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지호는 따사로운 햇살에 빨래를 널고 아점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미호가 뽈뽈뽈 걸어와 애교를 부리자 우히히 웃으면서 안아들었다. 그러나 이내 코끝에 느껴지는 시큼한 냄새, 바로 고개를 돌렸으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았다. 


"으아악! 미호야. 왜 또 발매트에 쉬야 했어...!"

"먕!"

"여기 너 쉬하는 데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해. 언니 닮은 발매트에 맨날 쉬하고. 미호 나쁜 강아지!"

"먕!!"

"아... 뭐 해. 시끄럽게. 아침부터."

"자기야아. 미호가 또오."

"아, 구지호 닮은 발매트에 또 쉬했네. 이쯤 되면 미호 너 싫어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아...."


오랜만에 식구들이 여행 간대서 본가에서 데리고 왔더니, 벌써 며칠째 지호를 닮은 발매트에 실례를 한 미호였다. 본체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서율은 귀여운 발매트에는 미련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사귀고 나서 지호가 준 선물이라는 점에선 의미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이제 꽤 낡아서 버릴 때가 된 듯했다. 강아지 오줌에 절여진 상태로 버려지다니 왠지 좀 미안하긴 했지만. 


"발매트 이제 보내 줘도 되지 않을까?"

"그래두 내가 너 사준 건데... 나 닮은 건데...."

"또 너 닮은 거 찾아 보지. 뭐. 너 닮은 거 많아."

"아, 자기도 무얼 봐도 다 나 생각 나?"

"으응? 뭐 쪼끔. 일단 얘는 버릴게."

"흐엉. 쁘띠 지호 주니어 안녕...."

"언제 그런 거창한 이름을?"


푸핫 소리내어 웃고선 서율은 가차 없이 쩐내나는 발매트를 쓰레기봉지에 집어넣었다. 지호는 자신이 버려지는 양 심장을 부여잡고 슬퍼했지만 이내 정신이 없어졌다. 부엌에서 손을 닦고 온 서율이 엄한 곳에 물기를 닦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자기야. 왜 왜 수건 두고 손을 그런 데에 닦아...."

"아침에 잠깨운 거 괘씸해서."

"아으. 엉, 엉덩이 창피해."

"말랑해. 마시멜로우 같아."

"자기가 더 말랑이면서...."

"뭐?"

"으으으으으응."

"말랑몰랑."

"변태야아...."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히. 해두 돼?"

"밥 차리려던 거 아냐?"

"배 안 고파...!"

"역시 고백부터 알아봤어."

"자기야. 그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그건 제대로 고백한 거 아니라구...!"

"말과 행동이 넘 다른 거 아니야...? 내려놓고 얘기해."


서율은 자신을 들쳐메고 침실로 향하는 지호에 포기한 듯 안정적으로 목을 그러안고 쪽쪽 뽀뽀를 퍼부어 줬다. 기름이 부어진 불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활활 타들어만 갔다.



41.1.

 

"쌤 이거."

"응? 오 이게 모야?"


지호는 하얀이 수줍게 손에 꼬물꼬물 쥐어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손을 폈다. 그러나 고딩 서하얀은 창피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다시 주먹을 꼭 쥐게 했다. 지호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며 손안의 감촉을 느꼈다. 머지. 이거. 종이 같은데. 


"모야? 뭔데? 쌤한테 편지 썼어?"

"아, 아니야. 현관 나가서 봐!!"

"뭐길래~"

"아 빨리 나가. 훠이. 훠이."

"힝. 알았어. 담주에 만나-!"


지호는 손을 흔들고는 웃으면서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손바닥을 펴 확인했다. 그리곤 감탄했다.


"우와. 허어. 너무 귀여워."


꽃다발을 손에 들고선 다가와 꽃다발을 내미는 인생네컷은 네컷만화처럼 귀여웠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 아니랄까 봐 구도나 화장이 완벽했다. 좋아하는 애의 귀엽기 짝이 없는 사진에 지호는 헤헤 소리내어 웃고선 지갑을 꺼내 소중하게 넣었다. 그리고 기분좋게 나서려는데 핸드폰 진동이 징 하고 울렸다. 


"으응?"


서하얀: 🙋‍♀️👩‍🏫😍👌👍👩‍❤️‍👩




"미쳤어? 그걸 고백이라고 해?"

"아니. 왜요. 가장 핫한 방법이라고 친구들이 그랬단 말이에요. 울 학교서 사진 주면서 고백하는 거 유행이었다구요."

"백번 양보해서 메시지로 하는 건 그렇다고 해. 이게 대체 무슨 뜻인데?"

"딱 보면 몰라요? '🙋‍♀️나  👩‍🏫쌤 😍좋아해. 👌👍좋다면 👩‍❤️‍👩사겨요.' 넘 명확한데."

"한 개도 안 명확해.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 봐?"

"물론 나도 걱정했지. 근데 구지호도 알아봤다고."

"은근 말 놓지. 알아봐? 걔가?"

"응. '☺️👭' 이렇게 왔다구요. 좋단 거잖아."

