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드디어 끝났네.”


뻐근한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안경을 벗었다. 검은 글씨가 가득 써져 있는 파일이 느릿하게 전송되고 있었다. 그 시간이 마치 억겹같아, 무협에서 나오는 폐관수련을 직접 체험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파일이 성공적으로 전송되자 나는 빠르게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어두워진 액정으로 수척한 얼굴이 비쳤다. 나는 까칠까칠해진 턱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도서실의 작은 창으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피로감이 배로 되어 덮쳐왔다. 


오늘도 혼자서 도서실에 늦게까지 남아 과제를 한 것이다. 미친, 벌써. 밤이야?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망할, 교수.’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해 침음을 흘리며 속으로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내가 고딩때도 이렇게 열심히 안했는데. 그때 이만큼 했더라면 수시로 서울대는 쌉가능이다, 진짜로.


  그 놈의 학점이 뭐라고! 그 놈의 졸업이 뭐라고. 이마를 책상에 끝에 대며 가슴 깊이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었다.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복학한 나는 부족한 학점을 채우려 이 교양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에는 막 전역하기도 했고, 복학 절차와 함께 동기들과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며 멀쩡한 날이 없었다. 


그렇게 혼미한 정신으로 동기 놈들의 예언을 무시하고 지금 교양을 호기롭게 수강신청을 눌렀다. 그것을 본 동기들의 경악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 시선들을 본 나는 그렇게 말했었지.


‘교양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이 형 잘봐라, 과제 그깟게 뭐라고. 나 고딩때에도 숙제는 잘해간 놈이야.’


 주변 동기들의 안타까운 눈빛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나란 놈. 미친놈인가 진짜로?


 과거의 나에게 제발 니 발로 지옥의 문턱을 밟지 말라며 외치고 싶었다. 앞섬이든 구렛나루든, 뭐든 잡아서 절대로 못하게 막아서고 싶었다. 


아무리 학점이 걸려있었어도 그렇지. 이 교양만큼은 선택하면 안됐었다. 절절한 후회는 한숨과 함께 공기중에 흩어졌다.


살인이 일어날 것만 같은 미친 과제의 양과 더불어 최상의 학점을 내어주는 당근과 채찍의 표본. 또 다른 말로는 환장의 케미. 


 다만, 이런 미친 과제의 양과 질에도 불구하고 이 교양이 폐쇄되지 않고 잘 돌아가고 있는 이유라면 아까 말했듯이 학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교수라 부르기에는 그는 악마 그 자체였다. 차라리 사탄이라 부르는게 낫겠다. 오히려 사탄직에서 머무르는 사탄들도 우리 교수를 보면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교수가 암살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구라 안치고, 과제에 묻힌 어느 학생 하나가 청부살인업체에 의뢰할 가능성이 0,000001%라도 있었다. 


내 희망사항은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나는 허망한 한숨을 내쉬며 에어팟을 찾아 귀에 꼈다. 잔잔한 인디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뚝뚝 거리는 살벌한 소리가 났지만. 정작 당사자는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조별과제가 없다는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가방을 정리하던 나는 한숨을 쉬며 어깨에 둘러멨다. 묵직한 가방의 무게에 고등학생때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며 나는 달을 등지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지 않았던가.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뒤로 한채 냉장고를 열었다. 


각종 반찬이 쌓여있는 구석에 손을 뻗어 맥주 한캔을 꺼내들었다. 

치익-,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의 표정도 확 펴졌다. 


다크서클이 짙은 모습이 참 안되어 보이지만, 지금만큼은 누구보다도 생기가 철철 넘쳐 흘러보였다. 황금빛깔의 맥주를 보며 침을 꿀떡 삼켰다. 


영약이란게 따로 있나? 내가 먹고 영약이라 느끼면 그게 영약인거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맥주를 꿀떡꿀떡 삼켰다.


 이 알콜, 이 쌉싸름한. 

캬, 절로 탄성이 나왔다. 시원함에 피곤함이 싹 가시는것 같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이게, 행복이지.”


혹잣말을 하며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를 털어 낸 후,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느덧 새벽 3시를 향하고 있었다. 


과제에 치여 살다보니, 이 며칠은 시간 개념이 과제와 함께 사라지는것 같았다. 숨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남은 맥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고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푹신한 이불이 몸을 감싸니 눈이 저절로 내리 감겼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지. 


아니였으면 좀비마냥 어기적 일어났을게 뻔했다. 감성적인 팝송을 틀어 놓은 후, 눈을 감은채 작게 허밍을 했다. 포근한 감을 느끼며 수마에 몸을 맡겼다.


***


“대체 내가 왜, 공연을…….”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옆에 있는 친구 놈을 흘겼다. 내게 안겨있는 기타를 한번 쳐다보고 눈앞에 있는 마이크를 흘겨 보다, 피아노에 앉아있는 친구 놈을 한번더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의자에 앉아 마이크 높이 길이를 조절하고, 기타 줄을 조절했다. 역시 습관이란게 이래서 무서웠다. 진즉에 접었던 꿈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준비를 하는 나를 발견하니 한숨이 나왔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평화로운 꿈 속 여행을 즐기고 있던 와 중에 친구 놈이 자취방으로 쳐들어왔다. 이 놈의 새끼는 나를 미친듯이 흔들어 재끼더니, 오늘 돈 줄테니 알바좀 같이 뛰자고 말했다.

싫다고 짜증이란 짜증을 다 부렸지만, 이 녀석은 거머리보다 더한 녀석이었다. 


