 벌써 여럿이 게임이 아닌 이유로 놀란 소리를 냈다.


커크도 모르진 않았다. 정말이지 그는 모를 수가 없었다. 다시 볼 일 없는 술집의 구경꾼이 아니라 신경이 쓰이지만, 이제와 돌아볼 일은 못된다. 어차피 소문은 날대로 난 시점이다.


입학 이후 아무리 많은 눈이 커크의 맨몸을 봤다고 해도 결코 전교생일 수는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예의를 지키면서도 무시가 어려운 게 그 등허리에 가득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수형이어야 할 그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운명이 찍어준 하나만을 품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부정하기 어려운 반항의 흔적이었다. 혹은 광기의 증거이거나, 길고 집요한 한탄일 수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규모인 것만은 처음 본 눈에도 확연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에 눈을 고정한다. 그의 등과 허리와 가슴과 배와 팔뚝에, 하여간에 보이는 모든 부분에 이리 저리 이어져 있는 글자에 날아와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며 패스를 요구하자 박자를 맞춘 기합이 이리 저리 전해진다. 동기들은 대체로 기숙사의 처음 한 달로 그에게 익숙해졌다. 겉을 본 게 전부일 사이에서라면 은근하게 흘러갔을 거부감들이 짐 커크를 경험한 뒤 나오고 마는 적나라한 불쾌감에 묻힐 정도로.



02


당연하지만 사람 손으로 새겨 넣은 이름 한 두 개 정도는 세상에 흔했다. 인간이란 잃을 수 있는 걸 언제나 얻을 수 있었다. 삶이란 다양한 법이라 어린 살에서 돋아난 운명의 이름이 이름으로만 남기도 한다. 통계에 따르면 놀랄 만큼 높은 비율이다. 물리적으로 지구에 제한되던 과거에도 드물지 않은 일인 만큼 우주로 세상이 확대된 시대에는 더했다. 사람들은 곁에 있는 당장의 상대와 사랑에 빠져버리거나, 기다림에 지쳐 반항하듯 새로운 인연을 찾았다. 적지 않은 숫자가 비극적으로 허무한 통보를 받기도 했다. 상상하고 기다리던 그림자가 만나볼 새도 없이 죽어서, 푹 자고 일어난 아침에 색이 빠진 이름을 마주하며 최악의 하루를 시작하는 건 벌써 몇 개의 고전이 떠오를 만큼 알려진 클리셰였다. 불행한 각종 사고로 이름을 잃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고,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이유로 새로운 이름을 더하기도 했다. 술 취한 밤의 실수나 충동적인 고백이 만들어낸 결과로 남은 게 이름 하나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커크는 달랐다. 평균을 웃도는 키의 어두운 금발머리는 눈썹이 짙었고 첫눈에 알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옷을 벗은 다음엔 누구도 그의 눈동자에 집중하지 못했다. 최소한, 자신이 지금 헛것을 보는지 자문할 만큼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짐 커크의 육체는 얼굴보다 못하지 않았고 확실하게 말해 대단한 장점이 많았지만, 불이 훤한 장소에서 시선을 붙잡는 건 겉에 새겨진 이름들이다. 짧고 길게 무리를 이루며 팔뚝까지 흘러 넘쳐 새겨진 무리는 얼핏 봐도 두 자릿수다. 작고 단정한 글자체로 새겨진 이름들은 특별하지 않아 잘 읽혔고 그래서 더 주의를 끌었다. 어느게 먼저일지 구분이 힘들게 똑같이 선명한데다, 거의가 맨 정신에 더해진 터라 잘못된 흉을 만들지도 않았다. 매끈하게 근육과 뼈의 선을 따라 만들어진 흐름을 가까이에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본다면 의도적이지 않고선 불가능한 규모라는 말을 과소평가로 생각하게 된다. 그의 몸에 새겨진 이름들은 하려고 해도 쉽지 않을 수준이었다. 얼굴 생김이 조금만 더 이국적이었다면 이름 모를 행성의 기이한 풍습으로 착각 당했을 테고, 실제로도 동기 몇은 그를 어딘가 고립된 곳, 소와 결혼하거나 하는 그런 전설 같은 공동체 출신으로 믿고 있었다. 한 둘은 그 모든 이름이 타고난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원천이었다.


사실 커크는 그렇게까지 남다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이유로 처음 몇 주는 어디에서나 화제의 중심이 될 만한 스스로를 알았고, 입학 후 열흘간 자신의 문신 갯수에 걸린 도박의 판돈을 교묘하게 높이며 주변을 탐색했으며, 결국에는 새로운 룸메이트이자 아마도 친구일 녀석과 거래를 성공해 총액의 반을 얻었다.