"맞아? 잘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나도 아리까리했는데 얼마 안 있어서 러브레터 줬다니까!"

"말 계속 짧지.... 허. 구지호도 MZ는 MZ인가."


하얀은 물어봐 놓고 뭐라고 한다며 꿍얼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리곤 도끼눈을 뜨고 상아에게 물었다. 


"조교님은 어케 멋지게 고백했는데?"

"반말 하즈므르."

"칫. 먼데요."

"내가 안 했지. 고백."

"하아?"

"지호가 했지. 고백은"


상아는 이불을 올려덮고선 그리운 듯 과거를 회상했다. 하얀은 뭐냐고 됐다고 썽을 내면서도 귀를 쫑끗 세우고 몸을 돌렸다. 



41.2.


6월초의 더위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학원, 아무 생각 없이 반팔을 입고 나왔던 상아는 냉방병 때문에 컨디션이 영 좋지 못했다. 마지막 학생까지 질문을 받아 주는 것을 마치고 시원하다 못해 추운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옷자락을 붙들었다. 


"선생님."

"왜? 오늘 좀 피곤하니까 나중에...."

"그, 에, 어...."

"어휴. 똑바로 얘기해야지. 대학 면접 가서도 그럴 거야?"

"아뇨. 억."

"뭐 고백이라도 하려고? 왜 이렇게 떨어."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처럼 상아는 발발 떨고 있는 지호가 꺼낼 이야기를 대강 짐작했다. 맨날 밥 먹고 산책할 때마다 귀신같이 마주치는 지호였다. 밥도 굶고 상아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단 건, 뱃속에서 울어대는 자명종 탓에 알았다. 

'뭐 받아 줄 생각은....'

상대는 (살짝 덜 떨어진) 재수생, 괜히 자신과의 연애로 인해 입시가 망했다느니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 책임. 그 두 글자는 상아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불쌍한 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의 상아였지만, 예전부터 책임을 지는 건 싫었다. 그래서 길고양이나 유기견들에게 먹이는 줘도 절대 집에 들이진 않았다. 구지호에 대한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엽고 보고 있으면 은근 재밌고, 무엇보다 대체 이런 애는 뭐 하면서 먹고 살까 걱정될 정도로 덜 떨어졌음에도 사귈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중간하게 계속 껄떡거리느라 시간낭비 하느니, 시원하게 차이는 게 얘한테도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었다. 분명히. 어제만 해도. 


"에?!... 어... 으윽. 선생니임."

"아니. 왜 대뜸 우는 거야? 나 너무 당황스러운데...?"


거절하기도 전부터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훌쩍이는 구지호에 상아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이래 진짜. 


"흐엉. 어뜨케 알았, 흐엉. 쌤...."

"아니. 왜 우냐고. 구지호. 지호야."

"허어. 지호라고 불러써어. 으앙."

"미쳤나 봐. 얘. 옆 강의실에서 다 들리겠어."

"죄성해허어. 흐어어엉."


갑자기 오열하는 지호에 상아는 일단 지호를 끌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지호는 훌쩍거리며 상아의 손을 꼭 잡고선 쫄래쫄래 따라갔다. 비상계단에 도착해 문을 닫고 상아는 우는 지호를 돌아보았다. 지호는 눈물범벅이 돼서는 상아의 손가락을 꼭 잡고 있었다. 


"왜 우니. 대체...."

"그냥 뭔, 히끅, 가 말, 히끅, 로 뱉으, 히끅, 니 더 좋아서...."

"너를 어쩌면 좋아. 그만 좀 울어."

"좋아해여. 쌤. 진, 히끅, 짜 좋아해, 히끅, 요."

"딸꾹질이나 그치고 할래? 아 진짜."

"쌤이 저, 히끅, 안 좋, 히끅, 아하셔, 히끅, 도...."

"어절 단위 아닌 데에서 끊어 말하는 거, 어그로 끄는 거야?"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지호에 상아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딸꾹질로 조각난 문장을 이어붙이고 있었다.


"좋아해요.... 쌤이 좋아요."

"하아."

"진짜 조아 죽겠는데... 말을 잘 못하겠어요. 바부같애."


엉망진창인 고백을 뱉어낸 뒤, 허락도 안 했는데 와락 끌어안고 엉엉 우는 지호의 찌질하고, 구질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상아는 허탈하게 서 있었다. 어떡하지. 오늘 바로 거절하면 얘 죽는 거 아냐? 


"일단 놔 봐. 지호야. 응?"

"! 으어. 죄송해요. 안아 갖고...."

"그래. 미안할 줄 알면 됐구. 아니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몰라요. 그냥. 좋아서 뭔가 주체를... 죄송해요."

"하아."


찌질하기 짝이 없는 모양으로. 지호는 손에 든 모자를 만지작거리면서 우물쭈물 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밤의 공기가 층계참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 뭔가... 울적하고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 뭔가 기운 내셨으면 좋겠어서... 사실 고백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그게."


지호는 손등으로 눈을 슥슥 비벼내며 눈물을 닦고선 주머니에서 따끈한 제티 하나를 꺼내 건냈다. 