“아! 박미르, 이렇게 좀비처럼 살거야? 내가 돈준다니까. 아름다운 청춘 우리가 간다.”

“남의 자취방에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지랄인데? 나가! 안해, 안한다고!”

“아잉, 자기야. 돈준다니까? 너 이번에 알바 못 구했다면서. 이거라도 딱 한번 뛰라니까? 별로 어려운거 아니야.”

“얼마주는데.”

“20.”

“가자.”


그래서 지금 상황이 만들어졌다. 누가 버스킹을 알바라고 개 구라를 깐단 말인가. 속았다 저 사기꾼 새끼.


“야, 알바라 그랬지 버스킹이라 하진 않았잖아?”

“돈 받으면 다 알바지 뭐.”

“니 새끼를 믿은 내가 바보다.”


 미친 논리를 펼쳐내던 친구 놈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저 얼굴에 침 한번 뱉어주고 싶었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속으로만 욕을 읊조렸다. 쓸데없이 이쁜 하늘은 공연을 부추기는것 같았다. 


“시작한다.”


친구가 눈을 찡긋 하며, 전주를 치기 시작했다. 저, 저저 썩을놈. 마음의 준비도 안했는데, 한숨을 내쉬며 따라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기타 실력 하나도 안 녹슬었네.”

“닥쳐.”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OST였다. 잔잔한 선율과 다르게 많은 고음이 필요해 원곡자만 부를수 있는 노래로 유명했다.


“가수 계속했으면 좋았을텐데.”


친구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기타에 집중했다. 익숙한 멜로디가 들리니 길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속으로 박자를 센 후, 노래를 시작했다.


지나가는 거리마다

그대와의 추억이 되짚어져

사랑이란 멜로디가

귓가를 간지럽혀


예쁜 만남, 영원한 노래는 없다지만

혹시를 기억하며

나는 또다시 우리의 노래에

빠져들어


감미로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퍼졌다. 거리가 버스킹용 거리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핸드폰을 들었다. 아 영상 찍는건가? 이럴줄 알았으면 꾸미고 오는건데. 노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르다보니 모두가 삑사리 내기로 유명한 고음의 구간, 일명 마의 구간이라는 곳에 다다랐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배에 힘을 주며 질렀다.


우리의 멜로디가 

사랑이란 멜로디가

비슷한 선율, 서로 다른 감정

사랑을 노래하고, 이별을 연주해

그대의 행복을 빌어요, 나 늘 이 자리에

우리의 멜로디를 연주할테니


시원하게 내지른 고음은 마이크를 타고 높게 울려 퍼졌다. 기타를 치던 손가락은 천천히 마지막을 연주하며 끝을 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적이 감돌던 거리에 하나 둘씩 박수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박수 소리는 현장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물을 한모금 마셨다. 


앵콜을 부르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친구 놈을 바라봤다. 아, 불길하다. 마이크를 빠르게 뺏은 친구가 노래 한곡 더 를 외쳤다. 저, 미친. 친구는 나를 보며 눈웃음 짓더니, 입모양으로 더블을 말했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노래는 어떠셨어요?”


짱이었어요! 한번 더 불러주세요! 앵콜!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그리고 잘생겼어요! 라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니 모두들 웃으며 잘생겼다를 외쳤다. 나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곡은 좀 신나는걸로 가죠. 과즙소녀들의 여름바람을 부르겠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후렴구, 같이 불러주세요!”


역시 돈이 최고죠, 노래 그깟거 실컷 부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이 낳은 착실한 자낳괴였다.


***


나는 맥주를 마시며 통장에 들어온 돈을 보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아이고, 내 새끼들. 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다 핸드폰을 바라봤다.


 친구 놈은 버스킹 영상을 주로 올리는 유튜버였다. 인별에 올라온 피드를 보다, 핸드폰 화면에 뜬 알림에 곧바로 알림이 뜬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요즘 즐겨보던 웹소설이었다. 로맨스 판타지라 쓰고 막장 궁중 치정물이라 읽는 이 소설. 오늘로서 마지막화였다. 나는 속독으로 읽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하지만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표정은 오묘해지다 마지막에는 결국 허탈한 웃음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작가님, 이게 뭐죠? 진짜 이게 끝이라고요? 나는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끝을 표하는 마침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이런 결말을 보려고 이 소설을 본건지 자괴감이 들고…, 아 이게 아니라. 


허탈함을 느끼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작가님 차기작을 기대해 봐야했나, 생각해보니 전 화에서 이미 지금 엔딩을 예고하긴 했지만. 터져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해피엔딩이라면 해피엔딩인데. 음, 마음에 안들어.”


침대가 너무 편했던 탓일까, 급작스러운 졸음이 몰려왔다. 잠이나 자자. 근데 이제 뭐 보지? 다른 로판이나 찾아봐야지. 아니면, 현판이나 볼까. 흐릿한 의식속에서 실없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묵은 피곤이 홍수처럼 덮쳐왔다. 의식은 서서히 수마 밑으로 가라 앉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밝은 햇빛이 눈을 찔러왔다. 음, 몇시간 잔거지? 무거운 눈꺼풀은 의식에 따라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검은 인영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만, 검은 인영들? 나는 눈에 곧바로 힘주어 떴다. 그러자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외쳤다.


“주, 주인님!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눈에 들어온건 익숙한 무채색의 천장이 아니라, 온갖 금칠을 해놓은 화려한 천장이었다.


안녕하세요, BL 웹소설 작가 달분입니다 :) 웬만한 2차 판소 연성은 시리즈로 묶어두었습니다. 이어 1차 BL 외전은 따로 묶어 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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