03


남부 사투리가 진한 커크의 룸메이트는 의사였다. 레오나드 맥코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그 남자는 경멸과 감탄이 뒤섞인 반응으로 커크를 대했다. 이름을 함부로 여기는 어린놈이 한심하다는 듯 비꼬다가도, 알고 보면 운명도 별 것 아닌 중매쟁이라며 화를 내는 반복이었다. 간단히 소개받은 내력을 보자면 누구라도 이해할 반응이라 큰일은 나지 못했다. 맥코이는 어린 시절 상상하던 그대로 운명의 상대를 만나 결혼했고 꿈꾸던 그대로 의사라는 직업도 가졌지만 어른의 현실은 상상이나 꿈과 다르단 걸 힘들게 깨우친 입장이었다.


“결혼도 이혼하면 그만이니 이름이 뭐가 대수겠어. 내가 너처럼 위생관념이 없었다면 지우는 정도는 했겠지.”

“간단하잖아? 레이저 펜 하나면 의사가 아니라도 지울 수 있을 텐데.”

“어떤 사람들은 배려라는 게 없어서 모조리 실수였다는 듯 끝내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누군가는 확실히 지웠다는 거군. 커크는 맥코이의 진득한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이미 여러 번 듣게 된 레퍼토리였다. 어떤 여자인지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단하기도 해라. 매번 나오는 감탄을 속으로 숨기며 커크는 더러워진 셔츠의 단추를 채웠고 친구의 빠른 걸음에 맞춰 속도를 올렸다. 시간 때우기로 휘말렸던 경기는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고 고학년의 날선 여유는 재밌는 분위기였다.


“졸업반도 아닌데 벌써부터 함선을 골라놓고 있더라니까!”

“이 학교에 와서 퇴학을 안당하고 삼년을 다녔으면 그 정도 머리는 있어야지.”

“본즈, 기껏 졸업해서 함선의 유명세를 쫓다간 말단부터 시작이라고. 유치하게 왜 그래?”

“난 어차피 땅에 붙은 부서에 지원할거라 상관없어.”


우주가 얼마나 끔찍한지 늘어놓는 맥코이의 중얼거림은 전 부인에 대한 원망만큼이나 익숙해진 레파토리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여느 때처럼 이어지지 못했다. 캠퍼스에 울려퍼진 사이렌은 누구도 실제로 들어본 적 없는 경계경보였고, 이후의 이틀간 아카데미의 모든 일학년들은 수업이 취소된 캠퍼스에 틀어박혀 갑작스러운 전쟁을 뉴스로 접하게 된다.



04


처음에는 누구도 전쟁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고위급은 모두 실전에 묶여 바빴고 언론이 전해오는 소식은 너무나 황당해 믿기가 어려웠다. 행성이 통째로 사라지다니, 그것도 벌칸처럼 지독히 오래 안정적이던 행성이? 하지만 몇 초의 지연만을 남기며 기숙사의 홀로에 떠오른 현실은 거짓일 수 없었다. 이런 걸 테러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범우주적인 범죄를 축소시켜주는게 아닐까.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함선이 가득 찬 우주는 지나치게 극적이라 오히려 진실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전에 모르던 블랙홀의 등장인지, 누구도 모를 우주의 비밀인지, 당황하던 연방의 시청자들 중 제일 먼저 사실로 인식한 건 다급하게 날아오는 명령으로 실전에 투입된 아카데미의 남은 다수다. 벌칸은 정말로 사라졌고, 사라진 행성의 생존자들과 연방의 환자가 제일 먼저 도착할만한 장소는 바로 그들의 캠퍼스였다.