"이거 드리려고 한 건데... 울어서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

"저 차인 거져... 그래두, 제티는 죄가 없으니까. 이잉."


요지도 모를 말과 다정함을 쏟아내면서도 지호는 제티를 쥐어준 손을 놓지도 못하고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횡설수설한 건 딱 질색인데 상아는 그 찌질함의 극치와 여름에 어디서 구해온지 모를 미적지근한 제티의 조합에 영 혼란스러웠다. 


"그니까 나 이거 주려고 기다린 거야?"

"훌쩍 네."

"아까 주지?"

"쌤 추워하시는 줄 아까 알아서... 자습, 째구. 사와서... 죄송해여. 자습 째서."

"그랬구나."

"제송해요. 학원 그만 두께요. 진짜 좋아했어요."

"뭐? 왜 그만 둬? 너 입시는 어쩌려고."

"몰라여...."

"아유 사람이 왜 이렇게 대책이 없어. 대책이."

"그르게요... 노답 구지호...."

"아오. 찌질해."

"힝. 그만 혼내세요."

"손 좀 놓고 얘기해."


그 말에 바로 손을 놓고선 아쉬운 듯 코를 훌쩍거리며 "죄송해요. 쌤은 저 안 좋아하는데...." 하는 지호가 귀여웠다. 귀여워 보이면 끝인데, 상아는 심란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이걸 어째. 괜히 한 마디 한 게 화근이었다. 어찌 보면 고백할 생각도 없는 애를 들쑤셔서 괜한 부스럼을 만든 건 자신이었다. 아 발음 나쁜 거 질색인데 그것조차 귀여워 보여. 짜증나. 

키 크고 잘생긴 애가 다정하게 굴고 절절메면서 목메는 거. 딱 


"뚝. 그만 울어."

"뚜욱...!"


진짜 내 스타일인데. 망할.


"누구 맘대로 그만 둬. 누가 찼다고 그래."

"에에?"

"콧물방울 봐...."

"흐응! 훌쩍! 아 죄송해요. 쌤. 뭐라고요?"

"안 차였어. 구지호."


지호는 멍 하니 있다가 소화전에 대뜸 머리를 들이받았다.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상아는 눈이 땡그래져서는 지호의 어깨를 붙들었다.


"꺄아악! 너 뭐해?!"

"아파요. 이잉."

"당연히 아프지. 안 찢어졌어? 괜찮아?"

"꿈이 아니야. 으에엥."

"그만 좀 울어. 어휴. 증말."


상아는 실감이 안 난다며 오열하는 큰 멍멍이를 다시 품안에 꾸겨넣고선 등을 토닥여 줬다. 




"그게 왜 좋아? 최악인데. 취향 진짜 이상해요. 변태예요? 원래 문학 하는 사람들 변태가 많다던데."

"시끄러워. 남의 추억에 배 놔라 감 놔라야."

"난 참외가 좋은데요."

"말을 말자...."

"농담이에요. 글쿠나... 진짜 조교님은 구지호랑 연애했네.... 찐 전여친이네...."


하얀은 무언가 분한 건지 서러운 건지. 등을 휙 돌리고 돌아누웠다. 상아는 별 말 없이 불을 끄고선 반대편으로 돌아 누웠다. 쿨쩍이는 소리와 함께 "나만 구지호랑 뽀뽀 못했어...."라며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쿨하게 못 들은 척하고 잠을 청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온종일 멘탈이고 피지컬이고 피곤한 일의 연속이었어서 그런지 스르륵 잠이 왔다. 



41.3.


상아는 가위에 눌리는 듯한 답답함에 몸서리를 치며 잠에서 깼다. 기분 탓인지 크라켄에 묶이는 꿈을 꾼 것 같았다. 일어나 보니 긴 팔다리가 저를 칭칭 휘감고 있었다. 


"잠버릇 하고는...."


칼국수처럼 허연 팔다리를 툭 떼어내 이불 위에 던져 놓고 상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아침에 결코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심란함에 깊게 자지 못했다. 영 개운하지 못한 채 세수를 하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미호만이 덩그러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케이지에서 자고 있었다. 

'아, 지호는?'

초여름치곤 꽤 더웠던 어젯밤이었다. 지호는 거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고 쪽방 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상아는 조심스레 쪽방 문을 열었다. 좁은 방안에서 지호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으이구...."

"으으응."

"이 방에서 자고 싶니? 더운데...."


땀범벅이 되어 자고 있는 지호에 상아는 푹 젖은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그러자 훅 하고 열기가 뿜어 나왔다.


"응?!"

"끄으응."

"세상에. 열 봐. 구지호! 지호야!"

"도이야.... 도야. 끙."


무슨 꿈을 꾸는지 끙끙 앓는 지호는 온몸이 뜨끈뜨끈했다. 상아는 에어컨으로 협박을 당할 만큼 더웠던 어젯밤을 떠올리곤 선풍기 하나 없이 좁은 쪽방을 둘러 보았다. 


"더위?!"

"끙...끙."


눈물자국이 아직도 선명한 지호는 대답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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