05


사태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했다. 피해상황은 아직도 비공개의 보고서들뿐이다. 누군가는 벌칸의 대부분이 죽었고 지금 모이는 건 우주에 흩어져 있던 잔존세력이라고 말했으며 누군가는 출동했던 연방의 모든 함대가 최대인원수를 넘게 살아남은 벌칸을 태웠다고 믿었다. 일반인에게 공표되지 않는 적의 정체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소문뿐이었지만 그 정체가 연방을 증오하는 고립분자든, 미래에서 온 로뮬란이든, 중요한 건 붙잡히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또다시 올 상대가 있는 이상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행성이어야 했고 크기만 한 상업용 함선을 차출해 사용하기에는 피난민들의 위치가 미묘했다. 여러 우주에 남아있던 벌칸의 우주선들도 목표로 돌아올 곳이 필요했으며 큰 문제가 해결되는 당장의 장소로는 지구밖에 없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만한 결과였다. 아카데미의 대부분은 바보가 아니었으며 냉정한 몇은 남들보다 빨리 이 정도의 추론이 가능했다. 사라지지 않는 직업정신과 사회경험의 덕으로, 맥코이는 대부분의 학생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 이미 전개를 예상했고 그덕에 커크도 조금이나마 준비한 상태로 혼란스러운 다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신입생이라도 자격이 되는 기술직은 모두 보조를 위해 뛰어간, 황량해진 캠퍼스에서, 커크는 임시로 분리된 대부분의 학생들과 같이 학교 건물과 기구의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오래 걸릴게 아닌 이사가 끝난 다음으로는 모든 학생들이 호명을 받고 흩어졌다. 환자로 돌아온 건 함선들 역시 마찬가지인 터라 의사가 아닌 이들에게도 할 일은 넘쳤다. 우주정거장에 보낼 부품을 찾느라 사방에선 물물교환이 시작되고, 단순작업의 일손이 딸려 밤을 샐 태세였다.


 

06


언론에 풀린 네로의 정보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더 많을 만큼 혼란스러웠고 벌칸이 당한 공격은 무자비할 만큼 간단해 인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런 판국이니 아카데미의 수업이 중단된 건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즈음의 캠퍼스는 늘어난 인원의 우선순위를 정해 적지 않은 숫자의 신입생들을 외부로 내보내야 했다.


그야말로 전시체제였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졸업도 하지 않은 채 함선의 보충병으로 가게 된 고학년도 많았다. 의료관계의 경험자는 모자랄 지경이었고 엔지니어는 이미 일학년의 몇도 뽑아가기 시작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 룸메이트가 어느 틈에 우주 저편의 함선에서 제복을 입은 건 아닐지, 상상하던 커크가 간신히 맥코이를 만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게 된 건 정신없던 순간이 삼일 혹은 사일 정도 쌓인 후다.



07


며칠 만에 보게 된 맥코이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깨끗하지 못한 하얀색이 수염자국이 거칠어진 얼굴에 하도 잘 어울리는 통에, 햄버거를 두 개째 먹을 쯤에서야 의사 노릇을 하는 중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계속 아카데미의 병원에 있었던 거야?”

“아니, 그치들은 일반 환자랑 섞이면 안 되는 상태라 따로 있어.”


전염병이라도 도는 듯 얘기하는 맥코이에게 커크는 눈을 껌벅였지만 돌아온 건 당연한 핀잔이었다.


“벌칸은 텔레파시 종족이잖아. 아니라고 하지만 그게 그거지. 죽은 숫자가 그렇게 많으니 외상보다 그쪽 관련이 더 많다고.”

“아.”

“뭐, 마지막에는 다 상관없어지지만…….”

 

커크는 맥코이의 돌려진 시선과 씁쓸한 표정이 어째선지 잘 읽혔다. 이건 마치 전부인을 생각할 때같다. 입버릇처럼 하는 불평이 아니라, 밤새 과제를 하다 고개를 들어 어둡고 막막한 창문을 쳐다볼 그런 때의 얼굴이다. 아직 그녀를 사랑하냐고, 한 번인가 지나가듯 물어본 커크에게 맥코이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그리운 건 그녀가 아니라 우리의 과거지.’ 흔한 대답은 아마 더 이상의 질문을 막기 위한 모범답안이겠지. 커크는 존중해준단 의미로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어느새 결론이 나와 있었다. 맥코이가 그리워하는 건 과거의 자신이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이름과 운명에 둘러싸여 아무런 의심없이 따르는 확실한 세계는, 분명 그만의 장점이 많은 종류였다. 어린시절의 순수함이나 빈틈없는 계약처럼.

 

“이제는 추억도 아니라더니, 그리울 만큼 힘든건가?”

“뭐? 배부른 소리 한다. 정말이지, 그깟 이름으로 엮인 팔자는 좋을 게 아무것도 없어. 어쩌면 다들 너처럼 같은 글자로 도배해놓고 없는 척 하는게 상책일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다 봤다는 거 잊었어? 아니라도 난 의사라고.”

“…….”

 

커크의 몸을 뒤덮은 이름이 몇 개인지에 대한 도박은, 상체에만 있지 않다는 게 제일 큰 관건이자 성공의 비결이다. 어쨌든 커크는 아무렇지 않다는 어깨 짓으로 화제를 돌렸고 다행히 맥코이의 목적도 그가 아니었다.

 

“하여간에 난 칭찬하려던 거야. 한명이 죽을 때마다 시체를 두개씩 치우게 되니, 그깟 이름에 너무 집착하는 삶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다고.”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

“벌칸말이야 짐! 벌칸, 그 미친 중매쟁이 공화국!”

“…….”

 

불평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어 일만 한 걸까, 벌컥 토해진 맥코이의 목소리는 적나라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서는 애들이 열 살만 되면 이름의 상대를 끌어다 짝을 지어주는 거 알았어? 몰랐겠지, 나도 몰랐으니까! 도대체가 아이큐는 어디에 써먹는 집단인지? 그렇게 어린 애들이 만나서는 뭘 하는지 알아? 소꿉놀이같이 신혼을 차리면 차라리 나을 지경이더라! 애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뭘 어떻게 엮는지 몰라도, 생살을 떼느라 피바다가 되는 게 낫겠어.”

“상심이 크다는 말이지?”

“아니, 사망률이 아주 죽죽 올라간다고!”

“…….”

“어제 간신히 벌칸 의사가 몰려와서 안심했더니 한다는 말이 뭔 줄 알아, 영양제를 챙겨주라는 거야! 진정한 벌칸은 감정을 다스려야 하고 신경을 조절해야 하니 안정제도 금지! 열두 살 애가 쇼크로 뇌사할 지경인데도 심장활동 체크만 하라니, 이게 대체 무슨 병원이라는 거야? 사서 고행을 하는 나라로 유명하긴 했지만, 설마 애들한테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거야?”

“게다가 원래 그렇다는 거야! 기면증처럼 잠에 빠져서는 깰 때쯤엔 회복되어 있을 거라는데, 꼭 따귀를 때려서 깨우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얼굴이 주먹만 한 애들이 부모를 잃고 밥도 못 먹고 있는데 하는 말은 명상하십시오가 전부라니, 최소한의 안정제가 필수적이라고. 이게 사람이 아니라 돌고래였더라도 이보다는 잘해줬겠다! 그리고, 여긴 어쨌든 지구라고!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사실 법으로 따지면 연방법이 적용되는 건 벌칸도 마찬가지잖아? 나랑 로이스는 오늘 밤에 어떻게든 상부에 보고를 올릴 작정이지. 애초에 우리를 믿고 맡길 거라면…….”

 

맥코이는 커크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지난 삼 일간 화가 나서 잠을 못잔 사람처럼 붉은 눈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앞에서 커크는 조용히 자신의 햄버거를 끝냈고, 지나가는 동기에게 부탁해 커피를 얻어왔다. 피처럼 걸쭉하게 진한 커피를 들이키며 무력감과 분노와 안타까운 애환을 털어놓던 맥코이가 입을 다문 건 플라스틱 머그의 열기가 가신 뒤였다.

 

“하여간에 짐, 알겠어? 이름 하나에 덥석 인생을 거는 건 미친 짓이야. 천만다행히 인간은 저런 대단하신 정신감응력이 없지만, 있더라도 저런 짓은 미친 거라고. 최소한 성인이 될 때까진 하지 말아야지, 아니 자기 몸뚱이 하나도 쩔쩔매는 애들한테 남까지 붙여주면, 그럼 뭐가 두 배로 되는지 알아? 문제가 두 배 아니 열 배로 늘어난다고. 그러니까 너도 시간 나면 아동병동에 자원봉사 좀 나가봐. 가서 청소라도 도와주든가. 호수쪽 체육관인 건 알고 있지?”

“어……. 안 그래도 우후라가 보드에 올렸더라. 통역기가 모자라서, 그쪽에 붙어 있는 모양이던데.”

“그것도 웃기는 노릇이지. 그 꼬맹이들은 모두 완벽하게 통용어를 쓴다고. 하지만 잠꼬대는 그렇지 않아, 풀썩거리고 쓰러지는 애들이 하루에 열 명은 나오는데, 그 벌칸 의사들이 하는 말이라곤 잠꼬대는 보편적이지 않은 현상입니다 어쩌고가 다라니까?”

“흠, 어, 그러면, 어른들은 좀 나은 상황인가?”

 

후루룩. 이젠 식은 커피를 물처럼 넘긴 맥코이가 빈 머그잔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한다.

 

“생각난 김에 행정실에 들러서 책임자를 확실히 해봐야겠어. 짐, 먼저 일어나도 되겠지?”

“그럼, 그럼. 그래도 그, 성인 벌칸들은 그 뭐냐, 신경의 조절이 좀 되고 있다는 거지?”

“뭐?”

“아까 그랬잖아. 진정한 벌칸은 안정제가 필요없고, 어쩌고 말이야.”

“아 그 개소리? 확실히, 아동과는 다르지. 훨씬 조용하니까. 그렇다고 결과가 크게 다른 건 모르겠어. 벌칸 의사가 좋아하는 보편적 상황이라면 안정적으로 주변의 도움을 받겠지만 지금은 그 주변이랄 게 다 아작 났잖아? 없어진 게 지구였다고 생각해봐, 지금쯤 우린 히스테리에 휘말린 군중에게 다 밟혀 죽었을 걸. 벌칸이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종족인 게 다행일지도 몰라. 시체처럼 닥치고 있다 쓰러지면 거기야말로 심장 활동을 꼭 확인해야 하지.”

“죽는다는 거야?”

“거의. 신경의 조절이 하도 확실해서, 선택에 가까운 결과인 거야.”

“…….”

 

냉소로 시작된 의사의 목소리는 체념을 띄운 채 흐려졌고 학생식당의 넓기만 한 탁자 위에는 진공의 침묵이 깔렸다. 한숨을 삼키며 일어서는 맥코이에게 인사말처럼 던져진 커크의 목소리는 꾸며낸 게 확실할 가벼움으로 끝을 올렸다.

 

“그러니까, 벌칸은 이름을 꽤 진지하게 취급한다 이거네?”

“뭐든 다 끔찍이 진지한 놈들이니 이거라고 왜 아니겠어.”

 

힘내라는 것처럼 올라온 손을 가볍게 마주 잡은 뒤 의사는 사라졌고, 그 뒤에서 혼자 남은 손은 몇 초인가 그대로 멈춰있다 내려갔다.

 

 

08

 

커크가 방으로 돌아온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자잘한 이동과 과도한 노동으로 인적이 적어진 기숙사에는 불 켜진 창이 몇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룸메이트는 벌써 며칠째 방에 오지 못하고 있다. 필요한 게 있다면 가져다 줘야겠군. 커뮤니케이터는 확인을 하는지 모를 일이라 내일쯤 찾아가봐야 할 것 같다. 오전에는 자신 역시 우주로 나가는 수송선을 타지만 아무리 늦어도 다섯 시 전에는 돌아올 테니 오늘처럼 저녁을 먹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서는…….

 

습관적인 움직임으로 불을 켜고 욕실에 걸어오며 옷을 벗던 몸이 멈춰 선다. 좁고 긴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며칠 새 푸석해져 낯설지만, 피부 위를 덮은 글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십 개가 넘던 전후로 세는 걸 포기했다. 흔적에 불과한 글자를 무심하게 스치던 커크의 눈이 어중간한 저 아래에서 멈춘다. 거울이 없이도 볼 수 있지만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는 몸의 한 구석.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배꼽의 약간 위 갈비뼈의 약간 아래에 마치 줄을 맞추듯 기울어져있는 저것. 그의 몸을 뒤덮은 수십 개 이름 중에서 아마 가장 읽기 어려우며 제일 처음으로 읽는 법을 공부했던 그 이름을, 커크의 입술이 소리 없이 읽어본다. 그러더니 한 번 더, 아홉 살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할 수 없는 목소리가 이번에는 소리를 낸다. 길고 복잡한 발음의 끝에서 그나마 제대로다 싶은 건 단 두 음절이고 그것이야말로 아홉 살 때와 다를 게 없다.

 

그것은 벌칸의 이름이고, 최초로 짙은 선이 생겨나던 여덟 살의 여름에도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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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2016.09.19 일에 받았던 리퀘로, 리퀘스트된 사항은 네임버스 커크스팍 + 주제를 뜻하는 시 한 구절, 이었습니다. 근 2년이 늦어졌으니 과연 리퀘해주신 분이 이 글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ㅠ 정확히 어떤 싯구였는지는 아마 완결 후에... 최소한 1부 완결 후에 밝힐 예정인데요, 나름대로 주제에 맞춘 감정선의 흐름은 잡아놓았는데 장편이 될 것이 너무나 확실해 제가 계속 미루다 네... 하여간 써보겠습니다. 사실 저는 네임버스를 잘 모르고 읽어본 작품도 한... 4개정도? 생각나는 수준이라 어쩌면 그래서 미뤘나 핑계대고 싶지만 개소리고 그냥 제가 계획없는 인생이라 장기적인 플랜을 두려워해서ㅎㅎ;; 아무튼 그렇습니다 빠른 연재가 될 것 같진 않지만 여유있게 열심히 써볼생각이고 못해도 올해안에 1부는 완결날 수 있겠죠. 어떤 면에서는, 끝이 없는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쓰는거라 한글이 엉망인데 퇴고는 완결후에나 하겠지만 오타, 비문 알려주시면 크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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